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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협' 주장은 어리석은 '新 북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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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위협' 주장은 어리석은 '新 북벌'!"

[동아시아를 묻다·18]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 복수(複數)의 중국

지난 글은 태평양을 감당했으니, 이번 글은 대륙으로 향합니다. 거듭 강조하시는 동(북)아시아의 내부 균열에 착목하려는 것이지요. 동아시아가 균열과 적대로 점철되어 있다는 견해에 일말의 이의도 없습니다. 허나 그것이 동아시아만의 남다른 특징인양 과장할 필요도 없다고 여겨집니다.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격언은 역설적으로 이웃애의 발현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반증합니다. 천년 전쟁을 반복했던 유럽은 말할 것도 없지요. 형제애를 강조하는 이슬람에서도 수니파와 시아파는 아옹다옹입니다. 이스라엘과 중동의 갈등이 동아시아만 못하다 하기 힘듭니다. 발칸과 동유럽, 러시아는 어떠합니까. 미국과 멕시코 사이에는 거대한 장벽마저 쌓이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유로 같은 단일 화폐도 없고 역내 자유무역협정(FTA) 하나 없이도 동아시아는 이미 하나의 경제권입니다. 문화 교류와 인구 순환 또한 활발하지요. 서울, 도쿄, 베이징을 막론하고 서로의 언어로 된 간판들을 쉽사리 발견할 수 있습니다. 중국의 최대 유학생은 한국인이며, 일본과 한국의 유학생 중 다수가 중국인입니다. 이렇게 동아시아는 단일 생활권이기도 합니다.

생활인의 생활 감각의 변화가 소중합니다. 이처럼 몸을 부대끼며 일상을 공유하는데 해묵은 갈등이 불거지지 않을 수야 없겠지요. 인간지사, 당연지사입니다. 정녕 두려워 할 것은 왕년의 무지와 무관심입니다. 무심함이야말로 대화와 소통을 원천 봉쇄하는 최대의 복병입니다. 그러하다면 균열과 적대를 의식하며 살아가게 된 작금의 현실은 도리어 진일보한 것이 아닐까요.

해외여행 자유화된 지 불과 20여년입니다. 미우나 고우나 동아시아가 한 이웃임을 실감하게 것도 극히 최근인 것입니다. 시행착오가 없을 리 만무하지요. 이를 간과하지도, 과장하지도 맙시다. 역사의 전진은 비약이 아니라 누적입니다.

비대칭성 또한 동아시아만의 고유함이라고 하기 힘듭니다. 남아시아는 어떻습니까. 인도는 네팔, 스리랑카, 부탄을 압도하며 홀로 우뚝합니다. 2억 명에 육박하는 핵보유국 파키스탄과 1억5000명의 방글라데시마저 왜소해 보이지요. 동남아시아도 2억5000명의 이슬람 대국 인도네시아가 돌출해 있습니다. 인도네시아는 말레이시아를 병합하려 했고, 싱가포르는 그 말레이시아로부터 분리 독립했습니다.

미국과의 전쟁이 끝나기 무섭게 베트남은 캄보디아를 점령했지요. 라오스와 캄보디아는 베트남이라면 이를 갑니다. 이러한 비대칭성과 위계가 켜켜이 착종되어 있음에도 그들은 아세안(ASEAN, 동남아시아 국가 연합)의 틀 안에서 균열과 적대를 조율해 가고 있습니다. 대국 브라질이 앞서 달리는 라틴 아메리카 또한 볼리바르 혁명 정신에 의거해 지역 통합에 박차를 가하고 있지요. 즉, 비대칭성이 곧바로 균열과 적대로 직결되는 것도 아닌 것입니다.

게다가 동아시아에는 대국과 소국이 공존하는 지혜가 일정하게 작동하고 있었습니다. 고려와 조선이 예외적으로 500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무관치 않습니다. 관건은 역시 근대의 도래가 산출한 150년의 '전국시대(戰國時代)'입니다. 그래서 방점은 동아시아보다는, 근대에 찍혀야 하겠습니다.

동아시아에서 비대칭성의 핵심은 중국과 그 주변입니다. 대청제국의 영토를 그대로 계승한 중국은 역사상 최대의 규모를 보전한 채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그래서 아시아의 신생 독립 국가들이 처음 얼굴을 맞댄 반둥 회의(1955년)에서도 중국에 대한 우려와 걱정이 분출했던 것입니다.

중국과 아시아야말로 동아시아론이 감당해야 할 최고의 과제라 하겠습니다. 그에 비해 일본은 점진적으로 (동)아시아로 복귀할 수밖에 없다고 여겨집니다. 일본 역사의 본거지는 애당초 간사이였지요. 문화의 젖줄도 대저 바다 건너 아시아 대륙이었습니다. 도쿄와 간토가 부상했던 지난 150년이 예외적입니다. 그 추세가 반전하여 오사카와 교토 중심의 역사로 회귀해 가는 것이 21세기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동북을 강타한 3·11 대지진은 퍽이나 상징적입니다. 대동아를 침몰시킨 핵폭탄이 간사이에 투하된 것과 상반됩니다. 때마침 오사카에 등장한 지역 정당과 간사이 내셔널리즘도 주목할 일입니다. 지난 150년이 아무리 휘황했다한들 1500년이 축적한 시간의 무게를 당해낼 수 없습니다. 길고 깊고 크게 볼 일입니다.

지난 글에서 동아시아의 비대칭성을 사고하는데 유력한 소재를 던져 주셨습니다. 그간의 동아시아론이 주로 이웃 대국들을 향해 발신되었다며, 싱가포르, 타이완, 몽골의 부재를 거론하셨지요. 매우 소중한 지적이라 하겠습니다. 하지만 이 소국들을 어떻게 담아낼 것인가를 정작 깊이 천착하고 독자적인 견해를 개진하고 있지 않음이 아쉽습니다.

이 세 나라를 염두에 둔 동아시아론은 기왕과 어떠하게 달라지는지요? 그 득의(得意)가 궁금합니다. 혹여 나름의 복안이 없다면 비판을 위한 비판을 위하여 소국들을 동원했다는 혐의를 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한 무심한 태도야말로 소국을 괄시하는 것이겠지요. 그런 폐를 범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몇 마디 보태고자 합니다. 분업이자 협업인 셈이지요.

싱가포르와 타이완은 홍콩과 마카오를 아울러 논의해야 하지 싶습니다. 타이완이 '제2의 중국'이라면, 홍콩과 마카오는 '제3의 중국', 싱가포르는 '제4의 중국'이라 할 수 있겠지요. 저마다 독자적인 발전 모델을 구축해온 '복수의 중국'들입니다. 나아가 전 세계에 구축되어 있는 '제5의 중국' 화인·화교 네트워크도 간과할 수 없습니다. 중화 세계, 혹은 화인 세계란 이처럼 국가 간 체제 너머에서 전 지구적 네트워크로 작동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복수의 경로로 존재하는 여럿 중국을 아우르고자 한다면, 기왕의 중국론 또한 크게 쇄신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중국은 도무지 일국(一國)으로 갈무리할 수 없는 복합적 대상인 탓입니다. 황해 건너 산동성의 인구가 자그만 치 1억 명입니다. 남북한을 합한 것보다 크고, 일본 열도에 필적할 날도 멀지 않았습니다.

'아시아의 병자'이든, '저항의 근대'이든 20세기의 중국론은 중앙주의, 혹은 중원주의에 갇혀 있었다는 점에서 매한가지입니다. 다채로운 지역들의 구체적인 현장성을 결여하고 있던 것이지요. 주요 도시들의 근대경험 또한 무척이나 다릅니다. 베이징과 상하이의 차이만큼이나 광동과 대련 사이는 아득하고, 하얼빈과 칭다오도 판이합니다. 국제도시들마저 그러할진대 지방 간, 성 간 차이는 말할 것도 없겠지요.

즉, 중국은 그 자체로 '소국 연합체'에 가깝습니다. 그래서 지역별로 접근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지역을 중국 내의 지역임과 동시에 (동)아시아의 지역이라는 복합적 관점으로 접근하는 것이 요체입니다. 가령 운남성은 베이징과 상하이와는 멀찍하지만 하노이와는 지척이지요. 그래서 베트남 전쟁의 후방기지 노릇을 톡톡하게 했던 것입니다.

이미 쿤밍에서 하노이를 거쳐 호치민까지 가닿는 열차도 개통되어 있다지요. 그에 반해 동북 3성은 홍콩이나 심천과는 도통 무관할 법합니다. 도리어 러시아의 극동과 몽골, 한반도나 일본과 밀접한 공간이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번 글에서는 몽골을 포함하는 북방으로 시선을 집중하려 합니다.

타이완과 홍콩은 선거를 앞두고 있으니, 싱가포르를 아우른 남방 중국에 대해서는 차후에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반해 북방 중국과 몽골은 한반도라는 시좌를 한층 부각시킬 수 있는 소재이기도 할뿐더러, 때 이르게 개막한 김정은 시대를 맞이하여 숙고할 대목도 적지 않은 탓입니다.

ⓒ프레시안

2. 東北-동양의 발칸

고구려사 문제를 거론하셨지요. 대·소국 간 규모의 차이에서 비롯되는 감각의 낙차를 지적하셨습니다. 그러면서 고구려사 논쟁은 한국의 중국 인식 문제로 보는 것이 한층 적절하다는 견해를 표명하셨습니다. 일정 그러한 측면이 있습니다. 비대칭적 관계에서는 구조가 인식과 행동에 큰 영향력을 발휘합니다.

규모의 차이가 역량의 차이를 낳고, 그것이 입장의 차이와 관심의 차이를 야기하지요. 그래서 소국이 대국에 한층 관심을 쏟기 마련이고, 신경을 곤두세우는 만큼 오판의 경향도 높아지곤 합니다. 대국의 무심한 행동을 고의적으로 인지하는 경우도 있고, 대국의 적의를 과장하고 편집증에 빠지기도 합니다. 그에 반해 대국은 다수의 소국들을 상대하고, 또 다른 대국을 우선하기에 개별 소국에 대한 관심은 뒷전에 밀리기 십상이지요.

이처럼 소국의 과대인식과 대국의 과소인식이 상호 오해의 악순환을 초래하는 것입니다. 국제 정치학에서는 이를 '비대칭적 오인(Asymmetric Misperception)'이라고 하더군요. 중국과 베트남이 전쟁으로 치달은 과정을 복기함으로써 얻은 결론입니다. 중국과 한국 사이에 적용해도 무방하겠지요.

그러하다면 한국의 중국 인식을 성찰할 필요성만큼이나, 소국의 민감한 반응을 넉넉하게 헤아리지 못하는 중국의 무심함과 둔감함도 함께 비판해야 공정하지 않을까요? 앞으로의 중국의 위상을 감안하자면 더욱 그러합니다. 즉, 대·소국을 막론하고 서로가 함께 변화해 갈 일입니다.

그러나 이 또한 절반의 진실에 그칩니다. 고구려사 문제를 양국 간 인식 문제로 한정함으로써 정작 중국에 내재하지 못하는 착오를 범한 것이 아닐는지요. 고구려사의 핵심 문제는 고구려가 아우르고 있던 저 동북 지역의 독특한 장소성에 있습니다. 고구려는 기표이지요. 그 기표가 담고 있는 역사성에 주목해야 합니다.

중국의 관점에서 보자면 동북 지방은 그야말로 전략적 요충지입니다. 누천년의 과거는 물론이요, 격동의 20세기를 망라하여 동아시아의 지축을 뒤흔든 갈등의 요람인 것입니다. 기실 중국의 정체성 자체가 북방에서 남진하는 유목 국가들과의 대결과 경합의 산물이 아니던가요.

유목 민족들이 중원으로 진출하는 역량을 비축하는 저수지가 바로 동북이었습니다. 고구려와 돌궐(투르크), 수와 당, 발해와 요, 몽골의 원과 만주의 청까지. 중원의 혼란은 매번 내륙아시아에서 비롯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만리장성이 남방이 아니라 북방에 쌓여진 까닭이기도 하겠지요.

근대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동북은 러시아가 동진하고 남하하는 관문이었고, 한반도에서 조선인들이 대거 이주하고, 일본이 대륙으로 진출하는 발판이기도 했지요. 이 다기한 국제이민의 네트워크 속에서 원주민 만주족이 극적으로 소멸할 정도였습니다. 한편 만주국이 탄생했던가 하면, 항일운동의 근거지이기도 했으며, 그 연장선에서 북조선에 사회주의 정권이 수립되기도 합니다.

북조선 건국은 국공 내전에서 공산당이 승리하는데도 크게 공헌합니다. 연안의 산적무리에 가까웠던 공산당이 중원을 재패할 수 있었던 것도 북조선을 후방 기지 삼아 동북에서 승기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리하여 신중국이 탄생하자 그 힘이 재차 한반도로 투사되어 한국 전쟁의 후폭풍을 낳았던 것이지요.

이번에는 거꾸로 동북이 북조선의 후방 기지가 되어 미국을 퇴각시켰습니다. 그런 탓에 중화인민공화국도 줄곧 동북의 향배에 주의를 기울였습니다. 소련의 영향력을 차단하고자 소련 통이자 '동북왕'으로 군림했던 가오강(高崗)을 축출하고, 문화 대혁명 시기에는 조선족 간부의 대대적인 숙청도 이루어졌던 것입니다.

돌아보면 청일 전쟁, 러일 전쟁, 중일 전쟁, 국공 내전, 한국 전쟁, 중소 분쟁 모두가 동북을 둘러싼 무력 충돌이었습니다. 안중근과 이토 히로부미의 비극적 만남이 하얼빈 역에서 이루어졌음도 우연이 아닌 것이지요. 그래서 신채호는 이곳을 '동양의 발칸'이라며 적확하게 짚었던 것입니다. 그러하다면 고구려사 문제를 양국 간 인식 문제로 간단히 처리할 수야 도무지 없는 것이지요. '거대한 뿌리'를 잊지 맙시다.

동북공정이 본격화되었던 시점이 6·15 공동 선언 언저리라는 점도 간단치 않습니다. 한반도의 통일이 희미하게나마 가시화되면서 동북에 대한 관심이 한층 고조된 것입니다. 이미 조선족 자치주는 한국과의 조우를 통해 정체성의 위기에 처해 있습니다. 한중 수교로 촉발된 조선족의 인구 이동은 괄목할 만합니다. '글로조', 즉 글로벌 조선족이라고도 하지요.

연변에서 자료 조사를 마치고 돌아오던 비행기. 인천 공항에 도착하자 "한궈! 한궈!" 환호성을 지르던 한 어린아이의 목소리가 귓가를 맴돕니다. 한국인들이 가는 곳에 조선족이 오고, 조선족이 떠난 자리는 탈북자가 메우고 있습니다. 이 환류(還流)하는 한인들의 인구 이동이 동북을 휘감고 있는 것입니다.

본디 조선족 사회는 내몽골과 더불어 '중화 민족' 통합의 모험으로 널리 선전되었습니다. 조선족 자치주를 책임졌던 주덕해는 주은래의 총애를 받았고, 내몽골 자치주의 울란후는 공산당의 최고 권력 반열까지 오르기도 했지요. 신장이나 티베트와는 달랐던 것입니다. 헌데 그 조선족 자치주마저 한반도(한국)의 원심력이 드세지는 형국입니다. 동북의 역사성을 익히 알고 있는 중국이 묵시하고 있을 턱이 없지요.

최근 김정일이 사망한 후 미국의 한 보수적 논객(Victor D. Cha)은 <뉴욕타임스> 기고문에서 북조선의 '동북 4성화'를 전망하기도 했습니다. 그 견해의 옮고 그름을 떠나서 동북은 그만큼 북조선은 물론, 한반도와 동북 아시아에서 관건적인 장소인 것입니다. 따라서 그 지역을 일이관지(一以貫之)하여 사고할 수 있는 안목을 갖추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북핵 문제 또한 동북 문제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누천년 '갈등의 요람'(cradle of conflict)이었던 동북 문제가 북조선 문제, 즉 한반도로 전이된 것이니까요.

갈등의 요람은 뒤집어 평화의 요람일 수 있습니다. 이곳은 '만주 웨스턴'이라는 영화 장르가 탄생했을 만큼 개방성과 역동성, 이국성이 뚜렷합니다. 이 고유함에 주목합시다. 국가 이성의 총아인 베이징, 모스크바, 도쿄, 울란바토르, 평양, 서울과도 멀찍이 떨어져 있습니다. 각국의 변경이 중첩되어 있는 이 장소성을 최대한 지혜롭게 활용할 일입니다.

마침 몽골에서 동아시아 논의를 주도하는 지식인들도 동북을 무척이나 강조하더군요. 그러면서 '동(東)몽골'이라는 개념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동몽골부터 블라디보스토크, 사할린, 시베리아를 아우르고, 압록강-두만강 유역의 북조선에 이르는 유연한 공간 창조를 제안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두만강 프로젝트 참여에도 열성입니다. 중국에서는 '창지투'(長春·吉林·圖門) 프로젝트라고 하지요. 창지투는 창춘과 지린 그리고 연변 일대를 포함합니다. 그래서 북조선의 라진·선봉 일대의 개방과도 궤를 같이하고 있습니다. 몽골-동북3성-북조선으로 이어지는 북방의 신천지가 열리고 있는 것입니다.

안타까운 것은 북방의 활달한 활로 모색에 비하건대 남방은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북미, 북일은 말할 것도 없고 남북 경협도 답보 상태입니다. 북방 경협과 남방 경협 사이의 이 불균형이야말로 신냉전의 토대가 될까 걱정스럽습니다. 항산이 항심을 낳기 마련이니까요.

따라서 한국 또한 서둘러 동북 개조 사업에 참여해야 할 것입니다. 기실 남북 경협 공간을 DMZ 근처에 여러 개 만드는 것은 북조선으로서는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습니다. 개성공단도 전방 부대까지 뒤로 물리면서 통 크게 양보했던 것이지요. 3대 세습의 권력 이행기에 접어든 작금의 형세에서 그러한 결단을 재차 요구하는 것은 한층 어렵습니다.

'소국'에 대한 배려는 남·북 간에도 필요한 것입니다. 그러하기에 북방이라는 우회로를 활용할 필요가 있습니다. 한국의 영향력이 상대적으로 덜하고, 평양에서도 떨어져 있기에 북조선 또한 적극성을 띌 만합니다. '동양의 발칸'을 해소하고 평화의 공간으로 반전시키는 이 대사업에 남·북이 함께 참여하여 상호 협력의 수련장으로 삼을 일입니다.

실용적 효과는 말할 것도 없고, 동아시아에서 이만한 규모의 국제적 실험이 진행되었던 사례도 없습니다. 동북의 영구 평화란 유라시아 2000년을 반전시킬 '세기의 실험'입니다.

3. 신 북학파 운동

몽골을 비롯한 북방 아시아 감각의 상실은 분단의 산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회주의 국제주의든 AA운동이든, 북조선은 내륙 아시아와의 연계가 지속되었지요. 개성은 고려의 수도요, 평양은 고구려의 수도이기도 했으니, 대륙과의 공속감은 한층 더했을 법합니다.

몽양 여운형의 글 가운데 <몽골 여행기>가 있습니다. 몽골에서 동료 대암 이태준(1883~1921년)의 묘를 찾아가는 일화가 가슴을 때립니다. 이태준은 세브란스 의학교를 졸업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한 인물로,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에서 병원을 개설했습니다. 몽골 마지막 황제의 주치의이기도 했지요. 그래서 3·1 운동과 5·4 운동이 일어난 1919년에는 몽골최고국가헌장도 받습니다.

그 길을 따라 다시 몽골을 방문한 이가 북조선의 걸출한 문학평론가 윤세평입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를 읽어가며 북방으로 향하는 여정 또한 일품입니다. 1950년대 초반 티베트를 방문한 북조선 지식인의 기행문도 있습니다. 아마 조선인으로는 최초의 기록이 아닐까 싶더군요. 이처럼 북방으로 향했던 독립운동가와 사회주의자들에게는 내륙 아시아의 경험과 감각이 뚜렷했던 것입니다.

이들이 대거 월북함으로써 그 역사적 유산들을 상실하고 만 것이지요. 아니 상실했다는 것조차 자각하지 못할 만큼 망각하고 있던 것입니다. 한설야 등 한국에선 금기시되던 월북 작가들의 작품들이 몽골 교과서에는 버젓이 실려 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하다면 북조선을 징검다리 삼아 우리들의 반쪽짜리 (동)아시아 인식과 감각 또한 쇄신할 법하지 않을까요. 박지원-여운형-윤세평의 계보를 감안하자면 북학파 이래 한국 지성사의 한 축을 복원하는 과제이기도 합니다.

따라서 남과 북의 재회를 한반도에 그치는 사안으로 한정할 일이 아닙니다. 더 큰 아시아와 더 깊게 만나는 지름길인 탓입니다. 우리의 시선과 사유 지평이 한반도 주변에 갇혀 있지 않기 위해서라도, 남과 북의 출로부터 열어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북조선을 거쳐 몽골에 당도하면 중국과 소련 사이에서 고심했던 소국의 비애도 마주할 수 있습니다.

'냉전 안의 냉전'에 직면함으로써 동아시아 냉전의 중층적 구도를 확인할 수 있을뿐더러, 그 소국의 고뇌를 공유했던 북조선에 대한 이해도 깊어질 법합니다. 나아가 국경을 맞댄 북조선이 감당했던 중국을 대면함으로써 한국의 중국론을 일신할 수 있으며, 우리의 대화가 여지껏 소화하지 못했던 소련/러시아를 제대로 숙고하는 길이 열릴 듯도 합니다.

그리하여 새로운 '북학파'의 양성을 궁리해 봅니다. 북조선과의 조우를 통해 남학과 북학이 합류하는 신 북학 운동을 펼쳐나갈 일입니다. 주체로 옹졸해진 북(조선)학은 개혁·개방으로 사상 해방을 도모하고, 일본의 동양학과 미국의 지역학에서 자유롭지 못한 남(한)학은 식민성을 털어내고 주체성을 확보해 가야 하겠습니다. 이를 통해 '중국 위협론'이라는 21세기 판 북벌론의 망상을 떨쳐내고, 북학파가 치켜세웠던 이용후생(利用厚生)의 가치를 실천할 일입니다. 동아시아론의 내실을 다지는 첩경일뿐더러, 사상적으로도 이만한 쾌거가 또 있을까요.

목하 해양에서 대륙으로, 남방에서 북방으로, 이용후생의 거처가 반전하고 있습니다. 북북서로 진로를 돌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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