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교 폭력이 몇 십 년 꾸준히 악화되는 동안, 우리 사회의 대응은 반창고 붙이는 식의 간헐적인 예방 대책이나 사후 처벌 대책 등이 고작이었다. 손 놓고 있다가 사회적으로 물의가 되는 엽기적 사건이 터져 이슈가 되어야 뭔가 하는 걸 보여줘야 하는 압박에서 임기응변으로 나오는 대책들은 대부분 실제로는 별로 도움이 되지 않는다.
며칠 전 학교 폭력 근절을 위한 정부 대책이 발표되었는데 이슈될 때마다 비슷한 대책들을 발표하는데 급급하기보다, 이제 그러한 많은 대책들이 왜 실패했는지를 한 번 생각해 볼 때도 되지 않았을까? 신문이나 방송에 크게 뭔가 한다는 것을 공표하기보다는 진정한 문제 해결을 위해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을 알아보고 그에 대한 해결책을 찾아 정책으로 반영하여 꾸준히 개선해가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을까?
이 글에서는 우리 사회에 만연된 폭력, 특히 학생들에게 가하는 교육 폭력이 학교 폭력의 원인이라는 것을 이야기하려 한다. 입시 경쟁이라는 교육 폭력의 결과로 학생들이 고통 받으면서 그들의 심성이 피폐해 졌다. 학교 폭력, 우울증과 자살 등은 학생들의 겪고 있는 고통을 보여준다. 그들의 고통을 덜어주지 못하고 그리고 그들의 피폐한 심성을 치유하지 못하면, 학교 폭력 문제나 우울증과 자살 등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 교육 폭력을 고치지 않고는 어떠한 예방과 처벌 대책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한국의 교육 폭력
현재 학생들은 사회로부터 경쟁 교육이라는 집단적이고 체계적인 아동 학대를 당하고 있는 상태에 있다. 학생들이 입시 경쟁 체제에서 정신적 육체적으로 당하는 고통은 수 없이 많이 있다. 한 가지 예로 입시 경쟁으로 아이들이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는데, 잠을 안 재우기 것은 일종의 고문이다. 그것도 1년 이상 몇 년이나 지속되는 혹독한 고문이다.
교육이 아이들에게 가하는 이러한 폭력은 학생들끼리의 학교 폭력보다 더 심각한 폭력이다. 왜냐하면 이 폭력은 모든 학생들에게 적용되는 것이며, 벗어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국가 차원의 폭력 아래서는 이를 피할 수 없을뿐더러 학부모나 교사들이 개인적으로 자녀나 학생들을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선택의 여지가 별로 없다.
학생들은 등수로 서열이 매겨지고 그에 따라 비교 평가를 받는다. 학생들 자신이 등수로 평가 받듯이 그들 역시 친구와 인간의 가치를 서열로 판단한다. 그래서 급우들이 계급으로 나누게 된다. 학생들은 잘난 아이와 못난 아이, 공부 잘하는 아이와 못하는 아이, 잘 사는 아이와 가난한 아이, 힘이 센 아이와 약한 아이로 나누고 차별 대우를 한다. 이렇게 학생들이 급우를 나름대로 평가 기준에 따라 구분하고 차별 대우를 하는 것은 학생들 자신이 학교와 가정에서 등수에 따라 차별 대우를 받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장 중요한 학교 폭력의 예방책은 우정으로 형성된 급우 관계일 것이다. 그러나 등수 경쟁 상황에서는 친구가 경쟁의 대상이 되고 이겨야 하는 라이벌이 된다. 급우를 배려하기보다는 1등 하는데 방해되는 라이벌로 여기는 풍토에서는 친구를 아끼고 존중하는 마음이 형성되기 어려울 것이다. 우리와 달리 캐나다 등 여러 나라에서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까지 학업 평가를 등수로 표시되지 않는다. 등수로 누가 몇 등 했는지 그 서열 자체가 없고 등수로 서로 비교하는 경우 역시 없다. 그래서 수석 또는 꼴찌라는 말 자체가 없다.
입시 경쟁의 압박 강도는 살인적이다. 학생들은 아침 일찍부터 학교 수업으로 시작해서 학원에서 밤늦게까지 공부해야 한다. 학생들에게 그렇게 장기간 강도 높은 노동(?)을 시키려면 그에 따른 강도 높은 압박이 필요하다. 강한 압박을 하기 위해서는 학부모의 밀착 통제, 잔소리, 심하면 구타로 연결되는 권위를 바탕으로 한 통제가 필요하다.
패자나 바닥에 떨어지는 사람이 버림받는 존재가 되는 곳이 한국 사회이다. 그래서 패자가 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에 모두가 경쟁에 매진하게 된다. 극단의 경쟁은 극단의 불안감에서 나온다. 학부모들은 자식이 패자가 될지 모른다는 극단의 불안감을 갖고 있다. 그래서 입시 경쟁 아래 자녀들이 당하는 고통을 알아도 어쩔 수 없이, 모든 것을 희생하더라도 좋은 대학 입학을 위해 자녀를 경쟁에 밀어붙여야 한다. 자녀가 커서 사회에서 패자가 된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싫은 사회이기 때문에. 강도 높은 경쟁의 달성으로 패자를 천대하여 비참하게 만드는 비정한 사회에서 구성원들은 모두 패자가 될까 두려워하게 되며 경쟁에 전력투구하게 된다.
학부모들이 갖는 자녀의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라고 하며 좋은 대학의 입학을 위해 많은 것을 희생하게 만든다. '기러기 아빠' 현상이 보여주듯이 자녀의 교육을 위해 가정의 기본 단위가 쪼개져 이산가족이라는 전시나 기근과 같은 극한 상황 외에는 보기 힘든 병적인 사회 상황이 나오기도 한다.
학부모들이 자녀들을 교육 폭력으로부터 보호할 유일한 방법은 입시 경쟁, 즉 교육을 포기하는 것이다. 교육을 포기하는 것은 보통 부모가 선택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패자가 멸시받는 혹독한 경쟁 사회에서 주류 교육을 포기한다는 것은 자녀를 패자로 만드는 것과 같다는 불안감이 팽배해 있기 때문이다. 교육을 포기하는 다른 방법으로는 자녀 교육을 위해 이민을 가거나 자녀를 유학을 보내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선택은 극소수 계층에 해당 되는 것으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불가능한 선택이다.
입시 경쟁은 아이들에게 정작 필요한 교육은 무시하고 등수에 의해 평가되는 강압적 교육이다. 이러한 교육이 인간 성장의 가장 민감하고 중요한 시기에 학생들의 몸과 마음을 피폐하게 한다. 그 피폐한 마음에서 당연히 예상되는 것들 중의 하나가 학교 폭력이다. 아이들의 마음을 병들게 하는 경쟁 교육은 어린 학생들에게 사회가 가하는 폭력이다. 결국 경쟁 교육이 학교 폭력 등 학생들의 여러 문제의 원인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으로부터 그 해결의 실마리를 찾아야 한다.
학생들이 죽어 가는데 아직도 국제적으로 경쟁력 있는 인재 양성을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강압적 경쟁 교육을 정당화하는 사람들이 있다. 경쟁 교육은 학생들에게 가하는 폭력이고 이 폭력 아래서 학생들이 피폐한 심성의 성인으로 성장하게 된다. 권위에 근거한 강압적 경쟁 교육은 독립적 사고, 또는 창의력보다는 권위에 따르는 복종적 사고를 강요한다. 경쟁 교육을 옹호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경쟁력은 열심히 일하는 복종적 직장인의 양성을 통한 이윤의 경쟁력을 말할지는 몰라도, 안정된 심성에 기반을 둔 독립적 사고를 하는 창조적 인간을 양성하는 경쟁력을 말하는 건 아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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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쟁과 사회의 폭력
한국의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이 있었지만, 경제 성장 우선과 경쟁 논리의 급격한 확대로 사회 전반에 걸쳐 국가 차원의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로 전환되었다. 학생들은 그 사회의 가치를 배우고 반영하는 거울이다. 학교 폭력 역시 사회의 폭력을 그대로 반영하는 것이다.
학교 폭력이 왜 증가하고 잔인해지고 있는지 원인을 살피면, 학생들에게 자살이나 정신병의 급격히 증가한 원인이 보일 것이다. 그리고 학생들이 겪는 고통을 보면 사회 전반에 퍼진 많은 고통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보일 것이다. 근원적 치료를 위해서는 현재 한국 사회에 나타나는 여러 고통들이 왜 그렇게 급격하게 증가했는지, 게다가 그 고통들은 연결되어 있으며 같은 뿌리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파악하는 일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현재 한국은 무한 경쟁이라는 경쟁병에 걸려 있다. 이 병은 근래에 우리 사회에 경제 성장이 우선되고, 차등화 강화와 국제 경쟁력이 강조되면서 무한 경쟁이라고 하는 경쟁 위주의 사회로 돌입하면서 발생했다. 현재 경쟁이 그 도를 넘어서 사람들을 불행하게 하고, 사회적으로 막대한 낭비를 초래하며, 경제성장 동력마저도 저하되는 상황에 처해 있다.
권력이 남용되면 그것이 폭력이다. 경쟁 위주의 권위 사회에서는 그 권위 또는 권력이 약자를 배려하는 데 사용되지 않고 개인의 이기적 이해를 위해 남용된다. 재벌의 횡포와 같은 돈의 권력 남용, 부정부패라는 정치권력의 남용, 사법부의 권력 남용, 언론 권력의 남용과 같이 권력이 약자 위에 군림하는 폭력으로 나타난다.
큰 권력을 지닌 사람이나 단체만이 그 폭력을 행사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위에 약자를 괴롭히는 무수한 조그만 권력들도 남용되고 있으며, 폭력으로 변해가는 양상을 보이고 있다. 사회 전반에 걸쳐 벌어지는 약자를 멸시하는 풍조나 권력의 남용은 학생들이 보고 배운다. 그들은 나름대로 일진회와 같은 권력을 형성하고 약자 위에 군림한다.
경쟁이 심해지면 주위 사람이 친구가 아닌 라이벌, 이겨야 하는 적이 되고 만다. 적대적 관계 속에서 상대를 해치더라도 내 이익만 차리려고 한다. 적대적 관계 속에서 상대가 못 되어야 내가 잘된다는 인식이 형성된다. 그래서 상대를 배려하고 함께 기쁨과 고통을 나누기보다는 시기와 질투를 하게 된다. 심한 경우에는 '묻지 마 살인'과 같이 남이 잘되는 것을 못보고 고통을 받게 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심성이 나타나기도 한다. 적대적 관계에서는 학교 폭력에서 보듯이 친구가 적이 되고 친구의 고통조차 느끼는 못한다.
경쟁이 심해지면 사람들이 더욱 이기적이 되고, 이기심의 강조는 또 경쟁을 조장한다. 이기적인 기업주는 돈을 많이 벌어도 직원을 더 혹사시킨다. 이기적 상관은 부하를 희생시켜서라도 업무 실적만을 생각한다. 이기적 교장은 선생과 아이들을 희생해서라도 학교의 명성을 높이려 한다. 이기적 재벌 기업들이 구멍가게들을 없애고 서민의 삶을 희생해서라도 유통구조를 장악하려 한다. 이기적 급우는 우정이나 배려보다는 친구를 돈을 갈취하는 대상으로 여긴다.
경쟁이 심해지면 남을 믿지 않는 사회가 되고 구성원 사이의 유대가 약화된다. 사람들은 경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압박 아래 주위 사람들은 승리를 위한 도구로 전락한다. 인간의 관계가 우정이나 신뢰와 같은 가치가 아닌 서로의 이용 가치에 기초한 사회에서는 서로가 이용하려고만 하고 서로를 믿지 않게 된다. 학생들 사이에서도 기쁨과 아픔을 공유하는 우정에 바탕을 둔 관계는 약화되고 서로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불신의 관계가 강화된다. 급우를 우정으로 대하는 관계라면 현재 목격되는 잔인할 정도의 학교 폭력들이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사회 전반에 걸친 경쟁의 강화는 그 도를 넘어서 '경쟁병'이 되었고 사회 곳곳에 여러 증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학생들이나 직장인들의 우울증 증가하고(2000~2007년 정신병 증가는 남자 100퍼센트, 여자는 200퍼센트)라든가, 여성들의 출산을 거부하고(한 여성 당 평균 출산율이 1.2), 어린 학생이 밤 10시 이후까지 학원에서 혹사당하고, 직장인들이 세계에서 가장 일 많이 하고(한국의 직장인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과 비교해 연간 약 60일 또는 490시간을 더 일한다), 자살률은 세계 2위(1989~2009년 사이 자살률 500퍼센트 증가)가 되는 것과 같이 '경쟁병'의 증상이 만연했다.
이러한 증상들은 무한 경쟁이라는 가치에 기초한 우리 사회가 그 구성원들에게 가하는 폭력의 결과로 나타나는 것이다. 우리 사회의 교육 폭력 역시 사회 전반에 퍼져있는 이러한 폭력의 한 부분이다. 폭력이 난무하는 사회에서 자라는 학생들은 그 폭력의 희생자로 고통을 받기도 하지만, 그들 자신들 역시 그 폭력을 배우고 동시에 급우에게 고통을 주는 폭력을 행사한다.
학교 폭력의 해결을 위해서는 사회 폭력 특히 입시 경쟁이라는 교육 폭력의 포기라는 큰 방향 전환이 요구 된다. 교육의 방향 전환을 위해서는 '경쟁 교육이 이대로 가면 미래 세대는 희망이 없다'는 사회적 공감대 형성을 필요로 한다. 과거 1997년 외환 위기 때 금 모으기 운동과 같이 한국 사회가 보여준 저력이 있다. 그들은 공동체가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을 때 문제 해결을 위해 기꺼이 단결하고 협동했다. 이러한 공동체를 생각하는 마음을 가진 구성원들이 학교 폭력의 근본 원인을 인식하고 위기 위식을 갖게 된다면 경쟁 교육을 바꾸는 방향 전환이 가능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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