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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배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사람은?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인디고 연구소의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

저항과 대안의 철학적 근거지

살아 있는 외국 철학자의 책 거의 대부분이 번역된 경우는 아마도 슬라보예 지젝이 유일한 경우일 것이다. 게다가 그의 엄청난 다작(多作)은 그의 저작을 읽는 일 자체를 숨 가쁘게 만들기도 한다.

그런 지젝 읽기에서 배제되는 것은 한국 사회의 지적 풍토상 낙오하는 느낌마저 줄 정도가 되었으니, 지젝은 어느새 우리 안의 문화 권력이 되다시피 한 셈이다. 그러나 그 문화 권력은 기득권을 방어하기보다는, 기존 질서의 해체라는 목표를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저항과 대안의 철학적 근거지가 될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지젝을 구성하는 네 가지 기둥, 그러니까 라캉의 정신 분석학, 헤겔 철학, 마르크스의 이데올로기 비판, 기독교 신학이라는 서구 철학사의 거대한 흐름을 하나로 합류시킨 그의 철학이 관통하려는 의지가 무엇인가에 대한 논의는 아직 명쾌하게 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그의 철학이 내면에 장착하고 있는 '역설의 변증법'에 대한 논의가 우리 사회에서는 아직도 과도하게 추상화되는 경향 때문이기도 하다.

이것은 쉽지 않은 지젝 이해를 넘어서서, 자본의 지배 전략을 뒤집는 일에 있어서 불행을 자초하는 사태이기도 하다. 일상의 경험과 일상의 언어 속에서 혁명의 철학을 발굴하려는 지젝의 철학적 의지와 노력이 우리 사회의 지적 풍토 속에서 번역되는 순간, 일상성을 잃어버리고 복잡한 언어로 뒤엉키고 마는 것은 푸코, 들뢰즈, 가타리 등을 받아들이는 이후 피할 수 없이 반복적으로 치루고 있는 철학적 함정이다.

일상의 관찰과 언어로 철학하기

▲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인디고연구소 기획, 궁리 펴냄). ⓒ궁리
이런 습관과 자세는 일상의 해방을 지향해야 할 철학의 거대한 장애물이다. 그런 점에서 청소년을 위한 인문학 연구를 수행해온 인디고 연구소가 직접 지젝과 만나 인터뷰한 내용을 중심으로 엮은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궁리 펴냄)은 일상의 관찰과 언어로 혁명의 철학을 논의하는 현장을 생생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기획 작품이다.

지젝을 읽는 일과 놈 촘스키나 하워드 진을 읽는 일이 서로 다르지 않는 본질을 담고 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다면 철학은 억압의 현실을 해체하고 해방의 진지를 만들어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철학은 자칫, 추상의 수준을 한껏 높여 일상의 현실을 살아가는 이들을 최대한 배제시키면서 말은 배제된 자들의 삶을 끌어안는다는 농간을 부릴 위험에 처한다.

<불가능한 것의 가능성>은 그런 차원에서 지젝과 우리의 일상이 만나는 길을 열어나가는 작업을 열심히 진행시켜나갔다. 물론 그러는 중에도 부딪히게 되는. 복잡하게 배치되는 언어의 사슬들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이만하면 세계적 현실의 모순이 집약되고 있는 지점들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공통의 전략을 짜내는 일에 기여할 수 있는 담론의 전개 방식이 된다.

슬로베니아의 작은 아파트

자본의 지배 전략을 교묘하게 지원하는 자유주의적 논법에 대한 지젝의 끈질긴 공격과, 이미 역사적으로 소멸되었다고 여길 만한 공산주의 이념의 핵심을 복구하려는 지젝의 시도는 정평이 나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그의 논리를 어렵지 않게 다가설 수 있게 하는 의의를 지닌다. 슬로베니아의 작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지젝을 만난 것도 흥미롭고, 그가 한 대학의 연구원으로서 아들과 함께 살면서 일상을 자유로이 살아가는 존재라는 점도 주의를 끌고, 어릴 때 영화감독이 되려다가 자질이 없다는 것을 깨닫고 철학으로 방향을 틀었다는 개인사적 고백도 생생한 장면들이 된다.

결국 철학은 이렇게 살아 있는 일상의 현장에서 건져 올리는 사유라는 점에서 현실의 구체적인 면모와 철학의 대화를 이뤄내는 시도는 중요하다. 이 책을 읽으면서 지젝에게서 그간 미처 발견하지 못했던 한반도를 비롯한 아시아에 대한 인식은 재검토해볼 여지가 있고, 지젝의 세계관에서 문제 제기를 해야 할 바가 적지 않게 있다는 인상을 받긴 했으나 그건 그것대로 앞으로 지젝이 어떻게 정리해나갈 것인지 주목되는 바다.

이 책은 '공공선'에 대한 인디고의 기획이라는 큰 틀에서 나온 결실이다. 그래서 질문의 시작은 공공선과 관련된 것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결국 그는 공적 영역이 자본의 사적 영역으로 전락하고 그로 말미암아 배제되고 있는 이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운 대안을 향해 가는 도덕적 다수가 되는 그림을 그려낸다. 이것은 레닌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 것처럼, "우리는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합니다"라는 명제와 관련이 있는 논법이다.

처음부터 다시 문제를 검토하고 어떤 과정에서 해방의 기지가 억압의 장치로 변질되었으며, 이념으로는 포함시킨다고 하는 이들을 현실에서는 배제해버리고 말았는지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게 해야 권력이 은폐하고 있는 것들을 드러내 "함께 가자"는 좌파 기획의 구호가 현실에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를 "슬럼의 정치화"라는 말에서 극적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버려지고 지워진 이들의 집결된 힘이 아니고서는 본질을 혁명적으로 바꿀 수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무엇이 현실적인가?

이런 작업은 대단히 비현실적으로 보일 수 있는데 지젝은 도리어 이런 자세가 바로 현실적이라고 강조한다. 그것은 일종의 역설인데,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것이 바로 현실주의라는 명제로 지젝은 기존의 사유에 반전을 꾀하고 있다. 말하자면, 금지된 것을 사유하는 혁명의 본질에 충실하는 것이 불가능을 현실로 바꾸어낼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우리의 지평이 공산주의로 남아 있어야 한다. 이것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으로서의 지평이 아니라, 우리가 그 속에서 유동할 수 있는 정신적 공간으로서의 지평을 말한다. 이는 불가능한 일인가? 이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내가 출발한 지점에 대한 전환을 감행하는 패러독스여야 한다. '현실주의자가 되자.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자.' 오늘날 진정한 유토피아는 현존하는 체계의 신중한 전환을 통해 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결국 현실주의자의 유일한 선택지는 이 체계 내에서 불가능하게 보이는 것을 실천하는 것 뿐이다."

이 말은 옳다. 현실에서 가능한 것을 선택하는 것은 현실의 가능한 범위를 지속적으로 좁히는 일이 될 뿐이다. 왜냐하면 현실에서 가능한 것들은 많은 조건들이 장애로 나서는 것을 내다봐야 하기 때문이다. 그걸 압도하기 위해서는 보다 큰 그림을 힘 있게 내밀지 않으면, 현실의 제약 조건들이 보다 강하게 자신을 내세우기 마련이다.

우리가 싸우는 대상은?

그래서 지젝이 사도 바울의 말을 동원하는 대목은 치열하고 의미심장하다.

"해방적 투쟁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적절한 사도 바울의 정의를 기억하라. '우리의 투쟁은 피와 살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통치자들, 권력자들, 이 어둠을 주관하는 군주, 그리고 천국에 있는 영적인 사악함에 맞서는 것이다.'(에베소서 6장 12절) 이를 오늘날의 언어로 풀이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 '우리의 투쟁은 개개의 부패한 개인들에 맞서는 것이 아니라, 일반적인 권력자들, 그리고 그들의 권위, 전 지구적 질서와 이를 지탱하는 이데올로기적 신비화에 맞서는 것이다.'

(…) 우리가 단호하게 거부해야 하는 것은 정치를 모든 긍정적인 기획을 포기하면서, 단지 최악의 선택을 피하고 차악을 선택하는 것으로 전락시키는 피해 의식에 가득 찬 자유주의적 이데올로기이다. 만약 우리가 이를 거부하지 못한다면, 빈 출신의 유대인 작가 아서 펠트만이 통렬하게 지적했듯이, 우리가 생존을 위해 지불해야 하는 대가는 우리의 삶이 될 것이다."


겁먹지 말고, 피해 의식에 찌들어 본래 요구하고 싶은 것을 슬그머니 뒤로 감추고 현실이 받아들일 만한 것만 만지작거리면서 내놓는 자유주의적 기회주의는 이제 접으라는 것이다. 그렇게 하다가 실패하면 어떻게 되는가? 그래서 더더욱 그런 식의 자세는 비현실적인 몽상이라고 지탄받으면 어쩌는가?

로자 룩셈부르크, 미성숙한 시도의 궁극적 승리

국내에서 아직 번역되지 않은 지젝의 <실재를 탐문한다(Interrogating the real)>에 다음과 같은 로자 룩셈부르크의 혁명 철학이 실려 있다.

"에두아르트 베른슈타인이 '객관적 여건'이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너무 일찍' 권력을 미성숙하게 쟁취하는 문제에 대해 두려움을 느끼고 수정주의적 논법을 전개하자, 이에 대해 로자 룩셈부르크는 첫 번째 권력 쟁취는 당연히 미숙할 수밖에 없다고 반격한다. 프로레타리아가 '성숙한 지점'에 도달하는 유일한 길은 이러한 '미성숙한 시도'를 거듭하는 것 외에 없다. 우리가 가장 적당한 때를 기다리고 있다면, 그 '적당한 때'는 결코 잡아내지 못할 것이다. 적당한 때란 혁명의 주체가 자신의 주관적 성숙을 위해 일련의 미성숙한 시도를 감행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질 뿐이다. 따라서 미숙한 조건을 이유로 내세워 권력의 쟁취를 반대하는 것은 결국 권력을 잡지 말자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수정주의자들은 혁명 없이 혁명하자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이 왜 혁명이 반드시 반복되어야 하는가의 이유다. 미성숙한 시도의 의미는 그 실패에서 발견된다. 헤겔의 어법을 빌리자면, 정치 혁명은 반복되는 과정에서 인민들에게 결국 승인되는 것이다. 역사의 반복이라는 헤겔의 논리는 간략하게 말하자면 '반복을 통해 애초에는 우연이라고 보였던 일들이 마침내 진정한 실체를 갖는 현실이 된다.' 로자 룩셈부르크에 있어서 미성숙한 시도의 실패는 종국적인 승리의 조건을 창출한다. 진정한 의미는 언제나 마지막에 가서야 드러나기 마련 아닌가? 실패하면서, 그 실패는 보다 깊은 의미를 총체적으로 획득하게 된다."

실패를 두려워하거나, 조건이 성숙되지 못한 것으로 본질에서 후퇴하는 자는 결국 아무 것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두 번의 민주 정권 그리고 실패. 이제 다시 우리는 조건의 성숙과 미숙을 따져 묻는 차원을 넘어 역사의 진전을 위한 연습을 반복할 것이다. 상황이 이러니 어쩔 수 없다하면서 차악을 선택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능한 것을 요구하는 현실주의"를 정치의 진정한 의미로 파악하는 지젝의 발상은 2012년을 혁명의 해로 자리매김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일상을 점령했던 월가가 99퍼센트의 민중에게 점령의 목표로 역전된 상황에서, 지금-여기에서 우리가 내세워야 할 현실주의적 목표를 재설정하는 노력은 절실해진다.

우리는 혁명의 열정을 과거의 흘러간 감상으로 모독하는 시대를 먼저 깨뜨리지 않고서는 새로운 역사를 쓸 수 없다. 그런 위축된 감정과 사유의 공간에 자본은 보이지 않는 지배자가 된다.

지배자가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라비아의 로렌스가 말했듯이, "한낮에도 꿈을 꾸는 자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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