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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알아도 '청나라'는 모르는 바보들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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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해군은 알아도 '청나라'는 모르는 바보들아!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구범진의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중국은 키메라의 몸으로 되어 있다.

'키메라(chimera)'는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사자, 염소, 뱀이 하나의 몸으로 만들어진 괴물이다. 다양한 존재가 하나의 유기적 체계를 이룬 셈이다.

구범진은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민음사 펴냄)에서 '청(淸)'의 역사적 형성 과정과 그 내면의 구성을 이런 각도로 살펴본다. 만주 여진족에서 기원한 청나라가 대제국으로 성장해가는 경로는 만주와 몽골, 한족의 중국과 이슬람의 신장, 티베트 등이 엮어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중국'은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하나의 모습을 한 국가이자 문명처럼 여겨지지만, 사실 그 내부를 보면 외래 정복 국가와 한족의 국가가 서로 교체하고 뒤섞이고 하면서 이루어져온 역사를 지니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중국의 이해는 바로 이러한 면모를 전제하지 않고서는 정확하게 이루어질 수 없다.

구범진의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은 오늘날 중국의 모태가 되는 '청'에 대한 매우 좋은 입문서이자, 우리의 근대사를 다시 재검토하는데 있어서 필요한 지적 기초를 제공해준다.

우리의 청사 연구는 어떤 단계에 와 있을까?

연구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실 우리의 '청사(淸史)' 연구는 양적으로 그다지 풍부하지도 못하고 대중적 인식의 수준도 낮은 편이다. 청 제국 말을 다룬 <케임브리지 중국사> 10권과 11권이 2007년에 번역되어 나왔고, 통사로서의 청사는 임계순의 <청사(淸史)(신서원 펴냄)이 거의 유일한 편이다.

▲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구범진 지음, 민음사 펴냄). ⓒ민음사
동아시아 외교사 서적도 여전히 부족한 처지인데, 청과 구한말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 최초의 저작이라고 할 만한 것으로서는 신기석(1908~1989년)의 <한말 외교사 연구(韓末 外交史 硏究) : 淸韓 從屬關係를 中心으로>(일조각 펴냄, 1967년) 정도다. (근대 청한 관계를 다룬 통사적 외교사로 추천할 만한 책으로는 권혁수의 <근대 한중 관계사의 재조명>(혜안 펴냄)이나 쉬안민의 <중한 관계사>(전홍석 옮김, 일조각 펴냄) 등이 있는데 두 책 모두 중국 출신 한인이나 중국인이 쓴 저작이다. 우리나라의 저자가 쓴 본격적인 청한 관계사는 아직 나오지 못하고 있는 형편이다.)

물론 최근에 청-한 관계를 정리하는 책들이 나오고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청에 대한 역사지식은 우리의 교육에서 변방에 속한다. 유교 고전에 대한 인문적 관심이 높아지면서 중국 역사에 대한 이해도 깊어지고 있기는 하나, 현대 중국의 직접적인 모태인 '청' 연구와 지식 확대는 아직도 초보적 수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따지고 보면 청일 전쟁 연구도 미진하기 짝이 없다. 동아시아 중화 체제에 종지부를 찍고, 우리의 역사를 식민지 체제로 들어서게 한 결정적 전쟁이라고 할 청일 전쟁은 후지무라 미치오의 <청일 전쟁>(허남린 옮김, 소화 펴냄, 1997년)의 수준도 넘지 못하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의 근대 동아시아 연구의 기초가 생각 이상으로 부실하고 국민적 상식으로 교육될 수 있는 자원이 빈곤한 상황인 것이다. <청나라, 키메라의 제국>은 이런 맥락 위에서 읽을 필요가 있다.

청에 대한 대중적 지식 보급의 필요성

구범진의 책은 '서울대 인문 강의'를 토대로 만든 저작이라는 점에서도 청에 대한 전문 지식과 연구의 대중적 보급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렇지 않아도 '청'하면 병자호란(丙子胡亂)부터 떠올리고 청일 전쟁 정도에서나 그 이름을 환기하는 현실에서, 17세기 이후 우리의 대중(對中) 관계에서 역사적 경험은 사실상 청과의 관계였다는 점을 인식한다면 청에 대한 기초적 이해는 상당히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야 하는 지식이라고 할 수 있다.

광해에 대한 연구와 영화까지 나온 요즈음, 광해를 몰아낸 인조반정과 이후 정묘호란, 병자호란 그리고 송시열과 윤증을 중심으로 분당한 노론과 소론의 격투나 19세기 세도 정치 가문인 안동 김 씨 집안의 명성도 다 청과의 관계에서 어떤 자세를 취했는가에 달려 있었던 문제였다.

안동 김 씨는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척화파 김상헌의 후손이라는 점에서 두고두고 위세를 떨친 셈이었다. 이후 박제가의 북학파(北學派) 형성이나 박지원의 <열하일기> 등도 모두 청의 등장과 제국 건설에 깊숙이 관련되어 있는 일련의 역사적 사건 또는 흐름 들이다.

임오군란과 청일 전쟁에 이르는 10년의 격동기는 우리 근대사의 일대 방향을 규정한 시간인데, 이 시기의 사실상 주역도 '청'이었으니 우리 역사의 근대적 단계에서 '청'을 빼놓고 사고할 수 없을 지경인 것이다.

그 청의 실체는 구범진이 지목하는 바대로 키메라인데, 그는 이를 "서로 다른 유전 형질을 가지는 세포 조직이 하나의 생명체 안에 공존하는 유전자 혼재 생물"이라고 말하고 있다. 청나라의 시작은 매우 미미했으나 과정에서 대제국이 되고, 그 제국은 바로 키메라적 존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를 보여주는 역사라고 할 수 있다.

누르하치로부터…

만주 여진족의 누르하치는 1583년 군대를 일으켜 확장 정책을 펼쳤고, 1644년 베이징에 들어와 금에서 청으로 이름을 바꾼 이후 청은 만주라는 변방에서부터 중국의 중심에 서게 된다. ("누르하치"는 누르/하/치, 즉 "누리를 다스리는 큰(하) 권력을 지닌 군주(치)"라는 의미가 된다.)

1592년 임진왜란, 1623년의 인조반정과 1627년의 정묘호란, 1636년의 병자호란은 모두 이 시기 사이에 전개되었던 동아시아와 조선의 변화였다. 그리고 이 시기를 거쳐 청은 명의 후방에 있던 조선을 장악하고 명을 확실하게 밀어내어 1760년에 이르는 120년간의 정복 활동을 펼친다.

1640년대에서 1680년대에 이르는 40년 동안은 한족이 중심이 된 기존의 중국을 직접 지배 아래 두게 되고, 이후 80년 동안에는 "북쪽으로는 고비 이북의 외몽골 초원, 서쪽으로는 티베트 고원, 그리고 텐산(天山) 산맥 북쪽의 준가르 초원과 남쪽의 타림 분지 등을 차례로 정복"한다.

여기서 한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자면, 구범진은 "만주는 원래 지명이 아니라 청나라를 건설한 핵심 집단의 이름"이라고 알려준다. 청의 중심 부족인 여진족의 경우도, "여진어 주션(jusen)을 한자로 옮긴 것"이라고 한다. 조선이나 쥬션이나 비슷한 계통이고 여진의 선조가 말갈족이기도 하니 큰 틀에서는 고구려를 비롯한 이른바 동이(東夷) 계통 요동 국가의 후손이라고 할 수 있다.

여진은 12세기에 금나라를 세우고 1세기 가량 중원 지역을 지배한 적이 있었으나 13세기 초 몽골 제국에게 멸망당하고, 이후 다시 흥기한 역사를 가졌다. 그런데 이들 여진이 16세기에 들어서서 일어서는 상황은 단순히 누르하치의 출현이라는 개인사적 차원에서 가능했던 것은 아니었다.

지구적 교역망과 만주의 흥기

16세기, 명은 남과 북방 변경에서 개방적 무역 관계를 세워나가고 이것이 기반이 되어 명의 상업은 활발해진다. 더군다나 아메리카 대륙의 은 생산과 명에 이 은이 대량 유입되면서 지구적 교역이 동력을 얻게 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교역의 이익이 커지자 "여진족 수령들은 명나라가 발급한 칙서를 두고 쟁탈전을 벌였다. 칙서는 곧 요동 변경 시장에서 교역 허가증으로 기능하였기 때문이다."

몽골과 다른 만주 문자를 창제하기도 한 누루하치는, 이러한 상황에서 조직력을 극대화하는 팔기(八旗) 체제를 근간으로 하는 군사력의 증강과 교역의 주도권을 확보하면서 "아이신 구룬(아이신 : 황금, 구룬 : 나라(金國))"을 창설하게 된 것이다. (아이신 구룬의 한자인 "애신각라(愛新覺羅)"는 "신라를 그리워하고 생각한다"는 식으로 풀기도 하는데, 이는 만주음을 한자로 표기한 것일 뿐이다.)

이들은 이후 중국 대륙을 석권하면서 여진 대신 만주를 쓰고, 국가 명을 "아이신 구룬"에서 "다이칭 구룬(大淸國)"으로 바꾼다. 이후 강희제로부터 옹정제, 건륭제에 이르기까지 청은 승승장구하는 시대를 거친다. 박지원이 건륭제의 70세 생일을 축하하는 사절단에 따라가 <열하일기>를 썼고, 건륭제 치하의 청을 보고 그때까지 소중화론에 빠져 있던 조선의 현실을 우회하여 질타했다는 것을 기억한다면, 당시의 청이 어떤 세계적 제국으로서의 위상을 지녔는지 짐작할 수 있다.

"키메라의 이미지"로 보자면, 청은 만주와 몽골의 유목 기마 제국의 웅혼함과 속도, 티베트 불교의 정신적 깊이, 위구르 이슬람이라는 다원적 존재 양식 그리고 중원의 한족 체제라는 이질적 요소를 하나로 묶어 제국의 역량을 최대한 뿜어내는 작업에 몰두했던 국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다양하고 이질적인 요소를 하나로 결합시켜 움직일 수 있는 힘을 잃게 되는 순간, 이 키메라적 요소는 도리어 분열적 요인으로 기능하게 된다. 결국, 청은 1911년 신해 혁명 이후 1912년 2월 선통제 푸이의 퇴위로 그 마지막 숨을 몰아쉰다.

청사(淸史) 편찬에 몰두하는 오늘의 중국

일본이 만주를 지배하면서 1934년 만주 제국이 건설되고 푸이는 만주 제국의 황제에 오르지만 그것은 대청 제국의 부활이 아니라, 관을 쪼개 시신을 꺼내 다시 죽이는 "청의 부관참시(剖棺斬屍)"에 불과했다.

구범진의 보고에 따르면, "근래 중국 정부는 엄청난 자금을 투입하여 역대 정사(正史)의 계보를 잇는 <청사(淸史)> 편찬 사업을 벌이고 있다"며 "<청사> 편찬의 궁극적인 목적은 청 제국을 중화 제국의 계보 속에 공식적으로 자리매김" 하기 위한 것이란다. 그는 중국 역사학자의 다음 말을 인용하고 책을 마무리한다.

"청나라가 통일을 완성한 후, 제국주의가 중국을 침입하기 이전의 중국 판도를 가지고 역사 시기의 중국 범위로 삼을 수 있다. 이른바 역사 시기의 중국이란 이를 범위로 삼아야 한다. 수백 년이든 수천 년이든 이 범위 안에서 활동한 민족은 모두 중국 역사상의 민족이고, 이 범위 안에 건립한 정권은 모두 중국 역사상의 정권이다."

이런 역사인식의 지평에서는 아무리 그 역사적 유전자가 달라도 고조선이나 고구려, 또는 발해는 모두 중국의 역사의 한 몸이 된다. 역시, "키메라의 제국"이다. 그런 나라와 우리는 동아시아의 현실에서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여러모로 심정이 복잡하고 생각이 많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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