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 자가 살아난다, 이러면 우리는 흔히 부활이라고 생각한다. 그건 기쁨이고 감격이다. 그러나 '좀비'의 경우는 좀 다르다. 이건 우선 무섭다. 그리고 추악하다. 뿐만 아니라 대응할 힘이 없으면, 희생당한다. 계속 죽은 상태로 있어야 할 존재가 공포감을 조장하면서 산 자에게 달려들어 그 목숨을 노린다. 이게 바로 좀비다. 좀비는 흡혈귀의 다른 형태다.
그런데, '좀비 자본주의'라니? 금융 자본의 투기성이 지배적인 경우 이를 카지노 자본주의라고 부르거나, 또는 자본주의의 발전 단계가 초기라 그 행태가 천박하다고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이 있기는 하나 좀비 자본주의는 낯설다. 뭔가 으스스 하지 않은가?
약간 곁길이기는 하나 본론에 들어가기 전, 이왕 말이 나와서 짚고 갈 게 한 가지 있다. '천민자본주의'라는 말은 천민이 자본가가 아닐뿐더러 행태의 천박성에 대한 비난을 천민에게 돌리는 방식이라 문제가 심각하다. 천민은 자본주의 계급 질서에서 가장 고통 받는 사람들 아닌가? 막스 베버가 만든 이 단어를 진보적 지식인조차 쉽게 쓰는 것에 대해 반성이 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자. 이제 책 소개를 해보자. <좀비 자본주의(Zombie Capitalism)>(Heymarket Books 펴냄)는 아직 국내에서 번역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저자 크리스 하먼은 한국에도 나름대로 알려진 영국 좌파 지식인이라는 점에서 그의 책은 주목할 만하다.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지도적 인물이자, <민중의 세계사(A People's History of the World)>(천경록 옮김, 책갈피 펴냄), 독일 좌파의 비극을 그려낸 <패배한 혁명(The Lost Revolution)>(임성윤 옮김, 풀무질 펴냄) 등으로 국내 독자들과도 만난 바 있다.
여전히 유효한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모순 분석
▲ <좀비 자본주의(Zombie Capitalism)>(크리스 하먼 지음, Heymarket Books 펴냄). ⓒHeymarket Books |
새로운 혁명의 출현에 대한 하먼의 예상과 관련해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 변화의 요구가 어느 수준인가와는 별도로 오늘날 전 세계 도처에서 자본주의의 미래에 대한 확신은 분명히 흔들리고 있으며 민생고에 대한 저항은 여기 저기 번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우리 사회에서 복지 논쟁이 일고 있는 것도 자본주의적 부의 축적 방식에 대한 도전이 더는 막을 수 없는 단계에 온 것을 입증하고 있다.
그러나 이 복지 논쟁도 노동자들의 삶에 대한 자본의 압박과 지배를 극복하는 근본적인 작업과 함께 논의되지 못하면, 자칫 자본의 노동 착취를 은폐하거나 민중들의 저항을 달래는 국가와 자본의 수단으로 전락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하먼의 <좀비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이론에서부터 20세기와 21세기 자본주의 발전 과정 전체를 정리할 수 있는 매우 유용한 저서이다.
사실 이미 마르크스 이론에 대해 상당한 지식이 있거나 마르크스 이후의 논의 전개를 체계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경우에는 이 책이 매력적으로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경우에도 마르크스로부터 힐퍼딩, 로자 룩셈부르크, 레닌, 부하린, 그리고 군다르 프랑크와 자본주의 국가론, 제국주의 논쟁 등을 망라하는 논의를 재정리한다는 점에서 읽어본다면 흥미로울 수 있다.
그러한 기반 위에서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 내부의 변화와 그 의미를 읽어낸다면, 전쟁과 평화, 독점자본과 국가 권력의 동맹 체제, 투기적 금융 시장의 확산과 거품, 위기의 발생 등에 대한 이해와 이론이 서게 될 수 있다. 2008년 이후 세계 경제의 파국적 충격을 경험하면서 미국 경제의 추락에 대한 여러 저서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지만, 사실 그에 앞서 이러한 위기를 내다보고 전망을 세우고 대안에 대한 논의를 해 온 것은 하먼과 같은 좌파 지식인들이다.
노동자들의 현실과 분리된 자본주의 분석은 무력하다
크리스 하먼은 기본적으로 오늘날 세계 자본주의는 노동자들의 삶을 매일 소진시켜가면서 만들어지는 (이른바 소외된 노동의 결과로 이룩된) 자본의 거대한 덩어리가 잠시도 쉬지 않고 노동자들의 생명을 좀비처럼 공격해서 빨아먹고 자신을 유지한다고 본다. 이것은 마르크스 이후 그 어떤 이론적 전개와 발전이 있었다고 해도 변하지 않은 자본주의의 본질이라고 그 핵심을 잡아낸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그는 노동자들에게 의존하지 않는 자본주의란 불가능하며, 국제적 경쟁 격화에 따라 날로 떨어지는 이윤으로 해서 노동자들에게 줄 것이 사라져가는 자본의 현실로 해서 (자본이 갑자기 개과천선을 해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분배 방식으로 살아갈 것을 각오하지 않는 한) 노동자들의 불만을 해결할 수 있는 길이 좁아지고 있음을 주목한다. 그렇다고 과거처럼 노동자들의 육체를 고강도로 착취할 수 있는 가능성도 줄어들고 있는 것이다.
이와 함께 자본주의 생산 방식으로 인한 환경 재앙의 증가, 에너지 가격의 상승, 인구가 느는 반면 식량은 부족해져 가는 상황 앞에서 자본이 노동자들을 자신의 요구에 맞게 동원할 수 있는 수단도 한계에 봉착해가고 있다고 본다. 더군다나 21세기 세계 자본주의 체제가 거대한 금융 자본의 투기와, 이에 근거한 부채 경제가 위기의 심화와 반복을 조성해내고 있다는 점에서 보통사람들의 경제적 안전은 날이 갈수록 보장되기 어려워지고 있다는 것이다.
도전받는 자본주의의 현실과 미래
상황이 이렇게 되니 자연,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대중의 자세는 변할 수밖에 없으며 지구촌 전체의 현실로 보자면 하나의 대세가 되어가고 있다고 본다. 거대 자본이 자신의 이윤 축적의 방식을 고수하면서 살아남으려면 결국 노동자들에 대한 착취 강도를 높이거나 또는 노동자가 많이 필요 없는 방식의 투자를 통해 대안을 모색해야 할 텐데 두 가지 모두 자본의 축적 과정에 긴장과 부담을 준다는 것이다. 전자는 저항을 불러오게 되고, 후자는 시설 투자에 따른 이윤 회수의 속도나 그 결과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는 좀비처럼 노동자들과 사회적 약자들의 피를 빨거나 생명을 갉아먹지 않으면 이윤 창출이 불가능하고 작동이 되지 않게 된다는 점에서 좀비의 운명을 벗어나지 못한다. 최근 <마이더스>나 <로열 패밀리> 등 드라마를 장식하고 있는 재벌 기업들 내부의 주도권을 둘러싼 전쟁과 욕망, 그리고 비인간화는 그 좀비의 정체 일부를 드러낸다. 물론 이 드라마들이 노동자, 사회적 약자를 짓밟고 착취하는 재벌 기업들의 현실을 폭로하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좀비들을 축출하자
좀비 영화는 언제나 좀비를 축출하는 매우 괴롭고 무서운 과정을 보여준다. 개인적으로 이런 영화들을 좋아하진 않지만, 바로 그런 현실 속에 우리가 살고 있다면 좀비는 반드시 좀비의 세계로 돌려보내야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성을 자본의 욕망으로 짓밟는 자들은 모두 좀비다. 인간의 생명을 자본의 수단으로 삼는 자들 역시 모두 좀비다. 그런 자본의 탐욕을 위한 권력도 좀비의 집단이다.
최근 청소하는 아주머니 등을 비롯한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집단 행동과 저항이 분출되고 있다. 좀비들에게 당한 사람들의 당연한 선택이다. 이들과 동맹 세력이 되고 있는 청년 학생들이 있다. 산업 재해로 죽은 이들의 한을 풀고자 일어선 사람들도 늘고 있다. 하먼이 말한 대로 노동자들은 무력해지거나 존재감이 없어지거나 또는 저항의 에너지를 잃거나 아니면 자본의 달래기에 넘어간 것이 아니다. 자본은 이제 점점 더 노동자들의 요구와 저항에 대해 땜질 처방할 방법이 없어지고 있다.
좀비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것이 우리 모두의 소망이다. 노동하는 이들의 삶을 먼저 바로 세우지 않는 복지는 자본의 모순을 연장하고 그 부담을 민중들에게 전가하는 길이 된다. 하먼의 <좀비 자본주의>는 이런 현실에 대한 시의적절한 논의 제기와 처방 제시다. 무엇보다도 좀비의 정체를 드러내는 일이 우선이다. 그래야 좀비에게 속지 않는다.
크리스 하먼이 이 책에서 인용하기도 한 <자본> 1권의 한 대목에서 마르크스는 이렇게 말한다.
"자본주의적 생산 방식은 주어진 기간 안에 노동자의 생산에 투여하는 시간을 늘리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노동자의 진정한 생명의 시간을 단축시키고 있다."
이게 바로 좀비가 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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