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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의 뒤를 캐는 저 수상한 사람은…

[1주년 특집] 이은영, 서평으로 의심하다

수사관은 용의자의 지난 과거를 어떻게든 더 깊이 파고들기 위해서 안간힘을 다한다. 또한 용의자의 사고를 재구성하고, 가장 사소한 생각들까지 내다보려 애쓰기 마련이다. (<수상한 라트비아인>(조르주 심농 지음, 열린책들 펴냄) 중)

나는 추리하는 것을 좋아한다. 일상 속의 사소한 단서나 자그마한 균열을 찾아내어, 몇날 며칠을 붙들고 늘어진 끝에 하나씩 하나씩 이곳저곳에서 그러모은 조각들로 마침내 퍼즐을 완성했을 때의 희열이란!

물론 내 추리가 적중했는지 어땠는지를 확인할 길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때때로 선무당이 사람 잡는다고, 기가 막히게 맞춰서 스스로도 놀라는 때가 있다. 예를 들자면, 대학 동기의 양다리 낌새를 간파해 낸 것이라든가(아주 지능적인 양다리여서 나중에 사실이 발각되고는 모두가 깜짝 놀랐을 정도였다), 지하철 2호선 신림역에서 간혹 시간차를 두고 볼 수 있었던 두 넝마주이 할머니가 자매였다든가(누가 언니고 누가 동생인지는 내 예상을 빗나가긴 했지만) 하는 등등.

어쩌면 주변 사람들 말마따나 천성적으로 오지랖이 넓어서, 또는 황색 언론이나 음모론에 과다하게 노출된 부작용으로 그냥 여러 가지 단서들을 엮어 이야기 짓기를 즐기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책을 대하는 나의 자세(책을 읽거나, 만들거나, 관련 서평을 쓰거나)도 추리하기 내지는 이야기 만들어 내기와 별반 다르지 않다. 한 권의 책을 만나게 되면, (책에는 등장하지 않지만) 그 책과, 책을 쓴 저자를 둘러싼 재미난 얘깃거리가 어디 없나 안테나를 쭈뼛 세우고 이리저리 탐색을 벌인 끝에, 새로 지은 나만의 옷으로 책을 입혀 주길 즐겨 한다.

사실 이것은 최근에 와서야 깨달은 것인데, 난독증이 아닐까 하고 심각하게 고민해 본 적도 있을 정도로 추리 소설이나 만화책 이외에는 끈기 있게 한 권의 책을 끝까지 다 읽지 못하는 내가 책을 만드는 편집자, 그것도 하필이면(!) 과학책을 만드는 편집자가 되고부터 생존을 위해 무의식적으로 습관화한 부분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꽤 긴 시간 동안 다양한 종류의 과학책을 접하고 과학책도 참 재미날 수 있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되면서, 독자들도 나처럼 과학책이 딱딱하고 어렵고 지루하지만은 않다는 사실을 인지할 수 있게끔, 책과 관련한 흥미로운 정보들을 풍성하게 실어 전달하고자 애써 노력한 부분도 있을 듯하고 말이다.

아주 작은 정보만이 드러나 있는 최초의 책이 내 앞에 놓이는 순간부터 이야기는 시작된다. 첫 문장을 읽는 순간부터 잠 한 숨 이루지 못하고 단숨에 마지막 장까지 읽어 내려갈 만큼 손 떨리게 재미있는 과학책들이 많이 있지만, 나의 경우, 담고 있는 주제나 내용이 쉽게 머릿속에서 이해되질 않거나, 때로는 도돌이표가 붙은 자장가처럼 계속해서 반복되는 지루한 문체로 수면욕이 몰아칠 때면 일단 잠시 책을 덮고 가능한 단서들을 찾아 추적하기 시작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인공, 즉 저자의 뒷조사이다. 어디서 태어나서 결혼을 몇 번 했고 자식이 몇 명이고 하는 뒷조사(를 안 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단은)가 아니라, 어떤 연구들을 했고 어떤 계기로 이 책을 쓰게 되었으며, 여러 권의 책을 썼다면 그 책들에는 어떤 흐름 같은 것이 있는지, 특별히 이 연구에 발을 들여놓은 계기나 이유 같은 것이 있는지, 그 혹은 그녀의 연구가 학계에서는 어떤 대접을 받고 있으며 이 연구 혹은 이 책 이후로 반박하는 연구나 책이 나왔는지 등등.

어쩌면 지금 내 앞에 놓인 책과는 크나큰 관련성이 없는, 그러니까 없어도 이 책을 읽는 데 지장을 주지 않는 정보들일 수 있지만, 이런 식의 정보들은 저자와 저자가 들려주고 있는 내용에 대한 신뢰를 구축하는 데 일말의 도움은 줄 수 있을 듯하다. 어디서 흘러 들어왔는지 모르는 일면식도 없는 사람이 "저기요, 내 말 좀 들어 보세요" 하고 하는 것과, 여섯 단계를 건너 아는 사람이긴 하지만 대략적인 배경은 익히 들어 알고 있는 사람이 갑자기 나타나 대화를 청하는 것은 듣는 사람 입장에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적어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일단 들어나 보자' 하고 자세를 고쳐 앉게 만드는 미끼 정도는 되지 싶다.

▲ <마음의 시계>(엘렌 랭어 지음, 변용란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 ⓒ사이언스북스
얼마 전 국내에서 출간된 <마음의 시계(Counterclockwise)>(변용란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저자인 사회 심리학자 엘렌 랭어의 뒷조사를 하면서, 원래는 대학에서 화학을 전공했던 그녀가 후일 '교도소 실험'으로 유명해진 필립 짐바르도('교도소 실험'을 바탕으로 쓴 <루시퍼 이펙트(Lucifer Effect)>(이충호·임지원 옮김, 웅진지식하우스 펴냄)가 몇 년 전 국내에서 소개되기도 했다)의 심리학 개론 수업을 들은 후 사회 심리학으로 전향했다는 인터뷰 기사를 찾아내었다. 기사에는 짐바르도와의 이메일 인터뷰도 실려 있었는데, 그는 학부 시절부터 랭어가 누구도 생각 못한 창의적인 실험을 고안해 내는, 눈에 띄는 수재였다는 칭찬의 말을 전했다.

미국에서야 대중 강연이나 기업 강연, 다큐멘터리 출연 등으로 익히 알려져 있는 인물인지라 출간 당시 굳이 이러한 정보들을 덧붙일 필요가 없었을 테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은 생소한 인물이었기에, 독자들이 책과 저자에 대해 판단하고 책을 선택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도록 비교적 상세하게 저자와 관련한 정보들을 밝혀 보여 주고자 했다. 특히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업계 최고의 석학이 들려주는 한마디 말은 그야말로 그 어떤 열 마디 말보다 든든한 보증서가 아니던가.

저자의 뒤를 캐는 과정에서는 책을 둘러싼 부수적인 정보들도 자연스레 수확하게 된다. 책 속에서 주장하고 있는 주요 이론에 대해, 책이 출간된 지 좀 되었다면 책 자체에 대해, 동일 분야 전문가들이나 이웃한 분야 전문가들은 어떻게 평을 내리고 있는지, 해당 분야나 저자 자신의 연구에서 책이 차지하는 위치는 어떠한지 등을 안다면, 보다 폭넓은 시각에서 책을 바라보고, 조금은 비판적이거나 자기만의 관점을 실어 책 속 이야기들을 읽어 내려갈 수 있을 것 같다.

<어머니의 탄생(Mother Nature)>(황희선 옮김, 사이언스북스 펴냄)의 경우에는 거의 1000쪽에 이르는 양적인 압박도 있었지만, 인류학, 진화 생물학, 사회학 등등 여러 학문 분야를 넘나듦으로 인한 질적인 압박도 책장을 수월하게 넘기기 힘들게 만들었다. 하지만 저자인 새러 허디가 자신의 전문 학문 영역이었던 진화 생물학과 영장류학을 바탕으로 쓴 첫 책 <여성은 진화하지 않았다(The Woman That Never Evolved)> 이후로 어머니이자 여성으로서의 자신의 개인적 경험담을 우려내어 다른 학문들과의 접목을 시도한 끝에 내놓은 책이 바로 <어머니의 탄생>이며, 그 후로 다시 <어머니의 탄생>에서의 한 장(章)을 심화시켜 모성 관계에서 비롯된 인간 이타성의 진화를 다룬 다음 책(<어머니와 타인들(Mothers and Others)>)을 집필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접하게 되자, 나 또한 자연스레 저자의 사고의 흐름을 따라가며 저자와 함께 호흡하는 기분으로 책을 읽어 내려갈 수 있었다.

이 모든 것들은 그저 책을 한 번이라도 더 관심 있게 쳐다보고, 낯설고 어렵게 느껴질 수도 있는 책과의 경계를 한 단계 낮춰 주는 부수적인 역할을 할 뿐, 책이 지닌 가치나 책 속 내용을 가장 잘 전달해 주는 수단은 아닐지도 모른다. 하지만 책을 둘러싼 주변 정보들을 가능한 풍성하게 담아 책이 놓여 있는 맥락을 들려줌으로써, 지금 당신 앞에 놓여 있는 이 책이 딱딱하게 죽어 있는, 박제된 사실들의 집합소가 아니라 나름의 역사와 탄생 신화를 지닌 살아 숨 쉬는 존재임을 독자들이 깨닫게 하는 것만으로도 새 옷 입히기 작업은 의미 있는 일일 듯하다.

내가 과학책을 읽고 과학책에 대한 글을 쓰는 방식은 조개껍데기나 고풍스러운 중세의 성 등지에서 볼 수 있는(미스터리 영화에서도 간혹 볼 수 있는) 나선형 계단을 걸어 내려가는 것과 비슷하다고 생각된다. 수직 하강하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빠른 시간 안에 1층에 가 닿는 것도 한 방법이지만, 창밖도 내다보고 모든 층의 모든 문을 열어 보며 쉬엄쉬엄 내려가는 것도 비록 시간은 더 들겠지만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점에서는 결국 마찬가지 방법일 것이다. 그리고 그러다 보면 새로운 친구를 사귄다거나 계단에 떨어져 있는 동전을 줍는다거나 하는 등의 의외의 수확물이 생길지도 모른다.

책을 앞에 딱 놓고, "너 책?", "나 독자야!" 하며 최영의식(혹은 송강호식) 독서법을 구사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공법으로 뚫으려다 어퍼컷 한 방에 그만 영영 읽기를 중단해 버리고 말았던, 그 수많았던 과학책들에 대한 아픈 기억을 간직한 나로서는, 오늘도 주변부를 맴돌며 단서들을 추적하고 수집해, 내 나름으로 녀석의 실체를 그려 볼 수 있게 된 순간, 본격적인 책 파기에 돌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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