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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텃세 없던 대안 올림픽, '가네포'를 아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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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인 텃세 없던 대안 올림픽, '가네포'를 아십니까?

[동아시아를 묻다] '그들의 올림픽'을 거부한 사람들

런던 올림픽이 한창이다. 큰 바다 건너 외지에 있는 탓인가. 관심이 예전만 못하다. 감정선을 자극할 기회가 덜한 것이다. 하더라도 모른 척 외면하기도 힘들다. 정색하고 동아시아를 논하기가 겸연쩍은 것이다. 그래서 올림픽 뒷이야기를 해볼까 한다. 물론 (동)아시아와 전혀 무연하지 않다.

동방 국가들이 똘똘 뭉쳐 올림픽의 대안을 모색한 적이 있던 것이다. GANEFO(Game of New Emerging Force)가 그것이다. 모아둔 사진들도 대거 방출한다. 나름 '올림픽 특집'이다.

가네포의 탄생

아시안게임이 출범한 것은 1951년 뉴델리였다. 인도의 네루가 야심차게 추진한 아시아 구상의 소산이다. 패전한 일본을 대신하여 인도가 주도권을 쥐었던 것이다. 아시아의 새 출발을 다짐하듯, 구호는 "언제나 전진(Ever Onward)"이었다.

허나 냉전의 화마를 피해 갈 수는 없었다. 특히 '두 중국', '두 한국', '두 베트남'이 경합하던 동아시아가 발목을 잡았다. 사단은 1962년에 일어난다. 4회 아시안게임의 주최국이었던 인도네시아가 중화민국(타이완)과 이스라엘 선수들의 비자 발급을 거부한 것이다. 당시 인도네시아는 '하나의 중국' 정책에 의거하여 중화인민공화국을 편들었다.

또 세계 최대의 이슬람 국가답게 아랍 국가들과 돈독한 관계를 맺었다. 자국의 외교 노선에 입각해 참가국을 선별한 것이다. 문제는 이스라엘과 중화민국 모두 아시안게임연맹(AGF)의 정식 회원이었다는 점이다. 이에 국제올림픽위원회(IOC)는 인도네시아의 '정치적 행위'를 질타하며 회원국 자격을 정지시킨다.

인도네시아의 초대 대통령 수카르노는 간단치 않은 인물이었다. 위축은커녕 IOC 탈퇴로 맞불을 놓았다. 20억 아시아인에 반하여 이스라엘과 타이완을 옹호하는 IOC를 거부하겠다는 뜻이다. 내친 김에 IOC 구성 자체가 불평등함을 역설했다. 당시 70명의 IOC 위원 가운데 아시아·아프리카 출신은 11명에 그쳤다. 유럽의 소국들도 두세 명씩 있는데, 인구 1억 명의 인도네시아는 한 명도 없었다. 그래서 새로운 스포츠 대회의 조직을 주창한다. 이참에 '제국주의의 도구'인 IOC와 올림픽을 대체하자는 것이다.

인도네시아는 반둥회의(1955)의 개최국이었다. 아시아·아프리카(AA)의 신흥 독립국들이 처음으로 회합한 국제회의를 이끌었던 것이다. 그래서 "반둥 회의 결의를 철저하게 실현하기 위하여, 아시안게임을 AA 게임으로 전환하자"고 했다. "중국, 베트남, 북조선, 몽골인민공화국도 참여하는 대운동회를 거행하자"는 것이다. 신생 국가들과 사회주의 국가들이 의기투합하여 올림픽의 위세를 넘보려던 것이다. 가네포가 발진하는 순간이었다.

1963 자카르타 vs. 1964 도쿄

▲ 자카르타 항에 도착하는 광화륜. ⓒ이병한
1963년 10월 20일. 광둥 광저우 황포 항에서 1만 톤 규모의 선박이 출항했다. 오성기를 휘날리며 남양으로 발진하던 이 배의 이름은 광화륜(光華輪). 운동선수 260명과 76명의 특별 취재반, 문화예술인 100명이 타고 있었다. 아울러 북조선과 (북)베트남의 운동선수도 100여 명이 있었다. 말 그대로 '한 배를 탄' 것이다.

자카르타까지는 꼬박 보름이 걸렸다. 그래서 진풍경이 연출되었다. 선수들은 갑판에 설치한 운동 기구를 통해 컨디션을 조절했다. 동행한 기자들도 못지않았다. 당시 중국에는 스포츠 전문 매체도 없었고, 기자 또한 부족했다. 임시방편으로 화교 업무 담당자를 선발했다. 이들 또한 20여 개 종목의 규칙을 습득하느라 밤을 새웠다. 문화예술단 역시 갑판에서 재주를 넘고, 목청을 다듬고, 춤사위를 연습했다.

대회 개막일은 11월 10일.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사의 기념비적 전투를 기리는 '영웅절(Hari Pahlawan)'이었다. 정오부터 10만 규모의 붕 카르노(Bung Karno) 경기장은 인파로 가득했다. 1주일 전부터 야간 조명을 밝혀 주변 일대는 불야성을 이루었다. 4시 정각, 수카르노는 헬리콥터를 타고 경기장에 도착했다.

▲ 성화 점화 순간. ⓒ이병한
선수단이 입장했고, 대표 선수의 선언식이 있었다. 개막이 선포되자 총성이 울리고 성화가 점화되었다. 수천의 비둘기가 창공을 가르고, 형형색색의 풍선들이 하늘로 떠올랐다. 46개국 선수단, 7개국 예술단 포함 총 51개국이 참가하여 2200명의 선수가 실력을 겨루는 일대 성공작이었다.

배후에는 중국이 있었다. 대회에 소요된 금액의 3분의 1을 지원했다. 교통비도 충당했다. 가네포에 참여하는 모든 국가의 여비를 중국이 제공한 것이다. 실력도 발군이었다. 올림픽과 아시안게임에서 선보이지 못했던 기량을 마음껏 발산했다. 중국의 금메달 수는 전체의 절반을 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연주단이 악보를 보지 않고도 중국 국가를 연주할 수 있을 정도였다.

▲ 200미터, 400미터 세계 신기록을 세운 북한의 신금단. ⓒ이병한
북조선도 대단했다. 특히 신금단의 압도적인 '천리마 역주'는 단연 화제였다. 200미터와 400미터에서 세계 신기록을 세웠다. 마라톤 1위도 북조선의 전만흥이 차지했다.

종합 성적은 중국-소련-인도네시아-이집트-북조선-아르헨티나-일본 순이었다. 중국과 소련이 수위를 다툰 듯싶지만, 그 격차는 매우 컸다. 중국이 금 68, 은 58, 동 45개를 획득한 반면, 소련은 금 27, 은 21, 동 9개에 그쳤다. 아시아는 중국-인도네시아-북조선 순이다. 식민모국 일본이 북조선보다 아래이다. 탈식민 아시아의 새로운 지형도가 아닐 수 없다.

사회주의 진영 내의 위상도 간단치 않다. 1963년은 이미 중소 분쟁이 심화되었을 때이다. 체조에서 4관왕을 차지한 17세 중국 소녀의 일화는 꽤나 흥미롭다. 매번 소련 선수와 금메달을 다투었다. 헌데 관중들이 일방적으로 중국을 응원했다. 소련 선수는 야유했다. 인도네시아어로 중국을 약칭하는 "R.R.T"를 외치는 소리가 도처에 가득했다.

소련으로서는 당혹스러운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가네포에는 동유럽은 물론 쿠바를 비롯한 신생 사회주의 국가들도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알바니아 대표단이 인도네시아 공산당을 방문해 공동 성명을 발표하는 일도 있었다. 한 해 전 쿠바 미사일 위기(1962년 10월)에 대한 미온적 대처를 지적한 것이다. 이 또한 소련을 비판하고 중국을 거드는 것이었다.

이처럼 경기장의 안과 밖 모두에서 중국은 소련보다 우위에 설 수 있었다. 동서 냉전과 중소 분쟁의 난국에서 제3세계로 영향력을 확대하는 출로가 되어준 것이다. 냉전 질서의 역학구도를 재조정하는 기회였다고도 하겠다. 소련-동유럽, 미국-서유럽과 맞먹는 중국-'신흥역량'의 천하삼분 구도가 뚜렷해진 것이다.

반면 이듬해 도쿄에서 개최된 올림픽(1964년)은 판이했다. 도쿄 올림픽은 전후 일본의 재탄생, 특히 국제(서구) 사회로의 재편입이 강조되었다. 일장기에 알파벳과 아라비아 숫자 그리고 오륜 마크를 보태면서, 국제사회에 복귀한 전후 일본을 이미지화했다. 기호와 추상적 패턴으로 디자인을 한 픽토그램이 최초로 도입된 대회이기도 하다.

현대적이고 평화적이며 합리적이고 기술 지향적인 전후 일본을 상징한 것이다. 종합 성적은 미국-소련-일본-동독-이탈리아-헝가리-폴란드…순이었다. 소련-동독-헝가리의 '유럽 사회주의'가 도드라졌고, 아시아에서는 10위권 내에 일본이 유일했다. 일본은 재차 '탈아입구'하고, 서구 중심의 구질서를 타파한다는 '대동아'의 사상은 흡사 가네포가 계승하는 듯 했다.

1966 프놈펜 vs. 방콕

가치와 지향을 달리하는 두 대회의 대비가 극적으로 구현된 것은 1966년이다. 캄보디아에서는 '아시안 가네포'가 열리고, 타이에서는 '아시안 게임'이 열렸다.

프놈펜에서 열린 아시안 가네포는 시종 중국이 앞장섰다. 재정 지원은 물론이요, 5만석 규모의 스타디움 건설과 시설 정비도 직접 감당했다. 심판진 양성을 위하여 5개월간 캄보디아인 300명을 교육시키기도 했다. 대회는 11월 25일부터 12월 6일까지 열렸다. 아시아 17개국에서 2000명이 넘는 선수들이 참여했다. 성적은 중국-북조선-캄보디아 순이었다.

▲ 여자 배구에서 우승한 북한 선수들. ⓒ이병한

사흘 후, 아시안게임이 열렸다. 장소도 프놈펜에서 지척인 방콕이었다. 18개국에 1945명이 참가하여 규모는 막상막하였다. 일본이 압도적인 1위를 지켰고, 한국과 타이가 뒤를 이었다. 타이완은 8위에 올랐다.

두 대회의 분기와 경쟁은 냉전기 아시아의 형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남·북한, 남·북베트남, 남·북중국이 각기 다른 대회에 참여해, 서로 다른 아시아를 만들어 갔던 것이다. 게다가 당시 이 세 분단국가는 인도차이나 전장에서 직·간접으로 무력 대결도 펼치고 있던 차였다. 1966년은 가히 치열했다.

동풍(東風)

가네포 폐막 기념행사가 인상적이다. 수카르노는 각별히 북조선을 지목했다. "아시아를 대표한 조선인의 연설이 감동적이다. '김일성 만세'를 소리 높여 외치자"고 했다. 남미 대표 쿠바도 지목했다. "쿠바 인민의 대변인은 카스트로다. 카스트로 만세를 외치자"고도 했다. 수카르노의 선창으로 2만 명의 인파가 김일성과 카스트로를 합창한 것이다.

이를 전하는 중국 문헌은 "동풍이 서풍을 압도"하는 국제 정세의 대국을 증명한 것이라 논평했다. 가네포가 아시아와 세계의 판도를 재정립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자카르타-프놈펜-하노이-베이징-평양이 축이 되는 새로운 아시아 블록이 부상했다 하겠다. 반공 아시아도 아닐뿐더러, 소련을 정점으로 삼는 사회주의 국제주의와도 결을 달리하는 흐름이다. 북조선 대표단 김기수는 이렇게 말했다.

"조선인민과 청년은 가네포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 노력을 다할 것이다. 그리고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인민들의 굳건한 단합으로 가네포를 분쇄하려는 제국주의자와 현대 수정주의자들의 기도에 투쟁할 것이다."

"현대 수정주의자들"이 소련과 동유럽을 가리킴은 두말할 나위 없다. 모스크바 또한 워싱턴과 아울러 '서풍'으로 묶이는 것이다. 이렇게 소련의 군정에서 출발한 북조선도 아시아로 크게 선회하고 있었다. 실제로 1964년 4월, 인도네시아와 북조선이 국교를 맺는다. 그해 8월에는 인도네시아와 북베트남 사이에도 수교가 이루어졌다.

▲ 가네포 폐막식 행사와 당시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카르노. ⓒ이병한

수카르노가 북조선을 처음 방문한 것은 11월이다. 김일성은 조선과학원 명예박사 학위를 선사했다. 수카르노도 김일성의 '자력갱생' 구호에 호감을 표했다. 귀국 후 'berdikari(자력갱생)'를 강조했다. 평양에 세워진 주체사상탑은 자카르타의 독립기념탑과 놀라우리만치 흡사하다.

1965년 4월, 수교 1주년을 겸하여 김일성이 인도네시아를 답방했다. 그 기간에 주은래도 반둥회의 10주년을 기념하여 인도네시아를 방문했다. 베트남의 호치민도 동참했다. 수카르노-주은래-김일성-호치민이 반둥회의 10주년을 축하한 것이다. 주은래, 김일성, 호치민 공히 분단국가의 지도자들이었다. 그래서 베트남 전쟁을 지원하는 유사 동맹의 성격이 농후했다.

여기에 보태 수카르노는 한층 대담한 구상을 추진했다. 올림픽을 대신하는 가네포의 성공에 힘입어, 유엔을 대체하는 국제기구의 설립까지 포석에 둔 것이다. 이른바 CONEFO(Conference of New Emerging Forces)이다. 1965년 알제리에서 열릴 예정이었던 제2차 AA회의를 코네포 창설의 디딤돌로 삼고자 했다.

중국은 물론, 김일성도 크게 호응했다. 그렇다면, AA회의 개최 직전에 일어난 알제리 쿠데타(1965년 6월)와 3개월 후 인도네시아의 쿠데타(1965년 9월) 또한 이러한 동향과 전혀 무관치 않았을 법하다. 미·소 합작으로 '평화 공존'을 뒤흔드는 동풍의 기세를 서둘러 잠재워야 했던 것이다.

중화 사회주의?

이처럼 (동)아시아는 냉전의 동서 대립 구도를 복제하지 않았다. 중소 분쟁의 파장과 착종 속에서 한층 복합적인 분화를 노정했다. 그럼에도 우리는 지금껏 '죽의 장막' 너머의 아시아에 대해서는 도통 까막눈이다. 냉전이 초래한 지리적이고 지적인 구획선에서 탈피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탈냉전보다는 차라리 '후기냉전'이 아니었을까?

▲ 마오쩌둥이 부각된 가네포 기념우표. ⓒ이병한
'죽의 장막' 너머를 낭만화 할 것은 없다. 도리어 한층 문제적이다. 아시안 가네포의 기념우표부터 예사롭지 않다. 마오쩌둥이 전면에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중국 선수들이 건네고 있는 책자도 마오 어록이다. 1년 전 반둥회의 10주년 기념우표와 비교하자면 영 딴판인 것이다.

다민족, 다인종의 연대를 대신하여 중국이 우뚝 도드라진다. 마치 세계 혁명을 진두지휘하는 천하의 중원으로 복귀한 형세이다. 때는 바야흐로 문화 대혁명의 서막이기도 했다.

즉, 중국-북조선/베트남-몽골/캄보디아/미얀마/인도네시아 등으로 구성된 '죽의 장막' 너머에는 긍정, 부정을 아울러 중화 질서의 잔상이 적잖이 남아있었다. 장구한 역사의 문명적 공속감이 반제 운동을 펼치는 협동의 근거인 동시에, 내부 갈등과 대립의 근원이기도 했던 것이다. 소련과 척을 지는 중국, 그 중국과 각을 세웠던 베트남과 북조선, 베트남의 캄보디아 점령 등 일련의 변화를 중화 세계 본래의 중층적 위계와 결부시켜 접근해 봄직하다. 중화 세계는 사라지지 않았을 뿐더러, 그 특유의 내적 역동성이 냉전 체제를 내파해 가는 동력이기도 했던 것이다.

이 냉전기 (동)아시아의 독특한 길항을 '중화 사회주의'라고 명명할 수 있을까? 신중국이 '제국'을 복원한 만큼이나, 이웃과의 관계 또한 옛 시절과 생판 달라지기란 힘들 법한 것이다. 나아가 이 '중화 사회주의'를 19세기의 중화 질서와 21세기의 (동)아시아를 잇는 징검다리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다.

물론 아직은 짐작이고 추론이며, 가설이다. 올림픽 열기가 식으면 이 '중화 사회주의'의 허허실실에 대해서도 찬찬히 따져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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