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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창세기'를 아들에게 읽혀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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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창세기'를 아들에게 읽혀야 하는가?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의 미래>

70년대 미국 대학의 지적 곤경

우선 이 책의 저자 이름이 눈에 띄었다. 월터 카우프만.

1980년대 미국 유학 시절 초기, 나는 그를 통해 니체와 다시 만났다. 니체와 독일 파시즘을 동일시하다시피 했던 미국의 왜곡된 지적 풍토에 일격을 가한 카우프만은 니체 읽기의 정밀도를 높여주었다. 그리고 역자 이름도 눈에 들어왔다. 이은정. 하이데거와 레비나스를 연구한 소장 학자로 경희대학교 후마니타스칼리지의 재원이다. 이만하면 이 책의 가치를 주목할 만하게 된다.

<인문학의 미래>(동녘 펴냄)는 1970년대 중후반 미국 대학의 풍토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1977년). 30년 전의 논의이지만 우리의 현실에서도 여전히 논란이 될 만한 내용들이 여기에 담겨 있다.

왜 그런가? 자본주의 체제의 기능적 수단으로 전락해가는 미국 대학에서 인문학은 현실적으로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밀려나고 있었다. 1960년대 인권 운동과 반전 평화 운동의 바람이 불고 간 캠퍼스에서는 지적 탐구의 견고한 뿌리도 말라가고 있었다. 현실을 변화시키기 위한 의지는 강했지만 그것을 뒷받침할 수 있는 지적 진지는 허약해져가고 있었던 것이다.

말하자면 자본의 위력이 강력해지면서 인문학의 주도권이 무너지는 가운데, 사회 운동의 전개 속에서 주장과 논박은 풍성했지만 책 읽기의 힘은 상대적으로 낙후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미국식 실용주의 철학이 지배적이 되어 가면서, 고전 교육의 틀 속에서 펼쳐졌던 유럽형 인문주의 교육은 퇴각을 강요당하다시피 했다. 깊이 있는 사고를 할 수 있는 교육의 질적 변모는 이로써 그 토대가 무너져가고 있었다.

유럽 인문주의 정신의 복원

▲ <인문학의 미래>(월터 카우프만 지음, 이은정 옮김, 동녘 펴냄). ⓒ동녘
이런 상황에서 월터 카우프만은 유럽 인문주의 전통의 힘을 미국의 현실과 접목시키려 노력한다. 이것이 이 책 <인문학의 미래>에 기본적으로 깔린 그의 철학이자 전략이다. 니체를 제대로 읽지도 않고 그의 '초인' 철학을 파시즘의 개인 우상화로 연결시키고 마는 당시 미국의 지적 풍토 앞에서 그는 미국 교육을 지탱하고 있는 인문 정신에 대한 점검에 나선다.

카우프만이 보기에는 고전이든 아니면 뛰어난 철학자나 사상가이든, 미국 교육은 이와 관련해서 원전 연구나 번역 문제에 있어서 또 다른 연관 학문과의 통합적 체계를 세우는 일에 있어서 치밀하지 못하고 성찰적 독서도 하지 않는다고 여겨졌다. 사실, 미국은 그 성립 초기에 유럽에 대한 반감과 단절, 이후 미국의 독자성 그러나 여전한 유럽에 대한 정신적 열등감과 그 극복 또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물질적 부의 축적과 우월감이라는 단계를 지나왔다.

이런 과정을 통과해온 1970년대의 미국은 이제 유럽 없이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충분히 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미국은 유럽의 자식이지만, 이제는 유럽의 보호자가 되어 있었던 것이며, 유럽 인문학은 제2차 세계 대전의 참담한 비극을 겪으면서 현실에서 패배했다고 본 것이다. 미국 자본주의는 유럽 인문학의 수준을 넘어선 현실적 결과물이며, 다시 그 고리타분한 유럽 인문주의로 돌아가는 것은 시대의 진보와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민권 운동, 반전 평화 운동은 미국 자본주의 체제 자체에 대한 비판적 성찰을 가능하게 했다. 또 이 운동의 소멸 과정에서 지적 자산이 빈곤해져 있는 현실을 깨닫게 된 지식인 공동체는 새삼 유럽 인문주의의 정신사에 눈을 돌리게 되었다. 그러나 어디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고, 어떤 번역을 신뢰하면서 새롭게 시작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했다. 이런 시기, 월터 카우프만의 인문학에 대한 논의와 교재 선택, 강의 방식에 대한 생각이 담긴 이 책은 순식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보다 10년 뒤 세계적인 홉스 연구자 레오 스트라우스와 헤겔 연구자 알렉상드르 코제브 밑에서 공부한 보수주의 정치철학자 앨런 블룸이 <미국인의 폐쇄적 심리 상태(Closing of the American Mind)>라는 책을 써서 고등 교육에서 고전 교육의 필요성을 강조하고 나선 것도 모두 이러한 분위기에 대한 미국 지식인들의 반응과 대응이었다. 블룸이 미국인으로서 유럽 고전 교육에 대한 관심을 표명했다면, 카우프만은 이러한 논의의 현관문을 연 셈이었다.

이 책의 독자들은…

그래서 이 책이 원래 염두에 두었던 독자는 인문학 연구자 또는 대학 교수들이다. 하지만 굳이 그렇게 한정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카우프만은 인문학이 성찰의 능력을 가진 지식인들을 길러내야 하는데, 대학이 그런 역할을 하기보다는 너무 좁게 정교화된 인문학을 추구하는 바람에 비판적, 성찰적 지식인 집단을 육성하는데 실패하고 있다고 보았다. 그래서 그는 "종교, 철학, 예술, 음악, 문학, 역사 등"에 걸쳐 포괄적이 교육이 필요하며 이걸 통해서 새로운 시대에 대한 비전을 길러나갈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인문학의 미래>는 그러한 의미에서, 그 내용이 대단히 구체적이다. 사고의 탄력성을 길러내는 독서의 기술을 비롯해서, 서평, 번역, 출판에 이르는 인문학 기반의 전반적인 현실을 짚어내고 있다.

카우프만은 프로이트의 예를 들면서, "프로이트는 통찰가였다. 그는 자신의 비전을 분명하게 만들기 위해 꾸준히 노력을 기울였다. 그리고 엄청난 양의 독서와 함께 끊임없는 자기 분석, 그리고 환자들에 대한 분석을 통해 이를 검증했다"고 주목한다. 사실 프로이트의 독서 영역은 엄청나게 광범위했고, 이것은 유럽 인문주의의 힘이기도 했다.

카우프만은 "이러한 통찰적 지식인이 대학 사회에 발을 붙이기는 어려워졌다"면서, 그 당시 흥미를 끄는 수준의 원고나 지식을 제공하는 자들이 당장은 인기를 끌지 몰라도 "몇 년이 지나면 그에 대한 흥미가 사라질 것"이라고 지식의 피상성을 비판한다. 그는 이러한 지식인의 유형을 저널리스트적 지식이라고 명명하고 있어 다소 논란이 생길 만한 규정이기는 하나 그렇다고 해서, 그가 현실 문제에 대해 외면하면서 지적 공동체가 만들어져야 한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었다.

현실에 문제를 제기하지 못하는 지식인

"20세기 초반 동안 독일은 고등 교육과 직업 전문 교육의 모델이었다. 많은 미국인들이 박사 학위를 취득하기 위해 독일 대학으로 몰려갔다. (…) 그러나 1930년대로 들어서면서 독일 대학은 순수 직업 전문 교육의 도덕적 파산을 보여주는 완벽한 표본이 되었다. 지도력 있는 대부분의 독일 학자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의 신념, 도덕, 정치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지 못했다."

결국 현실과 어떤 대치를 하면서 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성찰 내지 통찰적으로 접근하는 지적 노력을 기울이는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인문주의 정신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을 것이다. 이것은 변증법적 독서의 방식에 의존할 때 더더욱 기량을 발휘할 수 있는데, 카우프만은 이를 가리켜 "문화 충격을 마다하지 않는 독서"라고 이해한다. 이것은 독서가 자기 변화를 가져오는 의식의 성장 과정임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있는 결과다. 이걸 해내지 못하면 그 어떤 것(TV든 컴퓨터이든)도 제대로 성찰적으로 읽어낼 수 없다고 그는 강조하고 있다.

번역에 대한 그의 정밀한 논의도 한국 사회에서 반드시 필요한 사회적 담론의 하나다. 일본을 통한 번역의 수입은 우리에게 번역에 대한 사회적, 지적 고뇌를 별반 하지 않아도 되는 풍토를 만들어버리고 말았는데 카우프만은 이러한 대목까지 거론하면서 인문주의 교육의 질적 고양을 위해 필요한 지식의 재창출이 가지는 가치를 역설하고 있다.

종교 교육의 가치 그리고 '창세기'

이 책에서 특히 카우프만이 강조하고 있는 것이 종교 교육이라는 점은 주목된다. 그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어느 특정 종교에 대한 주입이 아니라, 가장 오랜 인류의 정신사가 담긴 원천에 대한 연구와 교육이야말로 인문주의 교육에 있어서 너무나도 필요하다고 본 것이다. 그는 성서의 경우에 있어서 '창세기'를 꼽고 있는데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좋은 텍스트를 골라야 한다.) 이를 위한 가장 좋은 선택이 나는 '창세기'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창세기'는 내가 알고 있는 책 중에 가장 위대하고 아름답고 심오하며 영향력 있는 책이다."

나의 경우, 이 카우프만의 이야기에 전적으로 동의하는 편이다. '창세기' 하나를 제대로 읽어내는 독법의 교육에 성공할 수 있다면 우리는 거기에서 상상 이상으로 깊은 정신의 진수를 퍼낼 수 있게 된다. 이후 유럽과 미국에서 '창세기' 연구가 활발해지고, 유대 랍비의 창세기 연구까지 포괄하면서 서구 철학의 힘을 보다 역동적으로 만들어간 과정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인문적 성찰의 공동체

번역자 이은정은 그의 서문에서 인문주의 교육이 "이 시대의 양심 있는 시민, 즉 지식인이 되기 위한 교육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물론 모두가 다 지식인이 되기는 쉽지 않겠지만 적어도 양심과 비판 정신, 성찰의 능력을 가진 지식인으로 살아갈 수 있는 기초를 공급하는 교육이 된다면 우리 사회의 변화와 발전은 제대로 된 방향과 길에 들어설 수 있게 될 것이다.

"왜 인문학을 가르치고 배워야 하는가?"에 대한 카우프만의 대답은 그런 의미에서 꽤나 구체적이다. 그래서 어찌 보면 우리의 현실이나 현재의 시점에서 맞지 않을 수 있다. 또 유럽 인문주의가 인문주의 전체를 대표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바로 그런 인식의 절박성과, 구체적인 노력의 자세를 배우는 것이 이 책의 덕목이 될 것이다. 인문학의 위기와 인문학에 대한 갈증이 서로 겹치고 있는 시점에서 이 책이 던지는 질문과 대답은 우리에게 성찰의 재료를 보다 풍성하게 해 줄 것이다.

책을 읽고 교육하고 토론하는 성찰의 공동체가 확대되면 될수록 이 사회의 인문정신은 미래를 태어나게 하는 가장 강력하고 진실한 힘이 될 것이다. 그건 우리 모두의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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