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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를 죽이려면 책을 불태워라!

[김용언의 '잠 도둑']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

1945년 초여름 어느 날 새벽 바르셀로나의 희뿌연 거리를 걸어가고 있는 두 부자.

'잊혀진 책들의 묘지'로 향하는 부자의 묘사로 시작하는 <바람의 그림자>(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문학동네 펴냄) 첫 페이지를 읽을 때부터 알 수 있었다. 이것은 책에 대한 이야기다. 책 속에 깃들어 있던 귀신에 들려버린 사람의 이야기, "환영(幻影)처럼 집요하고 확실(하여) (…) 그 진실성에 의문을 제시할 수 없고 단지 그것이 스스로 사라지거나 나를 파괴할 때까지" 좇아갈 수밖에 없는, 현실보다 더 선명한 픽션의 세계에 대한 이야기 말이다.

"저주받은 책들의 이야기, 그걸 쓴 사람의 이야기, 소설을 불태우기 위해서 소설 바깥으로 나온 인물의 이야기, 그리고 배신과 실종된 우정의 이야기야. 사랑의 이야기이고 증오의 이야기이며 바람의 그림자에 살고 있는 꿈들의 이야기이기도 하지. (…) 그리고 모든 실제 이야기들처럼 묘지에서 시작해 묘지에서 끝나."

카프카에게서 영감 받았다는 복잡하고 신비로운 잠금 장치로 무장된 '잊혀진 책들의 묘지'는 하나의 성전이다. "도서관이 하나 사라질 때, 서점 하나가 문을 닫을 때 그리고 책 한 권이 망각 속에서 길을 잃을 때" 그 책들은 반드시 이곳에 도착한다. 엄숙하고 신성한 비밀 동맹으로 유지되는 '잊혀진 책들의 묘지'를 처음 방문하는 사람은 책 한 권을 선택해 '입양'할 수 있다.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이곳에 도착한 소년 다니엘은 훌리안 카락스의 책 <바람의 그림자>를 선택한다.

▲ <바람의 그림자 1>(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지음, 정동섭 옮김,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훌리안 카락스의 <바람의 그림자>는 친아버지를 찾아 나선 남자의 이야기, 최후까지 그 남자를 괴롭힐 저주받은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완전히 빠져든 채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단숨에 <바람의 그림자>를 다 읽어버린 다니엘은 당연하게도 후릴안 카락스의 또 다른 책을 읽고 싶어 한다. 하지만 이내 놀라운 사실을 듣게 된다. 오래전에 사망한 훌리안 카락스의 소설들은 다니엘이 갖고 있는 <바람의 그림자> 한 권을 제외하곤 모두 불태워졌다. 곧 다니엘에게 수수께끼의 사나이가 접근하여 <바람의 그림자>를 팔라고 제안한다.

"그런데 당신은 뭣 때문에 그 책을 원하죠? 읽고 싶어서 이러는 건 아닐 테고…."
"아니다. 난 그걸 다 외우니까."
"책 수집가인가요?"
"비슷한 거지."
"카락스의 책을 더 가지고 있나요?"
"한때는 그랬지. 훌리안 카락스는 내 전공이란다, 다니엘. 그의 책을 찾아 온 세상을 헤매고 다니지."
"읽지 않는다면 뭘 하려고 그의 책을 찾는 거죠?"
그 수상한 자는 애써 억누르는 듯한 신음을 내뱉었다. 아주 고통스런 소리였다. 그가 웃고 있다는 걸 깨닫는 데 몇 초가 걸렸다.
"그것들로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한단다, 다니엘. (…) 불태워버리는 거지."


공포에 질린 다니엘은 그 책을 세상에서 가장 안전한 곳, '잊혀진 책들의 묘지'에 다시 숨겨둔다. 그리고 묘지의 관리인 이삭으로부터 훌리안 카락스와 가장 가깝게 연결되어 있던 사람의 이름을 듣는다. 바로 이삭의 딸 누리아, 훌리안 카락스의 책을 출판하는 출판사에서 일했고 불타는 창고에서 마지막 남은 <바람의 그림자>를 구해냈으며 훌리안 카락스를 사랑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해야 했던 여성이다.

훌리안 카락스는 자신의 소설 속 모든 등장인물은 "자기 자신"이라고 했으며, 소설이란 "작가가 다른 방법으로는 할 수 없는 것들을 이야기하기 위해 자기 자신에게 쓰는 편지"라고 했다. 그렇다면 이미 죽은 훌리안 카락스를 파괴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그 이야기들과 그 인물들을 파괴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다니엘을 찾아왔던, 불에 탄 종이 냄새를 풍기던 그 수수께끼의 남자는 대체 누구기에 훌리안 카락스를 그토록 증오하는 것일까?

다니엘은 훌리안 카락스의 과거를 추적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훌리안이 평생을 바쳐 사랑했던 소녀 페넬로페, 훌리안의 가련한 부모, 누리아와 훌리안의 애증의 관계, 어린 시절부터 훌리안을 질투했던 악질 경찰 푸메로의 과거가 차례로 밝혀진다. 다니엘은 이 과정에서 절친한 친구 토마스의 누나 베아트리스와 사랑에 빠지고, 점점 더 자신의 삶이 <바람의 그림자> 속 주인공, 더 정확하게 말해서 훌리안 카락스의 삶과 닮아가고 있음을 깨닫는다.

온다 리쿠의 미스터리 <삼월은 붉은 구렁을>(권영주 옮김, 북폴리오 펴냄)을 사랑했던 독자라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의 <바람의 그림자>에도 정신없이 매혹될 것이다. 이는 책벌레들의 자기 존재 증명과도 같은 언표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는 것, 책을 읽는 것, 그 책을 통해 타인의 삶을 체험하는 것 그리고 종국엔 그 책을 '살게' 되는 것. 책은 자신을 쓰게 될 사람과 자신을 읽게 될 사람을 스스로 선택하는지도 모른다. 작가와 독자는 어쩌면 한 몸이다. 책 속 주인공이 작가/독자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일까, 혹은 작가/독자가 책 속 주인공을 모방하는 것일까.

<바람의 그림자>의 시간적 배경은 스페인 내전 이후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를 아우르는 이 참혹한 시간대 역시 글쓰기의 연장선상에서 다니엘의 추적담 속으로 부드럽게 스며든다. 증오와 파괴가 온 나라를 뒤덮었던 그 시간대가 아니라면 비밀은 그토록 귀중하지 못했을 것이고 소망은 그토록 격렬하지 못했을 것이다. 다시 말해 이뤄지지 못한 첫사랑이 한 명의 작가를 영원불멸의 존재로 존립시킬 수 있는 것처럼, 사람들 사이에 내려앉은 끔찍한 침묵, 혹은 공포의 언어가 사람들의 영혼을 영영 파괴할 수도 있다.

"총성이 사라진 바로 그날 망각의 장치가 망치질을 시작했지. 그 시기에 나는 살아남아 말하는 영웅, 자기 곁에 쓰러진 모든 이들이 결코 말할 수 없을 것을 말하는 영웅보다 더 무서운 건 없다는 걸 배웠어. 바르셀로나가 함락된 이후의 몇 주는 차마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지. 그 기간 동안에 전투 기간 동안보다도 더 많은 엄청난 피가 뿌려졌지, 그것도 남의 눈을 피해 은밀하게. 결국 평화가 찾아왔을 땐, 감옥과 묘지를 찾아다니는 평화의 냄새가 났었어. 그것은 사람의 영혼을 썩게 하고 결코 떠나지 않는 침묵과 수치의 수의(壽衣)였지."

혹은 악질 경찰 푸메로가 관계한 사건은 모두 거짓으로 포장되어 공적인 글쓰기의 전형으로서 신문 기사화되고, 사건의 전말을 알지 못하는 이들은 그 거짓을 순진하게 믿는다. 그러나 소설은 다르다. 픽션의 언어로 견고하게 구축된 그 세계 안에서 순진한 독자는 하나의 결론에만 도달하지만, 의심에 사로잡힌 이들은 자꾸만 길을 잃으면서 아예 정해진 결말을 바꿔버리는 진실을 찾아낼 수도 있다. 말하는 자와 말하지 못하는 자 사이의 길항 관계는 불타버린 원고만으로는 절대로 상처를 없앨 수 없는 감옥을 만들어내고, 그 감옥을 파괴할 수 있는 것은 결국 어떤 희생을 치르고서라도 기어이 말하고자 하는 자가 나타날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람이 등장하자마자 바르셀로나의 눈부신 대기를 떠돌던 유령들은 비로소 자신들의 영매를 찾았다는 듯 그에게 몰려든다. "반은 탐정이고 반은 시인이며 월급을 조금 받고 불가능한 임무에도 놀라지 않는 그런 사람"이자 "정신과 영혼을 걸고 독서를 할 수 있는" 희귀한 사람이 등장하는 순간, 책 이곳저곳에 쓰인 글자들 사이사이에 숨겨진 욕망과 공포와 비애를 꿰뚫어볼 수 있는 눈을 가진 사람에게만 읽히는 비밀도 출현한다. 책의 페이지마다, 도시의 곳곳마다 비밀이 흩뿌려져 있고 그 보이지 않는 핏자국의 흔적을 좇아 지하실로, 벽 뒤로, 무덤 속으로 걸어 들어갈 수 있는 탐정만이 진정한 책의 수호자가 된다. 훌리안 카락스의 행적을 추적하는 다니엘이 "당신은 믿음을 잃기 이전의 훌리안을 연상시키는군요"라는 말을 자주 듣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훌리안은 다니엘의 미래이자, 다니엘의 삶을 미리 살아낸 전생의 흔적이자 정신적 아버지가 되어간다.

"가르시아 마르케스, 움베르토 에코,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가 <바람의 그림자>에서 행복하게 조우한다"는 <뉴욕타임스>의 리뷰 자체는 조금 호들갑스러운 구석이 없지 않지만, <바람의 그림자>를 다 읽고 나면 낯선 나라 스페인에서 날아온 이 매혹적인 성장-미스터리-고딕 소설을 설명하기 위해 그 같은 대가들의 이름을 빌려올 수밖에 없다는 걸 이해하게 된다.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이 그들의 적자라고까지 말하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지만 적어도 그들의 계보 안에 속하는, 기꺼이 속하고자 하는 강렬한 욕망으로 추동되는 그런 작가인 건 확실하다. 아마도 마르케스와 에코와 보르헤스가 훌리안 카락스라면, 카를로스 루이스 사폰 그 자신이 다니엘이다.

이 서평에 인용되는 책은 2005년 발간된 문학과지성사 판이므로 현재 서점에서 구할 수 있는 문학동네 판과 표기 등에서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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