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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화보다 힘있게, 삐라보다 재밌게 세상을 바꾼다!

[프레시안 books]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

얼마 전에 미국에 사는 친척과 장시간 통화를 했다. 더 이상 미국 생활에 희망이 없다며 한국으로 돌아가면 과연 먹고 살 수 있을지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미국에 이민간 지 30여 년이 넘은 친척은 이민자들 누구나 그러하듯이 초반에는 온갖 고생을 했다. 그리고 오랜 세월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하다가 몇 해 전부터 급속도로 위기를 맞게 되었다. 집을 담보로 은행에서 대출을 받아 벌인 사업이 몰락하면서 급기야 집까지 은행에 넘어가는 상황이 된 것이다. 한국에 있는 친척들은 미국 친척에게 사업을 한다고 욕심내서 크게 벌인 탓에 그렇게 되었다며 질책했다.

하지만 파산 위기에 직면하여 그나마 휴식을 취하러 잠시 한국에 들어 온 미국 친척에게 직접 전해들은 경위를 보면, 개인의 욕심이 부른 화라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그리고 미국 친척의 주변 사람들도 이와 비슷한 상황을 겪고 있는 이들이 상당수였다. 미국 친척이 사는 동네는 수영장이 딸릴 정도로 비교적 넓은 집들이 많은 곳인데, 빈집이 늘어가고 있고 물 빠진 수영장에는 쓰레기들이 쌓여서 악취가 진동하고 노숙자들의 공간으로 슬럼화 되고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신문에 보도되는 미국 경제 위기의 기사들을 볼 때보다 상황의 심각성을 실감하게 되었다.

에릭 라우센, 제시크 베를레, 세스 토보크먼의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김형규 옮김, 미지북스 펴냄)를 읽을 때 미국 친척의 상황이 떠오른 것은 이 책이 가까이 있는 내 이웃이나 친척의 이야기들처럼 미국 금융 위기 상황의 구조와 현상과 실태를 생생하게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설명해 놓은 친절한 책이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도 열심히 일하고 착실하게 저금하여 살아가는 서민들이 집도 잃고 일자리도 잃고 저축된 돈도 잃는 것은 그리 크게 부각되지 않는다. 하지만 리먼브라더스, AIG, 씨티그룹, 뱅크오브아메리카 등의 금융 회사들이 파산되는 상황에는 대마불사의 논리로 즉각 대처하는 정부와 국가의 부조리함을 이 책은 낱낱이 파헤치고 있다.

▲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세스 토보크먼·에릭 라우센·제시카 베를레 지음, 김형규 옮김, 미지북스 펴냄). ⓒ미지북스

이 책은 이런 현실의 문제가 야기된 원인을 대공황을 겪으면서 금융 서비스업의 규제를 하기 위해 만들었던 글래스-스티걸 법이 20세기 수십 년간 새로운 정부가 들어설 때마다 느슨해지면서 규제가 풀렸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2008년 금융 위기 이후에도 몇 개의 거대 금융 회사의 편의를 봐주는 데에 국민의 막대한 세금을 쏟아 부은 정부의 정책도 호된 비판의 대상이다.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의 뒷부분에는 '서민들을 회생시키고 대폭락의 재발을 막기 위해 정부는 어떤 일을 할 수 있을까?' 하는 질문이 있다. 이 책에서는 유독 상어가 많이 등장한다. 상어는 고리 대금 업자를 상징한다. 이 책은 국가가 거대 은행과 권력자들의 더 많은 이익을 위해 서민들에게 고리 대금 업자의 역할을 자임하고 있는 것을 상어를 통해 각인시키고 있다. 정부가 앞장서서 서민들에게 상어가 되고 있는 상황인 것이다. 자, 이러한 정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일까? 정부를 상어로 표현한 것은 정부가 할 수 있지만 하려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오늘날 신자유주의의 중심인 미국 정부의 실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가치는 지금 현재의 문제들을 진단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재발하지 않게 하려면 어찌해야 하는 것인지에 더 관심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이 땅은 우리 것이"기 때문에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은행과 거대 기업에 맞서는 전투적인 대중 운동"이라며 "저항"하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라는 것을 강조한다.

사실 이 만화는 재미가 없다.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를 만화책으로 보기 시작하면 참 재미없는 편이다. 만화적인 유머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마음을 바꿔서 만화책이 아니라 그냥 책으로 접하면 쉽고 재미있다. 이 책은 만화라는 매체가 얼마나 정보를 쉽고,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데 유용한 매체인지 증명해 준다. 이렇듯 기존에 우리가 봐 왔던 만화라는 인식을 접고 보면 새로운 만화가 보일 것이다. 그것은 만화가 단지 흥미로운 오락거리가 아니라 인식의 지평을 훨씬 넓혀주는 지식적 매체라는 것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흥미진진하다.

예전에 이처럼 재미없는(?) 만화책을 본 적이 있다. 멕시코의 저항 만화가인 리우스의 작품이다. 미술이나 만화 수업을 전혀 받지 않았던 신학도 리우스가 정치 만화를 그리기 시작하면서 사회를 변화하는데 필요한 교양을 습득하기 위해 리우스식 만화로 발표했던 그의 작품은 카툰이나 코믹스의 유형에 속하지 않는다. 지금은 흔히 보는 학습 교양 만화의 형식으로서 정보를 전달하는데 유용한 형식이라 할 수 있다.

바로 그 형식을 만든 것이 리우스이고 그의 작품들 몇 편은 한국에도 소개되어 있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 '아이콘북스 시리즈'로 만들어져서 1980년대 오월 출판사와 1990년대 이두 출판사를 거쳐 2008년 김영사의 '하룻밤의 지식 여행 시리즈'로 묶인 <마르크스>(윤길순 옮김, 김영사 펴냄)가 있고 그 이전에 출판된 <마오쩌둥>, <자본주의란 무엇인가> 등의 책이 있다. 그 책들을 읽으면서 만화책이라는 생각보다는 쉽게 풀어쓴 책이라는 생각이 먼저였다.

이 책들의 영향을 받은 많은 작가들이 등장을 했다. 특히 한국의 1980년대 사회 변혁 운동 속에서 등장했던 각종 유인물, 전단지, 학습 자료 등에 만화로 표현되었던 것들이 리우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 할 수 있다.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 작가 중 한 명인 세스 토보크먼은 전작인 <나는 왜 저항하는가>(김한청 옮김, 다른 펴냄)에서, 실제로 한국의 1980년대 이후 등장했던 시위 현장의 유인물들처럼 세스 토보크먼이 직접 인권이 유린되는 현장을 뛰어다니며 활동하면서 만든 선전물, 포스터 등의 쓰임새를 가졌던 작품들을 모아놓은 것이다.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는 그러한 측면에서 보면 프로파간다(propaganda)이기도 하다.

경제학을 다룬 책이라고 생각했던 <만화로 이해하는 세계 금융 위기>를 다 보고 나면, 경제학에 관한 지식 몇 개를 습득하는 것이 아니고 정치적이고 사회적인, 그리고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철학적 고민도 다시 하게 된다. 그리고 용산 사태를 만화로 묶어 낸 <내가 살던 용산>(보리 펴냄)과 인권 만화인 <십시일반>(창비 펴냄)과 같은 저항의 현장을 담은 더 많은 만화들이 기다려진다.

이러한 저항적 내용을 담은 만화책들이 출판될 수 있는 지금의 현실을 되돌아보면, 이 또한 수많은 저항의 역사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전 세계 시민들의 힘이고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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