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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는 하나다?" "천만의 말씀!"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타밈 안사리의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

이슬람이 미국을 시기했다고?

"이슬람은 미국의 부와 미국의 생활양식(way of life)을 시기했다."

9·11 당시 미국 내 지식인 사회의 논평이었다. 그리고 "문명의 충돌론"이 주목받았다. 서방 기독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의 싸움은 이미 오래전 십자군 시대에서부터 시작되었고, 이제 그걸 마무리하는 단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이로써 이슬람은 테러와 동의어가 되고 말았다.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은 이로써 이데올로기적 정당성을 굳혀갔다.

에드워드 사이드는 생전에 바로 이 테러와 이슬람을 동격으로 놓는 서방 언론의 이미지 조작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서구 제국주의의 역사를 조금만 알면, 국가 테러의 주범은 도리어 서구였으며 그 희생자는 이슬람권이라는 그의 주장은 옳다. 뿐만 아니다. 서구 문명이 중세의 중압에서 해방되는 과정에서 결정적인 기여를 한 것은 이슬람권이 번역하고 발전시켜온 그리스 문명의 자산이었다. 과학과 철학의 근대적 발상은 이슬람의 역할이 없이 생각하지 못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여전히 서구 문명이 틀을 짜놓은 방식으로 세계사를 바라보는데 익숙하다. 16세기 이전의 유럽과, 이슬람 문명권 그리고 동아시아를 비교해보면 그 삶의 질에서 엄청난 격차가 존재했다는 역사적 사실도 제대로 교육되지 않는다.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 유럽이 어떤 비극적인 상황에 놓였는지를 명확히 인식하는 경우는 그리 많지 않다. 서구는 언제나 문명의 선두에 서 있었고 그리스-로마로 이어지는 흐름 속에서 지금까지 지속적인 발전을 해온 양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실이 아니다. 아프가니스탄 출신으로 지금은 미국에서 역사 교과서 편집자로 활약한 바 있는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를 인식하는 또 다른 목소리를 우리에게 들려준다. 그것은 서구가 근대 이후 주변화 시켜온 방외(方外)의 문명이 걸어온 역사에 대한 해석이다. 달리 말하자면, 변방으로 밀려난 역사관의 복구를 통해 세계사의 진실을 캐는 작업을 보여주는 시도라고 할 수 있다.

내 안에 네가 있고 네 안에 내가 있다

▲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타밈 안사리 지음, 류한원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 ⓒ뿌리와이파리
어느 누구도 자신을 설명할 때 타자의 존재를 배제할 수 없다. 나는 너와의 관계 속에서 만들어졌으며 너 안에는 또한 내가 있다. 조선의 역사에는 중국과 일본이 들어 있으며, 중국과 일본 역시 다르지 않다. 유럽 중세의 역사 속에 이슬람의 역사가 담겨 있으며 이슬람의 역사에도 거꾸로 유럽의 역사가 들어 있다. 이 관계를 전체적으로 복원하지 않으면 우리는 역사의 실체를 정확히 알 수 없게 된다.

이슬람을 공격 목표로 삼았던 십자군 전쟁은 서구와 동방의 관계에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고, 지중해 교역을 넘어서는 항로 발견이라는 역사적 압박을 형성한다. 이는 이후 아프리카와 대서양 그리고 아메리카와 아시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매우 중요한 요건이 된다. 그 어느 것 하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유기적으로 관련되지 않은 사건은 없다.

그래서 타밈 안사리는 라이프니츠의 단자론, 모나드 개념을 역사에 적용시킨다.

"철학자 라이프니츠는 한때 우주란 모나드들로 구성되었으며, 각 모나드는 특정 관점에서 이해하면 우주 전체이며 각 모나드가 다른 모나드 전부를 포함하고 있다는 사상을 진리라고 상정했다. 세계사란 그와 같다. 특정 관점에서 보면 인류 전체의 이야기이고, 각 역사는 모든 다른 역사를 포함하며 실제의 모든 사건은 중심 내러티브와 관련되어 어딘가에 자리한다."

이런 까닭에 그는 "단일한 공동의 역사 안에 보편적인 인간 공동체를 건설하기 위해 모든 역사를 수집하는,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업"을 강조한다. 어느 하나의 역사로 인류의 모든 경험을 설명할 수도 없고 또 그 어느 하나의 역사가 그 자신의 역사마저도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가령, 한국사를 이해하자고 하면서 중국사나 일본사에 무지하다면 그건 이미 한국사 이해를 포기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미국사를 알지 못하면서 한국의 근·현대사의 경험을 제대로 파악한다는 것은 또한 성립되지 못한다. 그의 말대로 영원히 끝나지 않을 과업이다. 그래도 해야 한다.

두 개의 역사, 그 틀

이 나라의 역사 교육에서 이슬람 역사의 이해는 거의 전무하다시피하다. 타밈 안사리는 바로 이러한 교육의 틀은 이렇게 짜여 있다고 적시한다.

"1. 문명의 탄생(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2. 고대(그리스와 로마) 3. 암흑 시대(그리스도교의 부상) 4. 부활 : 르네상스와 개혁 5. 계몽(탐험과 과학) 6. 혁명(민주주의, 산업, 기술) 7, 민족 국가의 부상 : 제국을 향한 투쟁 8. 제1, 2차 세계 대전 9. 냉전 10. 민주주의적 자본주의의 승리."

타밈 안사리는 이러한 기존의 서구적 역사관의 틀과는 다른 이슬람 역사의 시선을 이렇게 정리한다.

"1. 고대 :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 2. 이슬람의 탄생 3. 칼리프 조 : 보편적 통일체를 향하여 4. 분열 : 술탄 제국의 시대 5. 재앙 : 침략자들과 몽골족 6. 부활 : 3대 제국의 시대(오스만, 사파비, 무굴) 7. 서양의 동방 침투 8. 개혁 운동 9. 세속 근대주의자들의 승리 10. 이슬람주의의 반발."

이 두 개의 역사관은 동아시아나 동남아시아 또는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의 경험이 빠져 있다는 점에서 여전히 문제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역사적 줄거리를 가진 이야기가 있다는 점, 그리고 이 다른 이야기가 이미 기존의 주도권을 가지고 있는 역사 인식과 대등하게 논의되고 유기적 관계를 만들어가는 대상이 되어야 한다는 점만을 받아들인다 해도 세계사의 그림은 상당히 달라질 수 있다.

<이슬람의 눈으로 본 세계사>(류한원 옮김, 뿌리와이파리 펴냄)는 이슬람 문명권의 역사적 탄생과 그 성장, 그리고 변화에 대한 서술이다. 이는 앨버트 후라니의 <아랍인의 역사>(김정명·홍정미 옮김, 심산 펴냄)의 큰 틀과 유사한 시각을 보이면서도 저자가 아프가니스탄 출신이라는 점이 주목되며, 사실 이슬람권 문명이 아랍만이 아니라 페르시아, 투르크를 비롯해서 북아프리카에 이르는 광범위한 요소를 지니고 있다는 점에서 좀 더 진전된 역사인식을 보여준다.

이슬람, 하나의 거대한 사회 프로젝트

이와 함께 이슬람 문명권의 성장사가 진행되는 동안 유럽은 어떤 처지에 있었는지도 주시하면서 이 두 역사가 하나의 틀 속에 만나고 융합되고 갈등하면서 새로운 역사 전개가 펼쳐지는 것을 잘 정리해내고 있다. 특히 저자는 이슬람 문명의 시작을 설명하면서 이는 단지 어느 특정 지역의 문명이라는 관점이 아니라, "새로운 사회 프로젝트"의 가동이라는 시각을 통해 우리에게 그 내용을 들려준다.

"히즈라(무함마드가 메카로부터 메디나로 피신한 사건) 이후에 무함마드는 법 제정을 하고 정치 방향을 제시하며 사회 지도를 담당하는 한 공동체의 지도자가 되었다. 히브라는 '단절'을 뜻한다. 메디나 공동체에 합류한 사람들은 자기 부족을 포기하고, 이 새로운 공동체를 부족을 초월한 연맹으로 받아들였다. 메디나 공동체는 무함마드가 어린 시절을 보낸 메카의 대안이 될 사회를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으며, 이는 장대하면서도 종교적인 사회 프로젝트였다."

이슬람 문명에 대한 이러한 인식은 서구문명이 이해해 온 방식과 전혀 다르다. 9·11 이후 미국이 이슬람에 대한 공격을 가하면서 테러 집단으로 이미지화했던 것과도 또한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이슬람은 이전의 부족주의가 만든 한계를 극복하고, 유일한 신('알'은 정관사, '라'는 신, 따라서 알라는 유일신)의 존재를 믿는 자들이 하나의 공동체(움마)를 형성해서 형제자매로 살아가는 새로운 대안적 미래를 제시한 것이다.

그래서 타밈 안사리는 서구 자본주의가 이슬람권에 자신의 논리를 강요하는 것을 지목하고 이를 이슬람의 사회프로젝트와 대립하는 것을 이렇게 설명한다.

"최근에 있었던 도덕을 내세운 캠페인이나 군사 작전들은 오래전부터 있었던, 제 나라(서구) 안에서 무슬림을 약화시키려는 계획들과 다르지 않아 보인다. 서구식 관습과 법 제도와 민주주의는 사회를 이성적인 자기 이익을 근거로 자율적인 결정을 내리는 개별 경제 단위로 원자화하려는 프로젝트처럼 보인다. 궁극적으로는, 모든 사람이 모두에 맞서서 물질적인 재화를 성취하려는 경쟁에서 모든 남자와 여자, 아이로 하여금 서로 맞붙도록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한마디로 공동체를 파괴하고 그 안에 남은 개인은 서로 적대적 관계가 되어 싸움 밖에 남지 않은 존재로 만드는 것이 서구의 자본주의 프로젝트 아니냐는 것이다. 그래서 서구가 이슬람권에 개입해 들어오면서 이른바 문명화시키려는 시도를 다음과 같이 비판한다.

"한쪽에서는 성별에 상관없이 시민들이 더 큰 권리를 누리게 하려는 운동처럼 보이는 것이, 다른 쪽에서 보면 힘 센 이방인이 가정의 사적인 문제에 끼어들어서 가족과 부족의 네트워크로 공동 사회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능력을 잘라내는 것처럼 보이는 셈이다. 요컨대, 한쪽에서는 각 개인에게 힘을 부여하는 것처럼 보이는 움직임이, 다른 쪽에서 보자면 전체 공동체의 힘을 빼앗는 것처럼 느껴진다."

우리는 어떤 역사 프로젝트를 가지고 있는가?

타밈 안사리의 책을 읽으면서 특별히 눈에 들어오는 것은 이슬람 문명권이 서로 다른 문명을 번역하고 해석하면서 자기 내부의 문명적 자산으로 만들어가는 과정에 대한 묘사다. 그것은 오늘날, 문명 충돌론을 앞세워 서구의 패권을 마치 역사의 정상 상태인 것처럼 인식시키려는 일체의 시도를 비판적으로 검증하게 해준다. 어느 역사도, 어느 문명도 이미 있던 것을 번역하고 해석하면서 자기 것으로 삼는 과정을 거치지 않는 것은 없다.

중등 교육 과정에서 세계사가 선택인 나라다. 이래가지고서야 무슨 세계적 시민을 길러낼 수 있을까? 우린 우리 자신도 잘 모르고 세계도 잘 모르고 살아가고 있다. 더군다나 세계를 모르면 자신도 잘 모르게 되어있다. 자신이 세계의 어느 지점에 위치하고 있는지, 무엇을 해체당하고 있는지, 세계사가 몇 개나 가능한지, 내 안에 들어온 세계사가 무엇인지 무지한 상태가 지속되는 한, 우리는 남들이 알게 모르게 세뇌시키는 역사의 노예가 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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