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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나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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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대한민국은 '박정희의 나라'다!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

박정희, 그는 역사 속의 고인이 아니다

박정희, 그는 우리에게 두 개의 얼굴로 남아 있다. 급속한 경제 성장 그리고 민주주의에 대한 가혹한 탄압.

대결적 냉전 구도를 기반으로 국가 총동원 체제를 만들어 이룩한 부는 오늘날 이 나라의 국제적 위상의 기본이 되고 있기도 하지만, 그 부의 사회 경제적 본질은 무엇보다도 재벌 특권 체제라는 점에서 우리에게 여전히 무겁고 질긴 멍에가 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그 박정희 체제의 후예 또는 정치적 혈통은 여전히 살아남아 이 나라의 현재만이 아니라 미래까지 지배하려는 상황이다.

애초에는 민정 이양이요, 뭐요 하다가 결국 박정희 체제는 유신이라는 이름의 장기 집권과 독재 체제를 낳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의 성공이 아니라 종국적 몰락의 신호탄이었다. 이를 밑받침 삼아 그 자신이 구축한 절대 체제가 가져온 모순으로 마침내 암살이라는 방식으로 목숨을 잃고만 비운의 독재자 박정희는 그런데 역사 속에 사라져간 고인이 아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가 이끈 군사 쿠데타는 이 나라의 현대사 그 중심을 기습함으로써 국가 발전의 진로를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그로써 우리는 박정희를 빼놓고 우리의 국가적, 역사적 자화상을 설명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딸 박근혜는 지금 이 나라 정치의 중심부에서 대권의 근거리에 가장 가깝게 존재하는 인물이다. 그녀의 정치적 비중과 위상은 그녀의 아버지 박정희 없이 가능하지 않다.

혈연인 그녀에게만이 아니라 우리에게 드리워진 박정희의 그림자는 실로 대단히 길고 짙다. 박정희를 넘어선 것 같지만 우린 "경제 성장을 위해서라면 자유나 인권, 또는 인간의 가치를 일정하게 희생시켜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의 경계선을 여전히 넘어서지 못하고 있다. 이명박은 이런 시대적 현실에서 태어난 권력이며, 혹여 정권 교체가 된다고 해도 이 시대적 사고방식의 낡았지만 아직도 견고한 틀이 확실하게 깨진다는 보장은 없다.

전인권의 박정희 읽기

▲ <박정희 평전>(전인권 지음, 이학사 펴냄). ⓒ이학사
이런 고뇌 속에서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이학사 펴냄)을 펴든다. 저자도 이미 고인이다. 이중섭 평전(<아름다운 사람 이중섭>(문학과지성사 펴냄))도 썼던 1957년생의 그는 살아 있었다면 전 방위적 중견 지식인으로 활동하면서 많은 글과 말을 쏟아냈을 터였다.

전인권의 책이 새삼 주목되는 오늘의 현실도 현실이거니와, 그의 박정희 분석은 박정희에 대한 찬양과 비판적인 시선 그 사이에서 최대한 객관적인 각도를 취하려 애쓴 점이 돋보이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그건 한 인간의 고뇌와 역정 그리고 그런 것들이 정치 사회적으로 어떻게 엮어서 역사적 존재로 만들어져 갔는가를 읽게 하는 진지함과 섬세함이다.

그런 까닭에 박정희에 대한 열렬한 지지자들에게는 박정희의 어두운 심리적 상흔을 조명하는 박정희 내면 탐구라는 방식이 불만일 수 있고, 박정희 비판자들에게는 박정희 나름의 능력과 의지를 주시한다는 점에서 그의 정치적 공적에 대한 일정한 지지로 읽힐 수 있는 것이 그의 책이다. 하지만 어떤 인간도 처음부터 끝까지 선하다거나 또는 악하다고 할 수 없듯이, 박정희라는 인간 한 개인의 삶과 그가 거쳐 온 사연과 역사를 거리를 두고 하나하나 짚어내는 노력은 의미 있다. 그것은 단지 박정희라는 인물 하나로 그치는 일이 아니라 이 나라 현대사가 걸어오고 만들어온 자화상의 매우 중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이는 우리들 대부분도 '한때는 스스로가 박정희가 아닌 적이 없었던 적이 없진 않을까' 하는 질문을 던져보는 기회이기도 하고, 지금의 우리 자신의 모습을 정직하게 바라보는 일과 관련되고 있다. 이 지점에서 출발하지 않는 박정희 넘어서기 또는 비판은 무력할 수 있다. 가난과 열패감에서 벗어나 능력 있는 존재로 우뚝 서고 싶지 않은 이가 어디 있겠는가? 의지와 용기, 전망과 실력까지 갖춘다면 그런 개인은 남에게 모델이 될 수도 있다.

그에 더해 이걸 한 개인이 아니라 국가 전체의 프로그램으로 만들어 추진력 있게 밀고 나가 일정하게 성과를 거둔다면 그건 당장의 저항과 반대를 무릅쓰고 해볼 만한 일이라고 확신할 수도 있다. 그 과정에서 생기는 희생과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역사의 평가 속에서 긍정적으로 정리될 수도 있다고 여길 수 있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박정희 체제의 운명은 이에 대해 그렇다고 쉽게 대답해주지 않는다.

박정희에 대한 전기적 접근

그러기에 우리는 박정희에 대한 연구의 가치를 다시 발견하게 된다. 부국강병의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가던 역사 속에 내장된 폭력, 그리고 인간적 가치의 유기(遺棄), 한없는 욕망이 도달한 끝은 그걸 주도한 한 인물의 참혹한 죽음으로 마감되어졌기 때문이다.

전인권의 <박정희 평전>은 박정희에 대한 정치적, 역사적 평가를 시도하기 보다는 박정희의 정치사상과 행동에 대한 "전기적 관점(傳記的/biographical approach)"을 중심에 놓고 접근한 작업의 소산이다. 그도 인정하고 있다시피 박정희에 대한 가장 세세하고 방대한 작업을 한 것으로는 조갑제의 박정희 연구와 저서가 꼽히지만 그의 경우에는 박정희의 명백한 잘못도 그의 영웅적 면모의 발로처럼 평가하고 있다는 점이 비판된다. 그런 한편, 전인권은 박정희에 대해 '정치사상'이라는 가치를 주목하고 그것이 국가 통치와 경영에 일정하게 작동한 측면을 주시한다.

달리 말해, 전인권은 박정희 정치는 아무리 비판적인 평가를 내린다고 해도 단지 그 개인의 권력욕이나 폭력적 정치관에서 비롯된 것으로만 바라보게 될 경우 문제가 생긴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박정희 자신의 나름의 진정성과 그 심리적 동기의 진상을 알지 못하면 박정희 시대에 대한 올바른 평가나 전모 파악에 지장이 발생한다고 보는 것이다. 그런 까닭에 전인권이 쓴 다음과 같은 대목은 간단히 읽어서는 안 될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

"박정희는 국가의 최고 통치자로서 목표 지향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 사실 그는 목표 지향적 리더십이란 측면에서는 하나의 모범을 제시했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투철한 측면이 있었다. 무엇보다 그는 목표를 잘 세우는 사람이었다. 그는 어떤 사물과 상황이건 서너 가지로 간명하게 요약하는데 탁월한 능력 또는 경향을 보였고…"

"그는 공식적인 관계에서는 투명하고 명쾌했으며 부정부패를 몰랐고 단체의 재산을 개인적 용도로 사용할 줄 몰랐다. 이런 경우 그는 공화주의자의 일면을 보여준다."


상당한 칭찬이다. 그런데 이 두 번째 문장 뒤에는 바로 이런 대목이 이어진다.

"그러나 공식적 업무 관계를 떠나면 자기중심적으로 행동하는 경향을 보였으며, 비밀주의로 일관하며 심복에게 특혜를 주었고, 지나치게 술을 즐기고 나르시시즘을 드러내곤 하였다."

가치 박탈과 박정희 리더십

이런 박정희의 특성을 전인권은 그의 가족사가 드리운 불행과 그로 인해 받은 심리적 상처로부터 추적해낸다. 아버지의 억압과 형제들 사이의 어려움, 가난과 열패감 등이 겹쳐 그에게 지나칠 정도의 과묵함과 어머니와의 높은 친밀도를 만들어 냈고, 이런 과정에서 생겨난 박탈감이 그의 본래적 의지와 결합해서 엄청난 에너지를 뿜어낸 것을 전인권은 주목한다.

일종의 "심리적 고아" 상태로 있던 박정희의 유년과 소년기를 검토하면서 전인권은 박정희가 이런 현실을 어떻게든 극복하려는 투쟁적 인간형으로 자라났고 기회에 민감해서 자신이 목표한 바를 위해서라면 그가 누구이든 가차 없이 인간관계를 저버렸으며 자신에게 복종하는 자들에게는 한 없이 인자하나 그렇지 않은 이들에게는 서슴없이 폭력을 휘두르는 종적 인간관계 집착형인 것을 분석하고 있다.

전인권은 박정희가 심리적 고아 상태와 빈곤의 틀에서 성장하면서 부를 축적하는 문제와 위기에 대한 안보 의식이 고도로 발달했고, 이것은 그에게 지도자로서의 영웅적 결단을 촉구하고 정당화하는 쪽으로 몰아갔다는 것이다. 일견 이러한 이해는 단순한 분석이 되기 쉽다. 그렇기에 박정희의 개인사나 가족사에 대한 연구가 보다 심화되어야 이런 전인권의 분석과 평가가 보다 명확한 지지를 받을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 나온 증언과 자료로 볼 때 그다지 어긋나지 않게 보인다.

"그는 권력에 대한 인간의 동기를 가치 박탈에 대한 보상 수단으로 보았던 헤럴드 라스웰의 견해에 잘 들어맞는 인간이다. 또한 그는 '가난의 극복'이란 가장 낮은 계층의 절박한 요구에 누구보다 민감했다는 점에서 인민민주주의자의 요소를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을 추진하고 달성하는 과정은 엘리트주의적 계몽주의로 일관했으며, 종래에는 자신의 꿈과 불안을 지나치게 정치 과정에 투입하는 '고독한 영웅의 해결책'에 의존했다. 이와 같은 존재와 이상의 분열은 그의 생애 동안 영원한 것이었다. 이것이 현실과 불화하며 끊임없이 살아남아 지도자가 되려고 했던 박정희 행동론의 요체였다."

그랬기에 그는 이런 목표 지향의 정치를 위해서는 그 밖의 모든 것은 언제든 희생되어도 좋다고 여겼고, 무엇이든 이런 각도로 정당화하는 방식을 제도화해버린 셈이다. 그래서 전인권은 박정희가 "단순히 권력욕이 강해서 민주주의를 파괴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민주주의를 몰랐다"고 지적한다. 이러한 박정희의 생각은 "민주주의란 어찌되었든 우리에게 행복을 가져다주어야 한다"는 식으로 표현되었다는 것이다.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박정희의 생각들

그런데 이러한 그의 생각은 사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 여전히 작동하고 있는 사고방식이기도 하다. "민주주의가 밥 먹여 주나?" 또는 "일정한 희생과 문제가 있다 해도 경제 문제의 해결 능력이 있는 지도자 내지는 세력에게 권력이 가야한다"는 생각이 모두 그렇다.

따지고 보면, 과거 우리의 역사에서 가난과 좌절을 겪지 않은 세대는 없었고 이들의 가치 박탈은 누군가 영웅적 존재의 출현을 통해 해결하는 방식을 갈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와 함께 확실한 목표를 제시하는 전망의 구체성과 프로젝트의 실천력이 겸비되어 있을 때 그것이 곧 권력의 기본적인 정당성과 효율성으로 믿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다. 박정희는 그런 각도에서 볼 때 실제로 엄청난 정확도와 현장성, 그리고 치밀한 확인 과정을 통해 박정희 근대화 프로그램을 밀어붙였다. 이는 전인권의 평가가 아니더라도 부인할 수 없는 대목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제 이것이 갖고 있는 무서운 모순을 겪었고 알고 있다. 거대한 권력의 폭력성마저 용인되고 정당화되는 부의 축적은 더는 우리가 바라는 바가 아니다. 그로 인해 만들어지는 권력의 독선도 이제는 도리어 경제적 효율성에 있어서도 문제가 되고 있다. 이명박 체제는 이런 박정희 구도에서 한 발자국도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더더욱 불행한 것은 전망의 제시와 대중적 열망을 일으키는 능력, 그리고 정책 집행의 탁월성 갈은 점들은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수준에 있다.

여기서 우리는 진보 정치의 미래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사람들은 잘 살기를 바란다. 물론 그 잘 산다는 것의 의미는 여러 가지나 그 갈망에 대해 진보 세력은 구체적이고 열정적인 실력으로 대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실존적 의지로 뿜어 나오지 못하면 그건 박정희에 비해 못 미치는 정치가 될 수 있다. 물론 이제는 박정희 모델을 현실에서 적용해보려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적이고 실천력 자체가 부재한 경우다. 그러나 폭력적 독재자가 농민에게 인자하고 넉넉한 모습으로 다가갔고 그것이 농민들의 가슴을 울렸던 장면은 쉽게 넘어가고 말 일은 아니다.

무서운 독재자와 소박한 농민의 웃음, 이 사이를 오가며 이 나라 현대사의 중심을 움켜쥐었던 박정희에 대한 이해는 아직도 우리에게 충분치 않다. 박정희에 대한 판에 박은 비판을 넘어서서 그가 이 나라 정치에서 차지했던 그 정서적, 정책적 실체의 내면을 보다 깊게 들여다보는 일은 지금, 이 나라 서민들이 저 깊고 깊은 가슴 한 구석에서 터져 나오는 절규를 듣고 대답하는 작업에 일정하게 기여하게 해 줄 것이다.

인정할 만한 것은 인정하고, 반면교사로 삼을 것은 삼는 그런 자세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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