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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운명? 100년 전 '이것'에서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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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운명? 100년 전 '이것'에서 보라!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장밍의 <신해혁명>

근대 중국의 탄생

지난해는 중국 신해혁명 100주년이 된 해였다. 1840년 아편전쟁 이후 1911년까지의 70년은 만주족이 세운 청조의 중국이 세계 자본주의 팽창 과정에서 받게 된 압박 아래 그 진로 선택의 기로에 헤매던 시기였다. 그리고 신해혁명은 이 격동의 세월을 전격적으로 변화시킨 출발점이었다. 근대 중국의 탄생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따라서 이 신해혁명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 없이 오늘의 중국을 파악하는 것은 중국의 정신과 몸에 대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것이 된다. 뿐만 아니라 중국의 격변과 우리의 근대사가 그대로 맞물려 돌아갔다는 점에서 신해혁명의 역사적 의미는 주목된다. 중국이 서구 제국주의 침탈의 고통을 겪으면서 주체적 근대의 길로 들어서려는 혁명적 격동기인 1911년의 바로 전해인 1910년, 우리는 일본에게 강제 합방 되었지 않았던가? 그 사실 하나만으로도 신해혁명은 우리와 중국의 운명에 중대한 경계선을 그어 놓았다는 걸 확인하게 된다.

신해혁명 전야의 중국은 청조에 대한 한족의 반발과, 서구 제국주의 세력에 의한 중국의 위기가 하나로 겹쳐 청조 배격과 외세 격퇴라는 두 가지 과제가 부과된 상태였다. 여기서 중요해지는 것은 청조가 어떻게 자신의 정치적 중심을 바로 잡아나가는가와, 이미 시작된 사회적 동요에서 빚어진 변혁의 에너지가 어떤 조직적 응집력을 가질 것인가에 있다.

청조 말기는 그러한 자신의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백방의 노력을 기울였으나 대세는 이미 기운 상태였으며, 중국 사회 내면의 움직임은 새로운 미래를 향해 가지 않으면 폭발할 기세를 보였다. 이런 점에서 신해혁명은 역사적 필연이라고 할 만하다.

복잡다단한 혁명의 과정

▲ <신해혁명>(장밍 지음, 허유영 옮김, 한얼미디어 펴냄). ⓒ한얼미디어
그러나 그 필연성이 신해혁명의 태동에 일관된 방향성을 주었다거나, 그 과정에서 어느 하나의 세력권을 형성하면서 근대 중국의 기초를 만들어 주었다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신해혁명의 발발과 그 전개 과정은 대단히 복잡하며, 거기엔 무수한 인물들이 등장한다. 때로는 역사의 우연, 때로는 시대적 조건이 무차별적으로 개입해서 하나의 역사적 실체를 만들어갔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 각도에서 보자면, 장밍의 <신해혁명>(허유영 옮김, 한얼미디어 펴냄)은 그 혁명의 과정이 얼마나 복잡다단했는가와 그 과정에 관여한 인물들과 세력, 그리고 조건들이 미리 예견하거나 기대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이 아니었는지를 정밀하게 추적하고 있다. 이 책은 우리가 잘 알지 못하는 무수한 중국의 인물들에 대해 소개하고 있으며, 하나의 혁명이 역사의 대세를 만들어 가는데 얼마나 많은 비극과 실수, 그리고 오판과 모순을 담고 있는지도 아울러 펼쳐 보인다.

그 모순을 장밍은 이런 경우를 통해 표현하고 있다.

"개항 도시에서 활동하는 신사층과 상인들은 혁명을 두 팔 벌려 환영했지만, 그 외 지역의 농촌에 사는 신사층은 혁명 과정에서 청 왕조를 위해 순절한 한족 관리들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탄식했다. 청 왕조를 그리워하는 이들은 거의 대부분 혁명 이후 민국제도가 시행되던 시기에 생겨났다. 청 왕조가 무너지고 중화민국이 수립된 후에야 많은 사람들이 사실은 청 왕조가 더 좋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면 중화민국이 수립되었지만 기대했던 것만큼 좋지 않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것은 신해혁명이 중국 민중들이 기대했던 질서를 빠른 속도로 창출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장밍은 당시 유일하게 강력한 힘을 휘두를 수 있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의 몰락을 통해 당시 사회 질서의 안정이 거의 불가능한 상황이었다고 평가하고, "혁명을 통해 민주 공화제가 실시되었지만 이 제도는 중국에서 제대로 뿌리를 내릴 수 없었고, 뿌리 내리지 못한 제도는 고쳐 볼 여지조차 없었다"고 말하고 있다. 신해혁명은 중국의 근대로 들어서는 문을 열긴 했지만 이후의 역정이 결코 간단할 수 없었음을 주시한 것이다.

우발적 우창봉기의 전개

실로 신해혁명은 무슨 대단한 준비를 거쳐 이루어진 것도 아니고, 도리어 우발적 사건으로 찾아온 거대한 변혁이었으며, 그런 까닭에 지난한 항일 투쟁과 중국 내전이라는 보다 거대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거치면서 그 안에 담겨 있던 중국인들의 역사적 갈망을 성취해내는 시작이 되었다. 다시 말해, 서양의 습격 앞에서 중국은 서양의 제도를 통해 자신을 살려내는 모순을 경험하게 되고, 그 이후 이에 대한 혁명적 성찰과 투쟁을 거치면서 자신의 정치적 육체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역사란 무릇 우발적 사태에 기대는 경우도 적지 않은 법이어서, 1911년 10월 10일 우창에서 일어난 봉기는 부대 내에 있었던 한 전역 송별식 자리의 다툼과 총격이 그 발발 원인이 되었다. 이후의 그 폭풍과도 같은 신해혁명과는 하등 관련이 없어 보이는 이 날의 사건은, 혁명에 동조하는 병사들의 실체를 알게 해 혁명파에게 기세를 올리게 했다. 그에 더해 우연히 발견한 금고에서 혁명의 자금이 마련되었으며, 현실에서 훨씬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던 청조의 관군이 지레 겁을 집어먹어버린 것도 혁명의 승리를 만들어낸 조건이었다.

그러나 신해혁명은 가령 훗날 마오쩌둥이 이룩했던 사회주의 혁명과는 달리, 농민들의 혁명적 봉기를 선동하거나 그 역량에 기대지 않았으며, 도리어 농민들은 관심도 없었다는 사실을 장밍은 증언한다. 변혁의 시기에 농민들의 봉기와 반란은 이 신해혁명에 적극 결합하지 않았던 것이다.

"개량을 주장하는 입헌파든 혁명을 주장하는 혁명파든 사회의 하층민을 동원하는 일에는 모두 관심이 없었다. 그들이 하층민을 선동했다가 자신들이 가진 계층의 기득권을 빼앗기게 돌까봐 두려워했기 때문이라고 해도 크게 빗나간 분석은 아니지만, 사실 그들이 더욱 걱정했던 것은 하층민들을 선동함으로써 사회 질서가 받게 될 충격이었다."

사실 역사적으로 중국의 농민 반란은 그 파괴력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막강했다. 당장에 태평 천국 운동을 통해 나타난 농민 반란의 위력은 가공할 지경이었으니, 신해혁명의 주도세력은 농민 혁명이라는 모습으로 혁명이 전개되기를 바랐던 것이 아니라 근대적 입헌체제라는 정치 혁명으로 사태가 수습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쉽지는 않았다. 군벌의 발호에 따른 권력의 불안정성과 함께, 중국 민중들의 의식수준, 혁명 주도 세력의 형성이 만족스럽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장밍의 책에서 이러한 과정 속의 인물들-북양대신 위안스카이, 사분오열되어 있던 혁명파를 결집시킨 쑨원(孫文), 동북 지역 군벌의 지도자 장쭤린(張作箖) 등-과 만나게 되며, 1911년을 전후로 한 10년의 암살 시대를 목격하게 된다.

뿐만 아니라 장밍은 신해혁명의 과정에서 중국을 문명 국가로 만들겠다는 과도한 의지가 도리어 전통적인 생활 습관에 익숙해 있던 중국 민중들의 저항을 받게 되었다는 점, 1900년 의화단 사건 이후 서양의 시선을 너무 깊이 의식함으로써 중국 자신의 길을 찾는데 시간을 낭비하게 되는 대목도 짚어낸다.

다채로운 역사 드라마의 현장

장밍의 <신해혁명>은 사실 간략하게 그 내용을 압축하고 정리하기 어려울 정도로 신해혁명의 드라마를 다채롭고 풍부하게 보여준다. 그래서 자칫 한참을 읽다가 길을 놓칠 수도 있다. 그래도 흥미진진한 역사 드라마처럼 본다면, 중국 근대사의 내면과 진상에 대해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가령 신해혁명 발발 당시 우창봉기의 주력 부대를 진압했던 리위안훙(黎元洪)같은 인물은 그 됨됨이가 신중하고 인망이 높아 봉기군의 지도자로 추대될 정도였다. 그의 정적들에게는 무능한 자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리위안홍은 애초에는 거의 강압에 의한 것이긴 했으나 봉기 진압 대장에서 봉기 지휘자라는 처지의 변화를 잘 소화냈고 우창봉기 정신을 고수하는 의지를 보였다.

장밍은 그에 대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혁명 이후 그는 성실하고 너그러운 인품으로 여러 정치인들에게 호감을 얻어 공화당과 진보당의 이사장으로 추천받기도 했다. 위안스카이가 황제를 자칭했을 때도, 리위안홍은 그에게 복종하지 않았다. 그는 우창봉기의 지휘자라는 상징성을 훼손하지 않고 조심스럽게 지켜냈던 것이다."

하나의 혁명이 역사의 성취로 남고, 그것이 이후의 역사에 끊임없는 상상력과 에너지를 공급해주려면 그 안에서 실제로 움직였던 인물들의 생생한 모습이 손에 잡혀야 한다. 그와 함께 역사의 흐름이 만들어내는 일의 형세가 하나가 되어가는 과정을 알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장밍의 이 책은 신해혁명 100주년을 기념하는 시기에 일독을 권할 만하다. 중국 인민대학의 역사학 교수인 그의 책을 통해, 우리 자신도 이런 역사 드라마를 종횡무진으로 거침없이 써낼 수 있는지 가늠해보게 된다.

아울러, 2012년이 우리에게 21세기의 100년이 가야할 진로를 정하는 중대한 의미를 지닐 수 있기를 바라는 바이다. 아, 그러면 혹시 신해혁명 대신 '임진혁명'이란 말이 가능해지는 것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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