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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와 함께 돌아온 마스터, 그는 누구인가?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The Return of the Master>

불황의 경제학과 함께 귀환한 거장?

폴 크루그먼이 쓴 <불황의 경제학>(안진환 옮김, 세종서적 펴냄)만 귀환 한 것이 아니다. 케인스 전기로 세계적 명성을 가지고 있는 로버트 스키델스키의 케인스에 대한 재조명도 귀환의 행로에 동참하고 있다. 2008년 미국의 경제 위기 이후 시장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있지 않고서는 세계적 위기의 심화가 지속될 것이라는 우려가 이러한 흐름의 배경이다.

그가 쓴 케인스 전기가 국내에 번역되었을 때(<존 메이너드 케인스>(고세훈 옮김, 후마니타스 펴냄)) 한국 지식인 사회는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우선 그 양에 압도되었다. 사실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경제학자라기보다는 역사학자의 면모를 갖춘 이로서, 케인스의 이론적 위치와 의미를 경제사적으로 들여다본다. 그런 까닭에 관리되지 못한 시장의 자유가 세계적 경제 위기를 가져온 현실에 대해 케인스가 가지고 있는 가치를 역사적 사실과 관련해서 면밀히 따지고 있다.

[Keynes] (로버트 스키델스키 지음, Perseus Books Group 펴냄). ⓒPerseus Books Group
아직 국내에 번역되지 않은 스키델스키가 2009년에 펴낸 [Keynes]는 200쪽이 채 되지 않는 두께이지만, 그 안에는 최근 미국 경제의 동요와 위기, 케인스의 삶, 그 이론의 배경과 발전과정, 세계화 시대에 케인스의 이론이 지니게 되는 의의들이 차분하고 정밀하게 설명되어 있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나면, 현대 경제사와 경제학사의 맥락이 하나로 묶이는 경험을 하게 되며, 그걸 기초로 해서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체제를 주도하는 경제 이론과 그 정책이 드러내고 있는 결함의 성찰과 대안에 대한 모색을 시도할 수 있도록 해준다.

보통의 소비자가 강해져야 경제가 강해진다

로버트 스키델스키에 따르면, 케인스는 1930년대에 이미 "경제학이 수학의 일부분처럼 되어버려 현실 세계를 반영하고 있지 못하며, 자본주의 시장 내부에 언제나 존재하는 '불확실성'에 대한 대응 능력이 없어 위기가 발생했을 때 시장에 대한 정책적 관리 체계를 갖추지 못하게 한다"고 비판한다.

케인스는 그 자신이 주식에 투기를 한 경험이 있다는 점에서, 이 불확실성에 대한 이해가 남달랐고 특히 금융 시장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할 경우 어떤 재앙적 결과가 초래되는지를 영국 재무성에 참여한 정책 결정자의 입장에서 발언할 수 있는 직접 체험이 존재한다.

케인스는 자본주의 시장이 위기를 겪게 되는 것은 보통의 노동자들과 시민들의 주머니에 소비에 사용할 수 있는 돈이 없어지게 되는 상황에서 비롯된다면서, 통화 정책으로 돈을 수혈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재정 정책을 통해 돈의 사용이 실질적 의미를 갖도록 하는 것임을 강조했다.

통화의 팽창은 자칫 하면 투기 시장의 논리만 강조하는 결과는 가져오게 된다는 점에서 "돈의 사용"에 대한 정책이 보다 중요하다는 것이다. 이러한 그의 이론은 널리 알려진 바대로 유효 수요의 기반을 확충해서 생산력 있는 경제를 회복하는 것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는 세이의 법칙으로 알려진 "공급이 수요를 창출한다"와는 전혀 반대되는 입장으로서, 수요 없는 생산과 소비는 생각할 수 없다는 점에서 경제 현실에 대한 이해를 바로 세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기업의 입장이 아니라 일반 소비자의 입장을 중심에 놓았다는 점에서도 주목된다. 보통의 소비자가 강해져야 경제가 강해진다는 논리가 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케인스의 이러한 접근은 무엇보다도 "완전 고용"을 목표로 했다는 점에서도 대단히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물론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가 실현되는 것이 현실에서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적어도 이를 정책적 목표의 중심으로 내걸었을 때와 그렇지 않은 경우는 엄청난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의 이론은 기본적으로 "자본과 노동의 사회적 타협"이라는 방식을 바탕으로 정부가 투자의 사회적 가치를 높이는 접근으로 가게 되어 있도록 한다. 말하자면 시장에서 자본의 사적 이익이 모든 것을 압도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노동자의 삶을 방어하면서 공적 가치를 도모하도록 이끌도록 하는 것이다.

이는 다시 풀자면, "사적 이해와 공적 이해의 중간 지대"를 확보하는 노력이며, 이를 통해서 시장이 그 사회에 대한 책임을 지는 구조로 만들어야 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이러한 케인스의 입장은 본질적으로 자본주의 경제를 불황과 위기로부터 구하는 부르주아 경제학의 면모를 갖추고 있는 한편, 자본주의의 사회 윤리에 대한 강조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시장에 대한 정책적 관여에 반기를 드는 하이에크나 프리드먼 등의 경제학과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자본주의 시장의 공적 책임과 윤리

가령 케인스의 자본주의 시장의 사회윤리에 대한 입장은, 그가 증시에 대해 보인 자세에도 그대로 드러난다.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케인스가 증시가 하락하는 경우에 제대로 된 투자가라면 마구 잡이로 내다파는 방식에 동조하기보다는 도리어 사들이는 쪽을 택함으로써 증시의 안정을 꾀하는 장기적 시야와 책임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 점을 강조한다. 물론 이러한 태도를 취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고 비현실적인 논지이기는 하지만, 케인스는 투자라는 방식으로 경제 활동을 하는 주체가 가져야 할 이런 윤리의 원칙이 서지 못하면 모두가 합심해서 경제 파국으로 가는 길을 만드는 오류를 발생시키고 만다고 주장한다.

로버트 스키델스키에 따르면, 케인스는 단지 경제학자로서만이 아니라, 윤리학, 철학, 역사학, 예술 등 각 분야에 걸친 학문적 훈련과 지적 축적을 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그의 경제학은 인간에게 궁극적인 행복을 가져다줄 수 있는 길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한다. 그런 까닭에 그는 "사회가 발전할수록 노동 시간은 줄어들어야 하며 남은 시간으로 보다 질적으로 또는 미학적으로 가치 있는 소비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한다.

즉, 케인스는 단지 부의 축적만이 자본주의 경제학의 목표가 되어서는 안 되며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부가 사회 전체의 공적 이익에 맞게 재분배되고 이를 기반으로 해서 각 개인이 보다 행복한 가치를 실현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것이 경제학과 정부의 책임이라고 말한다. 이는 밀이 경제 발전은 그 사회의 미학적 가치와 도덕적 삶, 문화적 즐거움을 지켜내는 지점까지만 이루어져야지 이걸 파괴하는 방식과 수준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이라고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증언한다.

재정 지출을 통한 사회적 투자의 가치

케인스의 경제학이 시장에 대한 국가 또는 정부의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시장에 대한 통제로 이어지는 것을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케인스의 의도는 자본 시장의 투자 행위가 사적 이해에만 좌우되는 것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정부의 재정 지출을 통한 사회적 투자의 가치와 비중이 높아지게 함으로써 시장 전체의 안정성과 함께 그 혜택이 국민 대중에게 골고루 가게 하려는 것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정책적 조정이 없게 되면, 결국 시장의 불안정성이 발생했을 때 그걸 해결하기 위해 국가의 재정이 지출되고 결과적으로는 투기에 따른 이익은 거대한 자본의 소유가 되고 불황의 부담은 국민에게 넘어가는 상황이 반복적으로 재연된다는 것이다.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바로 이런 자본주의 시장의 도덕적 파산은 2008년 미국 경제의 위기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면서, 메릴린치를 비롯한 거대한 투자은행이 투기에 따른 이익은 경영진이 가져간 반면에 그 손해는 납세자들인 국민들의 부담으로 전환된 것을 지적하고 있다.

로버트 스키델스키에 따르면, 결국 케인스는 자본주의 시장이 거대 자본의 탐욕을 충족시키기 위한 장치로 전락하는 것을 막고 시장의 공적 가치를 회복하면서 소비자들의 삶이 질적으로 높아질 수 있는 방식을 고민했다는 것이다. 또한 이 과정에서 자본의 이해가 주도하는 것이 아니라 자본과 노동의 정치적 타협이 중심이 되어 조화로운 사회를 만들어가는 동력을 창출해야할 필요성을 강조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논리는 비판하자면 자본주의 경제학의 틀 속에서 모순을 일정하게 순치시키고 자본주의 시장의 한계를 극복하기보다는 안정 위주의 정책으로 귀결된다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삶의 질을 위한 소비자의 권리가 강조되고, 노동의 이해가 공적 영역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시장의 사회적 윤리에 대해 조명한 점들은 오늘날에 있어서도 결코 가볍게 취급될 수 없는 가치들이다. 더군다나 다시 강조하거니와 "완전 고용"이라는 목표를 정부의 재정 정책의 책임으로 설정한 것은 대단히 중요한 논지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더해 경제학이 숫자에 묶이는 지수 논쟁이 아니라, 보다 근본적인 윤리와 철학, 그리고 역사의 차원에서 인문학적으로 사유되어야 하는 영역이라는 점을 강조한 것도 의미가 깊다.

로버트 스키델스키는 조지프 스티글리츠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2008년 경제 위기를 몰고온 제도적 요인 가운데, 상업은행이 투자은행의 영역을 겸하지 못하도록 한 '글래스-스티걸 법'을 해체해버린 것이라면서 이렇게 금융 시장에 대한 정부의 관리가 제대로 되지 못한 것은 시장의 공적 이익에 대한 고려나 의식이 부재한 까닭이라고 짚는다. 투기의 영토가 마구잡이로 넓어지도록 하면서 이를 통화 정책으로 부추기고 보통의 시민들은 돈이 없어 소비의 위축으로 고통당하도록 하는 정부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당연하게도 경제 전반을 불황과 위기로 가게 하는 주범이라는 것이다.

케인스를 다시 읽는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실에서 케인스 경제학에 대한 재조명으로 거장의 귀환을 맞이할 때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의 주술에 걸린 경제학의 새로운 변화를 기대할 수 있지 않겠는가라는 것이 그의 요지다. 오늘날 한국 경제의 현실과 미래가 여전히 불안정한 상태에 있는 조건에서, 케인스 경제학의 근본적 관심과 접근에 대한 논쟁이 펼쳐진다면 자본주의에 대한 근본적 극복까지는 아니겠지만 자본주의 시장의 사회적 책임과 노동 정책 그리고 재정과 통화 정책의 비판적 조절이 일정정도 가능하지 않을까?

케인스가 이젠 낡았다고 생각할 것도 아니며, 케인스는 여전히 부르주아 경제학자에 불과하다고 할 것도 아니며 그를 복귀시키기에는 현실 상황이 너무 달라졌다고 단언할 일도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의 불안정성이 지속되는 가운데 거대 자본의 사적 이해가 압도하는 현실에서 완전 고용과 시장의 책임 윤리를 따져 묻는 일은 여전히 중요하기 때문이다.

보통의 소비자들의 주머니에 돈이 있도록 하는 일, 그걸 못하는 정부는 정리 대상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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