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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배꼽'을 문지르지 않으면 '탄생'은 없다!

[김민웅의 '리브로스 비바'] 김정환의 <음악의 세계사>

음악의 역사? 음악적 흐름으로 본 역사?

제목만 보고 처음에는 음악의 역사에 대한 책인 줄로 알았다. 시인이면서도 워낙 클래식 음악의 조예가 깊고, 술이 오르면 어느 자리에서건 기운차게 뽑아내는 노래 솜씨를 가진 김정환이기에 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에 더해 우선 1200쪽에 달하는 거대한 분량을 써낸 실력에 탄복했고, 얼핏 펼쳐든 페이지에 담긴 방대한 지식의 넓이에 독파의 의욕을 다졌다.

그런데 이 책은 <음악의 세계사>(문학동네 펴냄)라는 제목이 줄 법한 인상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의 기원과 발전에 대한 탐색을 훨씬 넘어서는 시간과 공간을 우리에게 종횡무진으로 펼쳐준다. 김정환의 이 책은 우리가 오늘날 인문학의 사회적 기근상태에서 그토록 기다려왔던 "문화예술의 인문학 총서 프로젝트"를 그의 괴력에 가까운 역량으로 이루어낸 열매다. 이로써 우리는 인문학의 뼈대를 세울 매우 견고한 주춧돌 하나를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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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음악의 세계사>(김정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김정환은 세계사 전반을 큰 틀에서 조명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그 세세한 면모를 날줄과 씨줄로 촘촘하게 엮어내었을 뿐만 아니라, 문자와 음악, 신화와 문학, 무용과 연극, 그리고 영화에 걸친 인간의 모든 예술행위의 역사적 맥락과 그 성취를 전 방위적으로 다루어 냈다. 그래서 그의 책을 통해 우리는 저 아득한 고대의 기원에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인간이 살아온 내력의 무수한 길과 그 길이 펼쳐낸 예술적 상상력의 세계와 흥미진진하게 만난다.

그는 예술가의 의식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기에 역사를 전문으로 공부한 이들에게도 쉽지 않은 만만치 않은 작업을 "겁도 없이" 해냈을까? 김정환은 이렇게 말한다.

예술가의 모험

"'혼돈에서 우주가 나왔다'는 믿음은 정치의 토대지만 예술의 입장에서 그 믿음은 방관이다. 예술가는 자기 내부와 궁극의 우주를 일치시키기 위해 평생 동안 혼돈의 미로를 헤매며 스스로 '우주의 창조'보다 '창조의 우주'를 탐내고, 그래서 정치적으로는 위험하지만, 모험이 아름다운 건축미학을 낳고 그 속에서 정치가 거처를 마련한다."

결국 그는 "창조의 우주"를 모색하고 혼돈을 거치면서 자기 내부에 미학의 역사적 뿌리를 내리기 위해 치열한 역사탐험을 한 셈이다. 그에 더해 김정환은 그의 역사해석과 성찰의 압축을 도처에서 우리에게 선사한다. 가령, 위의 인용문 앞뒤에 걸친 발자크의 리얼리즘에 대한 글에서 그는 이런 문장을 써놓는다.

"바그너와 마찬가지로 발자크 리얼리즘은 (자본주의) 현실에 대한 현실적인 응전의 결과며, 자본주의와 친근한 소설 미학이다. 마르크스가 이룩했던 이성과 계몽의 절정으로 '(영국) 정치경제학, (독일) 철학, (프랑스) 혁명이론'의 삼위일체는 독일의 낭만주의적 후진성을 진보성으로 역전시키려는 필사의 절규로 인한 각질화를 말끔히 벗지는 못했고, 엥겔스의 말(리얼리즘의 승리)은 문학에 대한 혁명가의 매우 유연한 입장이지만, 충분하다고 할 수는 없다. 혼돈에서 우주가 나왔다는 (…) 정치의 '오해'가 더 위험하다.

엥겔스와 발자크는 불충분하게 만났으며, 장차 레닌과 현대 문학은 서로를 치명적으로 오해한다. '모든 러시아 단편 소설은 고골의 <외투>에서 나왔다'고 도스토옙스키는 말했고, 사실주의와 인상주의를 절묘하게 중첩시킨 <외투>의 영향력은 (인상주의적으로) 도스토옙스키 <지하생활의 수기(1864)>와 (사실주의적으로) 톨스토이 <이반 일리치의 죽음(1866)>에 이르지만 고골과 발자크를 합하더라도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의 러시아 산문문학 시대 전사를 모두 해명할 수는 없고, 끊어진 고리를 이은 가장 중요한 인물은 당시 가장 진보적이던 러시아 문학 평론가 벨린스키와 소설가 투르게네프다."

이런 문학사의 이해에는 다음과 같은 맥락이 전제 되어 있다.

"스페인 작가 세르반테스 <돈키호테>가 웃음의 비극으로 중세를 무너뜨리고 소설이 표준 문학 장르로 자리 잡은 이래, 작품을 통해 프랑스 작가 발자크가 말 그대로 이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키고, 러시아 작가 도스토옙스키가 우주보다 드넓고 깊고 복잡한 인간심리세계를 파고들며, 톨스토이가 세상보다 드넓은 생애를 펼치면서 (…)"

역사 없는 사람들의 의식과 그 기원

그런데 정작 그의 책은 이런 문학사적 그물망을 단숨에 조명하는 것에서 그치고 있지 않다. 고대하면 흔히 메소포타미아, 또는 그리스나 이집트부터 떠올리기 십상인 상황에서 그는 뉴질랜드, 오스트레일리아, 오세아니아 등으로부터 그의 신화적 기원을 이야기하기 시작한다. 이건 마치 오스트레일리아 출신의 저 고전적 인물이라고 할 역사고고학자 고든 차일드(Gordon Child)의 시도를 떠올리게 한다.

"유럽인들이 밝은 낮에 해안선을 보고 항해를 하던 수준일 때 폴리네시아인과 미크로네시아인들은 남극과 북극지역을 뺀 태평양 대부분을 별 위치, 해류 흐름과 파도무늬, 섬과 환초로 인한 공기-바다 간섭무늬, 새들이 나는 모습, 바람과 날씨 등을 살피는 방법으로 항해했다."

이로써 우리는 유럽중심주의의 역사관에서 벗어나 에릭 울프(Eric Wolf)가 <유럽과 역사가 없는 사람들(Europe and the People without history)>이 짚어낸 대목을 만나게 된다. 이런 그의 시선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언어로 역사를 창조의 우주로 변모시켜나가야 하는지 일깨운다.

그의 다음과 같은 대목은 역사에서 읽어야 할 광경들에 대한 시적 접근의 프리즘을 보여준다.

"햇살은 가장 가벼운 옷이고 바람은 속도와 힘만 보이는, '내가 나를 능가하는' 자유며, 식물은 내 안에 잠든 전혀 다른 생병 방식이고 꽃과 나무 그리고 풀은 인간을 능가하는 생명의 상상력이고 엽록소는 잎이 영원히 푸르른 생명이며 동물은 내 안에 웅크린 알레고리고, 철새이동은 천지를 수놓는 머나먼 본능의 지도며 동물 언어는 모든 것이 무용이자 음악인 소리다."

그래서 "만지는 것은 언제나 배꼽을 만지는 것이며, 만져진다는 것은 언제나 배꼽을 들키는 일이다"라고 시인은 말하며, "중요한 것은 우주의 음악과 무용을 '귀=배꼽'의 '몸=약동'으로 느끼는 일이다." 이렇게 하지 않으면 역사의 실체를 실체로 감각할 수 없으며, 역사는 관념의 덩어리가 되어 진실을 놓칠 수 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시선을 출발점으로 삼고 떠나는 김정환의 역사내면 여행은 세계사 전체의 시간적 범위와 지리적 공간 전체를 아우른다.

지구사적 조명의 성취

그건 오늘날 역사학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로 수행되고 있는 "지구사(Global History)"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하고 있다. 하나의 문명권이 다른 문명권과 서로 어떤 유기적 관계를 맺어나가는지, 그리고 그런 관계들이 어떻게 해서 자식을 낳고 사촌이 되며 서로의 혈연관계가 이어지기도 하고 헝클어지기도 하면서 신화, 음악, 무용, 문학 등에서 세계사적 지도를 그려나가는지 보여준다. 그는 각 문명권의 언어의 기원까지도 파고들면서 "의식의 기원사"를 시도하고 있다.

이러한 작업을 이뤄내는 것은 김정환이 그간 역사공부에 얼마나 넓고 깊게 몰두해왔는지를 알게 해준다. 그로써 독자들은 이 책을 읽으면서 자신의 지식체계에 대충 얼기설기 되어 있는 대목들을 정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이해를 심화시키면서 하나의 체계를 건축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우리나라 인문학자들의 경우 치명적으로 부족하다고 느껴지는 대목은 역사지식이 아닐까 하는 인상을 늘 받아왔는데, 김정환의 이번 작업은 그러한 부분을 메워줄 뿐만 아니라 하나의 전범, 또는 예술인이 쓴 역사의 오벨리스크와 같은 의미를 만들어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와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중국의 고대만이 아니라 우리 사회에서 상대적으로 무지한 영역이라고 할 수 있는 중세역사를 거쳐, 미국과 오늘의 중국을 넘어 현대의 본질, 김정환의 표현대로라면 "배꼽"을 만지면서 이제 어디로 가야할 것인지 묻게 된다. 그런 까닭에 그가 신화를 다루는 재주는 신화학자 조셉 캠벨(Joseph Campbell)과 <황금가지>의 프레이저(J.G. Frazer)를 겹쳐 놓은 듯 하며, 역사의 몸을 다루는 솜씨는 윌리암 맥닐(William McNeil)의 시도와 닮아 있다. 그만큼 김정환은 고전이 된 이들의 어깨 위에 서서 역사의 의식 내면과 구체적인 풍경을 그려내는데 상당한 성공을 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 그가 본 현대 80년의 단상은 그런 의미에서 오늘 우리가 서 있는 자리를 명쾌하게 분석하고 있다.

"신문과 TV 방송 등 매스커뮤니케이션이 민주주의 '정보=예술'망에 달하지 못하고, 언론이 칼보다 강한 붓과 칼보다 위험한 장난감 사이를 오가고, 언론자유 운동이 경제를 능가하는 '말=보석'의 유통을 가능케 하지만 언론재벌 황색 저널리즘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고, 영화 '예술'이 할리우드 스타시스템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지며, 록 음악이 반항하는 정신의 육체에 머물고 만화와 애니메이션이 풍자 및 환상의 정치학에 미치지 못하고, 영화의 배꼽을 이루지 못하고, 광고가 총제를 겪는 사회 일원의 순간을 창출하지 못한다. 제1차 세계대전은 죽음의 무용, 제2차 대전은 '죽음=무용', 그리고 세계 대공황은 그 무용의 배꼽이었다."

어떻게 다시 시작하나?

이러한 현실 앞에서 우리는 어디를 뚫고 어디로 가야 하는지에 대해 그는 역사를 대하는 우리 자신의 예술능력을 강조한다. 아무리 기계적 복제와 대중을 위한 대량생산 예술제작 체제가 형성되어 있더라도 우리의 역사 속에 깊숙이 잠겨 있는 보다 깊은 감동을 이끌어내어 세상을 음악처럼 흐르게 할 수 있는 힘은 결국, 예술적 개성의 발휘에 있다는 이야기다. 그리하여 그는 오래된 고대문명의 흔적들은 당대에 불변의 영원성을 과시하려 했지만 "그러나 그것은 지금 모든 문명은 망한다는, 그렇게 역사는 매일 매일 새로 시작된다는 아주 오래된 증거에 다름 아니다"라고 새로운 문명의 시원에 대해 갈파하고 나선다.

오늘날 출판계에서 보다 본질적인 논쟁과 방대한 지식이 요구되는 책들을 내려는 노력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반가운 일이다. 사실 책값도 부담 될 수 있고, 책의 양도 읽어내기 간단치 않은 저작들이 최근 계속 선을 보이고 있는 것은 그만큼 우리사회의 독서역량이 높아지고 있다는 점과 함께, 독자들의 관심사가 김정환의 말대로 "배꼽"으로 옮겨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걸 만지지 않고 다른 곳을 아무리 문질러 대도 "본질의 탄생"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뭔가 꽉 막혀 있는 듯한 이 시대에 역사를 악보의 "도돌이표"처럼 돌아보고 그 길고 오랜 시간의 연마 속에서 태어났다가 사라지거나 또는 살아남아서 익고 익혀 오늘에 이르기까지 한 것들 모두를 우리의 의식에 품어본다면, 오늘 이 시간, 우리가 서 있는 이 자리가 새로운 역사의 시작에 가장 적합한 때와 장소일 것이다. 한 시인이 역사를 마주 대하며 이토록 광활한 대작을 낸 것에 읽는 이로써 가슴 뿌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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