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초입의 세계를 뒤흔든 일본의 대재앙 앞에서 우리는 비극과 함께 인간적 감동을 경험하고 있다.
사람의 능력을 벗어난 자연의 대공습과 시한폭탄과 다를 바 없는 원자력 발전소의 위험성이 결합된 참극 앞에서, 인간의 이기적 자기 방어 본능을 뛰어넘는 희생적 자기 헌신의 모습도 목격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가 일본인들의 정신에 남겨놓게 될 거대한 외상이 어떻게 치유되어 새로운 내일을 열어가게 될 것인지 지구촌은 숨죽이며 주시하고 있다.
그런 반면에 이 땅에는 이웃의 고통과 재앙에 저주나 다를 바 없는 언사를 퍼붓는 종교 지도자들의 모습에 사람들은 경악하고 말았다. 일본의 지진과 지진 해일(쓰나미)은 하나님을 믿지 않은 벌과 경고라는 말로 압축해보자면, 그 재앙은 당연한 결과라는 투였다. 남이 겪고 있는 저 무서운 아픔과 절망에 연민을 느끼고 뭔가 도울 일이 있는지 마음 애절해하는 게 아니었다. 그건 마치, "거 봐라, 내가 뭐라 했니? 그렇게 당하는 것은 싸다"라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우리는 이러한 이른바 종교 지도자들의 발언에서 한국 사회가 어떤 정신적 추락과 파멸을 경험하고 있는지 절감하게 된다. 욕망의 탑을 축복의 열매로 선전하고, 이슬람 지역에 대한 미국의 침략 전쟁마저 선교의 기회로 호도하며 이슬람에 대한 극한의 적대감을 보이면서 자기 독선의 절대화에 몰두하는 이런 종교의 현실은 본래의 출발점과는 그 거리가 멀어도 한 참 멀다. 고통의 늪에 빠진 이웃과 자신 사이에 아무 경계선이 없는 차원으로 가는 사랑과 연민의 능력은 이들의 머리와 가슴에 존재하지 않는다.
"축의 시대"란?
▲ <축의 시대>(카렌 암스트롱 지음, 정영목 옮김, 교양인 펴냄). ⓒ교양인 |
각 고대 종교와 철학에 대한 방대하고 자세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다가, 기원전 13세기부터 기원전 3세기라는 1000년에 걸친 정신사를 마주하고 있어 그녀의 대작을 간단하게 압축해서 소개하는 것은 쉽지 않다. 아니, 그걸 압축해서 해설하는 것 자체가 이미 고대 정신사의 본질을 훼손하는 일이 될 수 있어 이 책을 직접 읽고 대화를 깊이 나누어 보는 작업이 온당한 접근이 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가진 가치와 주제 의식을 정리해보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정신의 내적 불꽃을 잃고 누추하고 조악한 말들의 악폐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라도 필요한 과정이 될 수 있다.
야스퍼스가 "축의 시대"라고 주목했던 기원전 5~6세기는 제국의 지배 아래 변방의 유랑자처럼 전락하고 만 이스라엘 민중들의 역사적 현실에서 터져 나온 예언자들의 목소리, 겉치레의 형식을 버리고 내적 각성에 몰두하게 된 불교의 등장, 합리적 이성을 통해 현실에 도덕적 질서를 부여하려 한 그리스 철학, 그리고 전쟁과 분열이 거듭된 역사를 거치면서 인간의 덕성과 자연 질서 조화가 하나의 유기체가 되어야 한다는 깨우침 등으로 인류가 거대한 정신적 각성을 하게 된 사태를 이른다. 그렇지 않아도 카렌 암스트롱의 책 원제는 "거대한 전환 내지는 변혁"으로 번역될
고대 정신사의 발생 기원
카를 야스퍼스가 <역사의 기원과 목적(The Origin and Goal of History)>(1953년)이라는 책을 통해 "축의 시대"에서 비롯된 인간의 정신이 이후 인간의 역사에서 어떻게 펼쳐지는가를 추적한 반면, 카렌 암스트롱은 "축의 시대"를 통해 탄생한 정신의 특징과 핵심, 그리고 이것이 우리에게 오늘날 무엇을 일깨우고 있는가에 보다 깊은 관심을 가졌다. 그런 점에서 그녀는 "축의 시대"의 발생 기원을 고대 인류 문명사에 끊임없이 벌어졌던 전쟁과 폭력, 그리고 잔혹한 희생과 죽음의 현실에서 찾는다.
이 경험은 인간에게 생명의 소중함, 평화의 가치, 고통에 대한 연민, 사랑의 연대, 내적 성찰의 중요성에 눈을 뜨게 되고, 나를 위해 누군가 희생하고 있다는 각성 등을 가져왔다고 본다. 고대 종교의 발상지가 각기 다르고 그 놓인 역사적 현실도 차이가 있으며 그 기원의 중심에 서 있는 존재의 관심도 동일하다고 할 수 없지만 그 모든 종교의 내적 깨우침 모두에 관통하고 있는 공통된 진실은 "고통 받고 있는 인간에 대한 구원"이라고 정리한다.
흥미로운 것은, 고대 문명사에 대체로 비슷하게 등장하는 종교적 관심의 제1단계는 어떤 외적 형식을 발전시켜 그것을 통해 인간이 겪고 마주하는 문제를 푸는 해결책으로 삼으려 한다는 것이며, 이 단계를 지나 보다 성숙해지면 그 어떤 종교도 그 눈을 자신의 내면으로 돌리게 된다는 점이다. 바로 여기서 인간은 자신의 진정한 자아, 자기 정체성에 대한 진실을 내다보게 되며 이걸 토대로 다른 사람과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된다는 가르침이 나온다는 것이다.
그 어떤 종교이든, 바로 이렇게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성찰과 각성이 빠져 있는 상태에서 제 아무리 세상을 바로 잡아보려 해도 그것은 올바른 자기 기준이 없는 상태로 출발하는 것과 같기 때문에 실패하고 만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축의 시대가 가져온 종교적, 철학적 각성은 "폭력의 제거" 또는 "폭력의 거부"가 그 핵심적 특징이라고 카렌 암스트롱은 강조한다. 동물이나 인간을 희생제의 제물로 삼거나 압도적인 폭력을 신의 성품으로까지 내세운 시대는 그로써 "축의 시대"와는 결별하게 된다.
고대 문명사에 이 폭력의 문제는 문명의 발전 과정에서 반드시 필요한 힘 내지는 추구해야 할 가치라고 인식했던 시기가 있었으나, 그것이 가져온 비극을 "축의 시대"의 선각자들은 직시했던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생명의 권리는 짓밟히고 "유혈(流血)의 체제"가 모든 것을 지배하고 만다는 것을 이들은 경고했던 것이다. 이와 함께 이들 축의 시대의 선각자들이 특별히 강조했던 것은 "사회적 악"이었다고 카렌 암스트롱은 말한다.
사회적 악과의 쟁투
가난하고 힘없는 이들에 대한 권력자들의 핍박과 착취는 절대자 또는 자연의 원리, 내지는 종교적 영성의 기준과 철저하게 대립하며, 이런 현실과 격렬하게 쟁투하는 것이야 말로 축의 시대가 이후의 역사에 남긴 소중한 유산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다.
특히 아모스와 호세아 등의 예언자나 예레미야 등의 불의에 대한 질타와 경고는 종교가 현실의 구조적 죄악에 어떻게 맞서 싸웠는가를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 무수한 종교적 기득권이 도리어 이와 같은 예언자적 목소리를 탄압하고 침묵시키는 것은 축의 시대가 일구어낸 종교 본래의 가치를 허무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카렌 암스트롱이 이 책에서 특별히 주목하고 있는 것은, 엄청난 전란과 재앙 그리고 그 와중에 겪게 되는 혼돈과 멸망, 그리고 고통의 연속으로 인한 절망에서 피어난 정신사의 가르침이다. 춘추 전국 시대가 낳은 도덕적 깨달음, 제국 바빌론에 포로로 끌려간 참담한 시절의 성찰 같은 것들은 모두 고난과 고통의 경험이 가져다 준 새로운 정신세계의 각성이다. 뿐만 아니라 이를 통해, 인간은 고통을 겪고 있는 이웃과 하나의 마음이 되어 연대하고 인간을 고통으로 몰아넣는 일체의 악과 마주해서 이겨나가려는 의지를 뿜어내게 된다는 것이다.
다시 정리하자면, 축의 시대가 태어나게 한 정신의 교훈은 인간이 치르게 되는 고통을 그대로 마주하고 이를 통해 서로 연민의 마음을 나누며, 결국 인간과 인간 사이에 그 어떤 구별이나 경계선 또는 차별을 사라지게 하는 세상을 만드는 것이다.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지고, 너의 고통이 곧 나의 고통이 되며 우리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인류의 일체화가 이루어지도록 하는 것이 모두가 행복해지는 세상을 이루어내는 원칙이라는 것이다.
"축의 시대"가 일깨우는 마음
카렌 암스트롱은 이 책을 마무리 지으며 이렇게 말하고 있다.
"우리는 축의 시대에 등장한 현자들이 무시무시하고 끔찍한 상황을 겪으면서 이웃에 대한 연민과 자비의 윤리의식을 발전시켰다는 점을 끊임없이 기억해야만 한다. (…) 이들이 말한 이러한 모두를 위한 연민과 자비의 마음이야 말로 우리를 위해 가장 좋은 최선의 방책이다. (…) '사랑'이란 이웃에게 도움을 주고 그들의 삶을 보살피며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을 말한다. (…) 오늘날 지구촌의 인류는 모두 우리의 이웃이다. (…) 오늘 아프가니스탄이나 이라크에서 일어나는 일은 내일 런던이나 워싱턴에 어떻게든 파장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결국, '사랑'과 '관심'이 이기적이며 단견에 찬 정책보다는 훨씬 더 모두를 위한 길이 될 것이다."
일본의 재앙과 고난은 일본인들의 정신에 깊고 깊은 외상(trauma)을 지워지지 않는 상처처럼 남기고 말지 모른다. 그러나 그들의 내면에 이 절망의 벽을 넘어 새로운 희망의 의지를 갖게 하는 정신의 변모와 발전을 가져올 날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이 고통의 와중에 처한 이웃 앞에서 어떤 마음을 품고, 무엇을 해야 할 것인지를 깨우치면 우리의 "축의 시대"가 새롭게 열릴지 누가 알겠는가? 우리 안에도 사랑과 관심, 연민의 연대로 일으켜 세워야 할 사람들이 너무도 많지 않은가?
조금만 눈을 돌려보면, 답은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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