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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소년에게 그림책 건넸더니 기적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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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출 소년에게 그림책 건넸더니 기적이…

[親Book] <그림책에서 찾은 책읽기의 즐거움>

중학교 1학년 때 왕따를 당했다. 친구가 생기길 간절히 바랐다. 공부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성적은 곤두박질쳤다. 중학교 2학년 때 내 성적은 국어 40, 영어 23, 수학 9였다. 찍어도 10점이 안 된다며 웃던 기억이 난다. 한 번 놓친 진도는 도저히 따라갈 수 없었다. 매일 멍하니 살았다. 아니면 잠을 잤다. 가슴이 허한 날들이었다. 나는 학습 부진아였다.

뒤늦게 대학에 갔다. 사서가 됐다. 책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나 같은 애들에게 책 읽는 기쁨을 차근차근 안내할 수만 있다면……. 처음부터 두꺼운 책을 소화할 수 없다. 그 자리에서 함께 읽고 이야기 나눌 만한 자료가 필요했다. 생각 끝에 그림책이 떠올랐다.

초·중·고등학교 교사들이 쓴 <그림책에서 찾은 책읽기의 즐거움>(전2권, 강승숙 외 지음, 나라말 펴냄)은 일종의 학습 지도안이다. 책읽기에 전혀 관심이 없는 학생, 누적된 부진을 안고 있는 학생이라면 누구나 적용해볼 수 있는 프로그램이다.

"우리는 초·중·고등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입니다. 우리네 교실에는 무기력한 모습으로 교실 한구석을 채우고 있는 학생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이 학생들을 어떻게 도와주어야 할지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외면하자니 마음이 불편했습니다. 우리는 '이 학생들도 잘하고 싶었을 것이다. 잘 못하니까 안 하게 되고, 칭찬이나 격려를 받아 본 적이 없으니까 하고 싶은 마음을 내지 못했을 것이다'라고 생각했습니다. 우리가 이 책을 쓰게 된 것은 이런 마음 때문입니다."

이 책은 읽기 전-읽는 동안-읽기 후 활동으로 구성됐다. 아이들이 고민할 만한 자존감, 친구, 열등감, 가족 등을 주제로 잡고 그에 어울리는 그림책 하나, 단편 소설이나 수필 하나를 넣었다. 그 중 교사가 직접 해본 수업 후기가 자못 감동스럽다.

"창훈이는 고등학교 3년 내내 글 한 줄 안 읽던 학생이었다. 만화책을 건네줘도 잠을 자던 그야말로 책하고 담을 쌓은 녀석이었다. 열흘 동안 가출하고 돌아온 창훈이에게 그림책을 내밀었다. (…) 그러고는 이 장면이 어떤 상황인지 예측 또는 추리해 보기로 했다. (…) 이런 이야기를 주고받다 보니 창훈이가 그림책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글만 후루룩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림도 놓치지 않도록 천천히 그림책을 읽어 주었다. 창훈이에게 다 읽고 나서 어떤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드냐고 물었더니 "손을 맞잡고 있는 남녀 주인공들의 몸에서 꽃이 피어나는 장면이 제일 마음에 들어요" 하는 것이었다. (…) 그렇게 창훈이는 고등학교에 온 뒤 처음으로 한 권의 책을 끝까지 읽었다."


▲ <그림책에서 찾은 책읽기의 즐거움>(전 2권, 강승숙 외 지음, 나라말 펴냄). ⓒ나라말
나 같은 애들을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을 한다. 저 애는 뭔가 사연이 있을 거라고. 집에서든 학교에서든 너무 힘들고 외로울 거라고. 연민이 인다. 나는 본디 위로를 잘못한다. 책은 나의 어쭙잖은 말보다 더 큰 위안을 줄 터이다. 그림책이 마음을 어루만져 주리라. 한 번 따라 해보자. 나는 이 책으로 동아리를 만들었다.

각 반 담임교사의 추천으로 사연 있는 이들이 왔다. 1학년 15명, 2학년 15명이었다. 매주 한 번 7교시마다 따로따로 모였다. 뭣 모르고 온 애들은 어리둥절했다. 친구끼리 온 여자애들은 이렇게 말했다. "이거 공부 못 하는 애들만 하는 거죠?" 나머지 애들은 내가 너무나 잘 아는 표정을 지었다. 무기력, 무관심……. 선생님의 입장에서 보니 가슴이 아프고 답답했다. 쉽지 않겠다는 각오는 진작 생겼다.

아주 많이 기대하진 않았다. 내가 누군가를 변화시키기 만무하고 책 조금 봤다고 사람이 확 달라지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다. 아이들이 제 입으로 대답 하나 하기까지 아주 많이 기다려야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저 친절하게 대했다. 친절한 게 능사가 아니건만 받들고 섬겼다. 과자와 음료수도 준비했다. 서툰 언어로 한 명 한 명 눈을 마주치려 했다. 네 말이 맞다, 딱히 정답은 없다고 말하면서도 어떤 방향을 그려주려고 애썼다. 겨우 말문을 튼 애들이 "다른 책(만화책) 보면 안 돼요?", "좀만 자면 안 돼요?" 하면 "그럼 우리 좀만 잘까?" 그랬다.

다행히 아이들은 유치하다 하면서도 그림책은 잘 보아주었다. 표지나 제목만 보고도 내용은 잘 알아맞혔다. 이 책에 실린 책들이 조금 쉬운 편이었다. 하지만 자기 얘기는 잘 꺼내지 못했다. 나도 더 묻지 않았다. 단편 소설이나 수필은 내용이 참 좋은데 시간이 부족했다. 몇 번 하다 보니 정규 수업의 반복인 것 같아 그만두었다.

대신 사회 현실을 말하는 그림책, 이를테면 위안부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한 <꽃 할머니>(권윤덕 지음, 사계절 펴냄), 가족 이기주의를 그린 <행복한 우리 가족>(한성옥 지음, 문학동네 펴냄), 성역할에 질문을 던지는 <돼지책>(앤서니 브라운 지음, 웅진주니어 펴냄), 재개발 문제를 다룬 <작은 집 이야기>(버지니아 리 버튼 지음, 시공주니어 펴냄), 가장 인기가 많았던 세계 인권 실상을 다룬 <내가 라면을 먹을 때>(하세가와 요시후미 지음, 고래이야기 펴냄) 등을 보여주며 줄거리나 느낀 점을 쓰고 발표해 보라고 했다.

애들은 점점 줄어들었다. 아예 학교에 나오지 않는 애들도 많았다. 남자애들은 과자만 먹으러 온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게 기분 나쁘진 않았지만 키들키들 속닥거리면 나의 무능력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더 재밌게 꾸릴 수도 있는 내용을 내가 망치는 것 같았다. 그 무렵, 우연찮게 이 책의 저자 한 분을 만날 기회가 생겨 도움을 청했다. 그 분은 꼭 그림책이 아니어도 좋으니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책을 이것저것 읽혀보라며 격려해주었다.

2학기가 시작되었다. 동아리는 1학년 7명, 2학년 6명으로 고정되었다. 아직도 서먹하지만 몇몇 아이와 친밀감이 생겼다. 언제나 신나게 인사하는 1학년 여자애 둘은 내가 수줍을 정도로 열심히 반응해준다. 종알종알 대답도 잘 하고 개의치 않는 모범생이다. 1학년 남자애들은 여전히 심드렁하다. 2학년 남자애들은 저희들끼리 아주 친해서 절묘한 대답으로 나를 웃게 해준다. 도서관에 전혀 안 왔던 이 애들이 만화책이라도 보러 문턱을 드나드는 게 나는 참 반갑다.

남달리 행보가 기대되는 아이도 있다. 무의식적으로 다른 애를 괴롭히는 그 애는 중학생 때 복장 불량을 지적 받아 교장 선생님과 싸운 기억을 아직까지도 분하게 여겼다. 그러더니 어느 날, 대학에 못 갈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눈물 젖은 얼굴로 찾아온 것을 휴지 한 장 건네고 그저 쳐다보기만 한 게 못내 미안했다.

하루는 사회복지사가 되고 싶다기에 <나 같은 늙은이 찾아와줘서 고마워>(김혜원 지음, 오마이북 펴냄), <부서진 미래>(김미정 외 지음, 삶이보이는창 펴냄), <일어나라! 인권 OTL>(한겨레21편집부 지음, 한겨레출판 펴냄) 등을 권해주었다. 어렵지 않을까 우려했는데 너무 슬프고 불쌍했단다. 또 뭐 없냐고 반짝 눈을 빛내는 그 아이 마음은 조금 변했을 것 같다.

그림책을 매개로 아이들과 대화한 시간이 고맙고 소중하다. 프로그램 처음에 실린 <줄무늬가 생겼어요>(데이빗 섀논 지음, 비룡소 펴냄)를 보고 난 후 아이들이 적어준 대답을 싣는다. 두려움과 솔직함, 용기가 묻어난다. 자기 마음을 가까스로 꺼내는 이들은 학습 부진아가 아니다. 책이 주는 것보다 더한 감동을 되돌려주는 내 첫 제자들이다.

"내가 말하면 다른 사람의 반응이 이상할까봐 못 말한다. 고치려면 자신 있게 말한다."

"주장을 밝히지 못하고 머뭇거린다. 시선 때문에 잘 안 된다. 신경 쓰지 않고 싶다. 이제 내 주장을 밝히고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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