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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배반한 과학자, '양심'을 선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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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을 배반한 과학자, '양심'을 선택하다!

[후쿠시마 그리고 1년] 다카기 진자부로의 <시민 과학자로 살다>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가 일어난 지 딱 1년이 됩니다. 21세기 인류 문명의 전환점으로 기록될지 모르는 후쿠시마 사고, 그 1년을 맞아서 '프레시안 books'는 특집호 '후쿠시마 그리고 1년'을 준비했습니다. 이번 호에서는 후쿠시마 사고를 깊고 넓게 볼 수 있는 다양한 시각을 책과 함께 선보입니다. <편집자>

노르망디 상륙 작전을 성공시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연합군 승리의 전기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는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연합군 최고 사령관은 일본에 핵폭탄 투여를 극구 반대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기진맥진해 항복할 수밖에 없으므로 그런 끔찍한 공격까지 필요한 건 아니라는 게 그 이유였는데, 초대 나토 사령관을 거쳐 36대 미국 대통령을 지낸 그는 취임 초기 유엔 연설에서 "원자력의 평화적 이용"을 제창했다. "무기를 보습으로!" 바꾸자고 외친 그는 제2차 세계 대전에서 한국 전쟁까지, 두 차례 전쟁을 승리로 이끈 사령관이자 전후 평화를 꿈꾼 대통령으로 후세는 기억한다.

핵무기를 만들려면 순도가 높은 우라늄 또는 플루토늄을 추출 정제해야 하는데, 복잡하고 위험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막대한 돈이 들어가야 한다. 방법을 알더라도 오직 미국만이 핵무기 손에 쥘 수 있었던 이유가 거기에 있었다. 하지만 핵발전소가 가동된다면 사정은 달라진다. 플루토늄 추출은 한결 간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용한 뒤 나오는 엄청난 양의 사용 후 핵연료를 슬그머니 가공하면 된다. 흔히 대량 살상용인 핵무기는 핵발전과 다르다고 말하는데, 그런가. '원자력'으로 언어를 순화했지만 핵발전소에서 플루토늄을 공급하지 않으면 핵무기는 요즘과 같이 축적될 수 없는데….

그렇다면 핵발전소는 핵의 평화적 이용에 얼마나 이바지했을까. 전 세계의 핵발전소에서 공급되는 플루토늄을 원료로 현재 개량된 핵무기는 일본 히로시마나 나가사키에서 수십만 명을 살상한 폭탄의 위력을 훨씬 초월한다. 질은 물론, 양적 확산도 무시무시하다. 미국과 러시아를 비롯해 세계에 몇 기의 핵무기가 도사리고 있는지 종잡기 어렵게 많은데, 분명한 것은 그중 일부만 터져도 인류는 물론 46억년 지속된 지구 생태계는 그 순간 종말을 맞는다는 사실이다.

핵무기에 피폭된 오직 한 나라, 일본. 그 일본에 핵발전소가 들어서면 아이젠하워가 제창한 '평화' 그림은 제법 근사해질 터. 그래서 그랬을까. 일본에 핵발전소가 들어오기 전, 일본의 주류 당시 정·관계와 자본과 언론을 총동원한 미국은 일본 전역을 돌아다니며 휘황찬란한 전시회를 열었다고 한다. 핵발전소가 가동되면 일본은 전쟁에 승리한 미국처럼 금세 잘 사는 나라가 될 거라는 환상을 등 떠밀려 들어오는 시민들에게 심어주기에 충분할 정도로 세뇌 공작에 나섰다는 것이다. 그때 일본이나 한국이나, 가장 영특한 청년은 핵을 공부했다. 장학금이 윤택하게 제공되는 것은 물론이고 미국 유학을 거쳐 귀국하면 장래가 명실상부하게 촉망되었기 때문이었다.

어릴 때부터 연합군의 공습을 바라보아야 했던 다카기 진자부로는 그런 분위기에서 성장해 핵화학을 전공했다. 자신은 평범했다고 수미일관 주장하지만, 고교 졸업 직후 도쿄 대학 이학부에 입학한 그를 운이 좋았다고 아무도 이야기할 수 없을 것인데, 과학과 문학의 구별에 의미를 두지 않았던 그가 이학부를 선택한 데에는 자신도 추측하듯, "일본은 과학 측면에서도 미영(美英)에게 패했다"고 한탄한 당시 분위기에 이끌렸을지 모른다. 이른바 선진국으로 발전해야 한다는 일념의 국가 주도 과학기술에 청소년이 경도되는 현상은 예나 지금이나, 우리나 일본이나, 다르지 않을 것이다.

'과학입국'이라는 분위기에서 핵화학을 공부한 젊은 과학도 다카기 진자부로는 어찌 보면 당연하게, 원자로를 연구하는 기업으로 취직을 했다. 1960년대 일본을 휩쓴 과격한 학생 운동의 시대에 파당과 조직화를 혐오했던 그는 격랑에 휘둘리지 않고 장래가 촉망되는 기업에 안착한 것인데, 그에게는 다른 과학도가 가지지 않은 약점,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거대 과학'에 결코 길들어질 수 없는 '양심'을 가지고 있었다. 대부분의 젊은 과학도처럼, 보아도 못 본 척, 들어도 못 들은 척하지 않고, 무모하게 원자로가 가진 치명적인 결함을 계속 들춰내려 든 게 아닌가.

핵연료가 분열할 때 온도는 섭씨 2000도는 훌쩍 뛰어 넘는다. 만일 그 상태에서 세슘 뿐 아니라 지르코늄이나 플루토늄 같이 무거운 방사성 물질까지 휘발된다면, 그것도 배웠던 지식보다 많을 뿐 아니라 휘발되는 양상이 복잡하다면, 연구자는 원자로의 안전을 어떻게 확보해야 할까.

원자로의 안전은 시민의 안전과 직결된다. 다급한 다카기 진자부로는 현재 사용하는 원자로의 한계를 더 연구해야 했다. 분열 중인 연료봉이 담겼던 물에 방사성 물질은 얼마나 있을지 연구하려고 양동이를 들고 뛰어다닌 그는 시끄럽게 경보를 울리는 가이거 계수기의 스위치를 끄는 무모함을 발휘하면서 원자로의 안전성을 연구하려 동분서주했건만, 회사는 냉담했다. 연구자 상층부는 방사능을 안전하게 다루는 기술을 확보하고 있다는 걸 세상에 보여주길 바랄 따름이었다.

'윗사람'의 의견에 거역하기 어려운 분위기, 돌출 발언을 할 수 없는 "옆으로 나란히" 분위기에 견딜 수 없던 다카기 진자부로는 '아웃사이더' 다시 말해 반대론자가 되기로 마음먹었다. 탄탄대로를 걷어찬 그는 낮은 선량의 방사능으로 우주와 지구의 역사를 연구하는 대학의 순수 원자핵연구소로 자리를 옮겼고, 거기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연구는 재미와 보람도 있었지만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수백 번 이어진 핵폭탄 실험으로 지구촌 천지 사방에서 도대체 인공 방사능에서 자유로운 공간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학위를 마친 그는 열정을 가진 젊은 학자가 그렇듯, 대학으로 가서 제자를 키우고 싶었다.

산이든 바다 바닥이든 빙하든, 표층의 얇은 부분을 채취한 시료에서 예외 없이 방사성 물질 '세슘 137'과 같은 핵실험의 '죽음의 재'가 검출되었다. 큰 충격을 받았지만 연구를 위해 어쩔 수 없는 일. 하지만 방사능을 측정하는 모습을 보고 걱정스레 묻는 주민에게 상투적으로 "허용량 이내"라며 안심시키는 자신에게 어처구니없었다.

그런 성향의 다카기 진자부로는 개발 일변도 과학기술이 필연적으로 몰고 온 일본의 대표적 오염 사고, 미나마타병과 이타이이타이병, 요카이치 천식을 목도해야했는데, 원인 조사에 나선 과학자들이 기업을 옹호하려 풍토병이라거나 바이러스가 원인이라는 가설을 세우는 걸 보고,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세계적인 68 운동의 격동기에 "대학이란 무엇인가" "과학이란 무엇인가" 고심하던 다카기 진자부로는 대학에서 자신의 한계에 다시 부딪혔을 뿐 아니라 지식인 동료의 사고방식에 질식하고 말았다. 당시 일본 '전공투' 계열 학생의 시위는 강력했는데, 교수들은 학생을 경계하는데 그칠 뿐, 도무지 그들의 주장을 헤아리려 들지 않았다. 침묵하면 승인으로 치부하는 '일본형 공동체'에 진저리치던 그는 '산리즈카 투쟁'의 현장에서 결심을 실행하는 계기를 맞았다. 경찰력을 동원해 누대 농사짓던 토지를 나리타 공항 부지로 강제 수용하려고 땅을 뒤집어엎는 야만의 현장에서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자신을 깨운 건, 한 소설가의 강연 제목이었다.

"우리는 어떠한 방법으로 우리에게 필요한 과학을 우리의 과학으로 만들 수 있는가?"

▲ <시민 과학자로 살다><(다카기 진자부로 지음, 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 ⓒ녹색평론사
농민에게 필요한 과학을 이야기한 소설가의 연설은 그렇지 않아도 반골 기질을 참으며 현실을 역겨워했던 다카기 진자부로를 드디어 자유로운 '시민 과학자'의 현장으로 이끌어주었다. 국가 권력의 거대 시스템 속에서 "농민들은 땅값이나 올려 받으려고 그러는 거야!"로 외면하던 동료 지식인들을 돌려세우게 하고, "농민들이 대지 위에서 농사를 짓는 것이 푸른 들을 파괴하고 공항을 만드는 것보다 훨씬 중요하다는 것을 이성적으로 사회"에 알리고자 마음먹었다. 방사능을 두려워하는 어민들과 불도저 앞에서 눈물 흘리는 농민의 처지에서 출발하고자 마음을 굳혔다.

다카기 진자부로는 '원자력자료정보실'에서 시민 과학자의 길을 본격적으로 내딛었다. 대학을 그만두기 직전 잠시 찾아간 독일에서 눈여겨 본 핵발전소 반대 운동이 녹색당 운동으로 발전하는 걸 부러워하면서 그는 시민의 관점에서 과학을 보려고 노력했다. 과거 엉거주춤했던 산리즈카 투쟁의 현장으로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15년 동안 생태주의 시각으로 플루토늄의 독성을 새롭게 주목하였으며 그 사실을 시민 사회에 전했다. 일본 곳곳에 핵발전소가 세워지고 급기야 핵 연료봉 하나가 부러지는 사고가 발생하는 와중에서 자식 키우는 이의 행동이 필요한 시점의 연속이 아닌가. 그는 과학자에서 시민운동가의 면모로 서서히 바뀌어갔다.

"과학자에게는 과학자의 역할이 있고 운동에는 운동이 해야 하는 역할이 있다"면서, "시계를 쇠망치 대신 쓰다가는 시계만 망가뜨리게 되고 결국 시계도 쇠망치도 안 된다"던 선배의 충고는 현실 앞에서 다카기 진자부로를 설득하지 못했다. 일본 정부는 사용 후 핵연료를 '지옥의 신'이라 칭하는 플루토늄으로 정제하려 하지 않던가.

위험할 뿐 아니라 비용 부담도 큰 핵연료로 지옥의 신을 사용하려 드는데 그치는 게 아니었다. 세계 어느 국가도 선뜻 나서려하지 않는 고속 증식로 방식의 몬주 핵발전소를 건설하려 하고, 아오모리 현의 가난한 로카쇼무라에 핵 폐기장을 지으려 획책하고 있다. 어디 그뿐인가. 다카기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한국은 굴업도에 핵 폐기장을 만들려고 하니, 연대해야 했다.

현재 일본은 가동하지마자 고장이 나고, 수리해 재가동하지마자 고장 나는 몬주 고속 증식로 핵발전소를 비롯해 로카쇼무라 핵 폐기장을 운용하고 있으며 '핵연료 사이클' 계획을 결국 시행하고 말았다. 15년 동안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밤낮없이 무리했던 다카기 진자부로가 대장암 진단을 받고 사망한 이후에 본격화된 일이다.

지진대 위에 핵발전소를 지은 무모한 과학기술은 철저하게 핵 산업 동맹에 예속되었고, 결국 2011년 3월 11일 후쿠시마에서 핵발전소 4기가 연속 폭발하고 말았다. 시민 과학자로 살며 발언했던 다카기의 말과 글과 <원자력 신화로부터의 해방>(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과 같은 책을 일본의 핵 동맹이 조금이라도 주목했다면 그런 일은 사전에 막을 수 있었을지 모른다.

정치색으로 외면되기 일쑤인 노벨평화상을 대신하므로 '대안 노벨상'이라 일컫는 '바른 생활상(The Right Livelihood Awards)'을 1997년 받은 다카기 진자부로는 <시민 과학자로 살다>를 마지막 병상에서 썼다. 대장암이 오기 전에 자각할 수 있었던 몇 가지 증세를 애써 무시하며 일에 몰두한 결과로 생긴 질병을 담담하게 받아들인 그는 '바른 생활상'의 부상으로 받은 상금을 기반으로 시민 과학자를 양성하는 '다카기 학교'를 개설했고, 현재 운영되고 있다. 현장에서 시민 과학자로 행동할 때, 은근히 다가온 선배 과학자는 회유와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가난한 시민 과학자는 아이를 가진 가장일 때 흔들리기 쉽다. 그래서 그는 흔들리지 않도록 젊은 시민 과학자를 지원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얀 가운을 입은 과학자는 똑똑하고 양심적인가. 개개인을 보면 그럴지 모르지만 국가와 자본이 주도하는 거대 과학기술에 포섭된 주류의 과학자는 그렇지 못하다. 그들은 일반인의 생각에 대체로 무지할 뿐 아니라 관심도 없다. 지능이 뛰어나더라도 지혜가 없는 주류의 과학자는 대학에 소속돼 있어도 학생과 눈도 맞추지 않는다. 박사 과정 이상이 아니라면 마주해 대화할 시간조차 없다. 애국을 가장하는 기득권의 이익을 위해 막대한 연구비를 독점하는 주류 과학자들에 의해 핵산업도 생명공학도 연구되고, 그 결과물을 '발전'이라는 가면을 씌우고 세상에 내놓는다. 절대 안전하다는 신화를 되뇌면서.

기존 권력에 충성하는 과학기술에 시민 과학자는 저항하지만, 지독한 편견 속에서 어제나 소외된다. 정부나 기존 학계는 물론이고, 경찰이나 검찰, 재판관도 마찬가지다. 어쩌다 일부 시민들도 한패가 된다. 그래서 상처를 받지만 시민 과학자는 기득권에 의해 버러지 취급을 받는 농민과 어민 그리고 시민의 처지에서 출발해야 한다고 다카기 진자부로는 생각해왔고, 그렇게 행동하며 살다 20세기의 마지막인 2000년, 비교적 젊은 나이인 62세에 사망했다.

다카기 진자부로의 책은 독자층이 열악한 우리 출판 사정으로 일부만이 번역되었다. 그 중 <지금 자연을 어떻게 볼 것인가>(김원식 옮김, 녹색평론사 펴냄)는 그가 과학자인지 인문학자인지 헷갈리게 한다. 현장에서 민중과 호흡하며 행동한 생태주의 시민 과학자의 자연스런 행로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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