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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중국 친구를 "짱개"라고 놀렸더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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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나다에서 중국 친구를 "짱개"라고 놀렸더니…

[공작의 꼬리 경쟁] 캐나다의 학교 폭력과 한국의 학교 폭력

한국의 학교 폭력 문제가 심각한 상황에 처해있다. 어린 학생들에 어울리지 않게 폭력이 조직적이며 잔인하기까지 하다. 정부가 종합 대책을 발표하는 등 개선을 위해 뭔가 한다고는 하지만 별 효과는 없을 것으로 예상된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 모르지만 비슷한 대책들이 학교 폭력이 이슈가 될 때마다 나온다. 문제는 정부의 대책이나 법이 없어서 이러한 폭력이 난무하게 된 것이 아니라는 데 있다. 이슈가 될 때만 잠깐 뭔가 한다고 보여주기는 하지만, 항상 빠지는 것은 학교 폭력의 근본적 원인에 대한 지속적 연구와 논의가 없다는 것이다. 그 원인이 정확히 이해되고 그리고 그 이해에 기초한 해결책의 공감대가 사회에 형성될 때 비로소 집행 가능한 대책을 수립할 수 있다. 이제 보여주기 위한 급조된 대책보다는 시간이 걸리더라도 꾸준히 원인 파악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캐나다와 한국의 학교 폭력에 대하여 간단히 알아보겠다. 그리고 예방과 사후 처벌 등의 대처는 캐나다에 뒤지지 않는데 왜 학교 폭력은 그렇게 심각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을까를 생각해 보려고 한다. 한국의 대책은 학교 폭력에만 집중되어 있다. 그보다는 학생들의 삶을 보아야 한다. 여기서는 캐나다와 한국 학생들의 삶의 몇 가지 주목할 차이점을 살펴보고 학교 폭력 문제 해결에 대한 실마리를 찾아보려 한다.

캐나다와 한국의 학교 폭력의 차이점은?

캐나다의 학교 폭력은 한국에서 요즈음 발생하는 학교 폭력과는 그 양상이 다르다. 캐나다에서는 체계적이며 학생들 사이 광범위하게 퍼진 그런 놀라운 학교 폭력은 들어보지 못했다. 캐나다에서는 학교 폭력이라는 말보다는 괴롭힘(bullying)이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괴롭힘에는 신체에 가하는 물리적 폭력을 포함하기는 하지만, '왕따'시키는 것, 남을 흉보는 것, 험담, 욕 등과 같은 언어나 사회적 괴롭힘이 대부분이다.

캐나다에서는 인터넷을 통한 사이버 폭력 방지가 요즘의 이슈다. 사이버 괴롭힘(cyber bullying)은 사회적으로 '왕따'를 시킨다거나 수치심을 유발하거나 욕을 하는 것으로 폭력이라고 규정하기가 애매할 때가 많다. 그럼에도 캐나다에서는 사이버 폭력에 관심을 집중하는 이유는 구타나 위협해서 돈을 갈취하는 것과 같은 물리적이고 명백한 폭력 문제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특히 요즘 우리나라 학생들 사이에서 벌어지고 있는 잔인하며 조직적인 폭력들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캐나다에서는 '왕따'를 시킨다든지 험담을 한다든지 하는 언어나 사회적 폭력과 사이버 괴롭힘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더러 사회적 약자를 보호하는 차원에서 소수 인종에 대한 또는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 대우나 비하의 폭력 역시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예를 들자면 온타리오 주정부는 괴롭힘 문제 해결을 위해 새로운 법안을 통과시키려 하는 데, 여기에 논란이 되는 것은 법안 중 성적 소수자가 학교에서 차별받지 않도록 하는 부분을 포함했기 때문이다.

한 가지 예를 통해 캐나다에서 생각하는 수준의 괴롭힘이 어떠한 것인지를 보기로 하자. 내가 사는 동네의 조그만 학교에서 별 대수롭지 않은 사건이 발생했다. 학교 수업이 끝난 후, 아이들을 데리러 온 몇 몇 학부모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학생들이 학교 운동장과 놀이터에서 놀고 있었다. 한 아이가 노는 중에 중국계 급우에게 중국인을 비하하는 우리말의 '짱개' 정도에 해당하는 말로 그 학생을 불렀다. 그런데 어느 학부모가 그 소리를 듣고 학교에 알렸다.

그 이튿날 그 학생의 부모가 교장실에 호출되고, 그 학생은 며칠 동안 정학 처분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일이 있은 다음에 그 가해 학생은 그 학교를 그만두고 다른 학교로 전학을 갔다. 이 사건은 한국인이 보았을 때 비하하는 말 한 마디에 학부모를 호출하고 정학 처분을 내린 것은 이해하기 힘든 조치였을지도 모른다. 게다가 그 학부모가 그 학생을 다른 학교로 전학시킬 정도로 심각했나 하는 의문을 갖게 하는 사건이었다.

이 사건으로부터 대수롭지 않을 것으로 생각되는 괴롭힘이 캐나다에서는 심각하게 받아들여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종 비속어 한 마디에 학부모 호출하고, 학생에게 정학 처분을 내렸다고 상상해보라. 캐나다 학생들 사이의 전반적 괴롭힘의 정도가 낮기 때문에 이렇게 별 것 아닌 것 같은 사안에까지 민감한 반응을 하고 그러한 처벌을 하는 여유가(?) 가능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명백하고 잔인하기까지 한 학교 폭력들조차 통제하지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언어폭력이나 사이버 폭력, 또는 이민자 학생등 사회적 약자들이 당하는 괴롭힘은 아직 신경을 쓸 여유조차 없는 상황이다.

ⓒhealthylifecarenews.com

가정에서의 폭력

한국과 캐나다의 가정 교육과 학교 교육의 중요한 차이점은 권위에 바탕을 둔 것인지 아닌지에 있다. 권위에 바탕을 둔 교육은 강압적으로 학생을 통제하고 하기 싫은 것들을 명령하는 데 유용하다. 특히 입시 경쟁이라는 혹독한 제도에서 아이들을 압박하기 위해서는 권위에 의한 교육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실정이다. 캐나다에서는 가정과 학교에서 아이들을 권위나 명령으로 다루지 않는다. 만약 캐나다 학부모들 역시 강도 높은 입시 경쟁으로 자녀에게 경쟁을 강요해야 하는 상황이라면 그들 역시 강압적 통제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을 것이다.

캐나다의 가정에서는 부모들이 아이를 야단치는 경우는 거의 볼 수 없다. 야단치는 행위를 좋지 않게 여긴다. 그리고 아이를 구타하는 행위는 아동 학대라는 범죄 행위로 간주될 수 있으며, 자칫하면 경찰서에 잡혀가고, 부모가 아이의 양육권을 잃게 되는 경우도 생긴다.

그러나 입시라는 치열한 경쟁의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 자녀를 둔 우리의 학부모들은 강압적 방법에 의존해야 한다. 강도 높은 교육을 시키려면 자녀에게 자유 공간을 허용해서는 안 되고 모든 수단을 동원해서 확실히 통제해야 한다.

자녀에게 자유를 허용해서는 안 된다. 그들의 자유 시간, 자유로운 생각으로 영어 단어를 암기하고 수학 공식을 외우는 시간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아이들이 놀이의 자유와 생각의 자유를 빼앗기고 부모에게 휘둘리면 주관을 가진 한 인간으로 다른 사람들과 서로를 존중하는 동등한 관계 설정을 하지 못하게 된다. 연약한 시키는 대로 하는 아이로 크거나 그 반대로 강압적으로 명령하는 아이로 크는 주종관계 설립이 주를 이루게 될 것이다. 상대를 무시하고 억압하는 것도 문제이지만 자신의 주관이 뚜렷한 사람으로 성장하지 못하고 주위에 휘둘리는 연약한 사람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 역시 큰 문제다.

자유를 요구하는 아이는 폭력적 언사나 매를 사용해서라도 확실히 통제해야 한다. 하기 싫은 주입식 교육을 시키려니 잔소리 정도는 보통이고 야단치거나 심지어 때리는 폭력을 사용하기도 한다. 부모로서 힘들게 공부하는 자녀의 고통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살벌한 입시 경쟁에서 다른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폭력적 언사를 사용하거나 매를 때리는 것은 자녀의 미래를 위해 필요한 어쩔 수 없는 것으로 정당화한다.

학교에서의 폭력

캐나다 학교에서 역시 선생에 의한 '사랑의 매'라는 것이 없다. 아이를 때리는 경우는 없고, 야단치는 경우도 전혀 없다. 선생이 아이에게 소리를 지르거나 겁을 주는 식으로 야단치는 행동은 용납되지 않는다. 만약 그런 일이 발생하면 그 선생의 행위는 심각한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대부분 선생들은 아이들을 친구와 같이 가깝게 대한다.

한국 역시 학생 구타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었다. 그러나 아직도 일부는 교권 수호의 주장과 함께 '사랑의 매'를 허용해야 한다고 하기도 한다. 때려서 강압적으로 어떤 명령을 따르게는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을 진정한 교육과 혼동하면 안 된다. 진정한 교육은 아이들이 매가 무서워서 하는 것이 아닌 마음에서 우러나와 하도록 하는 것이 진정한 교육이다. 자신의 독립적 판단에 따른 결정에 의하여 행동하지 않고, 선생이나 부모가 무서워서 행동하는 아이들은 부모가 없거나 선생이 없으면 다른 짓을 하게 될 것이다.

캐나다에서 선생은 수업을 가르치는 것 위주다. 한국과 같이 권위적 방법으로 아이들의 잘못을 고치고 훈육한다는 개념이 없다. 선생들이 학생들과 친구처럼 가깝게 지내지만, 규칙을 따르고 그 규칙을 어겼을 때는 그에 따른 벌칙을 준다. 그 벌이라는 것은 기껏해야 쉬는 시간에 나가서 놀지 못하고 교실에 있어야 하는 정도이다. 아이의 통제가 안 될 정도로 심한 경우, 예를 들면 아이가 수업 중에 시끄럽게 떠들고, 선생의 경고를 무시하면 그런 행위를 선생이 고치려고 노력할 필요 없이, 그 학생을 교장에게 보내면 된다.

아이들이 야단이나 매가 무서워서 말을 듣도록 교육을 받은 상황에서, 우리의 교사는 종종 '사랑의 매'로 또는 야단을 쳐서 통제해야 하거나, 아니면 통제 자체를 포기해야 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 처하기도 한다. 말을 안 듣는 학생을 통제하는 교사의 의무의 한계가 뚜렷한 캐나다와 그렇지 않고 교사에게 불가능한 짐을 지우는 한국의 상황과 큰 차이를 보여준다. '교권이냐 학생 인권이냐'라는 극명한 대립의 갈등을 겪는 한국에서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권위에 의한 교육을 탈피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을 학생들 생활 지도라는 훈육의 의무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도 심각하게 고려해봐야 할 것이다. 교사가 학교 폭력을 발견하면 상담 교사나 교장 또는 경찰에 당연히 신고해야 하겠지만, 훈육을 통한 문제 해결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의무를 없애는 방안을 심각히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교사들이 권위로 규율이나 도덕적 가치를 가르치는 것보다는, 학교에서 학생들과 함께 대화하고 활동하면서 모범을 보여 아이들이 보고 배우도록 하는 것이 더 효과적일 것이다.

별 효과 없는 학교 폭력 대책

학교 폭력을 근절하기 위해 정부가 종합 대책을 발표 하였다. 일진 경보제, 입학사정관에 인성 교육 내용 반영, 복수 담임제, 가해 학생 격리 조치, 징계 사항 생활기록부 기재 등의 정책들을 내놓았다. 과거에도 이런 문제가 사회적 이슈가 될 때마다 새로운 대책들을 내놓았지만 별 효과가 없었다. 오히려 문제가 더 심각해졌다. 이번에는 학교 폭력을 해결하는데 도움이 될까? 이러한 대책이 전혀 필요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근본 원인을 제거하지는 못한다.

캐나다 역시 학교에서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한 대책들이 있다. 구역 내 학교를 담당하는 전담 심리 상담원이 상담 및 교육을 한다든지 교장, 학부모, 선생, 학생, 전담 상담 요원, 전담 경찰 등으로 구성된 학교 안전 팀을 운영하기도 한다. '손도 대지 마라는(hands-off policy)' 정책을 강조하여 밀거나 때리는 행위를 방지하기도 한다. 그리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이나 피해자에 대한 대처는 한국의 그것들과 비슷하다. 학교 괴롭힘이 발생 했을 경우에 경미한 경우에는 교장실에서 몇 시간 지내는 정도의 벌이나, 심하면 며칠 정학 처분 정도의 벌을 받는다. 물리적 폭력인 경우에는 종종 경찰이 개입하게 된다. 물론 밀거나 발로 차는 경우에 그 행위가 경미하면 반드시 경찰이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런 판단은 교장이나 피해자 부모의 재량에 달려 있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는 학교에 보안 담당원이라던가 상담 교사를 두기도 하고, 가해자에 대한 처벌도 강화하고, 학교 폭력 신고 센터도 운영하고 있다. 크게 보았을 때 이러한 대책은 캐나다와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런데도 한국에서는 왜 그러한 대책들이 효과가 없을까? 반대로 생각하면 캐나다의 경우는 사전 예방과 대책이 좋아서 한국과 같은 학교 폭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그 이유는 이러한 대책이 부실해서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무리 대책이 좋아도 그러한 예방 교육이나 처벌로 학교 폭력 자체를 근절하는 데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대책들은 폭력의 근원이 되는 학생들의 피폐한 심성을 치유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 폭력은 입시 경쟁에 예속된 가정교육과 학교 교육에서 나오고, 한국의 사회 문제에서 나온다. 그런 문제에 대한 최소한의 논의조차 없이 폭력 방지 대책만으로는 그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학생보다는 우선 교육과 사회가 우선 바뀌어야

학생들 사이의 폭력은 그들이 창조한 것이 아니다. 부모나 교사가 한 학생에게 가하는 위협적 말 한마디가 급우에게 사용되는 위협적 언사로 나타날 것이다. 그들이 빈번히 당하는 언어폭력이나 신체에 가하는 폭력은 그들의 행동에 그대로 나타난다. 가정과 학교에서 때리거나 언어폭력에 의한 강압적 명령과 복종의 관계에 익숙한 학생들이 급우와의 관계에서 그러한 강압적 관계를 맺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의 학생들이 캐나다나 다른 나라의 학생들보다 더 폭력적이고 잔인한 심성을 갖고 태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왜 학교 폭력 문제는 이렇게 심각한 상태로 악화되었을까? 학교 폭력의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학생들과 그들의 가정과 학교뿐만이 아니라 경쟁 교육이 그리고 경쟁 사회가 어떻게 학생들의 인성에 영향을 미쳤는지 그리고 그들의 메마른 인간적 감성이 학교 폭력에 어떻게 기여했는지를 살펴보아야 한다.

학교 폭력 근절의 대책으로 인성교육을 강화한다는 정부의 발표가 있었다. 인성 교육에 대하여 그 중요성을 인정하였다는 점은 긍정적이다. 그러나 인성 교육을 입학 사정에 반영하겠다는 것은 학교 폭력의 인식에 심각한 문제가 있음을 보여준다. 입시 전형에 인성 교육의 평가를 반영하여 학생들의 인성이 개선될까? 그 반대로 이제 인성도 입시에 필요한 한 과목으로 전락하여 오히려 인성 교육을 망칠까? 예를 들어 봉사 활동을 점수화하여 입학사정에 포함시키면 눈에 보이는 봉사 활동은 늘어날 것이다. 그러나 이제 봉사라는 것이 자발적 동기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점수를 따기 위해 싫어도 하는 입시 전략으로 전락하게 될 것이다.

이제 인성에까지 점수가 매겨지고 인성의 등급이라는 딱지가 우리의 아이들에게 붙여지는 사회로 가려한다. 세기말적 과학 영화에나 가능한 사회상이 아닐까? 아무리 서열 평가에 의한 경쟁 논리가 팽배한 사회이지만 인성까지 대학입시에 점수로 평가하여 반영하는 정책은 폐지해야 할 것이다.

과도한 입시 경쟁이 인성 교육 실패의 근본 원인이다. 그럼에도 인성 교육마저 입시 경쟁으로 해결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한다는 그 발상 자체는 문제 해결의 실마리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거나 진정한 문제 해결에는 관심이 없는 상황임을 보여준다. 인성 교육 중요하다. 그걸 위해서는 결국 교육의 개혁이 필요하다. 이제 교육 문제 하나만이라도 그 개혁을 진지하게 논의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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