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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경고 "아시아 인민의 적은 '국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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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전의 경고 "아시아 인민의 적은 '국가'다!"

[프레시안 books] 고토쿠 슈스이의 <나는 사회주의자다>

여기 600쪽이 넘는 두툼한 책이 있다. 비록 길지 않은 생애였지만 한 인간이 평생에 걸쳐 발표한 글들을 모아놓은 책이다.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 "사회주의 신수(神髓)" 등 각 장(章)의 제목도 범상치 않다. 이론적인 글들이 있는가 하면, 격문도 있다.

그런데 이 두꺼운 책에서 유독 우리의 눈길을 끄는 것은 그러한 수많은 글들 사이에 자리한 한 사진이다. 그것은 안중근 의사의 사진이다. 그 사진에는 한시가 한 수 적혀 있다.

捨生取義 생을 버리고 의를 취하고
殺身成仁 몸을 죽이고 인을 이루었네.
安君一擧 안중근이여, 그대의 일거에
天地皆振 천지가 모두 전율했소.


사진 밑에 실린 설명에 따르면, 이것은 놀랍게도 1910년 초에 일본에서 발행된 엽서다. 1910년 초라면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이 있고 나서 불과 몇 달 뒤다. 한데 다른 곳도 아닌 이토 히로부미의 나라 일본에서 안 의사를 '살신성인'의 위인으로 기리는 엽서가 만들어진 것이다.

물론 일본 당국은 이 엽서의 발매를 금했다. 그래서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체류하던 일본인들이 국외에서 제작하여 일본 국내로 밀반입했다. 이 사진이 실린 책 <나는 사회주의자다>(임경화 편역, 박노자 해제, 교양인 펴냄)의 저자인 고토쿠 슈스이(幸德秋水)는 바로 그 해에 천황 암살 모의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그의 소지품들 중에서 이 엽서가 발견되었다.

사실 이 엽서에 실린 한시를 지은 이가 고토쿠 슈스이, 그 사람이었다. 그리고 자기네 나라 원로대신을 암살한 조선의 젊은이를 기리려고 굳이 태평양을 넘나들며 엽서를 인쇄한 이들은 그의 동지들이었다.

도대체 이 일본인들은 왜 안중근 의사를 원수로 여기기는커녕 마치 전우처럼 추념했던 것일까? 이 모든 일의 중심에 섰던 고토쿠 슈스이는 누구인가? 왜 그는 하필 안중근 의사의 의거가 있던 다음해, 일본이 조선을 최종적으로 식민지로 집어삼킨 그 해에 자기 나라의 차디찬 감옥에 갇혀야 했던 것일까?

이 물음들에 대한 고토쿠 슈스이 본인의 답변이 이 책 <나는 사회주의다>에 담겨 있다.

조선인의 운명과 묘하게 얽혀 있던 사회주의자 고토쿠 슈스이

▲ <나는 사회주의자다>(고토쿠 슈스이 지음, 임경화 편역, 교양인 펴냄). ⓒ교양인
1871년생(로자 룩셈부르크와 동갑이다)인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 사회주의 운동의 선구자들 중 한 명이다. '일본의 루소'라 불리는 자유주의자 나카에 조민의 제자인 그는 1890년대 말부터 사회주의와 노동 운동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했다.

일본인들에게 1890년대 말은 어떠한 시기였던가. 1880년대에 일본 사회를 뒤흔들고 10대의 고토쿠 슈스이를 들뜨게 만들었던 자유당의 입헌 민주주의 운동이 보수파에게 흡수되어버린 시기였다. 마침 막 시작된 자본주의 산업화의 결과로 노동 계급이 서서히 모습을 드러내던 시기였다. 그리고 또 하나,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이 제국주의 대열에 본격 합류한 시기이기도 했다.

이 모든 시대 상황이 청년 고토쿠 슈스이가 사회주의 쪽으로 기울도록 만들었다. 자유당의 훼절을 바라보며 그는 유신 운동, 입헌 운동의 뒤를 잇는 새로운 사회 변혁 운동이 필요하다고 절감했다. 그리고 그 불씨를 당시 막 등장하던 노동 운동에서 찾으며 그 이념적 기반인 사회주의를 수용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사회주의 사상은 그에게 전쟁 광기에 휩싸인 일본 사회를 비판할 유효한 무기이기도 했다. 이러한 무기를 갖춘 덕분에 그는 아직 러일 전쟁이 일어나기 4년 전인 1901년에 "20세기의 괴물 제국주의"를 발표할 수 있었다. (이 책의 서문은 함석헌의 스승이기도 한 기독교 평화주의자 우치무라 간조가 썼다.)

이 대목에서 우리는 조선인의 운명과 고토쿠 슈스이의 생애가 묘하게 얽혀 있었다는 것을 감지하게 된다. 1894년 동학 농민 혁명이 일본의 개입으로 진압될 때 그 일본 국내에서 고토쿠 슈스이는 보수파와 자유당 사이의 야합에 좌절하며 새로운 대안을 찾아 나섰다. 그리고 한반도를 둘러싼 러시아와 일본의 무력 충돌 가능성이 높아질수록 그는 제국주의 성토의 목소리를 드높였다.

이런 인물인데도 정작 한국에는 그의 이름이 그렇게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아마도 반공 체제에서 거명하기 껄끄러운 '좌파' 인물이었기 때문에 그랬을지 모른다. 하지만 반공주의의 전성기에는 그랬다 치더라도 1980년대 말 이후에는 소개의 기회가 없지 않았다. 그런데도 고토쿠 슈스이는 우리에게 여전히 낯선 이름으로 남아 있다. 한국 좌파 지식계의 어떤 치부를 드러내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이번에 '동아시아 사회주의의 기원, 고토쿠 슈스이 선집'이라는 부제를 달고 나온 <나는 사회주의자다>는 이런 부끄러운 간극을 뒤늦게나마 메워준다. 이 책은 신채호 등 20세기 벽두 조선 지식인들이 처음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장광설'을 비롯해서 고토쿠 슈스이의 중요한 저작, 논설들을 망라하고 있다. 그의 생애와 사상을 한 눈에 담는 데 더없이 좋은 내용과 체계를 갖추었다 하겠다.

왜 그들은 아나키스트가 되어야만 했던가?

하지만 이것만으로 100여 년 전 외국 사상가의 글들을 읽을 이유를 대기에는 좀 부족한 감이 있다. 고토쿠 슈스이는 일본에 사회주의를 '소개'한 인물이지 그것을 일본 사회에 맞게 '전개'한 인물은 아니다. 모든 초기 소개자가 다 그렇듯이, 그의 글들에서도 어떤 독창적인 착상이나 이론을 발견하기는 어렵다. 말하자면 레닌이나 그람시의 저작을 읽을 때의 기대를 갖고 고토쿠 슈스이의 글들을 읽을 수는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고토쿠 슈스이가 100년 전 일본인들을 위해 집필한 개론서를 21세기 한국인들의 사회주의 입문서로 활용할 수도 없다. 통일 직후의 독일 제국이나 러시아 차르 체제를 사례로 들며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성을 역설하는 글이 21세기인에게 설득력을 갖기는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문헌은 사상사 연구자의 흥미로운 검토 대상은 될 수 있을지 몰라도 보통의 독자가 쉽게 손에 들 책은 못된다.

그러나 이런 점들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뒤늦은 한국어본 고토쿠 슈스이 선집이 사상사 전문가들 외의 독자들에게 읽힐 가치를 충분히 지니고 있다고 단언한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이 책의 후반부 3분의 1 정도를 차지하는 만년의 논설들 때문이다.

그 중의 한 글인 "앨버트 존슨에게 보내는 편지"(1905년)에서 고토쿠 슈스이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사실 나는 처음에 마르크스파 사회주의자로서 감옥에 들어갔지만, 출옥할 때에는 급진적 무정부주의자가 되어 돌아왔습니다." (383쪽)

'나는 사회주의자다'라는 제목이 무색하게 자신이 '사회주의자'가 아니라 '무정부주의자(아나키스트)'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사회주의'를 아나키즘까지 포용하는 넓은 맥락에서 사용한다면, 책 제목이 문제될 것은 없다. 하지만 일반적인 용어법을 적용해서 보다 엄밀하게 말한다면, 고토큐 슈스이 선집의 올바른 제목은 '나는 아나키스트다'이다.

그렇다. 고토쿠 슈스이는 1905년을 전후하여 아나키스트로 전향했다. 그리고 지금도 그는 일본 사회주의의 선구자이면서 동시에 일본 최초의 아나키스트로 기억되고 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왜 하필 그 시점이 1905년인가 이다. 이 대목에서 그의 삶은 다시 한 번 조선인들의 운명과 엮인다.

1905년은 바로 일본이 한반도를 둘러싸고 러시아와 벌인 전쟁에서 승리한 해다. 이 전쟁으로 인해 러시아에서는 제1차 러시아 혁명이 시작된 반면 일본은 조선의 식민지화를 착착 진행하게 된다. 고토쿠 슈스이는 바로 이 상황 앞에서 한편 절망하며 다른 한편 희망의 서광을 보았다. 점점 더 제국주의의 야수가 되어가는 조국에 환멸을 느끼면서 동시에 러시아 혁명에서 노동자 직접 행동(총파업)에 의한 혁명이라는 대안을 발견한 것이다.

사실 그 전까지만 해도 고토쿠 슈스이는 천황제 국가 자체를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는 사회주의다자>에도 실려 있는 "사회주의 신수"라는 저작(1903년)에서 그는 사회주의와 '국체'(천황제)가 서로 양립 가능하다고 주장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1905년 이후에도 이런 입장을 지속할 수는 없었다. 고토쿠 슈스이는 메이지 유신으로 들어선 일본 근대 국가를 전면 부정하고 대중 직접 행동으로 이를 전복해야 한다는 아나키즘 노선을 제창하는 것으로 당대의 상황에 답했다.

이때부터 1910년 이른바 '대역사건'으로 체포될 때까지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의 활동이 계속된다. 내가 보기에 이 시기야말로 그의 가장 빛나는 시절이었고, 따라서 <나는 사회주의자다>에서 현대의 독자들이 읽어볼 만한 부분, 꼭 읽어야 할 부분이 바로 이 시기의 논설들이다.

이 시기에 고토쿠 슈스이의 조선관도 변화한다. 그 전까지만 해도 그는 조선인들을 '동정'할망정 그들을 '연대'의 상대로 바라보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나키스트로 회심하고 나서 그에게 조선인들은 일본 국가를 전복하는 데 함께 힘을 합쳐야 할 동아시아의 동지들로 다가오게 된다. 그와 그의 동지들이 안중근 의사의 사진을 엽서로 발간하며 추념한 이면에는 바로 이러한 시각이 자리하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주의적 시각에 따라 고토쿠 슈스이는 1907년 일단의 중국 혁명가들과 함께 '아주화친회'를 결성하기에 이른다. 이 단체는 동아시아 최초의 반제국주의 국제 연대 조직이었다. 훗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며 삼균주의를 창시하게 되는 조소앙도 이 조직의 참가자 중 한 명이었다.

오늘날 그들 아나키스트들의 의미

1910년 6월, 고토쿠 슈스이는 천황 암살을 모의했다는 혐의로 구속된다. 그로부터 2개월 뒤, 대한제국이라는 나라가 지도 위에서 사라지고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가 된다. 다시 그 다음해, 고토큐 슈스이는 결국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다.

그러고 나서 정확히 100년이 흘렀다. 100년 전의 그들이 미처 예상치 못했던 숱한 변화들이 동아시아를 휩쓸었다. 하지만 고토쿠 슈스이와 그의 동지들이 아나키즘을 선택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그 한 가지 문제는 100년 전과 다름없다. 그것은 국가다.

동아시아만큼 이 근대 국가라는 질곡이 인민을 옥죄는 곳도 달리 없다. 일본에는 천황제 국가의 유제가 여전하다. 중국에는 '사회주의'를 내건 거대 국가가 실상은 자본주의의 버팀목 역할을 한다. 한반도에서는 하나도 아닌 두 개의 국가가 일촉즉발의 대결 상황을 60년 넘게 지속하고 있다. 100년 여정의 중간 기착지가 이것이다. 이것은 그야말로 100년 전 고토쿠 슈스이가 맞부딪혔던 일본 국가라는 현실의 지속 아니 그 확대판이 아닌가.

그렇기에 '아나키스트' 고토쿠 슈스이는 우리의 동시대인이다. 고토쿠 슈스이만이 아니다. '아(我)와 비아(非我)의 투쟁'의 악무한적 반복에 대한 해답을 아나키즘에서 찾은 신채호도 있다. 노자, 장자의 원형적 아나키즘으로부터 출발해 국가주의를 쉼 없이 비판한 함석헌도 있다. 심지어는 마오쩌둥조차 젊은 시절에는 국가가 아닌 '인민의 대연합'을 제창한 바 있다.

비록 이러한 선각자들의 외침이 대안의 윤곽까지 제시해주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우리의 새로운 출발점을 환기시켜주는 것만은 분명하다. '나는 사회주의자다'라는 다소 어긋난 제목을 단 이 동아시아 아나키즘의 고전이 이 시대의 필독서 중 하나여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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