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보이지 않는 장님들이 코끼리를 만져보면서 각기 그 생김새에 대해 말하는 우화가 있다. 누구는 코끼리가 기둥이라고 하고 누구는 큰 배라고 하며 또 누구는 가는 뱀이라고 말한다. 우리가 잘 아는 이야기다. 전체를 보지 못한 채 부분으로 전체를 규정하는 인식 착오에 대한 비평이다. 부분을 보고 전체를 꿰뚫어본다면 사뭇 다른 논리가 서겠지만.
그런데 이 우화에 새로운 인물들이 등장한다.
"철학자라고 하는 사람을 코끼리 앞에 데려왔다고 하자. 그는 뜬 눈으로 코끼리를 보는 사람에다 비유할 수 있다. 그는 덩치 큰 짐승이라고 볼 것이다. 철학자는 '삶'을 전체적으로 관련시켜 본다. 그런데 또 한 사람이 와서 코끼리를 보았다고 하자. 그는 코끼리가 먼 나라에서 와서 먹이를 먹지 못하여 병들어 있고 눈물을 흘리고 있는 것을 보고 자기도 눈물을 흘렸다고 하자. 이 사람을 우리는 시인이라고 부른다. 그는 코끼리를 관찰하거나 생각한 것이 아니라 느낀 것이다. 그는 코끼리가 되었던 것이다. 이것이 이 세상에서 시인이라 불리는 사람들이 하는 일이다."
소설을 쓰는 최인훈이 시인의 내면을 우리에게 이런 방식으로 드러내준다. 그에게 소설가와 시인의 근본적 차이는 없다. 예술은 작가가 창조하는 예술적 진실 속에서 현실이 절감되도록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코끼리의 눈물이 어느새 우리의 눈물로 변모할 때 작가는 작가로서 목적을 이룬 셈이다.
환상의 힘
일상에서 경험하는 간단한 현상도 치밀한 논리적 전개로 파고들고, 그로부터 만만치 않은 관념적 추상의 수준을 이끌어 내는 최인훈의 본심은 이 시인의 눈물에 있다.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분단의 고통과 일제 식민지의 유령과 그토록 치열하게 싸워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 아픔을 놓지 않았기에 그는 자신의 처지를 말로 표현하고 있지 못한 존재의 삶 속 깊은 곳에 육박해 들어가, 그 사연을 소설과 희곡, 그리고 문학 평론과 문명 비평이라는 다채로운 형식을 통해 발언해왔던 것 아니겠는가?
<광장>의 작가로만 대체로 기억되는 최인훈은 그 이상이다. 이 말로도 부족할 지경이다. 그는 역사적 상상력이 뛰어난 작가다. 그 힘이 독자들을 완벽하게 사로잡는다. <회색인>과 <서유기>, <태풍>이나 <총독의 소리> 또는 <옛날 옛적 훠어이 훠어이> 등은 모두 고도의 역사적 상상력의 세계 안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들이다.
그런 까닭에 그는 "환상 없는 삶은 인간의 삶이라 불릴 수 없다. 환상 있는 곳에 길이 있다"라고 단언한다. 그에 더하여 그는 "마음이여, 정착하지 마라"라고 외친다. 이미 어느 한 곳에 정착해버린 마음은 상상하는 일에 게을러지기 마련이다. 그의 "지평선"에 대한 생각은 상상력의 모험이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설명하는 것으로 파악한다.
"지평선이라는 것은 귀중하다. 그것은 인간의 시야를 닫으면서 열어놓는 풍경이다. 거기까지가 보이는 데이자, 그 건너편의 초입이다. 동물은 지평선 앞에서 멈춰 선다. 인간은 그쪽으로 끌려간다."
최인훈은 우리를 바로 그 지평선 너머의 지점으로까지 이끌고 간다. 그게 그가 말하는 "내게 맡겨진 참호 속의 임무"일터다.
현대인이 잃어버린 것들
▲ <바다의 편지>(최인훈 지음, 삼인 펴냄). ⓒ삼인 |
어떤 글은 사실 단숨에 이해하기 매우 어렵고, 또 어떤 글은 경구처럼 우리의 정신을 치고 들어오는 힘이 있다. 그런데 이 글들 모두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우리가 애초에 가지고 있었으나 잃어버리고 만 것을 복구하고 그것으로 길을 내려는 것이다. 그 잃어버린 것은 무엇인가?
"우리가 잃어버린 것은, 서양에 대한 동양이라든가, 중국에 대한 우리 역사라든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을 다 알고 나서 우리가 역사의 어떤 시기에 얻었던 문명 감각이다."
달리 말하자면, 하늘의 별이 강처럼 빛나고 시간이 지나면서 흐르는 것을 처음 보았을 때의 놀라움. 그래서 생각해낸 말과 생각들의 의미가 가지는 깊이 등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문명 감각이 퇴화되어버린 책 지식이 상속되면 그것은 교조가 되고 만다. 그런 점에서 최인훈은 이런 교조의 폐습을 청산하기 위해 전투에 나선 지식인이다.
그가 쏟아내는 말들은 그래서 우리의 뇌리에 그대로 박히는 총탄이 된다. 물론 그것은 우리를 살해하는 것이 아니라, 태양은 이미 중천에 떠 있는데도 세상 모르고 잠든 우리를 번쩍 깨어나게 한다.
영혼에 박혀 오는 총탄
"광장을 가지지 못한 국민은 국민이 아니다. 밀실을 참지 못하는 개인은 개인이 아니다. 광장의 청소는 시정이 하는 것이 아니다. 기(旗)가, 함성이, 피가, 땀이 그것을 청정케 한다."
"용기 없는 이기주의자, 그것이 노예다. 자유를 위해 울지 않는 새, 적의 함성을 듣고 울지 않는 북을 가진 성은 불행하여라. 노예의 달력에는 늘 여름만 있고, 자유민의 달력에는 겨울도 있다. 겨울과 폭풍을 두려워하는 자, 그것이 노예다."
"국민이라는 말을 경로당의 피초대자쯤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권력에게서 효도를 받자는 사람들. 나쁜 사회란 파수대에서 노름판이 벌어지고 있는 사회다. 전의가 충분했는데도 함락된 성은 대개 파수병의 잘못이다."
"행동의 기억 없는 말은 무정란과 같다. 행동이라는 병아리는 그 속에서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마침내 최인훈은 이런 말을 한다.
"위대한 시인이란 회상의 능력이다. 그는 미래까지도 회상한다."
역사의 뿌리를 가진 상상
상상한다가 아니다. 회상은 역사의 뿌리를 가진 상상이다. 그래서 과거를 돌아보는 일은 언제나 미래를 회상하는 일에 앞서야 한다. 그렇다면 최인훈은 흔히 패배의 역사로 기억되고 있는 한말에 대해 어떻게 말하고 있을까?
"한말이란, 이 반도에 있는 모든 계층의 원주민들이 아직 역사적 전력을 다 소모하지 않은 시점이었다. 패배라는 것은 전력이 모두 소모되었다는 식의 산술이 아니다. 전력의 전략적, 전술적 투입이 졸렬했기 때문에 핵심적 전력 요점이 격파당해서 아직 접적하지도 못한 여타의 전력이 마비되고 해체되고 결국 적에게 무장 해제됨을 말한다. 민중은 적절한 전투 지시를 갈망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은 위기에 처한 모든 존재가 그런 것처럼 증폭된 폭발적인 에너지를 지니고 있다."
오늘날 우리의 정치 상황에도 그대로 대입되는 역사적 회상이다. 이걸 제대로 하면 미래도 회상할 수 있다는 말은 그래서 옳다.
그렇다면 이런 길을 어떻게 뚫어낼 수 있을 것인가? 최인훈은 그걸 "환상의 길"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것은 "길 떠나기"에서 시작된다. 익숙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모험, 비규칙적인 것, 위험, 혼돈 같은 국면"에 진입해 들어가는 것이다. 그의 말마따나 "고대의 영웅들은 '길 떠나기'로부터 그의 경력을 시작"했다. 이런 종류의 길은 다름 아닌 "미궁(迷宮)"이다. "인류 생활의 어떤 시기에 집단과 집단 사이에 통상적이 관계를 수립하기 위해 경험에 수반한 위험과 지혜를 상징적으로 반영한 표현이 바로 미궁 전설이다."
이걸 통과해야 우리는 미래를 향한 이정표를 체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은 단일한 경험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 최인훈은 유럽 문명의 역사가 그랬듯이 "잡종과 혼합"의 힘을 길러나가지 못하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러니 그 환상의 길을 여는 일에 필요한 환상의 능력에는 얼마나 많은 종류의 기억과 행동과 말과 좌표가 필요한 것이겠는가?
추잉 껌과 캐러멜이 되고 싶지 않다면
그에게 이 모든 경로의 최종 지점은 인간의 자유와 인간이 인간되기에 있다. <바다의 편지>는 바로 이런 의지를 가지고, 바다 속에 익사체처럼 누워 지난 과거의 모든 진화의 실체가 하나의 몸으로 빙의(憑依)된 작중 주인공이 인류를 향해 보내는 맹렬한 서간이다. 그는 예술이, 문학이 현실의 거짓을 타파하지 못하는 것은 그 자신이 진실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최후의 한 마디를 어느 시신이 쓰는 순간에도 지구는 가라앉지 않는다. 감투가 탐나는 시인들은 호기 있게 거짓말을 한다. 죽어라. 단 한 사람도 글 위에서 죽으려 하지 않으니 보리는 땅 속에서 썩지 못한다. 누구도 소금이 되기를 원치 않고 추잉 껌과 캐러멜이 되기를 원한다."
이게 우리의 "무서운 과거"라고 편지는 말한다. 그것이 미래에도 반복된다면 그것은 미래를 회상하는 시인에게 너무도 가혹한 형벌이 될 것이다. 이 편지에는 지난 인류의 역사가 흘린 눈물이 고여 있다. 아니 그것이 어느새 바다가 되어 있다.
상상의 능력을 갖지 못하는 시대는 현실의 논리에 복종할 뿐이다. 대안을 포기하는 노예는 그렇게 해서 끊임없이 대량 번식한다. 역사를 미래적으로 회상하지 못하는 문명은 자기 파괴를 반복할 것이다. 파수대에 노름꾼들을 세우는 어리석음도 되풀이 될 것이며, 영웅이 출현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권력은 미궁을 폐쇄하고 말 것이다. 그건 질식하는 시대의 몰골이다. 최인훈의 말대로 "민중을 깔보는 자들이 민중을 대변하는" 사태가 지속된다.
최인훈의 <바다의 편지>는 그래서 정신이 유배된 오늘에 우리가 받아보는, 얼핏 난해한 듯하지만 사실은 명료한 암호문이다. 그걸 해독(解讀)하는 즐거움과 함께, 길이 보일 것이다. 지평선 너머로 가는 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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