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도종환의 단아한 눈매 속에는 단조의 가락이 스며있다. 그러나 그건 단지 슬픔 또는 쓸쓸함으로 머물지 않고, 앞을 가로막고 선 벽을 천천히 또는 유영하는 듯한 움직임으로 허무는 힘을 갖는다. 벽을 허물지 못한다면 그걸 타고 넘는 느긋한 저력도 지닌다. 그래서 그의 시 '담쟁이'는 우리의 가슴에 희망의 깃발 하나를 넌지시 꽂아준다.
"저것은 벽 / 어쩔 수 없는 벽이라고 우리가 느낄 때 / 그때 / 담쟁이는 말없이 그 벽을 오른다./ 물 한 방울 없고 씨앗 한 톨 살아남을 수 없는 / 저것은 절망의 벽이라고 말할 때 / 담쟁이는 서두르지 않고 앞으로 나아간다. / 한 뼘이라도 꼭 여럿이 함께 손을 잡고 올라간다. / 푸르게 절망을 다 덮을 때까지 / 바로 그 절망을 잡고 놓지 않는다. / 저것은 넘을 수 없는 벽이라고 고개를 떨구고 있을 때 / 담쟁이 잎 하나는 담쟁이 잎 수천 개를 이끌고 / 결국 그 벽을 넘는다."
이렇게 침묵 속에서도 이루어지는 연대의 아름다움을 노래한 시인은 의외의 현실이 닥치자 여전히 당황하지 않고 침착하게 이 시대를 다독인다. 지난 해(2010년) 윤동주 상을 받은 시 가운데 하나로, 그의 시집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창비 펴냄)에 담긴 '지진'이라는 제목의 작품이 있다. 이 시는 가끔 내가 강연에서 읽으면 반드시 '아' 하면서 눈물을 닦는 이들을 목격하게 되는, 도종환의 진한 육성이다.
지진의 한복판에서
▲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도종환 지음, 창비 펴냄). ⓒ창비 |
10년 민주 정부의 시절을 보내고 나서 마주한 괴물 권력 앞에서 우리는 이 지진의 의미가 무엇인지 절감한다. 시인은 그 지진의 한복판에서 주저앉지 않는다.
"소중한 사람을 잃고 폐허만이 남았다. / 그러나 황망함 속에서 아직 우리 몇은 살아남았다. (…) 사랑하는 이의 무덤에 새 풀이 돋기 전에 / 벽돌을 찍고 사원을 세우고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 (…) 좀 더 높은 언덕에 올라 / 폐허를 차분히 살피고 / 우리의 손으로 도시를 다시 세워야 한다 (…) 과거에서 배울 수 있는 건 모두 배워야 한다 /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단 말은 그만하기로 하자 (…) 더 튼튼한 뼈대를 세워야 한다 / 남아 있는 폐허의 가장자리에 삽질을 해야 한다."
"아이들을 씻겨야 한다"는 대목에 이르면, 듣는 이들이 눈시울을 붉힌다. "삽질을 해야 한다"를 읽으며 내가 '삽질의 본래 의미는 이런 것'이라고 하면 다들 박장대소한다. 벽돌을 찍어 더 굳건한 뼈대를 세울 저력을 기르고, 사원을 세워 정신의 가난을 이겨내는 힘을 키우며, 아이들을 씻겨 미래의 꿈과 재목을 다듬는 거다. 그리고 폐허가 된 땅을 버리고 떠나는 것이 아니라 삽자루 하나씩 들고 지진이 망가뜨려놓은 시대를 기운차게 복구하는 거다.
역사를 기록하는 시인
용산의 한 구석에서 사람들이 불에 타 죽고, 사제들이 깡패의 주먹을 맞고 땅바닥에 고꾸라졌던 그 여름의 참혹했던 풍경을 시인은 '그 해 여름'에서 놓치지 않고 기록한다. 그건 지진의 진상을 보여주는 한 장면이었다.
"숲의 나무들은 진종일 허리를 구부리고 울었다. (…) 나라에 큰 슬픔이 있었던 초여름이었다. / 연초부터 벼랑으로 몰린 사람들이 / 망루를 오르다 불에 타죽고 / 죽은 몸은 다시 냉동되어 여름까지도 / 망각의 상자 속에 갇혀 이승에 방치되어 있었다. / 경찰과 깡패가 한 개의 방패 뒤에 저희 / 그림자를 가리고 발맞추어 지나가고 나면 / 신문은 무기가 된 활자의 볼트와 너트를 / 지나가는 사람들에게 마구 던졌다. (…) 슬퍼하는 이는 넘쳐 났으나 / 잘못했다고 말하는 이는 없는 여름이 지나가고 / 숲의 나무들만 여러 날씩 몸부림치며 울었다. (…) 곳곳에서 길이 끊어지거나 후퇴하는 여름이었다."
그렇게 후퇴가 강요된 여름, 이후 우리는 또 하나의 죽음들을 잊지 않고 전하는 시인의 목소리를 듣게 된다. 제목은 '카이스트'다. 시인은 망각의 상자 속에 죄수처럼 가두어지는 그 모든 아픔을 내버려 두지 않는다.
"젖은 꽃잎 비에 다시 젖으며 / 수직으로 떨어져 내렸다. / 우리는 이 학교에서 행복하지 않습니다. / 남아 있는 꽃잎들이 그렇게 말하며 울고 있었다. / 우리도 이 세상에서 행복하지 않다. / 카이트스 울타리 밖도 여전히 카이스트 (…) 카이스트보다 더 어린 꽃들도 불행하고 / 카이스트보다 더 진도가 나간 인생들도 / 이 밤 혼자 쓴 잔을 마시며 / 빗발 몰아치는 숲의 나무 잎을 보고 있다. / 우리는 겨우 이런 세상을 만들어 놓은 것이다. / 흔들리는 나무 위에서 하루하루 끔찍한."
이런 여름과 이런 카이스트 울타리 밖의 카이스트를 제대로 이겨내지 못하고 있는 우리의 실종된 자아는 도대체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일까?
'비둘기'라는 시다.
"양식을 하늘에서 찾지 않은 지 오래 되었다. / 광장의 돌바닥 위에 먹이가 뿌려지면 / 일제히 날개를 펴고 지상으로 날아든다. / 사람의 손때가 묻은 먹이는 푸석푸석하고 따뜻했다. / 벌레처럼 꿈틀거리는 긴장과 저항도 없고 / 씨앗을 지키는 떫고 시큼한 과육도 없는 / 밋밋한 먹이를 향해 전속력으로 / 부리를 쪼아대는 습관이 어느새 몸에 깊이 배었다."
그래서 이 비둘기들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을까?
"날개는 오르는 일보다 쏜살같이 내려가는 비행에 / 길들여져 있다. 하늘을 다 잊은 건 아니라고 /자신에게 주문처럼 되뇌어보지만 (…) 도시의 건물 아래쪽 허공만을 제 영토로 축소시킨 채 / 크고 푸른 하늘은 접어버린 비둘기 / 무리지어 몰려다니는 비둘기, 비둘기 떼"
날개 본연의 임무가 도리어 낯설어진 존재는 열심히 몰려다니고 열심히 먹어대지만 그들의 영토는 어느새 하늘이 아니다. 그 머리 위에 쇠 항아리를 덮어도 이미 하늘을 보아버린 이들의 치열한 기억도 이들에게는 없다. 이들의 영혼은 사막이 된 지 한참이나 지났다. 시인은 그걸 똑바로 응시한다.
"마른 바람이 모래 언덕을 끌고 대륙을 건너는 / 타클라마칸 그곳만 사막이 아니다. / 황무지가 끝없이 이어지는 시대도 사막이다. / 저마다 마음을 두껍고 둔탁하게 바꾸고 / 여리고 여린 잎을 마침내 가시가 되어 / 견디는 일 말고는 아무 것도 생각할 수 없는 곳 / 그곳도 사막이다."
이 시의 제목은 당연히 '사막'이다.
꽃밭 속에 꽃들이
그런데 어찌하여 시인은 황량하고 거대한 역사의 모래바람을 온 몸으로 맞으면서도 인간의 아름다움을 지치지 않고 노래할 수 있을까? 그건 그가 태어나 처음 본 것이 특별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분꽃 씨만한 눈동자를 깜빡이며 /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았을 때 / 거기 어머니와 꽃밭이 있었다. / 내가 아장아장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 내 발걸음마다 채송화가 기우뚱거리며 따라왔고 (…) 왜 내가 처음 본 것이 검푸른 바다 빛이거나 / 짐승의 윤기 흐르는 잔등이 아니라 / 과꽃이 진보라빛 향기를 흔드는 꽃밭이었을까. / 민들레만 하던 내가 달리아처럼 자라서 / 장 뜰을 떠나온 뒤에도 꽃들은 나를 떠나지 않았다. / 내가 사나운 짐승처럼 도시의 골목을 치달려 갈 때면 / 거칠어지지 말라고 꽃들은 다가와 발목을 잡았다. (…) 지금도 내 마음의 마당 끝에는 꽃밭이 있다. / 내가 산맥을 먼저 보고 꽃밭을 보았다면 / 꽃밭은 작고 시시해보였을 것이다. (…) 내가 처음 눈을 열어 세상을 보았을 때 / 거기 꽃밭이 있었던 건 다행이었다. / 지금도 내 옷소매에 소박한 향기가 묻어 있는 것이."
'꽃밭'이라는 시에서 우린 시인이 딛고 살아온 흙과 꽃 그리고 세월의 냄새를 맡는다. 그러니 도종환이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고 잠언에 수록될 만한 명구를 발설한 까닭이 자명해진다. 그런데 이제 그는 거기에서 한 걸음 더 나간다. '라일락꽃'이라는 제목의 시다.
"꽃은 진종일 비에 젖어도 / 향기는 젖지 않는다. / 빗방울 무게도 가누기 힘들어 / 출렁 허리가 휘는 / 꽃의 오후 (…)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 꽃은 젖어도 빛깔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니 살면서 비가 너무 내린다고 슬퍼하지 말자. 먼저 꽃을 피워내면 그 다음은 향기로 존재할 수 있는 길이 열리니까.
사실 시인이 역사의 폭풍이 몰아치는 광장 한복판에 처음부터 들어가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을 게다. 그가 정작 살고 싶었던 것은 아마 이런 거였지 않았을까 싶다.
"바이올린 켜는 여자와 살고 싶다. / 자꾸만 거창해지는 쪽으로 / 끌려가는 생애를 때려 엎어 / 한 손에 들 수 있는 작고 단출한 짐 꾸려 / 그 여자 얇은 아래턱과 어깨 사이에 쏙 들어가는 악기가 되고 싶다. / 왼팔로 들 수 있을 만큼 가벼워진 / 내 몸의 현들을 그녀가 천천히 긋고 가 노래 한 곡 될 수 있다면 / 내 나머지 생은 여기서 접고 싶다. (…)" ('바이올린 켜는 여자' 중)
'통영'에 가서도 시인은 자신이 정작 바라고 기뻐하는 것이 무엇인지 발견한다.
"당포 앞바다는 나전칠기 빛이었다"로 시작하는 그 첫 구절이 가슴을 저미게 한다. 아, 이 서늘한 느낌은 언제 적에 있었던 것인가?
시는 이어진다.
"섬 사이로 또 섬이 있었다. 굳이 외롭다고 말하는 섬은 없었다. 금이 가지 않는 바위는 없었다. 그렇다고 상처를 특별히 내세우는 벼랑은 없었다. 전란도 있고 함정도 있고 곡절 많은 날들도 있었지만 그게 세월이었다. / 윤이상도 이중섭도 그걸 보고 갔을 것이다 그들이 바라보았을 저녁바다를 나도 망연히 바라본다. 통영에는 갯벌이 없다. 바위 사이를 비집고 다니며 많이 움직여야 먹이를 구할 수 있는 건 어류들만이 아니었다. / 통영에 다녀온 뒤로는 해수욕장이 있는 늘씬한 해안보다 고깃배가 달각달각 모여 있는 바닷가 마을이 좋았다. 밀려 오른 바다 밀려가는 세월을 발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누워있는 섬들이 나는 좋았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
그렇게 우리의 시인도 세월의 강이 몸속에 흐르는 걸 느끼고 있었다. 그러다보니 어느새 하루하루가 '막차'다.
"오늘도 막차처럼 돌아온다. (…) 오늘도 많이 덜컹거렸다. / 급제동을 걸어 충돌을 피한 골목도 있었고 / 아슬아슬하게 넘어온 시간도 있었다. / 그 하루치의 아슬아슬함 위로 / 초가을 바람이 분다."
나는 그가 보여준 막차 버스 티켓을 여러 차례 휴지가 되게 한 바 있다. 그렇게 밤을 새는 시간으로 낡아가는 육신과 더더욱 은화처럼 맑아져가는 정신이 술잔 속에서 공존할 수 있을까를 시험해보려 했으나 그건 애초부터 성공할 수 있는 프로젝트가 아니었다. 그러니 그 첫 구절이 "오늘은 막차를 놓쳤다"로 시작되는 것도 하나 더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면서 속으로 웃었다. 시의 뒤는 예컨대 이렇게 이어지는 거다. "아, 또 그 인간 때문이다. 그러나 돌이켜 생각해보니 놓친 건 막차가 아니라 막차인생이었다. 어쩌구"
하루치의 아슬아슬함 위로 부는 초가을 바람에 시인은 "가만히 가을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가을오후') 그리고는 자신의 시계를 들여다본다.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인지 가늠해보는 것이리라. 시계침은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를 가리키고 있었다.
"산벚나무 잎 한쪽이 고추잠자리보다 더 빨갛게 물들고 있다. 지금 우주의 계절은 가을을 지나고 있고, 내 인생의 시간은 오후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와 있다. 내 생의 열두 시에서 한 시 사이는 치열하였으나 그 뒤편은 벌레 먹은 자국이 많았다. / 이미 나는 중심의 시간에서 멀어져 있지만 어두워지기 전까지 아직 몇 시간이 남아 있다는 것이 고맙고, 해가 다 저물기 전 구름을 물들이는 찬란한 노을과 황홀을 한번은 허락하시리라는 생각만으로도 기쁘다."
"이제는 돌아와 거울 앞에 선 누님"만 거울 앞에 돌아오는 것이 아닌가 보다. 또는 시인은 밀레의 <만종> 속에 기도하는 농부가 되어 들판에 내려앉는 우주의 계절을 감사해한다. 그런 영혼에서 태어나는 시는 우리에게 깊고 넉넉한 위로가 된다. 도종환과 그의 시, 그 시를 읽는 이들이 있어 그만큼이라도 이 시대는 경박해지거나 무모해지거나 아니면 거칠어지는 일이 줄어들게 될 것이다. 시인이 사는 마을에 물드는 노을은 쓸쓸하지 않고 오히려 황홀하다.
세 시에서 다섯 시 사이에 서성거리고 있는 이들 모두에게 그의 시는 숲속의 우편배달부가 보낸 고운 그림엽서 한 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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