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주에 나는 <프레시안> 기명 칼럼을 통해서, 보수 세력의 여론 재판, 현행 실정법 체계의 편파성, 그리고 '도덕성'이라는 허울에 매몰된 진보 진영의 가식을 지적했다. 나는 교육감 선거 당시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를 알 수 없는 처지이고, 그것을 모르는 상태에서 취해야 할 도덕적 입장을 나는 지난번의 칼럼에서 말했던 것이다. (☞관련 기사 : "곽노현은 정면으로 맞서 끝까지 싸워라!")
나는 아직도 선거 당시에 어떤 얘기가 오갔는지 언론에 보도되고 있는 바를 기초로 추측할 수 있는 이상으로는 모른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난 주 칼럼에 썼던 내용은 기본적으로 잘못되지 않았다. 반면에 적어도 일각에서는 곽 교육감이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으면 진보 진영 전체의 도덕성이 (사퇴했을 때보다) 더 크게 훼손되지 않겠느냐는 우려를 하는 것 같다.
논리적으로 보든, 도덕적으로 보든, 전략적으로 보든, 그러한 우려는 불필요하다. 그런 우려의 바탕에서 작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세 가지 혼동을 짚어 보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다.
"네 죄를 네가 알렸다"와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
선거에 두 사람이 출마했다가 한 사람이 사퇴했다. 나머지 한 사람이 출마해서 당선되었다. 당선된 후 8개월이 지나 이 사람이 사퇴한 사람에게 돈을 건넸다. 사퇴한 사람은 돈을 받기로 사전에 약속을 했다고 하고, 당선한 사람은 그런 일 없었다고 한다. 누구 말이 맞을까?
쌍방의 증언이 엇갈리고, 한 편의 증언을 결정적으로 배척할 만한 물증이 없을 때, 일단 두 갈래 방향의 의심이 있다. 약속이 있었는데 물증이 없는 것을 기화로 없었다고 잡아뗄지 모른다는 의심이 그 하나고, 약속이 없었는데 물증이 없는 것을 기화로 있었다고 우겨대는지 모른다는 의심이 다른 하나다.
이 사건이 보도되기 시작하면서 "합리적 (또는 합당한) 의심(reasonable doubt)"이라는 용어가 여기저기서 사용되고 있는데, 이 주변에서 큰 혼동이 있다. 어쨌든 나는 지금부터 이 용어를 "일리 있는 의심"으로 바꿔서 부를 것이다. 그래야 그 개념이 한국 사회에서 이해되기가 더 쉽다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보통 사람들이 느슨한 뜻으로 이 말을 사용하는 한, 위에 적시한 두 갈래 방향의 의심을 모두 "일리 있는 의심"에 포함시켜도 별 잘못은 아니다. 그러나 법률 용어로서는 두 갈래 중 한 방향의 의심을 "일리 있는 의심"이라고 하고, 다른 방향의 의심은 "개연적 명분(probable cause)"이라고 한다. 한국의 현행 법 체계에서 이런 용어들이 사용되고 있는지는 확인을 안 해봐서 잘 모르겠다. 영미법 체계, 즉 배심 재판에서는 그렇게 구분되어 사용된다. 나는 한국의 사법 제도에서도 법이 최소한의 정합성을 가지려면 이 구분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그래야 인민을 주권자로 보는 헌법의 정신과 모순이 발생할 위험이 줄기 때문이다.
일리 있는 의심과 개연적 명분은 어떻게 다른가? 뭔가 범죄의 기미가 포착되었을 때, 국가 권력이 개인의 사적 영역을 파헤쳐서라도 범죄의 증거를 찾아낼 수 있는 개연성이 충분할 때 개연적 명분이 있다고 말한다. 이번 사건의 경우, 돈이 건네졌다는 사실은 사전 약속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의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즉, 당선자 측에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해서 수사를 개시할 만한 개연적 명분이 있다. 따라서 그 증거를 찾기 위해 수색 영장이라든지 소환장이 발부되는 것 역시 당연하고 검찰은 그렇게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일리 있는 의심은 무엇인가? 이것은 배심 재판에서 배심원들이 피고가 유죄라는 의견을 낼 때 고려할 기준이다. 법정에서 수집된 증거가 유죄 판결을 내리기에 "일리 있는 의심의 여지를 넘는(beyond a reasonable doubt)" 정도로 충분할 때 유죄 의견을 내라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경우, 돈이 건네졌다든지, 사퇴한 측에서 "약속한 돈 달라"는 요구를 그 전부터 했었다든지, 양쪽 캠프에 종사한 동서지간의 두 사람 사이에 무슨 말이 오갔다는 정도의 정황을 배척할 이유는 없어 보인다.
문제는 이러한 정황을 보건대 후보 사퇴를 조건으로 금전 보상을 하기로 약속했다는 추정에 반대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의심이 어느 정도냐는 데 있다. 보통의 분별 있는 사람의 마음속에서 당선자를 유죄라고 판정하기에 저 정황이 충분한가? 배심원 각자가 생각해보고, 선거 전에 매수한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일어나서, 유죄라는 판단이 그 때문에 흔들릴 정도가 아니라면 유죄 의견을 내라는 얘기다. 그리고 통상적인 배심 재판의 경우, 12명의 배심원들이 유죄라는 만장일치에 도달할 때 비로소 유죄 판결이 확정된다.
개연적 명분이란 국가 공권력이 수사를 위해 사생활의 영역을 침범해 들어갈 수 있는 명분이다. 수사가 필요하다는 말은 아직 수사 기관에서 보더라도 유죄라고 확정하기 어렵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개연적 명분을 제공하기에 충분한 수준의 의심을 근거로 곧 유죄를 단정한다는 것은 국가 권력이 일방적인 심증만 가지고 "네 죄를 네가 알렸다"면서 으름장을 놓는 격에 해당한다.
이와는 달리, "일리 있는 의심의 여지를 넘는" 정도의 확신이 있을 때에만 유죄 의견을 내도록 하고, 12명 배심원 중 한 명이라도 유죄를 의심하는 한 판결을 내리지 않는 제도에는 "도둑 아흔 아홉 명을 풀어주는 한이 있어도 한 명의 무고한 사람을 처벌하지 않는다"는 정신이 깃들어 있다.
이번의 사례가 처음 불거졌을 때, 한국 사회의 대다수, 특히 평소에 진보와 합리를 자처하던 지식인 다수가 보인 반응에서 나는 "네 죄를 네가 알렸다"는 형태의 법의식을 목격하고 경악했다. 돈이 건네졌다는 사실에서 나올 수 있는 의심은 대가성 거래일지도 모른다는 것으로서, 이는 기껏해야 수사가 필요하다는 개연적 명분을 제공할 수 있을 뿐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의심을 가지고 마치 유죄를 단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것처럼 여겨버리는 뒤죽박죽 풍조가 발생한 것이다. "선의로 줬다"는 피고 측의 해명에 대해 믿기 어렵다는 느낌을 "합리적 의심"이라고 오인한 방향 착오 때문이다. "일리 있는 의심"이라는 개념이 검사의 기소 내용을 겨냥한다는 점을 간과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놀라운 일은 법학 교수인 조국마저 진보 세력의 상승세에 찬물을 끼얹었다는 걱정을 앞세우고, 검찰발 기사에 대해 일리 있는 의심의 여지가 있는지 여부를 살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다시 말해, 곽노현의 변론권을 처음부터 묵살하고 들어가고야 만 것이다. 물론 조국 교수가 의식적으로 그랬을 리는 없기 때문에, 조국이라는 인격체를 비난할 의도는 조금도 없다. 지금 내가 이 글을 통해 부각하고 싶은 의제는 우리 사회 지식인들이 법의 본질, 그리고 국가 권력의 기본 성격에 관해 몸과 삶으로 체득하고 있는 무의식적 전제를 검토해 보자는 것이다.
트위터를 중심으로 곽노현 지지 운동이 일어나고, 김어준, 유시민, 조기숙, 신진욱, 박숙경, 엄기호, 백낙청, 김상곤, 김승환, 김민웅, 최재천, 김진애, 정희준, 정태욱, 박재동 등, 많은 명망가와 지식인들이 적어도 실체적 진실이 재판에서 밝혀질 때까지는 예단을 삼가야 한다는 상식을 되살려 놓았다.
이 사안에 관한 관심이 이처럼 일단 방향을 선회한 것은 건강한 결과다. 하지만 실체적 진실이 장차 밝혀지고 그에 따라 판결이 내려진다고 하더라도, 깊게 따져 봐야 할 문제는 여러 가지가 남을 것이다. 나는 무엇보다 두 가지 점을 고찰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하나는 이와 같은 경우에 실체적 진실이라는 것이 어떻게 결정되느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실정법과 도덕의 관계다.
실체적 진실이 결정되는 방식
▲ 곽노현 서울시 교육감. ⓒ뉴시스 |
검찰은 박명기 측의 증언이 근거라고 하면서 서로 동서지간이라는 양측 캠프 관계자 사이에 7억 원을 지불하기로 사전에 이면 합의가 있었으며 이를 곽노현도 당시에 보고받았다고 주장한다. 곽노현은 애당초 이면 합의 자체가 없었고, 문제의 두 사람 사이에 오간 얘기라는 것도, 금전적 보상을 요구했다가 거절당한 상대방의 심사를 위로하는 수준의 일반적 덕담 수준이었다고 주장한다.
양측의 증언이 이처럼 엇갈리고, 이런 상황을 타파할 새삼스러운 물증은 더 이상 없는 상태라고 가정해보자. 법정에서 확정해야 할 실체적 진실은 선거 후 8개월이 지나 건네진 돈이 사퇴에 대한 대가인가 아니면 곤경에 처한 상대방에 대한 선의의 지원인가이다. 그런데 양측의 증언이 엇갈리기 때문에, 결국 이런 상황에서 실체적 진실을 확정한다는 것은 두 갈래 증언 가운데 어느 쪽 이야기가 더 믿을 만한지를 판단하는 일로 귀결된다.
배심 재판은 이 판단을 보통 사람들의 일상적인 상식에 맡긴다. 이와는 달리 한국의 법체계는 배심 재판이 아니라 판사가 국가를 대리해서 "법률과 양심에 따라" 판결을 내리도록 되어있다. 즉, 실체적 진실을 확정하는 일이 판사의 판단에 맡겨져 있다. 이 판단에서 판사의 양심이 작동한다. 그런데 판사의 양심이라는 것이 만약 특정 판사의 개인적인 취향에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달라진다면 양심이 아니라 변덕이라고 불러야 맞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한국의 법정에서도 이런 차원의 판단에서는 이른바 "사회 통념"이라는 것이 지침으로 언급된다.
이 사건이 여론 재판의 양상으로 흘러가지 않았다면 장차 공소가 이뤄져서 법정 공방이 벌어질 때 해당 판사가 자신의 양심 안에서 "사회 통념"이 어떨지를 측량한 다음 대가성 여부를 판단했을 것이다. 배심 재판에서는 배심원 12명이 실체적 진실을 확정하기 위한 "사회 통념"을 대변한다. 지금과 같은 여론 재판에서는 여론의 향배가 "사회 통념"에 커다란 영향을 미친다. 어떤 경우에도 사회 통념이라는 것은 손으로 만져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판사든, 배심원이든, 여론 재판에서 의견을 내는 한 사람의 시민이든, 결국은 엇갈리는 증언 사이에서 어느 편의 진술이 더 신빙성이 있는지를 스스로 판단하지 않을 수 없다.
이 사건의 경우, 곽노현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박명기의 증언에 무게를 싣는 사람은 "선거판에서 돈이 오갔다면 대개는 대가성"이라는 사회 통념을 따르는 것이다. 반면에 곽노현의 증언에 무게를 싣는 사람은 "때로는 선의로 남을 돕는 사람도 있다"는 사회 통념을 따르는 것이다. 그리고 이 사이의 갈림길은 결국 피고 측의 증언에 의심의 여지가 있으니 유죄로 볼 것인가 아니면 검찰 측의 주장에 의심의 여지가 있으니 무죄로 볼 것이냐는 데 있다. 이로부터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을 수 있다.
첫째, 이 특정 사례가 어떻게 결판이 나든지, 법의 일반 원리로서 어느 편이 사회의 진보에 도움이 되는가? 피고 측의 변론에 의심의 여지가 있다는 이유로 유죄 판결이 내려진다면 예수라도 법정에서 견뎌낼 수 없다. 실제로 예수는 바로 그처럼 전도된 방향의 의심 때문에 죽었다. 일리 있는 의심이라는 기준이 개명된 사법의 한 원칙이려면, 그것은 검사의 기소 내용에 의심의 여지가 있는 한 피고는 무죄라는 방향으로 작용해야 사회 구조의 개선에 도움이 된다.
둘째, 현재 벌어지고 있는 검찰의 여론 조작은 무엇보다도 실체적 진실의 확정 과정을 좌우할 수 있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다. 진보적인 의식을 가진 지식인 중에 많은 사람들이 이번 사건에서 검찰과 보수 언론의 여론 조작이 잘못임을 인정하면서도, 그 문제와 곽노현의 잘못은 별개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법정에서 밝혀야 하는 실체적 진실은 일어난 일의 물리적 진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대부분의 경우 유무죄의 갈림길에 대한 판단과 결부되어 있다. 이번과 같은 경우, "이면 합의", "대가성", "사전 인지", "선의" 등, 사건의 진상과 관련되는 핵심적인 서술어들이 모두 가치판단을 강하게 함축하는 단어들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컨대 보수 언론이 마냥 "이면 합의가 있었다"는 식으로 보도해버리고, 무엇을 가리켜 "이면 합의"라고 부르는지에는 관심을 차단해버린다면, 여론은 곽 교육감의 유죄 쪽으로 기울 위험이 대단히 높아지는 것이다.
실체적 진실에 관해서 이처럼 여론의 고정관념이 형성되고 나면 재판을 담당하게 될 판사의 입장에서도 여론에 반하는 판단을 내리려면 그만큼 추가적인 의지력이 필요해진다. 그렇기 때문에 적어도 진보를 지향하는 지식인이라면 이와 같은 사건에서 피고 측에게 도덕의 잣대를 들이대기 전에 먼저 여론 조작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성토하는 것이 온당한 순서라고 나는 믿는다.
셋째, 실체적 진실을 확정하는 과정에서 "사회 통념"이 핵심적인 역할을 한다는 점을 음미하면 할수록, 수사 절차의 중요성에 대한 깨달음으로 연결된다. 수사 과정이 법적 절차를 지켜야 한다는 것은 그 와중에 부차적인 인권 침해가 있을까봐 그러는 것만이 아니라, 절차를 어긴 수사는 실체적 진실을 오염하거나 호도하는 결과를 낳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피고 측에서 불리한 증거를 인멸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하고자 할 위험이 있다면, 이에 대칭해서 검찰 측에는 피고에게 불리한 증거나 정황을 조작함으로써 진실을 왜곡할 위험이 있다.
그렇기 때문에 근대적 사법 제도의 역사가 오래된 나라일수록 절차적인 반칙 행위를 통해 얻어진 증거는 아예 증거로 인정하지 않음으로써, 검찰이 애당초 증거 조작의 유혹을 받지 않도록 정하고 있는 것이다. 피의 사실 공표 금지는 피의자의 명예를 보호한다는 표면적인 의미에 앞서서, 국가 사법 기능의 공정성과 관련된다.
피의 사실이 검찰에서 언론으로 흘러나가게 되면, 이미 그 자체로 언제나 검찰 측의 주장만이 일방적으로 보도될 수밖에 없다. 가령 변호인 측에서도 박명기 측 사람들을 소환해서 심문하고, 그 결과 중에 자기편에게 유리한 내용을 추려서 언론에 흘려보내도록 할 권한이 주어진 상태라야만, 검찰의 이런 언론 플레이가 공정한 게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법의 기반이 되어야 할 도덕과 도덕의 탈을 쓴 처세술
보수 진영은 물론이고, 진보 진영의 일각에서도 지금 곽노현을 지지한다는 것은 예컨대 보수파가 강용석을 보호한 것과 피장파장이 되어버리지 않느냐는 반론을 펼치는 사람들이 많다.
이것은 그야말로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식의 두려움으로서, 이를 두고 김어준이 "쫄아서 그렇다"고 비판한 것은 정곡을 찌른 셈이다. 모든 두려움의 배후에는 혼란에 빠진 이해력이 있고, 두려움의 원인을 찾아보면 대개 여러 가지 혼동과 착각이 나타난다. 이번의 두려움에는 적어도 다음과 같은 두 가지 혼동이 원인으로 작용했다.
첫째, 실정법 위반이 곧 부도덕한 행동이 되는 것은 아니다. 인류의 역사에서 실정법을 위반했다고 처벌받은 사람의 목록을 뽑아보면, 소크라테스, 예수, 갈릴레오, 헨리 데이비드 소로, 도스토예프스키, 간디, 조봉암, 넬슨 만델라, 신영복, 김대중 등이 포함된다. 인류의 역사에서 실정법으로 정해진 조문 가운데에는 악법이라고 봐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또 법조문 자체는 악법이 아닐지언정 사법공무원들에 의해 악랄한 목적으로 활용될 수 있는 여지를 폭넓게 열어주는 것들도 있다.
이와 같은 법조문들이라고 해서 마냥 무시해 버린다면 법의 일반적인 권위가 손상되어 무정부상태를 불러오지 않겠는가? 적어도 사회의 진보를 바라는 사람이라면 이런 우려를 정당하게 가질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양심에 어긋나는 법조문을 지키지 않는 것과 법의 권위 자체를 부인하는 것 사이에는 하늘과 땅 만큼의 거리가 있다.
유명한 예로 소로는 1846년에 주민세 납부를 거부하고 감옥에 갔다. 멕시코와의 전쟁 그리고 노예제를 시행하는 정부에게 세금을 낼 수 없다고 한 것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그는 납세 거부에 따른 처벌, 즉 투옥은 달게 받았다. 자신의 의사를 무시하고 친척이 세금을 납부하는 바람에 그의 죄수 생활은 하루로 끝났다.
그러나 그는 그 후 이른바 "시민의 불복종(civil disobedience)"이라는 개념을 확립하게 된다. 양심에 어긋나는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도 법치 사회의 일반적 원리에는 복종하는 길이 있음을 알린 것이다. 두 문단 위에 내가 열거한 사람들은 모두 실정법 위반이라는 판결은 받았지만, 그 판결의 집행에는 저항하지 않고 순종한 사람들이다. 그들이 무엇을 위반했든지 간에, 그들은 법치 사회의 기본질서를 어지럽힌 사람들이 아니다.
곽노현의 행위가 "시민의 불복종"에 해당한다는 뜻이 아니다. 그는 지금 양심으로만이 아니라 법으로 봐도 잘못이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내가 소로의 예를 거론한 까닭은 곽노현이 "선의로 돈을 줬다"고 시인하자마자 그의 "도덕성" 나아가 진보 진영의 "도덕성"을 문제삼아버린 시각에 들어있는 혼동을 지적하기 위함이다.
현행 공직선거법에서 후보 매수와 관련된 조항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라서, 경쟁 후보들 사이에 어떤 협상도 사실상 위법이라는 취지를 담고 있다. 박재동 화백은 <한겨레>에 기고한 "곽노현과 함께 돌을 맞겠다"에서 경쟁 후보의 선거 빚을 당선자가 갚아줘도 범죄가 되지 않도록 제도의 개선을 촉구했다. 곽노현의 "부적절한 행위" 때문에 진보 진영 전체가 덤터기를 쓸까봐 불안해하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제도가 보다 합리적이라는 점에 동의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렇다면 바로 그만큼 현행 실정법을 설사 위반한 것으로 판결이 난다고 할지라도, 그 때문에 바로 양심불량을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관련 기사 : 곽노현과 함께 돌을 맞겠다)
하물며 그는 지금 실정법 가운데 자체로 문제가 많은 조문과 관련해서, 그의 범죄를 예단하고 나서 짜 맞추기 식으로 수사하는 동시에 여론 조작을 통해 그의 인격을 훼손하고 있는 검찰 당국에 맞서,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를 다투고 있는 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의 유죄를 먼저 예단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나 지성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정당화되기 어렵다. 한국 사회의 진보를 바라는 마음이라면, 지금까지 내가 지적한 바와 같은 일리 있는 변론의 여지를 몽땅 무시하고 곽노현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극우파의 광기를 고발하고 가라앉히는 데 주력하는 것이 일관적이다. 더구나 곽노현의 변론권과 검찰의 불법적 행태 그리고 제도적 문제점 등에 주목하면서 법정 공방을 차분히 지켜봐야 한다는 주장을 광기에 가까운 극우파의 패거리 문법과 같은 진영 논리라고 폄하한다는 것은 자학을 도덕으로 착각하는 인지도착증이라고 봐야 한다.
둘째, 이번 기회에 한국 사회의 모든 지성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한다고 생각하는 점이 하나 더 있다. "오얏나무 아래서는 갓끈도 매지 말라"는 속담이 과연 도덕의 원리인지 아니면 처세술, 그것도 매우 가련한 부류의 처세술인지를 따져봐야 한다. 노무현에 대한 검찰의 수사가 시작했을 때, 이해찬이 3·1절에 골프 쳤다는 기사가 떴을 때, 이필상의 논문 표절 의혹이 제기되었을 때, 기타 등, 수없이 많은 사례에서 진보 진영의 지식인들이 "읍참마속"을 되뇌며 도덕적 추궁에 돌격대 역할을 마다하지 않은 배경에 바로 이 "갓끈의 처세술"을 도덕이라고 착각한 원인이 있다고 나는 진단한다.
우선 이 속담 자체를 음미해보자. 홍길동이가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을 맸다. 오얏나무 주인 이몽룡이가 보고 외친다. "오얏 도둑놈 잡아라!" 동네 사람들이 몰려와 잡힌 홍길동이 항의한다. "나는 도둑이 아니라 갓끈이 풀려 새로 맸을 뿐이다." 흥분한 군중에게는 마이동풍, "도둑놈이 뻔뻔하게 무슨 변명"이냐고 때리고 짓밟기 시작한다. 이몽룡도 진실을 확인할 생각은 않고 거들어 짓밟는다. 옆에서 지켜보다 못해 심청이가 동네의 고명하신 선비 박흥부에게 하소연한다. 박흥부가 나와서 하는 말. "도둑질을 했는지 갓끈만을 맸는지는 접어두고, 오얏나무 아래서 갓끈 맨 것은 잘못이다."
내가 가진 상식적 도덕에 따르면 이렇게 말해야 한다. 오얏나무 아래라고 해서 갓끈 고쳐 맨 것이 잘못일 수는 없다. 이몽룡은 최초에 무고한 사람을 도둑으로 오인한 잘못을 범했다. 하지만 확인한 다음에 풀어만 줬다면 (사과까지도 필요 없다) 큰 잘못은 아니다. 확인도 하지 않고 마구잡이로 자신의 오인을 우겨댔기 때문에 가장 큰 벌을 받아야 한다.
동네 사람들은 이유 없이 폭력을 휘둘렀기 때문에 심하게 때린 순서에 따라 벌을 받아야 한다. 선비 박흥부의 죄는 지식인의 책무를 얼마나 무겁게 보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지식인으로서 빛과 소금의 역할을 다해야 한다고 보면, 그의 죄는 이몽룡의 죄보다도 오히려 크다고 볼 수 있다. 진실에 봉사할 의무는 모든 사람에게 공통이고, 지식인이라고 특별히 의무가 무겁다고 보지 않는다면, 그의 죄는 폭력방조죄에 해당한다.
지식인의 책무가 얼마나 특별해야 하는지는 어차피 지식인 각자가 자신의 실존을 걸고 인생을 통해 응답할 문제기 때문에 여기서 굳이 논의할 필요가 없다. 단, 지식인의 책무가 무엇이든 간에, 위의 가상적인 예에서 선비 박흥부는 도덕을 실천하고 있는가 아니면 살아남기 위한 처세술을 발휘하고 있는 것인가?
진실에 눈을 감고, 흥분한 군중의 입맛에 영합하는 태도가 도덕일 수는 도저히 없기 때문에 이는 생존을 위한 처세술일 뿐이다. 그것도 가련한 처세술이다. 왜냐하면 정의, 진실, 공정성 등의 가치가 자리 잡을 수 있는 형편이 도저히 안 되는 곳에서, 교묘한 문장으로써 도덕을 가장하지만 실상은 이미 참혹한 현실에 철저하게 좌절당한 영혼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미 몇 차례 반복해서 사용한 비유지만 다시 한 번 마태복음 18장의 우화를 상기해본다. 만 달란트의 빚이라도 사정이 딱하다면 탕감해 줄 수 있다. 그런데 만 달란트의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돌아서자마자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자를 옥졸에게 넘긴다. 이런 상황을 목격한 사람이 "백 데나리온을 빚졌으니 감옥에 가야 마땅하다"고 말한다면 어떤가?
살아남기 바쁜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악당의 치부를 꼬집어 말했다가는 무슨 해코지를 당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도 이렇게 말하면 안 된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이런 말은 도덕이 아니라 험악한 세상에서 살아남기 위한 생존의 기술에 해당함을 확인하고 싶을 뿐이다.
잘못이 있더라도 정상을 참작하는 너그러운 마음이 없는 곳에는 도덕이 없다. 기어이 처벌을 해야 한다면 형평의 기준에 따라 큰 잘못을 크게 처벌하고 작은 잘못을 조금 처벌하지 않는 곳에는 도덕이 있을 수 없다. 자기 눈에 들보가 들어 있으면서 남의 눈에 티를 지목하는 입으로는 도덕을 주장해봤자 아무런 힘이 없다.
한국 사회에서는 사법의 현실이 너무나 도덕과 동떨어진 상태를 사람들이 오래 견뎌온 탓에, 이제는 아예 도덕 관념 자체가 사법의 폭력성을 닮아가고 있다. 그리하여 눈에 들보가 들어 있는 자가 남의 눈에 티가 들어 있다고 시비를 걸어와도, 악당들과 같은 식으로 패거리를 짓는다는 구설수에 휘말릴까봐, 억울하게 당하는 사람의 편이 되어주지 못하는 비겁함이 도덕성이라는 이름으로 미화된다.
사법 개혁, 더 이상 미루지 말자
세속 정치에서 완전히 초연한 수도승의 도덕이라면, 또는 세상만사는 결국 자연의 이법에 따르게 되어 있으니 모든 일이 맘먹기에 달렸다는 스토아주의의 도덕이라면, 악당이 싸움을 걸어올 때 그냥 매를 맞으라는 말도 일관성이 있다. 하지만 정치판에 관심을 가지고, 정치를 통해서 세상을 조금이라도 낫게 만들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큰 잘못과 작은 잘못을 분별해서 처벌과 비난의 정도가 잘못의 크기에 비례하도록 만드는 데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는 모든 쟁점 사안과 관련해서 명확한 진상을 찾아내는 일을 국가 권력이 수행해야 할 최우선의 임무 중 하나로 격상시켜야 한다는 얘기다. 이를 위해서는 검찰이 독점하고 있는 수사권을 국회, 인권위, 감사원, 경찰, 등으로 분산시켜서 수사권의 주체들 사이에 상호 견제가 발생하도록 해야 한다. 아울러 수사 개시를 사법 절차의 시작으로 보고, 수사 개시 시점에서부터 판사의 지휘 아래 수사가 합법적인 절차에 따라 진행하도록 관련 법령을 바꿔야 한다. 절차를 어긴 방식으로 얻어진 증언이나 물증은 자동적으로 증거 능력을 상실하도록 하는 것이다. 재판은 공판중심주의를 강화하고, 배심 재판을 확대해야 한다. 그리고 검사장과 법원장은 주민에 의한 직접 선거로 선출해야 한다.
이 사항들에 대한 설명은 나중의 기회로 미룬다. 나는 이명박을 극복한 새로운 정부가 들어섰을 때, 추구해야 할 정치 개혁 과제 중 사법 개혁이 가장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사법 개혁의 내용은 최소한 방금 열거한 사항들을 포함해야 한다. 그리고 민주당, 민주노동당, 진보신당, 국민참여당 등, 진보와 민주와 개혁을 표방하는 정당들이 모두 합해도 안철수 한 명 만큼도 파괴력을 가지지 못하는 현실을 타개할 수 있는 길도 여기에 있다.
이 정당들의 주요 당원들이 사법 개혁이라고 하는 의제에 진정한 관심을 기울여서 위와 같은 근본적인 개혁안을 공통 공약으로 내놓을 수 있다면, 그 자체로 정책 연합이 이뤄진 것이며 그만큼 유권자들에게 수권 능력을 인정받을 수가 있게 될 것이다. 세상이 나아지기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이제 더 이상 가식적인 "도덕성" 뒤에 숨으려 들지 말고, 보다 정의롭고 보다 공평한 사법을 이 나라에 세울 수 있는 길을 위해 지혜를 모아야 할 시점이다.
검찰과 보수 언론이 곽노현에게 저지르고 있는 불의와 폭행을 아름답게 묵살해 버릴 수 있는 유일한 방법도 바로 거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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