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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키나와는 일본이 아니다!

[동아시아를 묻다] 오키나와에서 류큐로

복귀, 반환, 재병합

올해로 오키나와 복귀 40주년을 맞는다. 1972년 5월 15일의 일이었다. 미군의 지배하에 있던 오키나와가 다시 일본으로 편입된 것이다. 헌데 '복귀'라는 용어가 새삼 문제가 되고 있는 모양이다. 오키나와의 자립과 자치가 모색되는 가운데, 이름부터 바로 잡는 정명(正名)이 시도되고 있는 것이다.

40년 전의 사건을 설명하는 몇 가지 용법이 있다. 우선 '반환'이다. 이는 미국과 일본의 양 국 관계가 중심이다. 미국이 일본에 통치권을 되돌려줬다는 것이다. 정작 오키나와는 소외되고 있다. 그에 반해 '복귀'는 일국 내 관계를 의미한다. 중앙과 지방의 관계라고도 하겠다. 1952년이 본토의 '단독' 독립이었다면, 1972년 오키나와의 복귀로 일본의 전면 독립이 완수된 셈이다.

실제로 오키나와 인도 '조국 복귀' 운동을 펼쳤던 바 있다. 미국의 군사 요새로 전락한 상황을 타개하는 활로를 '평화 헌법'을 향유하는 일본으로의 복귀에서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기지 없는 섬'을 갈구하는 조국 복귀 운동은 반전 평화 운동이자, 아시아 연대 운동이기도 했다.

오키나와의 미군 기지야말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을 수행하는 핵심 거점이었던 탓이다. 즉, '복귀'란 애당초 사회 운동 용어로 출발했다. 하지만 정작 1972년 5월의 '복귀'는 군사 기지를 유예한 채 단행되었다. 이로써 복귀 또한 '행정 용어'로 귀착되고 만 것이다. 특히 미국의 입장에서는 반미 운동으로 심화되는 오키나와 문제를 일본으로 떠넘기는 '반환'의 효과마저 누렸다. 닉슨이 주창했던 '아시아 문제의 아시아화'란 대저 이러한 것이었다.

그런 탓에 최근 새로운 명명이 등장하고 있다. 일본 복귀가 사실상 '재병합'이었다는 인식의 전환이다. 류큐 왕국을 정복하고 메이지 일본의 일개 현으로 복속시킨 '류큐 처분'의 반복이었다는 것이다. 복귀란 본디 원래의 장소, 지위, 상태로 되돌리는 것을 말한다. 헌데 1972년 오키나와가 되돌아간 것은, 그로부터 100년 전, 1879년의 류큐 처분이었다는 말이다. 역사 인식의 일대 반전이라 하겠다.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1945년 제국 일본의 패망으로 '류큐'가 잠시 복원된 적이 있었다. 탈일본의 해방감 속에서 류큐 독립론이 일시적으로 분출했던 것이다. 다만 그것이 미군정의 지배 전략에 포섭되었다는 점이 뼈아프다. 미군은 포로수용소에서부터 일본인과 류큐인을 별도로 수감했다. 분리 통치(devide and rule)의 시작이다.

1946년에는 본토보다 앞서 남녀 보통 선거가 실시되는 등 '민주주의의 쇼윈도'로 류큐를 활용했다. 류큐 정부, 류큐 대학, 류큐 은행 등 류큐를 딴 공공 기관들도 대거 등장했다. 심지어 류큐 대학의 개교식이 링컨의 생일에 맞추어 진행되었을 정도이다. 류큐의 회복마저 일본=군국주의, 미국=민주주의라는 지배 담론에 포박되어 있던 것이다.

그러나 상황은 곧 일변한다. 대륙에서는 중국 혁명이 성공하고, 그 기세에 힘입어 반도에서는 한국 전쟁이 발발했다. 이른바 '역코스'가 진행된 것이다. 오키나와에는 대대적인 기지 건설 붐이 일었다. 민주주의는커녕 군사 식민화의 성격이 한층 강화된 것이다. 그 역코스의 정점에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1952년)이 있었다. 일본이 도리어 '평화 헌법'하의 민주 국가로 거듭나고, 오키나와는 군국주의의 전초 기지가 되고 만 것이다. 재차 동아시아 열전의 비극을 오롯이 감수해야 하는 형벌의 땅이 되고 말았다.

헌데 언뜻 역사가 반복되는 듯 보인다. 왕년의 '중국 혁명'은 작금의 '중국 굴기'로 대체되었고, 한국 전쟁을 대신하여 '북조선의 위협'이 강조되고 있다. 대륙과 반도를 명분삼아, 그 군사적 부담을 오키나와에 전가함이 60년 전과 판박이다. 그러고 보면, 올해는 그 말썽 많은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 60주년이기도 하다. 미군은 물론이요, 이제는 자위대까지 남하했으니, 사태는 한층 심각하다고도 하겠다. 류큐 처분(1879년)은 결국 청일 전쟁(1894년)과 한일 병합(1910년), 중일 전쟁(1937년), 태평양 전쟁(1941년)으로 치닫는 단초가 되었다. 오키나와의 '재병합' 40년을 도무지 남 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까닭이다.

국제 질서와 지역 질서

ⓒwikimedia.org
류큐 처분은 동아시아의 새로운 질서의 도래를 상징하는 사건이었다. 이른바 '국가 간 체제(inter-state system)'가 도입된 것이다. 국제(國際) 질서란 말 그대로 국가와 국가 사이의 질서이다. 달리 말하면 '국가'에 준하지 못하는 공동체는 참여가 원천 봉쇄되는 독점적 질서이다. 따라서 국제법(international law)이란 국가에 미치지 못하는 공동체의 식민화를 합리화하는 것이기도 하다.

조공과 책봉으로 '독립국이 아닌 국가'가 일반적이던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와는 판이한 것이다. 국제법 아래서는 '독립국이 아니면 곧 국가가 아니다.' 정치 공동체는 오로지 '국가'로 획일화되어야 하며, 그들 간의 관계 또한 법과 조약으로 규정되어야 한다. 허나 독립(獨立), 즉 홀로 섬은 동아시아의 사유로서는 가당치 않은 논리였다. 물류(국가의 조공과 민간의 호시)와 문류(한자, 유교, 불교 등)를 공유하는 일가족, 즉 가국(家國) 질서였기 때문이다.

그 천하(天下)의 논리가 붕괴되면서 너나없이 민족주의가 분출하는 악다구니의 20세기가 열리게 된다. 만국이 만국에 '평등'하게 투쟁하는 '전국(戰國)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어쩌면 그 시대의 한 정점이 '주체 사상'일지도 모른다. '독립 만세'라는 구호야말로 역설적으로 서구화의 뼛속 깊은 내면화는 아니었을까.

본디 동아시아는 '국제 질서'가 아니라 '지역 질서'였다. 정치체의 크고 작음(大小)과 멀고 가까움(遠近)에 따라 상이한 층위에는 상이한 관계가 적용된 것이다. 대국은 대국답게, 소국은 소국답게, 이웃은 이웃답게 그 복수성과 다원성을 아우른 복합적 질서가 작동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질적인 것을 포용하는 유연성을 발휘할 수 있었다. 류큐, 타이완, 홍콩, 티베트, 신장 등이 국가에 준하지 못했다 한들, 갈등의 소지가 될 이유가 하등 없던 것이다. 각자의 다름을 조화시키는 차등적 의례가 적용되었던 탓이다. 그래서 정치 공동체 사이의 '예(禮)'란 '법(法)'처럼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중원은 물론이요, 주변의 일본, 조선, 베트남 모두가 저마다 '중화'임을 자부하는 소중화주의 질서는 이렇게 성립한 것이다. 어느 국가도 중화의 소재에 관해 자신을 해석을 타국과 공유(=강제)하려고 하지 않음이, 도리어 장기간의 안정과 평화를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해 동아시아의 지역 질서는 내셔널리즘의 분출을 적절하게 조율해 갔던 체제였다. 인종과 민족의 차이가 갈등을 촉발한 경우가 무척 드물었던 것이다. 오로지 '문(文)'으로 교화하여 '덕(德)'을 발현하는가의 여부가 중요했을 뿐이다. 규범적으로나 그 실태에서나 생물학적 차별은 적었던 것이다.

그래서 북방 유목 민족도 수차례 중원을 다스릴 수 있었다. 천하태평의 '글로벌 공공재'를 제공할 수 있다면, 혈통이란 중요치 않았던 것이다. 즉, 인종과 민족에 연연하여 그것을 정치적으로 동원하는 민족주의의 발흥을 억제하는 인문주의적 질서였다고 하겠다. 이는 저열한 (사회)진화론에 기반을 두고 인종론과 문명론을 결합시킨 근대의 약육강식과는 질적으로 판이하다. 내셔널리즘이야말로 아프로-유라시아의 대 교역 망에 뒤늦게 편입한 유럽의 후발 국가들이 내세운 풋내기 논리였던 것이다.

대국이 소국처럼 굴고, 소국이 대국인양 하고, 이웃된 도리를 다하지 못함이 난세(亂世)이다. 약육강식의 시대인 것이다. 동방에는 대국(大國)과 상국(上國)은 있어도, '강=대국(强=大國)'이란 발상은 없었다. 큰 것이 곧 강한 것은 아니다. 이와 짝을 맞추어 소국이 곧 약=소국(弱=小國)도 아니었다. 하지만 '국제 질서'의 도입과 함께 규모의 차이와 이질적인 문화와 풍속이 차별의 근거가 되고 만다.

오키나와 지식인들은 풍속과 관습의 '내지화'를 독려하며 동화=식민화의 논리를 내면화해갔다. '생활 개선 운동'이라는 미명 하에 완전한 일본인이 되기 위한 각고의 노력을 경주한 것이다. 이는 표준어 발음을 위해 혀의 근육을 재조직하는 신체적 폭력을 수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 동화(同化)는 사태의 일면일 뿐이다.

다른 면으로는 오키나와인들이 타이완과 아이누, 조선인을 차별하는 '억압의 무한이양'이 연쇄되었던 것이다. 교린(交隣)하던 이웃들이 류큐는 장남, 타이완은 차남, 조선은 삼남이라는 차별적 질서로 재편된 것이다. 이광수의 '내선일체'란 이러한 중층적 위계를 돌파하려는 몸부림의 (그릇된) 탈출구였다 하겠다. 이 모든 착종이 동아시아의 '차등(差等)적 질서'(=差別도 아니요, 平等도 아닌 역동적 균형 상태)가 무너진 이후의 사태인 것이다.

'재병합'을 강조하는 이들 중의 일부는 1972년을 '제3차 류큐 처분'이라고도 한다. 1879년보다 더 거슬러 올라가 1609년의 사쓰마번 침략까지 염두에 둔 것이다. 일견 타당한 견해이지만, 지나친 감도 없지 않다. 당시에도 여전히 동아시아적 질서가 이어졌기 때문이다. 즉, 류큐 왕국은 중국과의 조공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고, 동남아와 태평양을 잇는 해양 왕국의 면모를 지속할 수 있었다.

이른바 '일지양속(一支兩屬)'으로 중국과도 일본과도 관계를 유지하고, 어느 일방으로 기울지 않았던 것이다. 중국도, 일본도, 류큐도, 나아가 조선도 그런 상태를 알고는 있었지만, '모르는 척'하며 질서를 교란하지 않았다. 그래서 왕권도 그대로 유지되었고 종래의 풍속과 관습을 헤치지도 않았다. 그렇게 지역의 독자성을 살려둠으로써 왕성한 중계 무역을 보호하는 것이 더 이로운 것이었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강국은 착취를 하지만, 대국은 '양육(nurture)'을 하는 법이다. 정치적 종속(제국주의)과 문화적 획일화(식민주의)를 수반하는 '국제 질서'와는 여전히 달랐던 것이다.

물론 과거를 미화하자는 것이 아니다. 복고를 주장하는 것도 아니다. 20세기를 통해 왕국(王國)이 민국(民國)이 되었음은 인류사의 크나큰 성취이다. 하더라도 그에 안주해서도 아니 될 것이다. 특히 그 '민국'을 구성하는 '국민'의 편협은 간과할 수 없겠다. 본디 류큐를 거점으로 동남연안과 태평양, 인도양을 왕래하는 교역선은 저 멀리 포르투갈까지 아울러 다국적으로 운영되었다.

류큐에도 중국인, 일본인은 물론 동남아 사람들까지 혼거하는 집단 거류지가 여기저기 있었다. 즉, '혼종성(hybrid)'이라 함은 지구화 시대의 새로운 현상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본래 그러했던 것이다. 아울러 그 민국과 민국의 관계맺음의 방식 또한 단조로워졌음을 무시할 수 없겠다. 국제라는 관계망의 '단수화'야말로 근대의 복병이다.

따라서 그 미래가 불투명해졌을망정 유럽연합(EU) 헌법이 뒤늦게나마 '이중 다수 결제'를 채택했음은 주목할 만한 일이었다. 국가 간 체제의 추상적 평등을 재고하여, 나라별 차이를 고려한 '국제 민주'의 질적 심화를 도모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구의 차이, 국력의 차이 등을 고려하여 차등적 역할을 배분하고 있는 것이다. 대국은 대국답게, 소국은 소국답게, 이웃은 이웃답게, 에 한층 가까워진 셈이다.

그럼에도 이제야 중국, 특히 중국의 육, 해, 공 관련자들이 미국에 유학하여 '국제관계학'이나 '국제정치학' 따위를 배우고 있음은 참으로 딱한 노릇이다. 세력 균형론이나 억지론 등의 논리를 체득한 중국의 일본화, 혹은 중국의 미국화란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 않은가. 하늘 아래 새 것 없고, 새 것은 옛 것에 깃들어 있다.

오키나와에서 류큐로

반전의 조짐은 보인다. 2011년 10월, 오키나와에서는 '세계 우치난츄 대회'가 열렸다. 우치난츄는 오키나와인을 가리키는 토박이 말이다. 1990년 시작하여 지난해로 다섯 번째를 맞았다. 오키나와는 그 신산스런 역사 경험만큼이나 이민과 이주도 번다했다. 남미와 북미, 아시아 각지에 흩어져 억척스럽게 삶을 지속해온 것이다.

그 우치난츄 2세, 3세, 4세들이 나하시의 '국제 거리'에 (재)집결한 것이다. 헌데 이들이 들고 있는 깃발이 비단 국기만이 아니었음이 소중하다. 국기와 더불어 지명을 기입한 작은 카드도 함께 들고 있던 것이다. 그들이 현재 살아가고 있는 저마다의 장소와 토지를 상징하는 깃발인 것이다. 이만하면 미군 기지의 산물로 조성된 '국제 거리'가 탈구축(decostruction)되고 있다고도 하겠다. 사람과 사람, 사람과 땅, 사람과 (국가를 포함한) 공동체의 관계를 재구축하고 있는 발랄한 광경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이들은 국민이자, 시민이고, 또 주민이다. 그 복수의 '민'의 무리를 민중(民衆)이라 일컫자. 이는 '계급(class)'이라는 협소한 '근대적 신분' 개념과도 다르다. 국적과 계급을 불문하여 합류한 이들이 '국제 질서'의 총화인 유엔에서 류큐의 역사와 문화의 복권과 자결권, 자치권을 요청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나아가 괌과 하와이 등 태평양 선주 민족과의 연대망도 구축하고 있다. 이들이 요구하는 것은 더 이상 20세기 식의 '독립(independence)'이 아니다. 미군과 본토에 대한 일방적 의존(dependence)에서 탈피하되, 그 방법은 홀로 섬이 아니라 '상호 기댐(interdependence)'의 강화이다. 독야청청이 아니라, 이웃애가 관건이다. 즉, 류큐에 내재하던 역사의 '거대한 뿌리', 아시아와의 폭넓은 교류 망과 그 바닷길을 왕래했던 민중 네트워크를 복원하겠다는 것이다. 1972년의 '복귀'가 '국가 주권'을 승인하는 '전환 시대의 논리'에 그쳤다면, '지역 주권'을 옹호하는 오늘의 논리는 '반전 시대'의 선취라고도 하겠다.

500여 년 전, 신숙주는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1471년)를 편찬한 바 있다. 바다 건너 이웃나라들에 대한 시찰 보고서이다. 그 서문을 보노라면 "풍속이 다른 나라 사람을 편안하게 접대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실정을 잘 알아야만 예절을 다할 수 있고, 예절을 다해야만 그 마음을 다할 수 있다"는 구절이 있다. 교린의 원칙을 밝히고 있는 대목이다.

그 중에서도 류큐 왕국은 '수예지방(守禮之邦)'으로 손꼽혔다. 예를 지키는 나라라는 것이다. 실제로 류큐에는 무장 병력이 없었다. 사쓰마 번이 류큐를 침략했을 때, 불과 3000명이 동원되었다. 류큐 처분 때도 순사 160명과 보병 400명이 파견되었을 뿐이다. 그래서 오래도록 비무장지대(DMZ)를 향유하던 류큐인들은 '칼과 무기를 찬' 일본군을 '야마토 짐승'으로 간주했을 정도이다. 본래 '강(强)'이라는 한자부터 벌레(虫)가 새겨져 있지 않던가.

당시 류큐 왕국의 상징으로 만국진량(萬國津梁)이 있다. 만국의 다리, 라는 뜻을 담은 종(鐘)이다. 종은 철을 녹여서 만든다. 창(戈)을 거둔다(止)는 뜻의 무(武), 라는 한자의 실현이 곧 종 만들기이다. 신숙주의 보고와 때를 멀리 하지 않는 1458년에 만들어졌다. 조선의 기술이 전파되어 만들어졌다는 설도 있을 만큼, 류큐의 황금 시절이었던 대교역 시대의 산물이라 하겠다. 이 만국진량의 발상이야말로 나라별로 담장과 성벽을 쌓는 만국공법의 국제 질서와 얼마나 다른 것인가.

때는 바야흐로 서구가 주도했던 '국제 질서'의 황혼기이다. 돌아보면 국민 국가를 준거로 삼은 국제 질서야말로 예외적이고 특수한 것이었다. 국가 간 체제로의 재편이 완수된 것이 극히 최근이며 (유엔 산하 200여 개국 가운데 70퍼센트가 20세기 후반에 탄생했다), 그로 말미암은 세계 지도의 인위성과 작위성 또한 역력한 것이다.

아니 동아시아만 놓고 보자면, 여전히 '국민 국가' 체제로의 전환은 완료되지 않았다. 남북한은 분단국이며, 홍콩, 오키나와, 타이완도 국가에 족하지 않으며, 평화 헌법 하의 일본 또한 '정상 국가'가 아니다. 중국 역시 도무지 일국으로 간주하기 힘든 제국적 실체를 지속하고 있다. 그 엄연한 차이를 억지로 국가 간 체제로 맞추어 가는 것이야말로 어불성설(語不成說)이 아닐까. 그런 이치에 맞지 않는 논리가 지배했던 시대가 안녕을 고하고 있는 것이다.

이제야말로 동아시아의 몸통과 뼈대에 부합하는 (오래된) 새 질서를 궁리할 때이다. 그 반전의 최전선에 류큐가 있을 것임을 고대해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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