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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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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절망의 인문학] '스티브 잡스 인문학'의 정체는?

인문학의 시대입니다. 스티브 잡스와 같은 자본가부터 거리의 노숙인까지 '인문학'을 말합니다. 유명 대학에서는 대기업 임원 등을 타깃으로 한 '인문학 코스'가 문전성시를 이룬다고 합니다. 예전에 테일러를 추종하며 드러커를 읽던 재벌 회장은 이제는 공자, 노자를 읽고 헤겔, 마르크스를 인용합니다.

이런 상황에서 '희망의 인문학'이 아닌 '절망의 인문학'을 외치는 인문학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이런 고통스러운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는 이 절망의 시대에 인문학을 말할 수 있는가?" 이들은 섣부르게 '희망'을 말하기 전에, 지금 여기 절망의 세상에 시선을 돌리고자 합니다. 이런 절망을 제대로 직시할 때 비로소 거짓이 아닌 진짜 희망의 몸짓이 가능하기 때문입니다.

<프레시안>은 지금 여기에서 인문학의 존재 조건을 묻는 이들과 '절망의 인문학' 연재를 시작합니다. 매주 화요일, 목요일 두 차례 던진 불온한 질문에 인문학자의 치열한 답변이 이어집니다. 첫 질문은 이렇습니다. "스티브 잡스는 과연 인문학적인 경영자인가?" 서동진 계원예술대학교 교수가 답합니다. "미스터 잡스, 이제 그만하면 됐거든요!" <편집자>

ⓒ연합뉴스

실제 사정은 전혀 그렇지 않다고 발끈하는 이들이 많을 테지만, 새로운 자본주의가 인문학을 끔찍이 애호한다는 것은 너무나 뻔한 사실이다. 그리고 조금만 생각해 보면 이는 엉뚱할 것도 없는 일이다.

일전 세상을 떠난 스티브 잡스는 아이패드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인문학과 기술의 교차로에 '애플'이 있었다고 기염을 토한 적이 있다. 그런 수준의 발언은 지난 수십 년간 이름난 경영 구루의 입에서 나날이 쏟아지는 상투적 발언이란 것은 눈치 밝은이들은 죄다 알고 있다. 그러나 아이패드라는 값비싼 장난감을 자랑하기 위해 잡스가 꺼내놓은 인문학 타령은 가뜩이나 인문학으로 밥 벌어 먹기가 어려워진 이들에게는 호재처럼 보였던 듯싶다.

아니나 다를까 대학의 학문 시장에서 인문학이 고사될까 걱정하던 이들은 이 때다 싶어 스티브 잡스의 발언을 두둔하고 선전하고 나섰다. 물론 그것은 상당한 오해에서 비롯된 것이다. 스티브 잡스가 인문학에 빚졌다고 말하는 것은 이를테면 문·사·철을 합해놓은 그런 것을 가리키는 것이 전혀 아니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이란 이미 인간에 관한 학문으로 변신한 경영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들을 가리킨다. 그것은 굳이 철학과 문학 따위에 신세를 질 이유가 없다. 그것은 그 자체가 이미 인문학이기 때문이다. 그가 말하는 인문학은 새로운 자본주의가 필요로 하는 정신을 집약하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비판의 두 얼굴

프랑스의 베버주의 사회학자인 뤼크 볼탕스키는 "근본적으로 존립할 수 없는 자본주의가 (계속해서) 연명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을 정당화할 수 있는 에토스를 지속적으로 생산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이를 '시테(cité)'란 말로 부른다. 그는 자본주의가 자본에 의한 노동의 지배에 근거하기에 기원적으로 사악하다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그 사악한 세계의 질서는 자신을 견딜 만하고 심지어 미더운 것으로 스스로를 보임으로써, 즉 자신을 정당화함으로써 존속하고 심지어 번창할 수 있다. 그가 생각하기에 자본주의 자체의 역사적인 운명은 바로 그것을 정당화하는 에토스에 따라 달라지고 변화한다.

볼탕스키는 자본주의에 관한 비판에서 크게 두 가지가 득세하였다고 본다. 하나는 사회적인 비판이고 또 하나는 미적인 비판이다. 사회적인 비판이란 흔히 복지 국가라고 부르는 '사회 국가(the social state)'를 탄생시킨 독특한 자본주의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두 개의 국가'라고 부를 만큼 자본주의는 마치 한 나라 안에 두 개의 나라가 있는 것처럼 사회를 계급적인 분열로 치닫게 하는 듯이 보였다. 19세기 유럽을 뒤흔든 계급투쟁의 열풍은 자본주의가 언제나 반사회적이라는 것을 방증하는 듯이 보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특히 사회주의적 노동자 운동의 등장은 화해할 수 없는 두 개의 진영으로 세계가 분열되어 있음을 생생하게 증명하였을 것이다.

바로 이 때 자본주의가 초래한 계급적인 분열과 적대를 해결하기 위하여 대두된 주요한 비판 가운데 하나가 바로 '사회'란 상상력이다. 마치 하나의 유기체처럼 스스로의 질서와 법칙에 따라 움직이는 전체로서의 세계란 생각은 분명 매력적인 것이었다. 계급적인 분열과 대립은 사회를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병리적인 현상처럼 여겨졌다. 프랑스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이 제시했던 저 유명한 '연대'란 개념은 통합과 결속이란 관점에서 이제 막 등장했던 국민 국가 형태의 자본주의 세계를 '사회'란 이미지 속에서 응시할 있도록 하였다.

바야흐로 세계를 인식하고 상상하는 새로운 지평으로서 '사회'라는 독특한 시점이 탄생한 것이다. 따라서 불평등과 착취는 사회의 안녕과 건강을 해치는 '위험'이란 견지에서 해석되었고, 사회를 성장, 발전시키기 위해 이런 위험을 관리하기 위한 다양한 기술(연금, 보험, 사회 보장 등)이 발명되고 확산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자본주의에 관한 사회적 비평으로부터 탄생한 것이 복지 국가라 할 수 있다.

반면 볼탕스키는 이런 사회적 비평과 함께 끈질기게 병존했던 또 다른 자본주의 비평의 갈래가 미적인 비판이라고 꼽는다. 미적인 비판이란 거칠게 말하자면 자본주의가 객체화, 획일화, 추상화를 통해 인간들의 삶을 소외시키는 질서라는 관점이다. 소외된 세계로서의 자본주의라는 초상, 즉 자신의 활동의 결과가 거꾸로 자신이 살아가야 하는 바를 거꾸로 결정하는 소외된 세계야말로 자본주의라는 상상은 자본주의가 등장한 이래 집요하게 존속하였다. 자본주의에 관한 미적인 비판은 한 번도 그 자체 유효한 정치적인 프로그램으로 자신을 실현한 적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무력했던 적도 없다. 되레 놀랍게도 동구권이 몰락하고 자본주의가 위기를 겪으면서 사회적 비판이란 것이 맥을 못 추고 패퇴한 자리에, 자본주의를 구원하는 새로운 대안으로 등장한 것이 미적인 비판이라 할 수 있다.

때마침 자본주의를 뒤흔든 마지막 격변은 1968년의 혁명이었다. 비경제적인 억압과 지배를 격렬하게 성토하였던 이 격동을 떠받치고 있던 것은 바로 미적인 자본주의 비판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조직된 노동자 운동 및 사회주의 정당과 지배 집단 사이에 타협이 이뤄짐으로써 형성된 사회 국가는 이미 노쇠할 만큼 노쇠한 상태였다. 안정된 직장과 연금이 있었지만 세상은 따분하고 지루하였으며 멍청하고 아둔해보였다. 앙드레 고르와 같은 사회주의자들은 '노동 사회'란 이념에서 벗어나 새로운 생태적이고 문화적인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고 앞 다투어 주장하고 나섰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런 미적인 비판을 효과적으로 흡수한 것은 위기에 빠진 자본의 편이었다. 라이프스타일의 혁명, 새로운 자아 찾기로 전환한 자본주의 비판은 이제 자본이 자신을 구원할 이념으로 단숨에 전환된다.

신자유주의 인간형 : 예술가로서의 기업가

흔히 사람들이 신자유주의라고 부르는 것을 가로지르는 에토스는 바로 이러한 미적인 비판의 정신이라 할 수 있다. 많은 이들이 신자유주의가 애호하고 장려하는 새로운 인간 모델을 기업가(entrepreneur)라고 할 때, 기업가란 인물의 모습은 예술가와 크게 다르지 않다. 기업가란 열정적이고 창의적이며 자발적이고 반규범적인 인물을 가리키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회색 정장을 입고 중역 의자에 파묻혀 이윤에 골몰하는 '조직 인간'보다 기업가와 먼 인물은 없다. 이는 1980년대 이후 폭발적으로 증대한 경영 담론이 장려하고 선전했던 새로운 경제적인 인간형이기도 하였다. 그런데 이 때 말하는 경영 담론은 굳이 경영학이라고 부를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몰입형 영어 교육이란 말로 유명해진 저 '몰입'이란 말은 놀이에 몰두한 아이들이 보여주는 자발적인 열정을 일터 안에 끌어들이기 위해 고안된 사이비 심리학 개념이다.

몰입이나 열정이란 개념은 '근면'이나 '성실' 같은 규율을 연상시키는 개념들과는 다르다. 경영 담론은 시간에 따른 인간 동작을 연구하고 '최선의 방식(the best way)'에 따라 표준적인 근로 방식을 도입했던 테일러주의를 격렬하게 배격한다. 조직, 관료제, 위계, 통제, 권위, 표준과 같은 말은 미적인 인간에게는 견딜 수 없는 가치이자 규범인 것이다. 새로운 경영 담론은 생산성과 능률보다는 탁월함(excellence)이란 가치를 찬미하였고, 이는 한국에서 우량 혹은 초우량이라는 일본식 번역어로 소개되더니 교육학을 통해서는 수월성이라는 더 희극적인 용어로 알려진 개념이 되었다. 이것이 경영 구루 가운데 피터 드러커와 쌍벽을 이루는 저 유명한 톰 피터스가 제창한 개념이란 것을 아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아무튼 새로운 경영 담론은 이제는 전과 같은 경직되고 고루한 지식의 모습을 취할 필요가 없다. 경영 담론은 거의 모든 인문학을 아우르고, 또 거기에서 생산된 지식을 수용한다. 당장 몰입, 자기 주도성, 창의성 같은 개념을 양산하고 새로운 심리 검사 모델을 도입하며 이를 교육, 경영, 행정 등 거의 모든 분야에 정차시킨 심리학은 그 자체가 경영 담론이다. 물론 이를 거드는 문학, 예술, 철학을 비롯한 인문학적인 지식 역시 새로운 자본주의가 요청하는 미적인 자기비판에 호응하여 왔다. 이때 여기에서 말하는 인문학이란 창의적이고 자율적이며 자신의 가치를 실현하기 위해 분투하는 정신박약 상태의 개인을 예찬하는 이념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심미적인 인간으로서의 경제적 인간의 모델이 정보 통신 분야에서보다 더 요란하게 출현한 곳도 없을 것이다. 빌 게이츠나 스티브 잡스는 억만장자 자본가이기에 앞서 히피 성향의 괴짜에 외골수, 반사회적인 인물로 표상된다. 그들은 닷컴 열풍을 이끈 저 악명 높은 벤처 자본의 화신이다. 그것은 장래에 엄청난 수익을 가져다 줄 창의적인 아이디어 하나로 엄청난 자본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신화를 만들어냈다. 자본가는 이제 창의적인 예술가란 가면을 쓴 모험적인 사업가로 변신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스티브 잡스가 애플의 혁신적인 상품은 전적으로 인문학적인 발상에 빚지고 있다고 너스레를 떠는 것은 그다지 신기한 일도 아니다. 가혹한 노동 조건을 견디다 못해 잇달아 자살을 택한 폭스콘 노동자의 처지는 애플이 만든 제품을 이야기하는데 아무 몫도 차지하지 않는다. 세련된 외장을 한 애플 숍에서 손바닥 속에 들어오는 '쌔끈한' 상품을 만지작거릴 때, 우리는 그것이 온갖 노동이 투입되어 만들어진 사물이란 점을 분별할 수 있는 능력을 잃은 지 오래이다.

그 때 상품이라는 이름의 사물은 전적으로 그것을 고안하고 디자인한 인물들에게 소속된다. 매 시즌마다 유명한 디자이너, 예술가와 협력을 통해 만들어졌다고 자랑하는 상품들이 진열대를 채울 때, 우리가 상품 안에서 보는 것은 정작 사회화된 노동이 아니다. 우리는 그 안에 깃들어 있으리라 상상하는 것은 창의적인 개인의 열정과 상상력이다.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그것이 출판 산업이 만들어낸 상품이 아니라 한 소설가의 상상력과 조우하는 것인 듯 상상하듯이, 상품 역시 더할 나위 없이 작품과 같은 모습을 띠고 우리와 마주한다.

인문학은 죽었다!

그런 탓에 인문학이 노동이란 고역이 부재하는 것처럼 상상케 하는 우아한 차단막의 이름이라고 규탄한다고 해서 잘못된 일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CEO를 위한 인문학 읽기" 프로그램 같은 것이 성행하고 경영 스쿨이 인문학 중심으로 교과 과정을 새로 짠다고 해서 기이할 것은 하나도 없다. 그것은 그럴 만하다고 수긍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인문학 애호는 거기에 그치지 않는다. 인문학은 이제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체득해야 할 에토스가 되었고, 이제 거의 모든 것에 스며든다.

이를테면 '서울형 복지'란 이름으로 고안된 신자유주의적 복지 정책은 '희망의 인문학'이란 프로그램을 실행한다. 물론 거기에서 말하는 인문학이란 "기업가 정신"을 통해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고 살아가라는, 저 악명 높은 노동 연계 복지(workfare)의 복음이 스며있다. 복지(welfare)란 개념을 대체한 노동 연계 복지라는 번역 곤란한 신조어는, 신자유주의적 복지가 무엇인지 잘 보여준다. 이는 사회적 연대의 원리에 근거하여 위험에 대처하기 위한 책임을 공유한다는 종래의 복지를 철두철미 개인화한다. 급여, 후생, 복지 같은 '사회적인' 테크닉은 사라지고, 창업, 교육, 훈련과 같이 기업가처럼 행동하는 개인을 제한적으로 지원하는 신종 복지 테크닉이 그 자리를 메운다. 그리고 인문학은 바로 그 개인과 그의 경제활동을 매개하는 윤리로서 자리 잡는다.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데서야, 자신의 능력과 가능성을 신뢰하지 않는데서야 어떻게 잘 살 수 있을 것이며, 기업가적인 인물이 될 것인가? 그러므로 우리는 무엇보다 인문학을 공부하여야 한다!

그러나 세간에서 말하는 인문학이란 것이 우리의 삶이 어떻게 사회화되는가를 응시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유치한 알리바이라고 규탄하는 것이 능사는 아닐 것이다. 이 대목에서 지난 수십 년 전 유행하였던 "의식화"와 신세기의 "인문학 열풍" 사이에 놓인 거리를 반성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의식화란 불온한 이념을 공부한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아닐 것이다. 대학생은 물론 많은 이들이 이른바 불온한 사유에 귀를 기울였다는 것은 모든 사유와 정신 속에는 모순과 대립이 스며들어 있다는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이 살아가는 세계가 어떻게 실존하는가를 묻는 이 몸짓에서 실제로 우리가 얻은 것은 놀랍게도 세계를 더 투명하게 객관화한 것이 아니라 새롭게 자신을 주관화한 것이다. 또한 그것은 폐소 공포증적 자기의 세계에 갇힌 채 세계를 망각하는 백치와도 같은 인문학적인 자아와 다른 인물을 만들어냈다. 사회과학의 시대였던 그 시기가 삭막하고 건조한 이념의 시대였다고 고발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 시기가 또한 한국 사회에서 가장 눈부신 시의 시대이자 예술의 시대였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그러므로 인문학이 융성한 시기에 우리가 정작 대면하는 것은 가장 역겨운 형태의 역설이다. 그것은 우리를 새롭게 주관화할 수 있는 가능성을 봉쇄하여 버린다.

인문학이란 이데올로기로부터 인문학을 구제한다는 것은 난센스다. 인문학 자체란 것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저 세계를 달리 사유하는 방식들이 각축을 벌이는 지평이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이제는 인문학을 거부할, 아니 소멸시켜야 할 때이지 않을까. 인문학이란 물신이야말로 사유를 중단시키는 미끼이기 때문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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