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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종말론 결정판! 인류 운명 건 한판 승부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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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종말론 결정판! 인류 운명 건 한판 승부는?

[장석준의 '적록 서재'] 폴 메이슨의 <탐욕의 종말>

2012년이다. 2008년 세계 금융 위기도 벌써 햇수로 4년 전 일이 되었다. 1년 전 산 휴대전화가 벌써 낡은 모델 취급을 당하는 요즘 같은 세상에 이 정도면 '옛날' 일 취급을 받을 만도 하다. 그때 망했던 게 골드만삭스인지 리먼브러더스인지도 헷갈린다. 하지만 세계는 지금, 2008년 금융 위기를 옛 추억 정도로 웃어넘길 수 없는 처지에 있다.

그리스 재정 위기가 스페인, 이탈리아로 확산되더니 급기야는 프랑스까지 강타하려 하고 있다. 유로존이 붕괴하는 것 아니냐는 이야기까지 나온다. 금융 위기는 해결된 게 아니라 단지 땅 속 깊이 잠복했던 것일 뿐, 이제 재정 위기로 그 모습을 바꿔 다시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2008년 이후 서점 경제, 경영 코너를 채웠던 위기 관련 서적을 아직 손에서 뗄 수가 없다. 아니, 대충 읽고 처박아 뒀던 책도 다시 찾아 한 번 더 꼼꼼히 읽어봐야 할 판이다.

그런데 금융 위기에 대한 책들이 많이 나온 것 같은데도 막상 찾아 읽어볼 만한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좀 권위가 있다는 책들은 경제 문외한이 무턱대고 손에 들었다가는 오히려 졸음과 어지럼증에 시달리기 딱 좋고, 대중성을 노린 책들은 그저 신문 경제면을 오려 붙인 것처럼 내용이 부실하기 십상이다.

그 중에 그래도 예외적인 책들이 있다면, 아마도 폴 메이슨의 <탐욕의 종말>(김병순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Meltdown)이 그 중의 하나일 것이다. 2009년에 나온 책인데 지금 읽어도 마치 오늘자 신문을 보는 것처럼 신선하다. 그러면서도 깊이가 있다. 유럽 재정 위기 와중에 4년 전 그 최초의 발단을 복기하는 데는 더없이 좋은 읽을거리다.

비판 의식을 갖춘 민완 기자의 위기 보고서

▲ <탐욕의 종말>(폴 메이슨 지음, 김병순 옮김, 한겨레출판 펴냄). ⓒ한겨레출판
폴 메이슨은 영국의 꽤 저명한 저널리스트다. 그는 영국 국영 방송 BBC의 밤 10시 30분 정규 뉴스 <뉴스나이트(Newsnight)>의 경제 담당 편집자다.

편집자라고 해서 책상에 앉아 가위질만 하는 사람은 아니고 영미 언론계에서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는 탐사 저널리스트다. <탐욕의 종말>은 이런 민완 기자의 심층 취재의 산물이다. 그래서 다른 책들이 담지 못한 고급 정보들을 담고 있고, 서술 방식도 마치 잘 만든 다큐멘터리 영화처럼 박진감 넘친다.

그런데 이 책의 진정한 미덕은 이런 저널리즘의 장점이 정연한 비판 의식과 잘 버무려져 있다는 점이다. 메이슨은 세계 유수 방송국의 고위직이라는 명함에 어울리지 않게(적어도 이명박 정부 시대 한국인의 상식으로 보면 그렇다) 뚜렷한 좌파 성향을 지닌 인물이다. 들리는 말에 따르면, 젊었을 때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가입한 적도 있었다고 한다. 더구나 <탐욕의 종말>의 영어판을 낸 곳은 좌파 출판사의 대명사처럼 되어 있는 버소(Verso, <뉴레프트리뷰>의 발행처)다.

물론 이 나라든 저 나라든 '한때 좌파'였던 사람들은 부지기수로 많다. 하지만 <탐욕의 종말>을 읽어보면, 이 책의 저자가 1990년대와 2000년대를 겪고서도 여전히 삐딱한 좌파 지식인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메이슨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대해 시종일관 엄격한 비판의 칼날을 들이댈 뿐만 아니라 웬만한 좌파 경제학 교수보다 나은 정돈된 논리 체계로 현재의 모순과 미래의 징후들을 분석한다.

한 마디로 <탐욕의 종말>은 고급 저널리즘과 진보적 이론 틀의 적절한 혼합의 산물이다. 2008년 가을 월스트리트와 워싱턴 DC, 다우닝가 10번지 등에서 벌어진 일을 르포르타주처럼 써나간 이 책의 제1부 "붕괴의 현장에서"나 위기의 직접적 원인이 된 '그림자 금융 체계'를 하나하나 짚어가는 제2부 "비열한 10년"에서는 상대적으로 저널리즘의 현란한 색채가 빛을 발한다. 반면 제3부 "신자유주의의 탄생과 종말"은 역사서는 보지 않고 신문 경제면만 읽는 이들을 위해 짧은 지면 안에 아주 성공적으로 이론적 개요를 제시한다.

어렵사리 짜낸 여유 시간에 책장을 넘기다가 '부채 담보부 증권(CDO)'이니 '구조화 투자 회사(SIVs)'니 하는 요상한 말들과 마주치는 것이 썩 유쾌한 일은 아니다. 또 금융 체제만 개혁하면 정보화 기술로 인한 새로운 장기 호황도 가능하다는 식의 저자의 전망에 고개가 꺄우뚱하기도 한다.

하지만 어쨌든 이 책은 몇 줄만 훑다 보면 금세 잠이 쏟아지게 만들거나 책장을 닫고 나면 아무런 여운도 남지 않는 그런 책은 아니다. 그래서 스탠더드앤푸어스(S&P)가 프랑스의 신용 등급을 강등한 또 다른 역사적인 밤(1월 13일 혹은 '13일의 금요일'), 나는 다름 아닌 이 책 <탐욕의 종말>을 책장 구석에서 끄집어내 다시 읽어 내려갔다.

신자유주의, 하나의 지배 체제

읽다 보니, 처음 읽었던 때와는 다른 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금융 위기 직후에는 아무래도 비우량 주택 대출이라는 사기극의 황당함 그리고 전 세계 거품의 어마어마한 규모 따위를 좇아가기 바빴기에 다른 것은 잘 눈에 띠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것들이 이미 어느 정도 상식이 된 지금에 와서 눈을 끄는 것은 다른 대목들이다.

그 첫 번째는 신자유주의의 주인공을 지목하는 대목이다. 신자유주의는 현대 자본주의의 필연적(따라서 어쩔 수 없었던) 전개 과정의 산물도 아니고 단순한 경제 학설이나 국민 국가의 정책들의 더미도 아니다. 신자유주의는 사람들, 그러니까 아주 구체적인 특정 세력이 만들어온 지배 체제다. <탐욕의 종말>은 이것을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다행히도 자유 시장 세계 자본주의의 파워엘리트는 이론화하기는 어렵지만 설명하기는 매우 쉽다. 그것은 마치 권력 계층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네트워크다. 그 네트워크의 중심에는 은행, 보험 회사, 투자 은행, 헤지펀드의 대표와 이사회 구성원, 한때 최고 권력층에서 일했던 사람들이 있다. 2008년 9월 12일 금융 시장이 붕괴되던 날, 뉴욕의 연방준비은행에서 만난 사람들도 현대의 권력을 구성하는 전체 집합 관계에서 하나의 집합을 이루는 권력 집단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229쪽)

불행히도 사회과학계는 아직 이들 집단을 제대로 정의하거나 분석한 적이 없다. 나도 2011년에 낸 <신자유주의의 탄생 : 왜 우리는 신자유주의를 막을 수 없었나>(책세상 펴냄)에서 이들을 단지 '네트워크'라고만 하고 넘어갔다. 메이슨도 인용하는 것처럼, 이제까지는 데이비드 로스코프의 지극히 저널리스틱한 저작 <슈퍼클래스>(이현주 올김, 더난출판사 펴냄) 정도가 이들에 대한 유일한 보고서다.

모두들 감은 잡고 있다. 그래서 '국제 금융 과두제'라는 통칭도 이미 존재한다. 하지만 이렇게만 말해 버리고 말면, 잘못된 신비화에 빠지기 쉽다. 벌써 인터넷에서는 신자유주의가 국제 유대인 세력의 음모라는 나치식 선동이 고개를 들고 있다. 자본주의의 주도권을 금융 자본이 쥐게 되면, 항상 이렇게 음모론이 힘을 얻게 된다. 세상을 좌우하는 금융계 거물들의 세계가 그만큼 대중의 지상 세계와 멀찍이 떨어진 올림포스 산을 연상시키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들을 신비화해서는 안 된다. 그것은 공포의 다른 표현일 뿐이다. 금융 과두 세력은 자본주의와 별개로 툭 튀어나온 혹과 같은 것도 아니고, 사회의 다른 부분으로부터 아무런 중력의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우주 공간 어딘가에서 사회를 원격 조종하는 외계인 사령부도 아니다.

칼 마르크스는 <자본> 3권에서 "사회적 자본을 대표"하면서 "화폐 자본을 통제"하는 은행가의 역할을 강조했었다(<자본 3-1>, 강신준 올김, 길 펴냄, 484쪽). 이후의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제대로 발전시키지는 못했지만, 어쨌든 현대의 국제 금융 과두제는 이러한 전체 자본가 계급의 통제자 격인 은행가의 역할이 그 극단적인 형태로까지 발전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신자유주의에서 금융 시장의 역할을 소련 경제에서 중앙 계획 기구가 사회 전체에 지령을 내리던 것에 견줄 수 있다면(홍기빈 글로벌정치경제연구소장이 언젠가 대화 중에 이 사실을 환기시켜주었다), 그러한 극도로 발전한 금융 시장의 담지자들이 곧 금융 과두 세력들이라 하겠다.

한때 이들은 국민 국가(민족국가)의 전 지구적 위계 체계 안에 부자연스럽게 끼워 맞춰져야 했다. 은행가들의 수평적 네트워크 대신 국민 국가의 정책 결정 과정에 각국의 금융 제도가 복속된 역사적 국면이 있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의 몇 십년간이 바로 그 시기였다. 이런 시기가 있었다는 것은 금융 과두 세력이 결코 무소불위는 아니라는 것을 말해준다. 다만, 이들은 1970년대에 브레턴우즈 체제의 붕괴와 함께 세력 관계를 극적으로 역전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것이 곧 신자유주의 시대의 시작이었다.

2009년에 <탐욕의 종말>이 처음 나올 때만 해도 약간의 낙관론이 없지 않았다. 그 정도로 2008년에 월스트리트 거물들이 보여준 모습은 안쓰러운 것이었다. 메이슨도 지적하는 것처럼, 심지어는 그동안 우습게만 보았던 삼류 정치인에게까지 잔뜩 굽실거려야 하는 했다. 당장 국고에서 구제 금융 지원을 끌어내야만 할 때에는 그랬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이 낙관론은 너무 분위기에 휩쓸린 것이었다. 일단 혈세로 당장 급한 부실들을 막고 나자 금융 과두 세력은 위기 자체를 세력 관계를 재역전 혹은 정상화시키는 기회로 활용했다. 우리는 그 결정적 사례를 그리스 재정 위기에서 볼 수 있다.

독일, 프랑스 은행가들은 자국 금융 위기에 대한 공적 자금 투입으로 폭발한 그리스의 국채 증가 사태를 자신들의 권력을 행사하고 재확인하는 계기로 삼았다. 한편에서는 채권 시장의 집단 행동으로 그리스를 훈육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그리스에 대한 구제 금융을 고스란히 독일, 프랑스 채권 은행에 지급케 하여 잇속을 챙겼다.

유럽연합(EU)은 이런 권력 놀음의 가장 효과적인 무대였다. 개별 국민 국가의 통화 주권을 양도받았으면서 동시에 국민 국가 수준의 민주적 경제 정책 장치들은 전혀 갖추지 못한 유럽연합의 구조보다 이런 사기극에 더 좋은 무대는 없었다. 이것은, 다시 한 번, 기존 국민 국가(그리고 그들 사이의 위계 체계)로부터 은행가들의 네트워크가 삐져나갈 때 금융 과두 세력의 권력이 구축되고 그 지배 체제가 작동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나의 미완성의 문명으로서, 신자유주의

한데 <탐욕의 종말>에서 새롭게 눈에 띠는 대목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두 번째로 소개하고 싶은 흥미로운 대목은, 신자유주의가 지배 체제라면 그것은 정확히 그람시적 의미의 '지배' 체제였다는 점을 환기시키는 문장들이다.

그람시적 의미의 '지배'는 '강제'만이 아니라 '동의'를 통한 지배다. 이것은 곧 신자유주의가 하나의 지배 체제이면서 또한 지배 세력과 피지배 세력(그 중요한 일부라도)이 공유한 하나의 문명적 양식이기도 했다는 것을 말해준다. 관련된 대목을 인용해보자.

"10년 동안의 거품 경제가 지닌 매력은 초대형 금융 부자와 가난한 노동 계층, 중산층 사이의 이해관계가 서로 어느 정도 일치했다는 점이다. 금융업자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더 빨리 부유해질 수 있었다. (…) 중산층은 당시 한창 호황을 누리던 주택 매매나 임대 사업에 뛰어들어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다. (…) 한편 가난한 노동자 계층은 수천억 달러의 대출을 받았는데, 그것은 도저히 갚을 수 없는 큰돈이었다. 모든 자료와 도표는 주택 시장이 과대평가되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당시 사람들은 그 자료를 믿지 않았고 신자유주의 이데올로기에 심취되어 있었다." (227쪽)

미국 이야기다. 하지만 이것이 단지 미국만의 이야기인가. 2000년대 중반, 노무현 집권기에 한국 사회가 경험한 일이고, 이명박 정부의 탄생 신화이기도 하지 않은가. 아니, 어디 한국만인가. 나중에 세계 금융 위기가 터지고 나서 보니, 거의 모든 선진 자본주의 나라들이 같은 형편이지 않았는가.

신자유주의는 어느 곳에서나 좁은 의미의 금융 시장뿐만 아니라 자산 시장(대표적으로 부동산 시장)에 거품 호황을 일으켜서 이것을 성장 동력으로 삼았다. 임금 상승이 막힌 상황에서 금융 세력뿐만 아니라 중간층이나 일부 노동자층까지도 대출금으로 투기에 뛰어들어 자산 가격을 올리고 그것으로 소비 생활을 유지했다. 그래서 로버트 브레너 같은 이는 신자유주의의 후기 양상을 '자산 가격 케인스주의(asset price Keynesianism)'라고 규정하기도 한다.

사실 이것은 신자유주의 초기부터 일관된 기획이었다. 영국의 대처 정부가 처음에 한 일은 거대 공기업을 국민주 방식으로 민영화해서 중간층이 주식 소유자가 되게 만들고 공공 임대 주택을 분양해서 자가 소유 가구를 육성한 것이었다. 주식 시장, 부동산 시장에 중간층과 일부 노동자층을 동원할 수 있는 기본 구조를 만들어놓은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들은 케인스 경제학의 이념을 해체했다. 그 작업은 대학과 언론 영역뿐 아니라 수많은 일반 대중 사이에서도 이루어졌다. 신자유주의 정치인들은 가난한 사람들에게 개인 주식 소유, 자영업, 대규모 주택 소유에 대해 선전했다. 대처 정부는 영국 서민들이 실제 가격의 10분의 1 가격으로 공영 아파트를 구입할 수 있다고 했다." (215쪽)

이 바통을 이어받은 것은 이른바 '좌파 신자유주의자'들, 즉 '제3의 길' 정치인들이었다. 이들은 '우파 신자유주의자들'이 구축해놓은 금융 시장, 자산 시장의 기본 구조를 실제 작동시키는 역할을 떠맡았다. 그래서 이 도박판에 어깨를 들이밀게 된 중간층, 노동자층이 자신들도 신자유주의 체제의 수혜자라고 느끼도록 만들었다.

시장은 이제 경쟁의 살벌한 무대일 뿐만 아니라 아름다운 사회적 합의의 터전이 되었다. 대처가 꿈꾸었던 '대중 자본주의'가 실현된 것처럼만 보였다. 만인이 적극적인 시장 참여자가 되고, 만사가 시장을 거쳐 결정되는 인류 초유의 사회 말이다. 이러니 대처가 블레어를 그토록 예뻐했을 수밖에.

"금융 위기를 불러일으킨 금융 규제 완화 정책을 계획한 장본인은 바로 클린턴과 블레어 행정부였다. 그들은 마치 금융 부문과 암묵적인 거래를 한 것 같았다. 그들은 대처나 레이건 세대가 상상했던 것과는 다른 더 '진보적인' 사회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시장을 지배하고 규제하되 그 대신 모든 규제는 원칙적으로 가능한 한 가볍게 적용하기로 했다. 따라서 거대 금융 기관은 누구에게도 간섭받지 않고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게 된 것이다. (…) 그들은 이처럼 완전고용의 경이로운 세상을 창조하도록 도왔고 세계 곳곳에 스타벅스를 세웠으며 우편함마다 신용카드 신청 권유 편지로 가득 차게 만들었다." (226~227쪽)

그러나 이 문명적 기획은 아직 미완성인 상태에서 돌연 붕괴하고 말았다. 신자유주의의 다른 여러 얼굴은 2008년 이후에도 그대로이지만, 신자유주의의 이 얼굴만은 금융 위기의 발발과 함께 확실히 사망했다. 은행은 구제받았지만 대중은 개인 및 가계 부채에 더해 과세 부담까지 짊어지는 것으로 판이 끝나버렸다.

동의의 기반이 붕괴했으니 회의와 환멸의 쓰나미가 밀려오는 것은 당연하다. 2011년의 전 세계적 봉기들은 이러한 대중의 심리 변화를 염두에 두지 않고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현상이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금융 위기, 재정 위기의 직접적 타격을 입은 나라들에서만 대중 투쟁이 분출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한국을 비롯해서 다른 많은 나라들에서는 여전히 2000년대 거품 호황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만큼 신자유주의가 대중의 일상생활에 일정하게 뿌리를 내리고 있다는 이야기다. 문명적 기획 자체는 미완으로 중단되었지만, 그 후과는 결코 얕거나 작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신자유주의를 넘어선다는 것은 애초 예상보다 훨씬 더 어려운 과제일지 모르겠다.

전환 시대의 책 읽기를 시작하며

<탐욕의 종말> 결론 부분에서 메이슨이 제시하는 대안의 핵심은 은행 국유화 등을 포함한 금융 체제의 변혁이다. 이 정도만 해도 아주 거창한 이야기로 들린다. 신자유주의의 전성기 시절에는 상상도 하기 힘들었던 내용이다. 더구나 아직도 한국 사회의 자칭 진보파들 사이에서는 이 정도 대안조차 '현실성 없는' 이상론 취급을 당하는 형편이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정작 문제는 메이슨의 대안이 신자유주의 극복의 '최소' 조치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위에서 지적한 것처럼, 신자유주의는 어떤 문명적 차원의 기획이다. 그것은 지구 전체를 종횡하며 국가와 시장을 새로 끼워 맞추고 대중의 일상생활을 하나하나 뜯어고치려 한 야심찬 시도다.

그렇다면 신자유주의 '이후'를 노리는 대안 역시 그 정도의 문명적 기획이어야 할 것이다. 금융 체제 개혁은 이 기획의 절대적으로 중요한 한 부분이겠지만, 그 전체일 수는 없다. 전 지구적 금융 체제 개혁이 가능하기 위해서도 뭔가 더 근본적인 일들이 함께 일어나야만 한다.

폴 메이슨은 이 점을 놓치지 않은 것 같다. <탐욕의 종말>에서는 모호하게만 스쳐지나가지만, 이번 달에 나온 그의 신작 (Verso 출간. 제목을 번역하면 "곳곳에서 그렇게 터져 나오는 이유"쯤 되겠다)는 이 문제를 정면으로 다룬다.

이 책에서 메이슨은 2011년의 운동들, 즉 아랍 혁명, 영국의 긴축 정책 반대 투쟁, 스페인과 그리스의 저항 들을 추적한다. 그러면서 인민 대중의 변화를, 즉 노동 계급 중 젊고 일자리가 불안정한 계층의 정치적 각성을, 그리고 이들이 지배자들의 네트워크와는 또 다른 네트워크를 통해 실체화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메이슨이 보기에 위기 뒤의 이 격변은 1848년 유럽 혁명에서나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있는 세계사의 절호의 기회다.

메이슨은 나름대로 분투하고 있는 것이다. 자기 방식으로 시대에 충실히 화답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도 우리 나름의 분투가 필요하겠다. 우린 그럼 무엇을 할까? 모름지기 난세에는 읽고 토론하며 힘을 모으고 한 발 앞서 나아가야 한다. 그 시작은 읽기이다.

그래서 나는 우선 책 읽기를 제안한다―전환 시대의 책 읽기를. 이를 위해, 우리에게 적색, 녹색의 상상력을 북돋을 책들을 먼지 쌓인 서가에서 꺼내 그 발제문을 작성하려 한다. 이 책들을 동시대인들의 공물(公物, 말하자면 the common)로 만들어보고자 한다. 이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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