뿐만 아니라, 엥겔스의 역사에 대한 지식의 폭과 깊이가 얼마나 막대한지를 새삼 절감하게 된다. 하나의 이론을 세워 나가는 과정에서 역사적 구체성을 기반으로 하는 작업이 얼마나 중차대한지를 확인할 수 있는 이 책에서, 우리는 고대 모계 사회의 공동체적 평등, 협력, 우애 등의 원리가 어떻게 파괴되어왔는지를 확인하게 된다.
특히 엥겔스는 게르만의 역사적 의의를 이렇게 정리한다.
"실제로 게르만은 유럽을 소생시켰다. 게르만 시기에 일어난 국가의 해체는 노르만 인과 사라센 인에게 정복당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은대지 제도와 보호 위탁 제도가 봉건 제도로 발전, 성장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유럽을 재생시킨 것은 그들의 특정한 민족적 특성이 아니라, 그들의 미개성, 즉 그들의 씨족 제도였다."
부르주아 가족 제도 비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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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대웅 옮김, 두레 펴냄). ⓒ두레 |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형성된 가족은 여성에 대한 남성의 일방적 지배를 비롯해서, 사유 재산에 기초한 계급성이 가장 강하게 반영되어 있는 현실을 보여준다. 가족 안에서 여성의 지위가 최근에 들어 상대적으로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지난 시기의 과정에서 여성들은 남성들의 재산처럼 다루어졌고 결혼은 계급적 선택의 의미를 가지고 있음을 숨기기 어렵다.
한국 사회에서도 결혼 정보 센터가 무수히 널려 있고, 이들의 역할이 사랑하는 남녀를 맺어주는 것보다는 신청자의 계급적 위치를 확인하고 그것에 바탕을 둔 계급 시스템을 견고하게 만들어 주는데 있다는 점에서도 엥겔스의 저작은 현대 한국 사회 비판의 의미를 지니게 된다. 이에 더하여, 이러한 계급적 관계를 지탱하고 방어하면서 기득권을 만들어내는 국가의 본질에 대해서도 꿰뚫어보게 하는 힘을 제공한다.
미개성의 힘, 문명의 폭력
엥겔스는 야만(미개) 상태에 대해서 스스로를 문명권으로 인식하고 있는 서구의 비하와 멸시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한 계급에 의한 다른 계급의 착취가 문명의 기초인 만큼, 문명의 발전은 끊임없는 모순 가운데서 진행된다. 생산에서의 온갖 진보는 동시에 피억압 계급, 즉 사람들 대부분의 생활 처지가 낙후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한쪽을 위한 온갖 선은 필연적으로 다른 쪽에게는 악이며, 한 계급을 위한 온갖 해방이 다른 계급에게는 새로운 억압이다. (…) 문명은 한 계급에게 거의 권리만을 주고, 다른 계급에게는 거의 의무만을 부담시킴으로써 아무리 미련한 자라도 권리와 의무 간의 차이와 대립을 알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엥겔스는 인류의 문명이 진화하는 과정에서 소멸시켜버린 씨족 공동체가 지켜내고 있었던 원리에 대한 복구를 강조한다. 이러한 관점은 미국의 인류학자 루이스 헨리 모건이 1877년에 출간한 <고대 사회>라는 저작을 기초로 전개한 논리다. 엥겔스는 모건이 마르크스와 동일한 결론을 내렸다고 보고, 그 한계는 사적 유물론의 역사 해석으로 보완해 나간 것이다.
모건은 다윈과의 만남과 대화를 통해 진화에 대한 생각을 확고히 다지게 되는데, 그는 미국의 이로쿼이 원주민 부족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면서, 이들 씨족 공동체 안에 모계 사회가 존재하고 공동체 내부의 협력, 우애, 평등을 비롯해서 여성의 역할과 위치가 현대 부르주아 사회와는 차이를 보였음을 주목한다. 가령, 서구의 선교사들이 이들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선교하는 과정에서, 원주민 여성들이 개별 가족을 넘어서는 범위의 성적 접촉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하자 이들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당신들이 정말 이상하오. 어찌해서 자기 아이들만 사랑해야 한단 말이요? 우리 씨족 안의 아이들은 우리 모두의 아이들이고 따라서 우리가 이들 모두를 사랑하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겠소?"
이러한 현실에서 이들의 씨족 공동체 내부의 정치 사회적 참여나 발언은 모두에게 당연한 권리이자 의무가 된다. 공적 삶과 개인적 삶이 구별될 수 없고, 그 안에 계급적 대립과 구별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원주민들의 생각도 흥미롭다.
"아니, 잠자고 먹고 쉬는 것을 새삼 무슨 권리와 의무로 말하지 않는 것처럼, 씨족 안의 일들에 대해 함께 말하고 결정하고 서로 돕는 것을 무슨 권리나 의무로 따로 생각해야 하는가? 너무도 당연하지 않소?"
계급과 국가 그리고 가족 해체
그러나 계급과 국가가 사유 재산의 시스템을 적극 옹호하면서 이러한 씨족 사회의 해체는 필연적이 되었으며 공동 소유와 공적 삶 대신, 개인의 사적 소유와 이해관계를 앞세우는 사회가 만들어졌고 이를 방어하는 권력체로서의 국가가 만들어졌다고 엥겔스는 본다. 이러한 역사 이해는 오늘날 새로운 것은 아니지만, 자본주의 국가의 기본 성격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 중요한 인식의 토대를 마련해준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계급 간의 대립을 억제하기 위해서 생겨났기 때문에, 또한 동시에 그것은 이 계급들이 충돌하면서 발생했기 때문에 대개 가장 강력한 계급, 경제적으로 지배하는 계급의 국가이다. 이 계급은 국가의 힘을 빌려 정치적으로도 지배하는 계급이 된다. 그리하여 피억압 계급을 압박하고 착취하기 위한 새로운 수단을 획득한다.
따라서 고대 국가는 무엇보다도 노예 소유자들이 노예를 압박하기 위한 노예 소유자들의 국가였으며, 봉건 국가는 농노와 예농을 압박하기 위한 귀족들의 기관이었다. 그리고 현대의 대의제 국가는 자본이 임금 노동을 착취하기 위한 도구이다. 그러나 예외적인 현상이지만, 투쟁하는 계급 간의 세력이 균형을 이루어 국가 권력이 외견상 두 계급의 조정자로서 어느 정도 독립성을 일시적으로 획득하게 되는 시기가 있다. 귀족 세력과 부르주아지 세력이 서로 비슷했던 17세기와 18세기의 절대 군주제의 경우가 그러하다.
역사에서 알려진 대부부의 국가들에서는 시민들에게 부여하는 권리는 그들의 재산 상태와 비례한다. 이것은 국가가 유산 계급을 옹호하기 위한 조직이라는 것을 단적으로 말해준다."
여성에 대한 남성의 억압과 비판
엥겔스는 이러한 계급과 국가의 등장 그리고 형성이 씨족 공동체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가능해졌다면서 일부일처제의 경우에도 여성을 남성에게 종속시키기 위한 제도적 장치이면서 남성들은 매춘과 간통으로 일처 일부제의 한계를 넘어서는 자유를 누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러한 엥겔스의 일부 일처제에 대한 주장은 여러 가지 논란이 있을 수 있겠지만, 그 출발점이, 여성들에 대한 남성들의 지배와 폭력을 비판하는 의도가 있음을 안다면 달리 해석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러한 엥겔스의 주장은 당대로서는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엥겔스의 <가족, 사유 재산, 국가의 기원>은 사실 마르크스의 유고에서 발견한 모건의 <고대 사회>에 대한 언급이 기초가 되었다. 이를 토대로 엥겔스는 자본주의 사회가 가족 제도를 어떻게 변형시켜왔고, 그 안에 사유 재산과 계급의 연관성을 어떤 방식으로 구조화시켰는지, 그에 더하여 이를 토대로 한 국가의 본질은 어떻게 정리되어야 할 것인지를 분석한 것이었다.
결국, 이러한 가족, 계급, 국가는 착취 관계를 본질로 하고 있다고 본 엥겔스는 그런 조건이 존재하지 않았던 고대 모계 사회의 씨족 공동체가 지닌 힘을 현대에 복원시켜나가는 노력이 필요함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 우리도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지난 시기의 대가족 제도가 지녔던 공동체적 성격을 얼마나 많이 파손하고, 가족 관계의 끈끈한 사랑과 정을 해체시키고 말았는지 체험하고 있다. 이미 어떻게 손 써볼 겨를도 없이, 부모와 자식, 형제 관계는 이전의 결속력이나 우애, 또는 공동의 삶이라는 힘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가족주의라는 이데올로기가 이기적 인간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다면, 서로 사랑하고 협력하면서 함께 먹고 나누며 살아갈 수 있는 원리를 기본적으로 지닌 가족 관계의 해체는 우리 모두에게 불행이다. 그리고 그것은 결혼도 계급적 선택으로 하고, 가족도 그런 토대 위에서 구성하고, 국가의 기능도 이러한 계급적 이해관계를 지배적으로 관철하는 도구가 되는 현실에서 인간은 행복해지기 어렵다. 문명이 발전하면 할수록, 사회 경제적 부가 쌓이면 쌓일수록, 그 개인과 가족이 비참해지는 경우가 더 많아지고 있다는 사실은 이를 증명해주고 있다.
우리가 갈망하는 사회란?
엥겔스는 모건의 다음의 말을 인용하면서 그의 저작을 마무리 짓고 있다.
"문명의 개시 이래 재부는 크게 증가했으며, 그 형태는 매우 다양해졌고, 그 이용은 심히 광범해졌으며, 그 관리는 소유자를 위해 매우 교묘해졌다. 그리하여 이 재부는 인민과 대립되고 극복할 수 없는 힘이 되고 말았다. 인간의 정신은 자기 자신의 창조물 앞에서 어리둥절 한다. 그러나 만일 과거와 마찬가지로 앞으로도 진보가 항상 법칙이라면, 단순히 재부만 추구하는 것이 인간의 궁극적인 사명은 아니다. 재부를 둘도 없는 궁극적인 목표로 삼는 그런 역사 과정의 결말로서 사회의 멸망이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왜냐하면 그런 역사 과정은 자멸할 요소들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통치에서의 민주주의, 사회 내에서의 우애, 권리와 특권의 평등, 교육의 보편화 등은 경험, 이성 및 과학이 항상 지향하는 더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를 창조할 것이다. 그것은 고대 씨족이 지닌 자유, 평등, 우애의 더 고양된 형태의 부활이 될 것이다."
우리는 지금, 어떤 사회의 등장을 갈망하고 있는 것일까? 자멸하는 사회? 아니면, 더 높은 다음 단계의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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