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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은 유럽, 결혼은 타이, 직장은 인도, 노년은 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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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은 유럽, 결혼은 타이, 직장은 인도, 노년은 스웨덴?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예란 테르보른의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

'코리아 국제 포럼'에서

예란 테르보른(Göran Therborn)의 책을 읽었던 것이 미국 유학 시절 초기였으니 벌써 30년이 다 되어간다. <지배 계급이 권력을 쥐고 있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가?(What Does the Ruling Class Do When It Rules?)>와 <권력의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의 힘(The Ideology of Power and the Power of Ideology)>, 이 두 권은 정치사회학에서 다루는 계급과 이데올로기의 의미를 조명하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던 책이었다.

서울에서 열린 제3회 '코리아 국제 포럼'은 유럽, 라틴아메리카, 아프리카, 인도 등 여러 나라의 진보적인 학자들을 초청, 오늘날 인류가 직면한 지구적 위기에 대하여 의미 있는 토론을 벌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반대 운동이 펼쳐지는 긴박한 상황에서 이 포럼이 제대로 주목받지 못했으나, 그 내용으로 들어가 보자면 오늘의 정세에 더욱 필요한 모임이었다.

이슬람 지역에서 일어나는 민주화 운동과 유럽 경제 위기에 대응하는 저항 운동 그리고 미국 뉴욕의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에 이르는 일련의 움직임은 우리의 현실과 결코 분리될 수 없는 세계적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코리아 국제 포럼'은 그런 의미에서 이와 같은 지구적 정세를 전반적으로 살펴보면서 자본주의의 폭력, 인간성에 대한 자본주의의 공격, 공적 자산에 대한 유린, 다른 세계에 대한 정치적 상상력과 지구적 연대를 논의하는 귀중한 자리였다.

예란 테르보른을 직접 만난 자리가 바로 이 '코리아 국제 포럼'에서였다. 스웨덴 출신으로 케임브리지 대학 사회학과 명예교수로 있는 그는 70세의 나이(1941년생)를 무색하게 할 지력과 정력으로 오늘날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자본주의의 야만에 대한 저항과 새로운 선택을 명료한 어법으로 강조해나갔다.

복지 국가이기 때문에 위기 돌파력 가져

테르보른은 유럽의 좌파 정당이 신자유주의의 해독을 극복하지 못하고 일정하게 타협한 결과, 결국 청년 세대들이 들고 일어나는 상황이 벌어졌다면서 이들 세대의 열망과 지향점을 정확히 파악하여 정치화해나가는 일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그의 논지는 우리의 상황과도 일정하게 맥을 같이 한다는 점에서 관심을 끌었다.

특히 스웨덴의 복지 국가를 설명할 때, 복지 국가이기 때문에 도리어 지금 진행되는 유럽 경제 위기에서 비켜날 수 있다고 한 대목은 위기 상황에서 복지 국가는 재정 부담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식의 논리를 정면으로 반박한다는 점에서 청중들의 주의를 집중시켰다. 사회 전체가 자신의 안전망 구축에 우선순위를 두는 체제가 사적 자본의 이해를 우선하는 체제를 이긴다는 현실적 사례가 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니는 논지가 아닐 수 없었던 것이다.

세계사 전체의 흐름 알기 쉽게 정리

▲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예란 테르보른 지음, 이재영 옮김, 홍시 펴냄). ⓒ홍시
12월 1일 예란 테르보른과 만난 날 바로 나온 <다른 세계를 요구한다>(이재영 옮김, 홍시 펴냄)는, 그렇지 않아도 학생들에게 세계 역사의 전반적 흐름과 그 구조를 단시간에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교재를 찾던 중에 발견한 매우 적절한 책이었다. 원서는 로 우리가 사는 세계의 역사적 형성 과정과 그 내면의 구조를 쉽게 알고 싶은 이들을 위해 쓴 저서이다.

그런 까닭에 이 책은 복잡한 이론이나 논쟁보다는 처음부터 끝까지 그대로 쭉 읽어나가면 지금까지의 문명이 어떻게 만들어져 우리의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규정하고 있는지에 대한 전체적인 그림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 한 권을 기본 교양의 차원에서 통독하고 소화해 나간다면 세계사 전체의 흐름과 오늘날의 국제 정세 전반에 걸친 이해의 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세계 체제론이 집중적으로 분석했던 자본주의의 유기적 구조와 세계적 맥락에 대한 이해 그리고 최근 역사학에서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세계사(World History)의 성과를 융합적으로 정리한 테르보른은 자신의 방법론을 "사회 문화 지질학(Sociocultural geology)"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역사의 각 지층이 쌓여서 오늘의 형성하고 있다는 점을 주시한 결과이며, 그로써 만들어진 사회 문화적 구조 속에 담겨 있는 일종의 유전자를 파악해내려는 노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테르보른의 책을 읽으면, 고대로부터의 세계 문명사의 전 과정이 어떤 경로를 통해 발전하고 서로 교류, 융합해 나갔는지, 어떤 갈등과 충돌의 과정을 거쳐 근대적 패권이 성립되었는지 그리고 누가 이러한 세계 역사의 무대에 등장해서 주된 흐름을 이끌고 나갔는지를 정리할 수 있다.

가령 그는 중국, 인도, 서아시아의 고대 문명이 어떻게 서로 만나고 합쳐지고 갈라지면서 그 당시의 세계화를 성취해냈는지, 그 이후 자본주의 체제의 성립 과정에서는 또 어떤 특징을 가진 세계화의 현실이 나타났는지를 주목한다. 이와 함께 이러한 노력과 역사를 바라보는 시선은 단지 거대한 구조에 대한 역사 사회학적 이해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간의 인생이 거치는 경로와 겹치면서 어떤 현실과 의미를 지니는지도 추적해냈다.

다시 말해서 한 인간이 출생하고 성장하고 늙어가는 과정과 오늘날 우리가 도달한 문명의 체계가 서로 어떻게 어우러져서 우리의 삶을 규정하고 있는지를 밝혀나간 것이다. 이는 결혼, 가족, 성 등의 문제와 우리의 현실이 서로 어떻게 얽혀 있는지를 보게 하는 동시에, 보편적인 인간의 삶에서 미래는 어떤 가능성을 열어주게 될 것인지를 상상하게 해준다.

테르보른에 따르면, 인류사는 4세기에서 8세기에 걸쳐 주요한 문명의 중심이 설정되고, 이것이 초문화적 교류와 지구적 움직임을 만들어 냈으며 15세기 말과 16세기에는 유럽 문명이 아메리카 대륙을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가 격돌하면서 지구적 패권이 결정되고 이후 영국의 자본주의로 말미암아 교역의 확대와 자본의 지배가 성립되었으나 이 시대는 결국 전례가 없는 규모의 학살로 마무리 지어졌다는 것이다.

우리가 바라는 이상적인 생애란?

그 다음의 시기에 인류는 제국주의 시대의 종말과 함께 자본주의의 역학에 따른 새로운 단계의 세계화 시대로 진입, 인류 사회를 하나로 통합해왔지만 이 역시도 이제 저항에 부딪혀 대안적 세계를 요구하는 지점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그는 21세기를 살아가는 인간에게 가장 이상적인 생애의 과정은 다음과 같은 상상의 세계가 아니겠는가라고 말한다.

먼저, 안전하게 태어나서 북서유럽의 비권위주의적 부모로부터 양육을 받는다. 그리고 학업 성취도가 세계 최고이면서, 부모의 재산과는 무관하고, 주입식 교육이 전혀 없는 핀란드식 국립 학교에 다닌다. 이어서 세계 각지를 여행할 능력을 갖춘 북서유럽의 자유로운 청년으로 활동한다. 옥스브리지(Oxbridge, 옥스퍼드 대학과 케임브리지 대학 )대학에서 교육을 받고, 나와는 다른 문화에서 온 훌륭한 파트너를 만나, 아시아의 어느 곳에서 잊을 수 없는 결혼식으로 멋지게 청년기를 마감한다. 그 다음에는 동아시아(또는 인도)의 대도시에서 흥미진진하게 열심히 일하며 높은 보수를 받는 성년기를 보낸다. 그러고 나면 고요한 은퇴가 찾아온다. 그때는 제네바나 밴쿠버같이 조용하고 아름다운 네트워크가 잘 짜인 곳에서 산다. 마지막으로 노인 요양을 잘 받으려면 스칸디나비아로 가는 게 좋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인생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인류가 지금까지 걸어온 길을 보면 한편으로는 야만과 폭력 그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이를 극복하기 위해 치열하게 쟁투해온 과정이라는 걸 알 수 있고 그 가운데 일부는 꽤나 성공한 것을 우리는 부인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결국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여전히 열려 있는 셈이다. 역사가 주는 교훈과 지구적 현실에서 현재 진행형으로 작동하고 있는 모델이 있으니 말이다.

젊은 세대에게 일독을 권한다. 이들에게 가르칠 것이 있는 세대에게도 일독을 청한다. 읽기 쉽고 사실관계가 정밀하게 잘 요약되어 있어서 오늘날 지구촌의 현실을 파악하는데 매우 유용한 책이다.

무엇보다도 자본주의의 야만에 맞서서 새로운 세계를 요구하는 운동이 지구적 차원에서 펼쳐지고 있는 이때에 그의 책은 하나의 거대한 지도처럼 우리 손에 쥐어지는 안내서이다. 정말 행복하고 제대로 살고 싶은 이들의 생애에 무엇이 권리로 주어져야 하는지, 함께 생각해볼 수 있는 화두가 잡힐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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