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미르 아민이 1990년에 출간한 <고리 끊기(Delinking)>는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신랄한 비판이었다.
이 책은 신자유주의 체제가 제3세계의 현실을 어떻게 구조 조정하게 되는지를 명확히 밝혀 놓은 저작이다. 그런데 당시 신자유주의는 대세였고, 이걸 정면으로 치고 나가는 좌파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을 경험한 상태에서 신자유주의는 자본주의의 세계적 차원을 창출하면서 난공불락의 성채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사미르 아민은 "아마도 10년에서 20년이 지나면 신자유주의를 더 이상 거론하는 이들은 없게 될 것이다"라고 단언했다. 그는 신자유주의의 몰락이 조만간 오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이 시스템에 함께 쓸려가지 않으려면 당장의 고통이 있더라도 단절의 결단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조언한 바 있다. 자본의 주도권을 중심에 놓고 정치경제적 질서의 재편을 세계적으로 꾀하는 이 체제에 편입되어 가는 순간, 사회적 양극화는 피할 길이 없게 된다고 정확히 짚은 것이었다.
이러한 논리와 결론은 오늘날 상식이 되었지만, 20여 년 전만 해도 신자유주의의 정체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고, 그것이 '세계화'라는 방식으로 확대 재생산될 경우 어떤 사태가 벌어지게 되는지도 가늠하지 못했던 것이 현실이었다. 현존 사회주의 체제의 붕괴와 케인스주의의 국가 개입 정책이 작동하지 못하는 경제 위기가 겹치면서 그 출로를 신자유주의가 석권했을 때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하는지 진보 진영은 혼란을 겪었던 것이다.
세계 경제의 위기와 자본 축적 전략의 모순
사미르 아민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모순을 경험하면서 이것이 결국에는 자기모순에 직면해서 수명을 다할 것이라고 예견했던 것은 옳았다. 그러나 그의 주장이 보다 확산되어 받아들여지기까지 지구촌이 겪어야 했던 희생과 손실은 막대했다. 그만큼 세계 자본주의의 위기 타개책이 자신을 정당화시키고 포장하는 방식은 교묘했으며, 그 후과가 무엇인지 확인하기까지는 간단치 않은 시간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사미르 아민보다 10년 앞서서 바로 이 신자유주의 체제의 탄생 과정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분석한 것이 바로 안드레 군더 프랑크였다. 그는 서구 자본에 의한 라틴 아메리카의 종속 상태가 저발전의 확대 재생산을 가져온다는 논리를 세운 세계적 종속 이론가의 한 사람이었던 동시에,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제국주의의 연속선에 있다는 주장을 해온 인물이었다.
그의 인생 후반기에 들어서서는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이해를 15세기 이후 500년의 단위만이 아니라 세계 문명사의 5000년을 전제로 접근하는 이론의 축을 세워 보다 심층적인 세계 체제론을 세운 작업으로 주목받았다. 이러한 접근의 결과로 1998년에 그가 쓴 <리오리엔트>는 서구 자본주의의 확산과 동아시아 체제의 관계를 세계사적 차원에서 분석한 명저라고 할 수 있다.
안데르 군더 프랑크가 종속 이론에서 세계 체제론으로 이행해 가는 과정에서 세계 경제의 위기 국면을 분석해 들어간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World Economic Crisis)>(New York : Monthly Review Press, 1981년)은 국내 번역이 없는 상태라 아쉽지만, 이 책은 2008년 미국 경제의 위기 국면을 역사적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는 기초를 제공해준다. 그리고 이에 토대를 두고, 어떤 해법을 선택하려 할 것이지를 내다보게 해주는 저서라고 할 수 있다.
자본의 자유와 노동에 대한 통제
▲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성찰(Reflections on the World Economic Crisis)>(New York : Monthly Review Press). ⓒamazon.com |
이런 상황에서 선진 산업 국가 내부의 계급투쟁을 일정하게 완충해온 사회민주주의도 한계에 직면하게 되었고, 케인스주의에 따른 시장에 대한 국가의 개입도 재정 적자를 증대시켜 계급 정치의 긴장이 고도로 강화되었다. 따라서 국제 노동 시장에서 주변부의 역할을 강화하는 선택을 하지 않으면 첨예한 내부 모순을 피할 길이 없게 되었다고 본 중심부의 자본은 주변부 자본주의 체제를 보다 강력하게 세계 자본주의 체제 내로 편입시켜 재식민지화하는 전략을 구사하는 것 외에는 방법이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에도 이에 해당하는 대상이 되었는데, 그 시기가 바로 박정희 체제가 압축적 산업화를 진행하려는 때였으며 이를 위해 고강도의 안보 국가론을 전개하여 노동을 통제하는 주변부 국가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크의 설명에 따르면 박정희 체제 단독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서구 자본주의의 경제 위기와 그로 인한 자본축적 위기를 돌파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조건이라는 것이다.
이 시기의 세계 자본주의 전략은 자본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선택했으며 주변부 국가에서 군사 정부의 강화를 통해 자본주의 시장을 만들어가는 작업이 이런 틀 안에서 진행되었던 것이다. 결국, 1970년대 초반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주변부 파시즘과 동맹을 맺어 자본의 주도권을 강화하는 동시에 노동을 국가적 차원에서 희생시켜나가는 선택을 강제화했다.
신자유주의는 국가의 권력을 강화시킨다
오늘날에는 이제 많이 알려지게 되었는 바, 칠레의 아옌데 정권이 피노체트 군사 정권으로 대체되어간 과정도 바로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의 실험을 신자유주의 이론의 주도자 밀턴 프리드먼의 이론에 따라 관철해나간 결과였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프랑크가 강조했듯이, "임금의 억제"와 이에 기초한 "자본 축적 체제의 강화"라고 할 수 있다. 서구 자본주의 체제의 자본 축적 위기를 제3세계 주변부에 떠넘김으로써 그 부담을 온통 주변부 민중에게 전가하고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방식을 밀고 나갔다는 것이다.
프랑크에 따르면, 1970년대 세계 경제 위기는 노동과 자본의 타협 국면을 소멸시키고 주변부 국가의 노동을 보다 강도 높게 착취하는 방향으로 그 해법을 찾아나갔으며, 기존의 군사주의 권력과 손을 잡고 시장의 주도권을 거대 자본이 장악할 수 있도록 하는 전략을 구사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전 세계적인 사회적 양극화가 심화되어갔으며 "자본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신자유주의 체제"가 보다 본격적으로 가동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신자유주의 체제는 세계적 자본 축적의 위기에 대한 대응이라는 점에서, "주변부 국가의 임금을 억제하기 위해 노동조합을 탄압하고 노동자들의 시위를 불법화하며 국가의 권력을 강화함으로써 서구 자본이 요구하는 국제 노동 분업 체계에 편입되도록" 했다는 것이다. 프랑크는 여기서 민주주의는 신자유주의 체제와 대립할 수밖에 없게 되고, 그 과정에서 신자유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을 가지고 저항하게 되는 계급 또는 계층을 양산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자신의 무덤을 스스로 파는 모순에 직면하게 된다고 지적했다.
프랑크는 신자유주의 체제는 자본의 주도권을 강화함으로써 마치 국가의 권한은 축소하는 것처럼 여기거나 기만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노동을 통제하여 자본 축적의 기구를 확대 강화하게 된다는 점에서 매우 강력한 국가의 출현을 필연적으로 가져온다고 말했다. 그리고 이 국가는 자본과 심도 깊은 동맹 관계가 됨으로써 자본의 주도권을 압도적으로 만든다고 강조한다.
신자유주의 세계 체제의 본질
이렇게 보면, 자본 축적의 위기가 발생하면 자본의 권한을 확대 강화하려는 전략이 가동되고 이를 위한 강력한 국가 기구의 출현이 이루어질 수 있음을 알게 된다. 그리고 이 국가는 자본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함으로써 노동에 대한 고강도의 착취와 수탈, 민주주의의 해체를 가져오고 사회적 양극화를 일상의 현실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프랑크의 이러한 지적들은 오늘날 모두 입증된 일들이다. 프랑크에 앞서서 자본주의체제가 장기 순환의 사이클에 따라 위기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본 에르네스트 만델 역시도 그의 <후기 자본주의(Late Capitalism)>에서 "오늘날의 세계 자본주의 체제는 자본주의 발달 단계의 새로운 국면이라기보다는 독점 자본의 주도권 아래 강화된 제국주의의 확대 발전"이라고 갈파한 바가 있다.
다시 말해서,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위기가 반복되어가는 과정에서 선진 자본주의 체제 내부의 계급 모순이 날카롭게 드러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주변부 자본주의 국가들의 희생을 요구하는 대응이 펼쳐지게 된다는 뜻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우리는 미국의 경제 위기와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이 어떻게 연결될 수 있는지 보다 확실하게 파악하게 된다.
다시 말해 미국의 입장에서 한미 FTA는 자본 축적의 위기와 내부적 계급 모순에 대응하기 위한 신자유주의적 해법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우리 내부의 노동 구조의 정치적 무력화와 민중의 삶을 곤고하게 만드는 대가로 추진되는 제국주의적 성격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독점 자본의 주도권 강화 전략에 다름 아닌 것이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국가는?
프랑크의 <세계 경제 위기에 대한 성찰>은 바로 이러한 독점 자본의 지배 전략을 정당화하는 경제 이론을 비판하고 있다. 또 안보 국가론이 국가 자본주의의 자본 축적 논리의 변형이며 신자유주의가 자본의 독자적 영역을 내세우는 것 같으나 사실은 부르주아 국가와 자본의 동맹 체제를 강화하는 것이라며 이러한 기만적 이데올로기와 이론의 진상을 폭로하고 그 환상을 거둬내는 작업을 할 때 민중은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의 이러한 예견이 너무 낙관적이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신자유주의 체제가 독점 자본의 자본 축적 위기의 대응책이라는 점, 그래서 노동자들을 비롯한 민중들에 대한 계급적 수탈체제가 강화되어 사회적 양극화가 필연적이며 국제 노동 분업 시장에서 종속 상태가 심화되어가는 사태가 벌어진다고 하는 지적들은 모두 현실에서 입증되어왔다.
우리가 만들고자 하는 국가가 이러한 수탈 체제를 포장하고 정당화하는 장치가 된다면 그것은 날로 더더욱 서민들의 삶을 고통으로 몰아놓는 일이 된다. 오늘날 유럽이 경제 위기로 계급적 모순이 보다 첨예해지고, 미국이 사회적 양극화의 심화와 복지 체제의 동요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모두 그 나라의 기본 동력이 되어야 할 민중들의 삶이 벼랑으로 몰린 결과다. 그리고 이는 독점 자본의 자본축적 전략이 근간이 된 국가의 존재와 역할 때문이다.
4·11 총선이 끝나면서 대선 정국이 시작되었다. 누가 가장 막강한 대선 후보인가 못지않게 우리가 일궈나가야 할 국가의 정체성과 그 본질은 무엇이 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논의가 빠지는 순간, 우리는 보다 심각한 곤경에 빠질 수 있다.
거대 독점 자본의 자본 축적 전략에 봉사하는 국가가 아니라, 서민들의 삶을 중심에 놓고 이들이 희생되지 않도록 보호하면서 자본에 대한 사회적 통제를 구축할 수 있는 국가. 이걸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우리 앞에 놓인 정치적 과제이자 실천 목표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안드레 군더 프랑크가 30년 전에 남긴 교훈이 우리에게 성찰의 능력이 되었으면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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