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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여, 왜 그렇게 빨리 늙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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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들이여, 왜 그렇게 빨리 늙습니까?"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제임스 미치너의 <소설>

남태평양의 작가, 그 여든넷의 유산

작가 '제임스 미치너'하면 '남태평양'을 떠올리게 된다. 1907년생인 그는 39세였던 1946년, 첫 작품 <남태평양 이야기>를 발표하고 이듬해인 1947년 퓰리처 상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이었던 1943년, 그가 미 해군의 역사편찬위원으로 남태평양에 파견되어 그곳에서 지냈던 경험이 이 작품의 뿌리가 된다. 훗날 이 책은 뮤지컬과 영화 <남태평양>의 원작이 된다.

그는 무수한 소설을 발표했고, 가히 "미국 대중 소설의 신"이라는 위상을 지니게 되었다. 다소 늦게 작가의 길로 들어섰던 제임스 미치너의 나이 84세였던 1991년에 나온 작품이 다름 아닌 바로 이 <소설>(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이다. 이 작품이 특이한 점은 우선 여든이 넘은 그의 원숙한 문학관과 출판계에 대한 풍부한 경험이 녹아 있다는 것과, 작가-편집자-비평가-독자라는, 책을 중심으로 구성되는 네 개의 시선이 팽팽한 긴장과 각기의 개성을 가지고 드러나 있다는 점이다.

출판계의 필독서

▲<소설>(제임스 미치너 지음, 윤희기 옮김, 열린책들 펴냄). ⓒ열린책들
그런 까닭에 제임스 미치너의 이 <소설>은 글을 쓰려는 이나 책을 만들고자 하는 이, 또 비평에 관심을 가진 이들이라면 반드시 읽어야 할 필독서처럼 인식되고 있다. 물론 이 책이 다루는 시대상이나 독서 시장의 특징 또 비평 이론 등은 오늘의 한국 현실과 마주할 경우 차이가 있다. 그러나 작가의 고뇌, 비평가의 위기, 편집자가 처하는 시장의 압박, 독자의 취향 변화 등은 흥미롭고 또한 우리 자신에게도 적지 않은 질문을 던져준다.

같은 뉴욕 출신이면서 그보다 늦게 태어난 폴 오스터가 쓴 <뉴욕 3부작>의 경우, 작가가 작중의 인물인 작가가 되기도 하고 그 작가가 작품에서 그려내는 작중의 인물인 탐정이 되기도 하고 그 탐정이 뒤쫓는 인물이 되기도 하는 등 한 인물에게서 여러 인물이 겹치는 과정에서 자기를 찾는 구도가 보인다면, 제임스 미치너는 작가 자신을 네 명의 등장인물로 나눈 셈이다. 그러면서 작가와 출판사, 비평가와 독자라는 책을 받치고 있는 전면적인 구조를 노출시키고 그걸 통해 작가 자신의 목소리와 작가를 둘러싼 세계를 구축해내고 있다.

폴 오스터의 작품을 읽을 때에도, 리버 사이드 파크, 펜 스테이션, 브로드웨이, 암스테르담 애비뉴 등 뉴욕을 아는 독자라면 그 이름을 가진 공간이 익숙하게 느껴지듯이, 제임스 미치너의 이 <소설>도 펜실베이니아를 무대로 삼고 있어서 앨런타운, 드레스덴, 리딩, 베들레헴이라는 곳을 아는 이들은 그 지명이 떠오르게 하는 풍경을 어렵지 않게 잡아낼 수 있다. 더군다나 이 작품은 펜실베이니아에 거주하는 독일계 청교도 마을의 역사와 풍습, 인간관계를 밑그림으로 그리고 있다는 점에서 지역적 개성을 강하게 가지고 있다.

<소설>에 등장하는 것들

이런 지역성은 뉴욕이라는 대도시에 비하면 시골이라고 할 수 있는 곳의 이야기를 그 뉴욕에 있는 출판사가 어떻게 전국적으로 호소력을 가진 작품이 되게 하는지를 보여준다. 또 고도의 문학 비평 훈련을 받은 지식인의 눈으로 볼 때에는 무슨 특별한 문학 수업을 받은 것도 아닌 구시대적 인물로 보이는 작가가 어떻게 대중들에게 호소력 있는 저자로 받아들여지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도 던져 진다. 뿐만 아니라 문학적 논란의 와중에서도 서로에게 오가는 인간적 영향력과 관계의 내면적 본질 같은 것이 갈등과 화해, 이해와 결별 등의 여러 극적 요소와 결합되어 펼쳐진다.

제임스 미치너가 대중적 인기를 모은 작가라는 점에서 그에 대한 문학적 평가가 비평적 위치가 통상적으로 높지 않고, 그의 이념적 좌표가 다소 보수적이고 미국주의적인 지점에 있다는 것은 <소설>이라는 이 특이한 작품의 가치를 다른 세계관을 가지고 있거나 다른 비평적 시각을 가지고 보는 경우 낮게 평가되거나 다른 가치로 해석될 만한 것은 아니다. 그런 요소들이 이따금 이 책을 읽어내는데 걸리는 대목으로 나타나긴 해도, 작품 전체가 말하고자 하는 것, 노년의 원숙한 경지에 오른 작가가 남기려 했던 목소리가 무엇인지 주목해본다면 의외로 얻는 바가 적지 않을 것이다.

<소설>의 줄거리는 저명 작가가 된 노년의 루카스 요더의 1990년 어느 날의 이야기에서 시작된다. 그는 젊은 시절 네 권의 책을 낸 바 있으나 별로 성공을 거두지 못했고, 작가로서의 길을 계속 걸을 수 있을지 의문시 되었던 인물이었다. 그가 그려내는 이야기는 펜실베이니아 독일계 청교도 미국인들이 살고 있는 마을(제임스 미치너는 이곳을 가상의 그렌즐러로 정해놓는다)의 풍경과 습속, 그리고 사람들이 잘 알지 못했던 인간적 갈등이 만들어 놓은 전통 같은 것들이다. 그런 까닭에 이런 곳의 사정에 관심을 두지 않는 한 별반 대중들의 눈을 사로잡기는 어렵다는 것이 뻔하다.

그러나 그의 작품에는 완고할 정도로 세상의 변화에 마주해서 버티고 있는 사람들, 지나간 것들에 대해 애착을 지니면서 그 가치를 지켜내는 사람들, 이제는 사람들이 버리고 쳐다보지도 않는 것들을 다시 주워 그 가치를 새롭게 인식시키려는 치열한 노력이 우직할 정도로 담겨져 있다. 뉴욕의 키네틱 출판사에 있는 여성 편집자 이본 마멜은 이런 그의 작품에 처음부터 주목한다. 그녀는 고등학교만 졸업한 맹렬 편집자이고 남들이 성공하지 못한다고 하는 요더의 책을 붙들고 씨름한다.

네 사람의 시선, 하나가 되어가는 몸

여기서 우리는 작가 요더와 편집자 마멜 사이에 책의 내용과 방향, 문체, 구성 등을 놓고 벌어지는 긴장감 넘치는 때로의 대치와, 때로의 격려, 그리고 서로에 대한 깊은 신뢰를 보게 된다.

결국 이본 마멜의 고집스러운 요더에 대한 옹호와 끈질긴 인내 덕으로 요더의 작품은 전국적 명성과 국제적 인기까지 모으게 되는 단계에 온다. 키네틱 출판사가 여러 가지 위기에 처하게 되었을 때에도 그녀와 요더의 관계는 "의리"라는 말로 집약될 수 있는 관계를 유지하고, 훗날에는 가족과도 같은 인간관계를 맺게 된다. 마멜은 뉴욕을 떠나 요더가 사는 그렌즐러로 이주하기까지 할 정도다.

이들 사이에 등장하는 인물이 비평가이자 문학 평론을 전공하는 교수 칼 스트라이버트다. 그는 자신의 스승이 되는 옥스퍼드의 저명한 문학 평론 교수와 동성애 관계를 갖는 인물이기도 하고, 그 스승의 문학적 이론에 토대를 두고 요더의 작품에 비판적인 견해를 굽히지 않기도 한다. 한편, 그에게는 티모시 몰이라는 뛰어난 젊은 제자가 등장하면서 그의 인간관계에 새로운 긴장이 생기기도 하고 스승도 사망한 이후 그의 정신세계는 여러 가지 고비를 겪게 된다.

이런 가운데 그와 루카스 요더, 이본 마멜, 티모시 몰의 할머니이자 이 작품에서 독자로 등장하는 제인 갈란드가 서로 얽히면서 치열한 작품론이 전개된다. 세월이 점차 지나면서 질투들 느낄 정도로 성장하게 되는 티모시 몰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이 작풍의 대단원을 이끄는 사건이 된다. 너무도 일찍 사망한 탁월한 한 젊은 작가이자 그 발상과 접근이 새로운 시대를 암시하고 있는 그의 작품을 책으로 내놓는 작업을 통해 이들 네 명의 인물들은 하나의 몸이 되어간다.

"소설"은 이제 그간의 대립과 긴장, 비판과 이해, 만남과 결별 등의 고개를 넘어 앞으로의 문학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지를 묻고 있는 셈이다. 이제는 마지막 작품을 썼다고 생각하고 다들 그렇게 여긴 요더는 이 사건 이후 "지나가고 죽은 것을 되살리는 과거 속에 사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현실을 마주하고 그려내겠다"는 요지의 말을 한다. 그러면서 자신의 문체와 발상, 표현과 접근에 대해 신랄할 정도로 비판했던 스트라이버트나 티모시 몰의 말이 맞았음을 인정한다. 이는 노년에 접어든 작가 제임스 미치너의 자기 고백적인 대목이기도 하다.

작가, 비평가, 편집자, 독자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작가는 자신의 문법과 현실에 충실하고, 비평가는 그것이 담고 있는 가치를 인정하는 동시에 그 한계를 뛰어넘으라고 질책하고, 편집자는 자신이 아끼는 작가의 미래에 기대를 걸고 치열한 싸움을 한다.

그리고 독자는 세월이 흐르면 자신의 독서에 대한 세계관도 변화하는 것을 깨닫는다. 세상에는 그 어느 것도 절대적으로 고착된 것은 없고, 어느 기준 하나만이 유일하게 진실일 수는 없다. 인간은 때로 이것을 사랑하기도 하고 때로 저것을 갈망하기도 한다. 그러면서 그 사이 사이에 새로운 내면의 성장과 변모를 겪기 마련이다.

이 작품을 읽어가면서 느껴지는 강렬한 대목들은 글 쓰는 이들이 치러야하는 비판을 어떻게 소화해나가는가, 좋은 책을 만들기 위해 고투하는 편집자들의 실력과 권위가 어떻게 다져지는가, 인간관계와는 별도로 문학에 대한 충실함이 가져오는 비평의 냉혹함을 어떻게 받아들일 것인가, 그리고 좋은 독자들의 공동체는 어떻게 만들어지고 자라나는가의 문제 같은 것들이었다. 이것은 우리 현실에서 인문학이 처한 상황과, 그것이 새로운 계기를 잡아 이 사회의 정신적 자양분으로서 자리매김을 하는 길에 대한 물음이기도 하다.

제임스 미치너는 이 작품 <소설>을 통해, 문학하는 이들이 가져야 할 정신적 뿌리에 대해 줄기차게 묻는다. 그것을 잃거나 또는 없는 경우, 어떤 장벽과 고독에 빠지게 되는지 그리고 더는 앞으로 나가지 못하고 마는 위기에 직면하게 되는지 일깨운다. 그와 동시에 거기에만 사로잡혀 있을 경우, 새로운 변화를 적극적으로 자신의 내면에 수용하거나 그것을 창출할 수 있는 안목을 상실할 수 있음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 문학은 어떤 벽에 부딪히고 있다. 몇몇의 인기 작가의 작품 외에는 우리 사회에 지적 충격을 주지 못하고 있고, 그마저도 평가가 엇갈리고 있는 중이다. 그런 가운데 한쪽에서는 인문학에 대한 새로운 시도가 제도권, 비 제도권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작가의 훈련과 독자의 성장이다. 이 두 가지가 서로 만나 하나의 불꽃을 일으켜나가는 사건이 없고서는 우리의 지식 시장은 계속 허덕이고 말 것이다.

언제나 새로운 도전에 자신을 내놓을 수 있는가?

그 허덕임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찌 해야 하는가? 이 <소설>에 등장하는 작가 루카스 요더는 그의 나이 여든넷, 이제는 모든 것을 마무리 하고 자신의 세계를 하나의 성채로 고정시킬 만한 때에 그는 비명에 간 젊은 작가 티모시 몰의 세계에 눈을 뜬다. 그리고 그는 새로운 도전을 한다. 요더는 제임스 미치너의 분신이다. 지금까지 자신의 영혼 깊숙이 지켜온 세계에 대해 루카스 요더는 묻는다. 이것이 최선인가?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것은 무모한 일인가? 그의 아내 엠마는 말린다. 그러나 요더는 밤늦게 서재로 들어선다. 그의 새로운 작품이 탄생하는 시각의 시작이다.

무얼 말하는가? 우린 너무 쉽게 노화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또는 너무 빨리 좌절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니면 자신에 대한 기대조차 접고 사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의 봉우리가 이루어지기 위해 필요한 실험은 언제나 끊임없는 열정과 새로운 발상의 시도이다. 그것이 그의 지금까지의 세계를 난도질 하는 듯해도.

우리는 아마도 다름 아닌 용기를 잃었는지도 모른다. 오늘날의 한국 문학, 또는 오늘날의 한국 인문학,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다시 새로운 문명의 지평에 달려드는 그 무모할 정도의 용기가 생겨난다면 우린 어느새 긴 항해이지만 신비하고 놀라운 경험이 쌓여가는 기쁨에 취할지도 모른다.

인문학의 빛나는 성취는 그런 용기 있는 자에게 돌아가는 위대한 선물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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