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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낳은 '식인 잔혹극', 역사는 반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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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금이 낳은 '식인 잔혹극', 역사는 반복된다!

[프레시안 books] 유승훈의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

유승훈의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푸른역사 펴냄)은 먹는 것 가지고 장난쳐온 역사에 관한 기록이다.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다음과 같은 정약용의 말 한마디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백성이 필요로 하는 것이 이미 간절하니 국가의 권장이 당연히 후(厚)하여야 될 터인데, 한(漢)나라 이후로부터 소금에 대한 행정을 까다롭게 하여 그 이익을 독점하였다." (133쪽)

정약용은 "무릇 소금은 백성들이 늘 먹어야 하는 것"이라고 했지만 실상 소금의 긴요함은 이보다 훨씬 더하다. "설탕이나 식초를 먹지 않아도 살 수 있으나 소금을 먹지 않으면 생명을 유지할 수 없"기 때문이다(231쪽). 소금은 단지 필요한 음식이 아니라 먹지 않으면 죽는 음식이다. 따라서 소금을 가지고 장난치는 것은 사람의 목숨을 가지고 장난치는 패륜 행위이다.

그러나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을 조금만 읽어 봐도 인간의 역사가 얼마나 이런 패륜아들에 의해 좌우되어 왔는지 쉽게 알 수 있다. 소금은 먹지 않으면 죽는 음식이므로 인간이라면 사는 곳과 신분의 귀천을 떠나 반드시 쉽게 얻을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있는 자들은 도리어 이런 소금의 속성을 이용하여 이익을 챙기고 권력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삼았다.

▲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유승훈 지음, 푸른역사 펴냄) ⓒ푸른역사
소금을 가지고 장난치는 행위는 국가의 존재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에 따르면 국가가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독점하는 전매 제도는 제나라 관중의 제안에 따라 시작되었다고 한다. 지금의 중국 산둥 반도를 세력권으로 했던 제나라는 연해 지역이 많아 소금을 쉽게 생산할 수 있었는데, 관중은 여기에 착안하여 소금을 전매함으로써 부국강병을 이루었다고 한다.

이후 소금을 국가가 전매할 것인가 민간에 맡겨둘 것인가 하는 문제는 역사를 관통하는 쟁점이 되었다. 중국 전체를 지배한 한나라도 강력한 전매 제도를 실시했다. 그러자 농업을 중시하는 유학자들이 이를 비판하고 나섰다.

"소금, 철, 술의 전매 제도와 균수법을 폐지함으로써 본업(농업)을 진작시키고 말업(상공업)을 물리치게 하여 농업을 크게 이롭게 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생각됩니다." (42쪽)

견실한 농업 생산과 국가에 의한 재화의 공평무사한 재분배를 강조하는 유학자들이 볼 때 소금과 같은 생필품을 국가가 전매해 이익을 남기는 행위는 용납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이들에 맞선 상홍양이라는 관리는 다음과 같은 현실론을 펼친다.

"그렇게 되면 안으로는 국고가 텅 비게 될 것이고 밖으로는 변경 방비에 필요한 비용이 부족하게 됩니다. 요새를 지키느라 성루에 올라가서 고생하는 병사로 하여금 변경에서 굶주림과 추위에 시달리게 할 것인데, 장차 이를 무슨 비용으로 충당하겠습니까?" (43쪽)

이때 유학자들의 주장은 '구름과 안개에 가려져 폐기'되고 말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유학자들의 말처럼 국가가 소금을 전매하여 이익을 남기는 행위는 무조건 악일까? 만약 국가의 전매 제도를 폐기하고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민간에게 맡겨둠으로써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면 그렇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역사는 소금의 전매 제도가 폐지되거나 흔들릴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잘 보여준다.

고려 때 충선왕은 소금 전매 제도인 각염법을 실시하면서 다음과 같은 교지를 내리고 있다.

"옛날에 나라에서만 소금을 생산하고 판매하게끔 법을 낸 것은 국용 지출에 쓰려고 함이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여러 궁원, 사사(寺社) 및 권세 있는 가문에서 사사로이 소금가마를 두어 거기서 나는 이익을 독차지하고 있으니 국용은 무엇으로 충족시킬 수 있겠는가!" (45쪽)

이 말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도 중국처럼 소금 전매를 실시한 적이 있었는데, 충선왕 이전에 그것이 유야무야되었던 모양이다. 그런데 국가의 전매가 없어지자 "권세 있는 가문에서 사사로이 소금가마를 두어 거기서 나는 이익을 독차지"하는 꼴불견이 나타났다. 일반 백성들이 생존에 필수적인 소금을 손쉽게 나눠 먹는 것이 아니라 국가 대신 별난 개인들이 소금으로 제 잇속만 챙기게 된 것이다. 일부 개인이 과한 이익을 얻다 해도 모든 백성이 소금 얻는 데 어려움만 없으면 그나마 참을 만 할 터인데, 현실에서는 소금을 살 수 있는 베나 쌀이 없어 제때 소금을 먹지 못하는 백성이 부지기수였다.

조선 시대 사상가 토정 이지함이 말한 대로 소금이란 "염분이 많은 땅의 무진장한 짠물"에서 나오는 자연의 음식이다. 그런데 이런 소금이 모든 사람에게 자연스럽게 공급되지 않고 이권을 추구하는 자들의 손에 놀아나게 된 것이야말로 어느 사상가가 갈파한 인류 역사의 근본 문제와 직결된다.

"왜 토끼는 서로 잡아먹지 않는데 인간은 서로 잡아먹는가?"

지구상에서 거의 사라진 식인종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인간이 먹지 않으면 죽을 수밖에 없는 소금으로 이익을 추구해서 결국 제때 소금을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이 생겨난다면, 그거야말로 식인 행위가 아니고 무엇인가? 토끼는 서로를 잡아먹지 않을 만큼 충분히 진화했는데, 인간은 지난 수천 년의 문명에도 불구하고 아직 하나의 종으로서 충분히 진화하지 않은 것이다.

'식인종'은 개인과 국가가 따로 없다. 개인의 분탕질을 막기 위해 충선왕이 실시한 각염법은 "한 해에 포 4만 필, 소금으로 따지면 8만 석"을 국고에 확보할 만큼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백성들 가운데는 10년 동안 소금을 받지 못하는 사람도 생겨났다. 국가가 소금을 전매하면서 백성들에게 베를 들고 와서 소금과 바꿔가게 했는데, 관리들이 베를 받고도 소금을 내어주지 않는 비리가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국가를 공적 기구라고 믿으며 꼬박꼬박 세금을 바쳤던 백성들만 불쌍해지는 대목이다.

유학을 국시로 내세운 조선은 한나라 때 소금 전매를 반대한 유학자들의 정신을 이어받아 소금의 공평 분배를 위해 애썼다. 물론 일부 정신이 제대로 박힌 군왕과 신료에 국한되는 이야기이다. 태조 이성계를 도와 조선 건국에 공을 세운 정도전도 그중 한 사람이었다. 그는 충선왕이 실시한 각염법이 어떤 부작용을 가져왔는지 똑똑히 인식하고 태조와 함께 대책을 마련했다.

"염법이 문란해지면서 베만 관에 흡수될 뿐, 소금은 백성들에게 돌아가지 않아서 백성들은 큰 곤란을 당하였다. 전하는 즉위하자 맨 먼저 윤음을 내려 전조의 문란한 염법을 크게 개혁하였다. 연해의 주군마다 염장(鹽場)을 설치하고, 관에서 소금을 굽고 백성들로 하여금 베든 쌀이든, 또 그것이 질이 좋은 것이거나 나쁜 것을 묻지 않고 자기가 갖고 있는 쌀과 베를 가지고 염장에 가서, 먼저 시가의 고하에 따라 값을 계산하고 소금을 받은 다음에 쌀과 베를 소금 값으로 내게 하였다. 이는 국가가 백성과 함께 이익을 나누고자 하는 것이지, 사적으로 굽는 것을 금지하여 국가가 이익을 독점하려는 것은 아니다." (75쪽)

왕조 체제에서 이보다 현명한 소금 정책이 나오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조선 시대의 소금 분배 제도가 정도전의 의도대로 전개되었으리라 짐작하는 독자는 한 명도 없을 것이다. 이미 분명해졌듯이 국가라는 것이 결코 공평무사한 집단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선 중기에 고기를 잡는 어전(漁箭)과 소금을 굽는 염분(鹽盆) 등에 대한 소유권과 수세권이 궁방(왕실과 왕족의 집)과 관아에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 이렇게 자연의 이익을 엉뚱한 권세가들이 독점함으로써 국가의 재정은 텅 비고, 백성들은 가난을 면치 못하였다." (98쪽)

그리하여 19세기에 이르면 다산이 "승냥이야 이리야, 또 누굴 죽이려느냐?"라고 울부짖으며 역대 소금 행정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터져 나오게 되는 것이다. 다산이 내놓은 소금 행정 개혁안 역시 관철되지 못하면서 조선의 소금 분배는 올바른 길을 찾지 못한 채 망국을 맞이하고 말았다. 그 이후 일제 강점기와 해방기에 우리나라는 제국주의 수탈과 전쟁을 겪으면서 왕조 시대 못지않은 소금 잔혹사를 통과했다. 한국 전쟁 중에는 남북한 모두 염전에서 소금을 생산하지 못해 피란민들이 소금 없이 견뎌야 하는 암흑기를 보내기도 했다.

1950년대부터 우리나라에서 소금은 더 이상 불공평하게 분배되거나 없어서 못 먹는 음식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금의 과잉 공급과 과잉 섭취를 걱정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다. <작지만 큰 한국사, 소금>이 잘 서술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저기서 소금이 만병의 근원이므로 가급적 적게 먹어야 오래 산다는 '웰빙 시대'의 건강 구호만 요란하게 울려 퍼지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소금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패륜아들의 추악한 이익 놀음에 깃들어 있는 역사의 근본 문제가 해소된 것은 전혀 아니다. 소금이 '월급(salary)'이라는 말의 어원이라는 사실에서도 알 수 있는 것처럼 과거에 소금은 기본적 재화, 기본적 생존권을 상징했다. 오늘날에도 그런 기본적인 것들을 가지고 국가 기구와 일부 인간들이 벌이는 패륜적 '식인' 행위는 계속되고 있다.

자칫 역사에 대한 미시적 호기심을 채우는 데 그칠 수도 있는 소재를 진지하고 끈질기게 탐구하여 새로운 성찰의 계기를 제공한 저자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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