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운전면허 교습을 받을 때였다. 경기도 쪽으로 나가 주행 연습을 할 때 처음으로 시속 100킬로미터로 텅 빈 도로를 달렸다. 운전면허장 내에서 시속 20킬로미터로 굼벵이 운전할 때와는 완전히 달랐다. 내 옆자리에서 덜덜 떨고 있는 도로 주행 교육 요원은 신경 쓰지 않은 채, 크로넨버그의 영화를 잠깐 떠올렸었다.
작년 봄, 눈 깜짝할 사이에 어이없는 실수로 차 사고를 냈다. 다행히 다른 차와 부딪힌 건 아니었다. 그냥 나 혼자 중앙차선 분리대를 들이받는 바보 같은 일을 저질렀다. 보닛을 비롯한 차 앞면이 크게 훼손되고 에어백까지 터졌다. 불과 몇 초 사이에 벌어졌던 충돌의 충격과 이후 차에서 피어오르던 연기와 매캐한 냄새에 얼이 빠져서 멍하니 앉아만 있었다. 주변에서 몰려든 사람들이 나를 강제로 끌어내린 덕분에 간신히 차에서 빠져나왔다.
사고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운전할 때마다 언제나 충돌의 감각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외부로부터 나를 차단하고 지켜준다고 믿었던 차 속에는, 언제 닥칠지 모를 사고의 위험을 항상 의식해야 하는 불안한 기운이 조그맣게 자리 잡았다. 마침 내가 사고를 냈을 무렵 제임스 발라드가 쓴 그 영화의 원작 소설 <크래시>가 출간되었다.
제임스 발라드(작가는 자신의 이름을 주인공에게 선사했다)는 어느 날 고속도로에서 운전 중 의사 헬런의 차와 충돌하는 사고를 일으킨다. 발라드는 다친 몸을 내려다보며 이상한 흥분을 느낀다.
"자동차 엔지니어는 내 몸에 난 상처 모양만 보고도 내 차의 정확한 제조사와 연식을 떠올릴 것만 같았다. 내 가슴에 멍을 새긴 핸들의 양각 마크처럼 계기판의 레이아웃도 내 무릎과 정강이에 아로새겨졌다. 내 몸과 차 내부의 2차 충돌의 여파로 이런 상처들이 정의된 것이다. 마치 몇 시간 동안 섹스를 한 후, 그동안 짓눌린 피부가 화답하며 여인의 굴곡진 몸에 남긴 형체와 비슷하다고나 할까."
사고를 낸 날, 그는 불륜 관계를 맺고 있던 비서 레나타와 어색한 이별을 나누고 돌아가던 길이었다. 레나타는 애무를 받으면서 <파리 매치> 잡지를 팔락거리며 기근으로 죽어가는 필리핀 인들의 사진을 대충 훑기만 하는 무감각한 인물이다. 한편 아내 캐서린은 보란 듯이 외도를 즐기며 자신의 욕구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 <크래시>(제임스 발라드 지음, 김미정 옮김, 그책 펴냄). ⓒ그책 |
전직 과학자이자 교통사고의 성적 가능성의 극한을 추구하는 로버트 본과 어울리면서, 발라드는 본의 몸 구석구석에서 빛을 발하는 상처들을 탐욕스럽게 주시한다. "왼쪽 겨드랑이에서부터 사타구니에까지 걸쳐 그의 몸에는 허연 흉터가 성운을 이루"고 있었는데, "으스러진 계기판 다이얼, 부러진 기어 레버와 주차등 스위치가 피부에 새긴 설형문자였다. 이들은 모두 고통과 감각, 에로티시즘과 욕망을 정확한 언어로 설명했다." 발라드에게 있어 본의 상처는 황홀한 접촉 지점으로 정의된다.
"각종 성행위를 할 때 손이 놓일 위치를 자동차가 미리 만들어준 것이었다. 그는 내가 앞으로 누릴 쾌락을 위해 일부러 충돌 사고를 일으켰다."
상처의 절정은 본이 소개해준 여성 가브리엘에서 완성된다. 교통사고 때문에 하반신이 으스러진 가브리엘은 요추 보조기와 철제 죔쇠로 다리를 지탱하며, 휠체어 위에선 "클리토리스가 길게 연장된 듯한 크롬 발판"을 과시했다. 그녀의 몸은 "20세기 복잡하고 다양한 테크놀로지가 창조한 다른 기술을 고스란히 빼어 닮은 유사체"다.
발라드는 공항 근처 교외 지대의 쾌적한 아파트에 거주하고 있었다. 우아한 쇼핑과 산책과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던 평화로운 교외 지대는 이제 은밀하게 숨겨졌던 그리드(grid)를 드러내며 전혀 다른 레이아웃으로 재편성된다.
"내 생활의 풍광을 정의내리는 고요한 지역이 이제 끝없이 펼쳐진 가상의 지평선으로 나뉘고, 높아진 난간과 고속도로 축대 벽, 진입로와 교차로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마치 지름이 수 킬로미터가 넘는 분화구가 만든 분화 벽처럼, 저들은 밑에서 차를 에워쌌다."
발라드는 지금까지 자신을 지탱해왔던 일상의 안온한 삶이 얼마나 연약한 것이었는지를 절감한다. 그건 "끝없이 뻗은 고속도로라는 단단한 현실 앞에" 불안정하게 흔들리는 연약한 공간일 뿐이었다. 공항으로 향하거나 공항에서 빠져나오는 차량들로 인해 상습적인 정체 구역인 그의 집 근처 고속도로를 내려다보며, 매일 한 건씩은 발생하는 경미한 교통사고를 지켜보며 발라드는 "번쩍번쩍한 셀룰로스 도장이 만들어낸 광대한 무리"들이 전부 휘말릴 듯한 "자동차 아마겟돈"을 예감한다.
"다들 리허설 하는 것 같아. 자기가 맡은 배역을 리허설하고 나면, 진짜가 벌어질 것 같아."
자동차를 경유하는 새로운 경험의 확장. 발라드는 헬런과 섹스하면서 인조가죽 시트와 그녀의 회음부의 축축한 주름을 동시에 쓰다듬고, 자동차 내부의 플라스틱 합판과 여성 음모의 색깔의 유사성을 발견한다. "성행위를 통해 피, 정자, 엔진 냉각수라는 인체 모형을 생성하는 기계처럼 승차 공간이 우리를 에워쌌다." 그러니까 자동차는 인간과 (철로 뒤덮인 제2의) 자연을 닮아가고, 인간은 점점 기계처럼 움직인다. "단단한 크롬과 인조가죽이 발린 자동차 내장은 내 정액으로 의식을 되찾고, 에로틱한 꽃이 만발하는 내실로 변하는 모습을 상상했다. 담쟁이가 실내등에 뒤엉켜있고, 바닥과 시트에는 촉촉한 잔디가 싱싱하게 돋아 있다." 크롬 창문턱에 걸쳐진 여인의 브래지어 끈은 "철과 나일론을 재료로 한 투석기"를 연상시키며, "그곳에서 발사되어 일그러진 유두가 내 입 안을 뚫고 들어온 것"처럼 보인다.
또 다른 충돌 효과로는 새로운 섹슈얼리티로의 도약이 가능해졌다. 발라드는 로버트 본과의 섹스를 꿈꾸고, 교통사고를 수차례 당한 어머니와 지고지순한 근친상간을 벌이는 것을 상상하며, 교통사고를 매개로 한 늙은이와 어린 아이의 육체관계도 거부감 없이 떠올리게 된다. 혹은, 본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스턴트맨 시그레이브는 여성적인 측면을 내재화한다. 그는 "어린 아들의 입에 유두를 대고 밋밋한 가슴을 쥐어짜며 젖가슴을 어설프게 흉내"내고, 배우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흉내 낸 여장 차림으로 노골적인 욕망을 사람들 눈앞에 전시한 채 매우 외설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인공과 자연을 가르는 경계선이 구부러지고, 섹슈얼리티와 젠더의 엄격한 구별도 흐물흐물해진다. 이제 남은 것은 이질적인 존재들의 궁극적인 결합, 즉 죽음과 섹슈얼리티의 완벽한 합체뿐이다. "사이드브레이크 장치에 끼여 두 갈래로 갈라진 음경", "핸들 양각과 제조회사의 엠블럼에 부딪혀 멍이 든 외음부", "옆에서 룸미러가 찌르고 들어오는 바람에 여자의 눈을 대신하게 된 거울", 다시 말해 "고통과 욕망이라는 새로운 이행 속에서 생성된 불안한 모듈과 유닛"은 지고의 쾌락을 약속하는 전조(前兆)로 기능한다. 해독하기 어려운 사고의 신호들이 한데 모여, 불안한 모듈들이 제각기 올바른 자리를 찾아감으로써 하나의 거대한 그림이 완성되는 순간 "단 한 건의 자동차 사고로 이 세상이 죽어가는" 멸망을 완성하게 될지도 모른다.
지금까지 읽었던 중 가장 차갑고 난폭하고 기계적인 포르노그래피는 마르키 드 사드의 <살로, 소돔의 120일>이었다(그나마 완독을 포기했다). 어떤 의미에서 제임스 발라드의 <크래시>도 그에 비길 만한 경험이었다. 작가 본인이 서문에서 "테크놀로지를 근간으로 한 최초의 포르노그래피 소설"이라고 자평한 소설 <크래시>는 상상할 수 있는 온갖 체위와 삽입의 방식을 구현하지만-이 모든 행위가 '차 속'에서 벌어진다는 게 핵심 포인트-그것에서 당연히 기대되는 어떤 육감적인 흥분을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여기서의 육체는 타인과의 감정적 교류를 거쳐 성적 합일에서 절정을 맛본다는 일반적인(정상적인?) 과정이 생략된 채, 오로지 자신의 판타지를 실현시키려는 추동력으로만 움직이는 기계다. 이 욕망의 기계가 구현하고자 하는 판타지의 요체는 표면에 대한 집착이다. 사고가 나는 순간, 무시무시한 속도의 힘을 빌려 자동차와 내 몸이 결합되는 그 한순간, 자동차 내부의 구조가 나의 몸 이곳저곳에 흔적을 남기는 순간의 강렬한 결합이야말로 인간끼리의 섹스와는 비할 바 없는 인장의 순간이다. 한 마디로 <크래시>는 인터페이스, 이질적인 두 시스템이 접합되는 표면에 관한 거대한 포르노그래피다. 어쩌면 이 소설의 또 다른 제목으로 페드로 알모도바르의 영화 <내가 사는 피부 (The Skin I Live In)>를 붙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고를 당한 타인의 목의 피 흘리는 구멍에 음경을 들이밀고 피스톤 운동을 하고 싶다는 소망. 보통 상대방의 모든 '구멍'을 다 탐색하고 싶다는 소망은 '자연적인' 구멍에 국한된다. 하지만 <크래시>의 주인공들은 충돌 사고로 인해 인위적으로 생긴, 테크놀로지의 발전이 가져다준 놀라운 선물과도 같은 그 뜻밖의 구멍에 집착한다. 인간(혹은 차체)의 매끈한 피부 표면에 생긴 뜻하지 않은 구멍과 흠집과 상처들은 그 우발성 때문에 더욱 특별하며 아름다운 연관성을 지닌다. 마치 로트레아몽이 <말도로르의 노래>에서 (초현실주의의 선언문처럼 사용되는) "해부용 탁자 위에서 재봉틀과 우산이 우연히 만나는 것처럼 아름답다!"(<도발>(마크 애론슨 지음, 장석봉 옮김, 이후 펴냄) 중에서 재인용)라고 썼던 것처럼, "현실과 비현실의 대립이 해소되는 특이한 계기, (…) 극단의 경계에서 대립의 통합을 시도하는 윤리"는 세계의 멸망을 예고하는 맹목적인 에너지를 발산한다. "적어도 그는 저 자신의 주인이다."(<초현실주의 선언>(앙드레 브르통 지음, 황현산 번역, 주석, 해설, 미메시스 펴냄, 황현산 해설 주에서)
초현실주의적인 오브제끼리의 만남은 곧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테크놀로지에 처음 맞닥뜨린 20세기 초반의 미래파의 도취와 황홀경에서 시원을 찾는다. 미래파는 "속도에 의지해 마치 원심분리기로 사물을 분리하는 것과 같이 세계를 해체하길 원"(<미술로 보는 20세기>(이주헌 지음, 학고재 펴냄))했다. 1909년 필리포 마리네티가 발표한 미래파의 선언문은 <크래시>의 그것과 놀랍도록 일치한다. 마리네티는 "가자, 친구여! 떠나버리자! 마침내 신화학과 이상의 신비로운 숭배는 떨구어졌다. 우리는 반인 반마 켄타우로스의 탄생을 목도하게 될 것이며, 수석 천사들이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우리는 빗장과 자물쇠를 감식하기 위해 삶의 문들을 때려부숴야 한다!"라고 부르짖으며 지극히 도발적인 마니페스토를 내놓았다.
"우리는 위험에 대한 사랑과 에너지의 습관과 성급함을 노래하고 싶다.(…) 문학은 지금껏 생각에 잠긴 부동성, 황홀경과 졸음을 과장해왔다. 우리는 공격적인 움직임, 열광적인 불면, 구보, 위험을 무릅쓴 도약, 따귀 때리기와 주먹질을 한껏 찬양하고 싶다.(…) 폭발적인 활기를 띤 뱀 같은 모양의 근사한 튜브들로 장신된 보닛을 과시하는 질주하는 자동차…쉬지 않고 연사하는 기관총을 쏘는 것처럼 으르렁거리는 모터가 달린 차는, '사모트라키 섬의 승리의 여신'보다 훨씬 아름답다."
더욱더 완벽해지고 싶은 욕망은 인간의 신체와 정신을 확장시키려는 노력으로 이어져왔다. 그러나 테크놀로지가 홍보될 때 으레 그러하듯 그 확장은 인류의 발전에 긍정적인 도움이 되는 쪽으로만 움직이려 들지 않는다. <크래시>의 주인공들은 서슴없이 파괴의 테크놀로지를 통한 새로운 합일을 꿈꾸고, 자동차의 아마겟돈을 지휘하는 죽음의 천사가 되길 선택한다. 30년 쯤 지나고 나면 "교통사고의 시대가 만들어낸 이 새로운 (부서진 유리 조각의) 지질층" 속에서 인류의 죽음은 참으로 보잘 것 없이 묻히고 말 것이다. 그들은 그러기 전에 공격적으로 유리를 부수고 자동차를 파괴하며 테크놀로지 이전에는 꿈꾸지 못했던 집단 악몽의 쾌락에 적극적으로 동참할 것을 요구한다. 그리하여 발라드는 결론 내린다.
"이 세상이 흉터 속에서 만개하기 시작했다."
참, <크래시>는 1973년에 쓰인 소설이다. 맙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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