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충을 전공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내게 이런 질문을 한다.
"구충제 봄. 가을로 먹어야 되나요?" (그럴 필요 없다)
"요즘 들어 항문이 가려운데 혹시 기생충 아닐까요?" (그럴 수도 있지만, 대개는 안 씻어서 그렇다)
많은 이들이 같은 의문을 품고 있을 것 같아 공중파 방송에서 <기생충의 진실>이란 한 시간짜리 특강을 했다. 하지만 그 방송의 시청률은 1% 미만이었고, 그나마 방송을 봤다는 사람들은 어머니와 일가친척, 친구들 등이라, 그런 질문들은 지금도 반복되고 있다.
그렇다면 기생충에 관한 올바른 대중서가 대중들의 편견을 바로잡아줘야 하건만, 우리나라엔 기생충에 대해 알려주는 책이 거의 없다. 모 학자가 쓴 <기생충의 변명>(서민 지음, 단국대학교출판부 펴냄)은 여러 가지 면에서 어설프고, 같은 학자가 쓴 <대통령과 기생충>(청년의사 펴냄)은 기생충에 대해 혐오감만 부추겼고, 그나마 별로 팔리지도 않았다.
칼 짐머가 쓴 <기생충 제국>(이석인 옮김, 궁리 펴냄)이 그나마 괜찮은 책이지만, 우리나라 학자가 쓴 읽을 만한 책이 없다는 건 안타까운 일이었다. 기생충을 전공하는 학자들이 대중서를 안 쓰는 이유는 연구와 강의로 시간이 나지 않아서겠지만, 승진 등에 있어서 그런 책의 가치를 별로 인정해주지 않는 풍토도 한몫 했을 듯하다.
예컨대 우리 학교는 학술서를 쓰면 250점의 업적 점수를 주지만, 기생충 관련 대중서를 쓰면 달랑 50점만 준다. 그래서 학자들은 자기 학교 학생들 외엔 아무도 읽지 않는 기생충 교과서를 쓰는 데 열중하고, 그 결과 기생충 교수가 있는 학교 수만큼의 기생충 교과서가 시중에 나와 있다.
저자 정준호
▲ <기생충, 우리들의 오래된 동반자>(정준호 지음, 후마니타스 펴냄). ⓒ후마니타스 |
저자는 런던열대의학원에서 석사를 마친 정준호. 그는 나를 잘 모르겠지만, 난 그를 잘 아는 편이다. 기생충에 관한 교양 강의를 준비하면서 그의 블로그를 많이 참고했으니까. (☞바로 가기)
아는 것도 많고 자신의 앎을 글로 표현하는 능력도 대단했지만, 내가 감탄한 건 한 주제에 대해 글을 쓸 때마다 아주 많은 논문을 참고했다는 사실이었다. 그의 블로그를 보면서 얄팍한 지식으로 학생들을 가르쳐 온 스스로가 부끄럽기까지 했다.
석사를 마친 뒤의 행보도 평범하진 않았다. 그는 갑자기 아프리카에 있는 스와질란드로 떠나는데,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회의에서 비롯된다.
"연구가 기생충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연구를 위한 연구였던 것인지 지금도 자신 있게 답할 수 없다. 결국 나는 실험실을 떠나, 실제 기생충이 어떻게 세상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사람들과 함께하고 있는지를 보고자 아프리카에 오게 되었다." (11쪽)
연구를 하는 목적은 진리 탐구여야 하고, "이건 도대체 왜 그럴까?" 하는 지적 호기심이 그 바탕이 되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한 연구가 한둘이 아니다. 남들이 다 해놓은 연구를 기생충의 종류만 바꿔서 한다든지, 아니면 미국에서 오래 전에 한 일을 '국내 최초'라는 타이틀을 걸고 하는 게 그 예.
누군가 내게 "네가 하는 게 연구를 위한 연구가 아니냐?"고 묻는다면, 나 역시 별로 할 말이 없을 것이다. 그런 면에서 실제 기생충의 세계를 보기 위해 실험실을 박차고 나간 저자의 용기는 실로 존경스럽다.
기생충의 세상
이 책 184쪽에 언급된 것처럼 미국 기생충학회 회장이던 노먼 스톨(Norman Stoll)이 "벌레로 가득 찬 세상"이라고 탄식했던 건 1947년의 일로, 그땐 세계 인구수보다 기생충의 수가 더 많았다. 그로부터 60여 년이 지난 2011년, 기생충은 아직도 우글우글하다.
현재 장(창자) 속에 한 마리 이상의 기생충을 갖고 있는 사람의 수는 10억 명 정도, 아프리카에서 환자들을 진료하면서 저자는 이렇게 외칠 수밖에 없었다. "여전히 세상은 기생충으로 가득 차 있다."(11쪽)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생충에 대한 관심이 떨어진 것처럼 보이는 첫 번째 이유는 일단 우리나라에서 기생충이 많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2004년 조사 결과를 보면, 우리나라의 기생충 감염률은 3.7%, 전체 인구를 5000만 명이라고 한다면 대략 170만 명 정도가 기생충 한 마리씩을 갖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많나?' 하며 놀랄 분도 계시겠지만, 1971년 전 국민 감염률이 84%였던 걸 감안하면 거의 없는 수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래서 날더러 "요즘 할 일 없겠다?"라고 말하는 사람도 한둘이 아니다.
또 다른 이유는 기생충의 대부분이 못사는 나라에 집중됐다는 것.
"제대로 된 의료 혜택을 받지 못하거나, 심지어 아무런 의료 활동조차 이루어지지 않는 곳. (…) 기생충으로 대표되는 열대 질환이 만연하고 있는 곳이 바로 이런 지역이다." (185쪽)
생각해 보시라. 미국에 기생충이 만연한다면 우리가 지금처럼 기생충을 더럽고 한심한 병이라고 여길 수 있을까? 어쩌면 기생충이 선진국병이라는 인식하에 일부러 기생충에 걸리려는 사람들이 생겨날지 모르겠다.
아무튼 못사는 지역에 기생충이 만연한다는 건 기생충을 박멸하려면 어느 정도의 경제적 뒷받침이 필요함을 의미하며, 우리나라의 성공적인 기생충 박멸도 경제 발전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제3세계의 경제 발전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개발
"정부가 추진하는 4대강 정비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수질 개선을 통한 지역 주민의 건강권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한나라당 신상진 의원은 4대강 유역 주민들의 간디스토마 감염률이 10%에 달한다면서 이와 같이 말했다. 간디스토마는 담관암과의 관련성이 입증된 위험한 기생충이니 조심할 필요는 있지만, 그 대책이 4대강 정비 사업이라는 데는 고개가 갸웃거려진다. 간디스토마의 중간숙주인 우렁이는 수질이 좋아야 살 수 있으므로 4대강 사업으로 수질이 정말로 개선된다면 오히려 간디스토마 감염률이 증가할 것 같아서다.
무분별한 개발이 기생충의 급증을 부른 사례는 이 책에도 여럿 나오는데, 그 중 하나가 간디스토마보다 훨씬 무서운, 주혈흡충이란 기생충이다. 이집트에 세계 최고의 저수량을 지닌 아스완 댐이 건설된 이후 "댐 근방에서 주혈흡충 감염자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아이들은 사춘기가 되면 피 섞인 오줌을 누는 것이 당연한 일이 되었다."(152쪽)
또 케냐에서는 물고기 양식을 위해 보를 만들고 웅덩이를 만드는 일을 전국적으로 시행했는데, 그 웅덩이들은 결국 모기의 창궐을 불러왔고,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말라리아도 덩달아 급증했다.(155쪽) 더 큰 문제는 다음과 같은 일이다.
"과거에는 인간의 발길이 미치지 않았던 새로운 환경, 특히 열대 우림 지역의 난개발은 심각한 문제다. 개발로 인해 생태계가 파괴되고 생물 다양성이 줄어드는 것뿐만이 아니라, 야생동물에 국한되어 있던 다양한 기생충들이 인간 사회로 풀려나오는 기회를 제공해 주어 인간과 기생충이 접촉할 기회가 늘었기 때문이다." (223쪽)
에볼라 바이러스와 에이즈 바이러스는 열대 우림 지역의 야생동물에서 유행하던 질병이 인간에게 옮겨진 경우라니, 기생충이라고 해서 이런 일이 생기지 말란 법은 없다. 개발에만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는 현 정부가 새겨들어야 할 대목이다.
노란 리본을 기다린다!
저자 정준호는 집필을 마치자마자 국방의 의무를 수행하기 위해 입대해 버렸다. 저자와의 대화나 저자 사인회, 신문 인터뷰 등이 죄다 취소된 건 아쉽지만, 원래 저자는 책을 내는 것으로 자기 의무를 다하는 존재니 이제부턴 독자들이 나서야 한다. 기생충을 통해 질병과 사회, 정치를 모두 들여다볼 수 있는 좋은 책을 사 주는 건 좋은 독자의 의무일 테니 말이다.
참고로 말씀드리자면 책이 2000부 이상 팔리면 출판사 후마니타스에서 운영하는 책 다방의 은행나무에 노란 리본을 달아주기로 했단다. 그의 첫 번째 휴가 때 노란 리본이 잔뜩 달리기를 기대해 본다. 이건 협박인데, 학자들 중엔 자신의 책이 안 팔리는 경우 엇나갈 수가 있고, 기생충학자가 엇나가면 그 파장이 크다. 책에 나온 사례를 옮겨 본다.
"기생충학을 전공하던 어떤 박사생 한 명이 같이 살던 룸메이트가 너무 싫었다. 참다 못한 박사생은 매일 아침 먹는 샌드위치에 회충 알을 잔뜩 넣었다. 자신은 꾸준히 치료제를 먹으면서. 결국 룸메이트는 영문도 모른 채 급성 회충 감염증으로 응급실에 실려 갔다." (179쪽)
회충이 든 샌드위치를 먹고 싶지 않다면 당장 서점으로 가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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