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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독립 국가'는 정답이 아니다!

[동아시아를 묻다] 티베트 : 오래된 미래

근대의 독배

지난 글의 제목이 "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다!"로 나갔다. 그러하기도 하고, 아니하기도 하다. 오키나와는 일본의 일부이되, 일본만은 또 아닌 것이다.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란 '국제 질서'처럼 국가만으로는 재단할 수 없음이 요지라 하겠다. 즉, 국제 질서는 지역 질서를 구성하는 한 요소(one of them)로 제자리를 찾아야 한다. 그 하나를 전부인양 여긴 것이 근대의 병통이었다. 따라서 일본 복속만큼이나, 류큐 독립도 정답은 아니다. 홀로 섬(獨立)이라는 미망이야말로 근대의 지속이고 반복인 탓이다.

일본에 오키나와가 있다면, 중국에는 티베트가 있다. 중국의 '민주화'의 향방은 물론이요, 동아시아 질서의 재건을 가늠해보는 시금석이라고 하겠다. 실제로 오키나와와 티베트의 운명은 깊이 포개져 있었다. 류큐가 일방적으로 일본에 편입되는 질서가 도래하면서, 티베트 또한 왕년에 누리던 고도의 자치와 자율을 상실해 갔던 것이다.

그 운명의 겹침이 생판 남일 만은 아니다. 그 불행을 식민지 조선도 공유했을 뿐더러, 류큐에서 티베트로 연쇄되는 억압의 연결 고리에 한반도가 자리했던 것이다. 청일 전쟁이 그러하다. 근대를 몸에 익힌 일본은 류큐와 엇비슷한 논리로 조선을 대했다. 중국과의 관계가 '속국자주'라면 조선은 독립된 나라라는 것이다. 즉, 조공국은 속국이 아니며, 그래서 일본의 식민지로 삼을 수 있었다.

이러한 논리(와 무력)로 조공국이 하나 둘 떨어져나가자, 청조 또한 티베트의 자치를 허락하기 어렵게 되었다. '속국자주'가 그러했듯, '번부자치'를 빌미로 열강들의 땅 따먹기가 관철될 것을 우려했던 것이다. 그래서 번부를 '속지'라고 주장했다. 속지(屬地)만큼은 속국(屬國)과 달리 청제국의 '주권'이 미치는 불가분의 영토라는 것이다. 청조 또한 어느덧 주권을 방패막이 삼아 자웅을 겨루는 근대 국가로 변모해 갔던 것이다.

그러자 티베트에도 시련의 계절이 닥쳤다. 기실 티베트는 또 하나의 '중화'였다. 네팔, 부탄, 라다크 등 티베트의 주변에 포진한 불교 국가와 몽골을 비롯한 북아시아 유목 민족의 정신세계를 감화시킨 소중화였던 것이다. 뿐인가. 만주족이 이끈 대청제국의 지배 집단 또한 독실한 티베트 불교 신자였다. 그래서 열하에 자리한 대청제국의 여름 별장도 라싸의 사원을 모방한 것이다.

나아가 태평성세를 이끈 강희제의 무덤은 한자도 아니요, 만주어도 아닌 오로지 티베트어로만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허나 중원에서 주권을 옹호하는 발상이 증대하는 만큼, 번부자치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강화되었고, 주변의 문화를 경시하는 편향도 심해졌다. 사회진화론과 우승열패의 논리가 드세진 것이다. 청년들은 일본 유학에 열성이었고, 메이지유신을 모방한 '신정'(新政, 1901년)이 단행되기에 이른다. 입헌 군주제, 민선 의원 설립, 보통 교육 등을 추진한 것이다. 량치차오는 이 새로운 주체를 '신민'(新民)이라 일컬었다.

신민이 공유해야 하는 신지식 체계도 선양되었다. 티베트에 한자 학교가 설립되고, 사서삼경 교육이 시행된 것이 1906~7년의 일이다. 티베트의 고유한 문화와 종교를 중원의 문화로 대체하려 한 것이 20세기 초인 것이다. 즉, 티베트의 '한화=중국화'라 함은 실상 근대화이며, 그래서 서구화이기도 하다. 서구와 일본의 국민국가 건설을 본 딴 것이기 때문이다. 즉, 청제국은 그 멸망의 순간에 가서야 처음으로 중원에서만 공유되었던 '중화 문명'을 제국의 판도 전체에 침투시키려 했다. 그런 의미에서 '중체서용'의 그 '中'조차도 '상상된 것'이라 하겠다. 본디 이슬람과 불교, 유목 민족을 아울러 '中'이 품고 있던 넉넉함과 유연함, 탄력성이 사라지고 한자와 유학으로 동질화된 '中'으로 축소되었기 때문이다. 과연 전통이란 발명되는 것이다. 근대와의 접종이야말로 한자/유학 중심의 옹졸한 '중국'을 탄생시켰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티베트가 독립을 선언했던 까닭도 여기에 있다. 습속의 변화를 시도하는 한화=중국화=서구화에 맞선 반발과 불신이 홀로 섬의 기운을 지핀 것이다. 지역의 개별성에 따라 운영되던 옛 질서가 붕괴한 것에 대한 저항이라 하겠다. 그러나 신정을 추진한 청조나, 그에 반해 독립을 갈구한 티베트나 모두 국민 국가가 되기를 원했다는 점에서는 매한가지다. 양자 공히 근대의 독배를 들이킨 것이다. 이로써 중원과 티베트가 어울렸던 지난날도 '앙시앵 레짐'이 되었다. 불과 100년 전 일이다.

전장과 시장

또 한 번의 변곡점은 냉전이다. 애초에 중국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미국 또한 티베트가 중국의 영토임을 문제 삼지 않았다. 허나 1949년 공산당이 이끄는 신중국이 성립한 데 이어, 이듬해 한반도에서 미국과 중국은은 정면으로 충돌했다. 청일 전쟁의 후폭풍이 티베트의 자치를 앗아간 것처럼, 한국 전쟁 또한 티베트의 명운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실로 인민해방군이 압록강을 건너던 시기(1950년 10월)와 때를 맞춤하여 티베트 진격도 단행된 것이다. 같은 기간 중국은 베트남의 항불 전쟁도 지원하고 있었으니, 번국과 번지였던 조선-베트남-티베트가 모두 전장이 된 셈이다. 청말과 거의 흡사한 구도가 연출된 것인데, 그 결과만은 사뭇 달랐다.

속절없이 무너졌던 청조와는 달리 한반도에서는 비기고, 베트남의 승리에는 일조했으며, 티베트는 다시 품어 안은 것이다. 그래서 1951년 티베트와 맺은 '17개 조약'의 첫 항은 "제국주의로부터 조국의 품으로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국과 인도, 소련이 중국의 티베트 지배를 승인했으니, 반세기의 곡절과 혁명을 거쳐 신중국으로 환골탈태한 셈이다.

신중국은 일견 청조의 통치 방식을 계승하는 듯 했다. 티베트에서는 '사회주의 민주 개혁'을 유보한 것이다. 티베트를 지배하는 상층부 종교 세력을 고려하여 점진적 개혁을 도모했다. 그럼에도 티베트 불교를 숭상했던 과거와는 달랐다. 사회주의 사상으로 무장한 중국공산당에게 티베트의 남다름이란 '봉건성'과 '후진성'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사단은 역시 사회주의 개혁의 진척에서 비롯되었다. 티베트의 이웃인 윈난성, 칭하이성, 쓰촨성까지 대약진 운동의 물결이 미친 것이다. 헌데 그곳에도 티베트족들이 산재하고 있었으며, 티베트 불교를 신봉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이들이 급진적 사회주의화에 맞서 싸우는 무장 게릴라가 된 것이다. 그리고 밀리고 밀려 최후의 보루로 삼은 곳이 티베트의 수도 라싸이다. 여기서 티베트 군과 합류하여 일어난 사건이 1959년의 대봉기이다. 대봉기에 대진압이 잇따랐고, 결국 달라이 라마는 티베트를 떠나 인도에 망명 정부를 꾸려야 했다.

여기에는 일정 미국의 개입과 CIA의 지원이 있었다. 한국 전쟁 이후 미국은 티베트 독립의 최대 후원자가 되었다. 괌과 사이판 등 태평양의 미군기지 뿐 아니라, 콜로라도에서도 티베트 게릴라를 훈련시켰다. 험준한 산악 지형이 티베트와 유사했던 것이다. 다람살라에 터한 망명 정부의 살림살이에도, 히말라야 주변에서 지속된 게릴라 투쟁에도 CIA의 자금이 흘러들었다.

중국이 사회주의에 기반을 둔 '신 티베트' 건설을 주장했다면, 미국은 종교의 자유와 인권에 의거한 '구 티베트' 보호를 지원한 셈이다. 이 신·구 티베트의 대결 또한 남·북한, 남·북베트남, 남·북중국 못지않은 동아시아 냉전의 한 축을 이루었다. 나아가 중·인 갈등과 중·소 분쟁까지 촉발했으니, 동서 냉전 구도를 교란하는 도화선이기도 했다.

상황이 일변한 것은 역시 1972년이다. 미·중 화해로 전환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키신저와 주은래의 속 깊은 비밀 회동에 티베트는 언급되지 않았다. 일본·오키나와, 남·북한, 남·북베트남의 향방에 대해선 긴밀하게 의견을 주고받았지만, 티베트는 타이완과 함께 미·중 화해의 부속품이 된 것이다.

달라이 라마의 이미지가 극적으로 변한 것도 이 무렵이다. '냉전의 전사'에서 '평화의 사자'로 거듭난 것이다. 달라이 라마가 미국을 처음 방문한 것은 미·중 수교가 맺어진 1979년이다.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것은 천안문 사태가 발생한 1989년이었다. 최근 티베트 소요가 일어난 것 또한 공교롭게도 베이징 올림픽이 열린 2008년이었다. 왕년의 티베트가 중국 혁명에 대한 저항의 표상이었다면, 현재는 중국굴기에 대한 요긴한 비판의 방편이 되고 있는 것이다.

▲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만나는 달라이 라마. ⓒwhitehouse.gov

하지만 작금의 티베트 문제를 자유와 인권으로 한정하여 접근하기는 어렵다. 최근 심화되고 있는 티베트의 저항이란 상당 부분 개혁 개방의 산물이기 때문이다. 시장 개혁, 즉 자본주의화의 후폭풍인 것이다. 고속철을 비롯한 교통 인프라가 정비되고 공장 유치, 관광 개발, 자원 개발, 교육과 의료 지원 등이 대폭적으로 이루어졌다. 서부 대개발 사업의 일환으로 추진된 것인데, 이러한 파격적 지원이 도리어 갈등의 기폭제가 되고 있는 것이다.

시장화의 물결은 그간 명목상으로나마 누리고 있던 티베트 자치의 기반을 근저에서 뒤흔들고 있다. 시장에선 (원칙적으로) '만인이 평등'한 까닭이다. 모두가 평등한 시장에서 종교 세력의 특권은 좀처럼 허락되지 않는다. 분신자살이라는 극단적 선택을 감행하는 이들 가운데 유독 젊은 승려들이 많음이 우연은 아닌 것이다.

대학 입학이나 자녀 제한 등에서 소수 민족에게 베풀었던 정책적 혜택도 시장에서는 도통 힘을 쓰지 못한다. 티베트로 밀려오는 한족 자본가들과 도무지 경합이 되지 않는 것이다. 비유하자면 일종의 '부르주아 혁명'이 일어난 것이라 하겠다. 그 결과 중원과 티베트의 관계 또한 수직적 분업 체제로 재편되고 있다. '내부 식민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후왕이박래'(厚往而薄来), 즉 가는 것을 후하게 하고, 오는 것은 박하게 했던 중원의 옛 질서와는 질적으로 다르다. 증여를 대신하여, 착취에 가까워진 것이다. 그렇다면 작금 티베트의 저항 또한 월가를 점령한 동시대의 전 지구적 '99퍼센트 운동'과 그리 멀리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겠다. 중국의 개혁 개방이란 본디 신자유주의와 한 몸이 아니던가.

연기(緣起)와 네트워크(network)

티베트 문제의 출발에는 국민 국가가 있고, 모순의 누적에는 자본주의의 확산이 있다. 즉, 근대의 질곡이 티베트에 응축되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해결 방법 또한 티베트 독립이라는 국민 국가의 반복이나, 자유와 민주를 명분삼은 근대화의 확산에서 찾는 것은 미봉책에 불과하다.

다민족·다문명·다종교·다언어의 복합 사회라는 중국의 제국적 실체에 부합하는 독자적 민주화의 경로를 밟아야 한다. 100년이 넘도록 내달려온 근대화=서구화를 거꾸로 되돌리는 역근대(de-modernization)의 과정이 필요하다. 근대라는 (허)상의 집착에서 해탈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저 우심한 중원·중앙주의를 해갈하는 길도 열린다. 이 중국식 민주화를 잠정적으로 '재봉건화'라고 풀어낼 수 있을까? 일각에선 100년간 고독했던 '천하'를 호출하고 있다.

이에 부응하여 티베트 또한 베이징만 해바라기 하지 않고 이웃들과의 네트워크를 복원할 일이다. 티베트의 역사를 돌아보면, 지금처럼 티베트-중국의 양자 관계에 포박되었던 적이 없었다. 중국은 물론 남아시아, 중앙아시아, 북아시아의 정신적 가교였던 것이다. 그 복수의 관계망을 회복하는 것이 요체이다. 마치 오키나와의 행보가 그러하듯, 유연한 아시아의 그물망 속에서 티베트가 나아갈 길을 모색할 일이다.

기실 불교의 핵심 원리인 '연기'(緣起)야말로 독립이나 주체, 자주라는 근대의 허상을 일깨우는 각성의 요람이다. 만물은 서로 다르지만 그것이 곧 모순과 대립(선악, 좌우, 변증법, 계급투쟁 등)을 낳지는 않는다. 모든 존재는 서로 새끼처럼 꼬이고 엮여서 인과응보의 인연을 생멸할 뿐이다. 요즘말로 푼다면 '네트워크'(net+work)가 아닐까.

개인, 국가, 계급 등 근대의 단단한 실체적 개념에 반(反)하는 탈구축의 사유를 촉발하는 것이다. 과연 견고한 모든 것은 (동)아시아의 역사 속으로 녹아내리고 있다. 근대가 흐물흐물 액체화되면서, 거대한 뿌리가 재차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최근 논의되는 '네트워크 국가' 또한 영판 새로운 것만은 아닐 것이다.

동아시아는 '오래된 미래'를 향해 되돌아가고 있다. 이 반전(反轉)하는 되돌림(revolve)과 되새김이야말로 21세기의 혁명(revolution)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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