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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소설, '설거지들' 와서 노는 잔치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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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기후원

"내 소설, '설거지들' 와서 노는 잔치판"

[어쿠스틱 인문학] <설계자들> 김언수와의 만남

서울 마포구 합정동, 주택가 한 가운데 공장이 우두커니 서 있다. 잘못 찾아온 건가 두리번거리자니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가 손짓을 한다. 험악하게 생긴 커피기계들 사이로 콩 볶는 냄새가 따뜻하게 새어나오는 희한한 곳이다. 이름마저 순박하고 무뚝뚝한 '커피 공장 앤트러사이트(anthracite·무연탄)'다.

11일 이곳에서 열린 '어쿠스틱 인문학'에서도 날 것의 냄새가 났다. 어쿠스틱 인문학은 KT&G 상상마당아카데미와 <프레시안>이 11월부터 매월 둘째 주 목요일 저녁에 마련하는 '저자와의 만남' 행사다. 손님들은 소파에 아무렇게나 둘러앉아 좋아하는 책의 저자와 가공되지 않은 대화를 나눈다.

▲ <설계자들>(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이날 첫 회에는 소설 <설계자들>(문학동네 펴냄)의 '설계자'인 김언수 씨가 초대됐다. 진행자는 <책 읽기의 달인 : 호모부커스>(그린비 펴냄)로 유명한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다. 두 사람은 마침 같은 대학의 같은 과 선후배 사이라고. 같은 도서관에서 책을 읽고 비슷한 곳에서 술을 마시며 성장한 탓인지 분위기도 살짝 닮았다.

둘 다 음악을 별로 듣지 않는다. 책을 읽는 이유는 "달리 즐길 매체가 없어서"(이권우) 혹은 "오로지 심심하기 때문에"(김언수). 술에 대해선 의견이 좀 다르다. 김언수 씨는 책이나 여자보다 "두말할 것도 없이 술"이 좋다지만 이권우는 "책 60%, 술 30%, 여자 10%"라는 모범적(?) 답을 내놓는다.

사전 인터뷰와 서로 나눈 문자 메시지가 슬라이드 영상을 통해 벽에 비춰지는 동안 진행자·저자·독자는 만남의 워밍업을 끝낸다.

내가 모르는 내 삶, 설계된 세계

<설계자들>은 2010년으로부터 그리 멀지 않은 어느 시점, 서울의 위성 도시쯤으로 보이는 '푸주'를 배경으로 펼쳐지는 킬러들의 이야기다. 문장은 액션 영화처럼 흥미진진하지만 던지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핵심은 총을 쏜 자가 아니라, 총을 쏜 자 '뒤에' 누가 있느냐는 것이다.

죽음은 암살자의 의지대로가 아니라 세상을 계획하는 더 큰 설계자들에 의한 것이다. 주인공 '래생(來生)'은 '밀렵꾼이 놓은 덫에 걸려 숨을 헐떡이는 멧돼지가 있다면 죽일 것인가 기다릴 것인가'를 묻는 노인에게 이렇게 말한다.

"글쎄요, 누가 죽이건 그건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닌 것 같은데요?" (21쪽)

<설계자들>을 쓰게 된 계기에 대해서 이권우 씨가 묻자 김언수 씨는 이렇게 답한다.

"어느 날 신호등 앞에서 신호를 기다리는데 내 마음대로 좌회전, 우회전도 못하고 길을 설계한 사람들의 의도에 의해 움직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아 그렇구나. 내가 이렇게 잘못되기 이전에 누군가 이 세계를 설계해왔고, 그래서 내 몸에 맞는 길은 존재하지 않는 거구나.' 아주 단순한 것조차 내가 다 아는 게 아닌 거예요. 이게 살아오면서 안 유일한 진실입니다."

이권우 씨는 "이 소설은 '우리 삶이 구조의 산물인지, 의지의 결과인지' 묻는 철학적 주제와 맞닿아 있다"고 덧붙였다.

매 순간이 설계돼 있는 거라면 '설거지들'에겐 이날 자리가 최고의 설계가 아니었을까. '설거지들'은 <설계자들>이 출판사 문학동네 카페에 연재될 당시 꼼꼼히 읽고 댓글을 달던 광신도들을 일컫는다. 작가 자신도 독자들 의견에 적극적으로 답했고, 연재가 끝날 때까지 2만2383개의 댓글이 오갔다.

▲ 소설가 김언수 씨(왼쪽), 도서평론가 이권우 씨(오른쪽). ⓒ프레시안(최형락)

"내 소설은 댓글 오가는 잔치판"

이권우 씨, 김언수 씨 두 대담자의 어린 시절에는 신문의 연재소설이 인기가 많았다. 독자들은 작가에게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요즘은 신문이 맡았던 소설 연재의 기능이 인터넷 포털사이트와 각종 문화 예술 사이트로 넘어갔다. 마침 이권우 씨가 김언수 씨에게 그 얘기를 물었다. '설거지들'은 귀를 기울인다.

이권우 : 반응도 실시간 댓글로 오지 않아요? 5개월간 '주 5일제' 근무를 하면서 2만 개 넘는 댓글을 받았다는데, 댓글이 작품에 미친 영향이 있다면요?

김언수 : 좋은 제안이 있으면 잘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물론 안 받아들이는 경우도 있습니다. 많은 분들이 늙은 개 '산타'를 죽이지 말라고 했는데 죽였어요. 왜 죽였냐고 난리가 났습니다. (웃음) 댓글의 영향은 긍정적인 일입니다. 댓글을 스펀지처럼 잘 흡수할 수 있는 이야기가 좋은 이야기이고, 댓글이 잘 스며들지 못한다면 나쁜 이야기를 쓰는 셈입니다.

서른두 살이 되기 전까지 저는 소설이라는 게 내 이야기라고 착각했습니다. 그런데 그건 소설이 아니었어요. 김언수가 느낀 게 뭐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나의 이야기를 넘어 우리의 이야기가 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습니다. 여기 계신 분들이 '나 같으면 이러지 않았을까' 하고 동일시하는 얘기가 되지 않으면요.

소설은 누구나 떠들 수 있는 광장이나 마당, 잔치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을 쓰는 건 판을 벌린다는 의미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작가의 인식 < 이야기"

하지만 작가의 고유한 세계관, 애초에 그어놓은 윤곽선마저 댓글로 어그러지고 마는 실패의 경우를 우리는 적잖이 보아왔다. 특히 가장 저렴한 판타지인 TV 드라마의 경우 어느 때보다 커진 시청자의 목소리의 힘은 절대적이다. 매일 연재된 <설계자들>에도 그런 갈등이 있지 않았을까. 원래는 제목처럼 작가 머릿속에 완벽히 '설계'되어 있는 세계가 아니었을까.

"많은 이들이 소설을 전부 장악하려고 합니다. 전지적 관점, 신의 관점에서 이야기를 움켜쥐고 인물들을 마음대로 움직이려고 하죠. 물론 저도 키보드 하나로 천둥이나 해일을 나오게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작가가 높은 위치에서 독자에게 무언가를 던져준다는 생각을 버려야 한다고 봅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다 알 수 없어요. 짬뽕을 30년 만든 사람만이 겨우 짬뽕에 대해서 하나의 관점을 보탤 수 있을 정도입니다. 전 지금도 제 아내가 어떤 사람인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지 못합니다. 하물며 소설은 어떻겠습니까. 그것이 반영하는 진실은 극히 작은 부분입니다."


▲ 김언수 씨. ⓒ프레시안(최형락)
이렇게 '아무 것도 모른다' 말하면 소설은 대체 어떻게 쓸 수 있을까.

"일단 공간을 만들어 놓고 (내가 구상한) 인물들을 그 공간으로 한 번 던져 보고, 어디로 흘러가나 보는 겁니다. 사회도 이질적인 것들이 유기적으로 의미를 찾아가는 것처럼, 이야기도 조금씩 걷고 흔들리면서 의미를 가져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덧붙인다.

"작가가 뭔가를 깨달았다고 생각하고 어떤 메시지를 반드시 전해야 하기 때문에 이야기라는 틀을 빌려오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그런 것이 옳은지 그른지는 제가 판단할 부분이 아니지만, 개인적으로 이야기가 작가의 인식이나 주장보다 훨씬 큰 공간이라고 생각합니다.

김언수 안에는 새로운 것도, 가치 있는 것도 없습니다. 하지만 김언수가 만든 이야기는 김언수보다 대단할 수 있습니다. 미워하고 증오해서 실제 삶에선 받아들일 수 없는 것들이 이야기 속으로 들어와 같이 놀 수 있는 것처럼."


<설계자들>과 리얼리티

이야기는 작품 얘기로 흘러갔다. <설계자들>을 관통하는 모티프는 암살이다. 이권우 씨가 그쪽으로 화제를 돌렸다.

▲ 이권우 씨. ⓒ프레시안(최형락)
이권우 : 우리 현대사 중요 분수령마다 암살이 있었습니다. 현대사의 역사가 곧 암살의 역사라고 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그것은 대부분 정치적인 암살이었습니다.

이 소설에서는 일제 시대 이래 가장 강력한 암살 청부 집단이었던 너구리 영감의 '개들의 도서관'이 민주화와 함께 새로운 세력으로 떠오른 한자의 '기업형' 보안 회사와 충돌하고 있습니다.

이런 거대한 경제적 목적을 둔 음흉한 암살 얘기는 이제까지 볼 수 없던 것입니다. 정치에서 경제로 헤게모니가 넘어가는 시점에서 나온 정치적 우화로 읽을 수 있을 것 같은데요.

김언수 : 소위 리얼리즘이라고 불리는 것을 선호하는 편이 아닙니다. <설계자들>은 실제 사건들이 모티프가 된 것도 아니고 어떤 고발을 위해 쓰인 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현실에서는 사실 누군가가 (암살로) 사라진다고 해도 거대한 관료제가, 이 세계가 뒤집어 질 수 없고요.

마침 소설의 리얼리티와 관련해 재미있는 문제 제기가 하나 있었다. 소설가 장정일 씨가 '프레시안 books'에 쓴 <설계자들> 서평에서 "원래 총이 나오는 한국 영화(소설)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한다"며 총으로 이뤄지는 암살에 대한 비현실성을 지적했다. 물론 그 판단 기준은 '현실의 승인'이 아니라 '작품 내적인 핍진성'이다.

후자를 위해서도 총은 등장하지 말았어야 하는 것 아니었을까? 이권우 씨가 같은 질문을 던졌다.

"부산 서구 암남동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는데 바로 앞에 영도가 있었습니다. 영화 <친구>에 나오는 동넵니다. 해방 전 큰 항구가 있었는데 지금 인천항에서 하고 있는 밀수를 거기서 하고 있었어요. 집 근처에 부산 3대 빈민가 중 한 곳이 있었는데 세 집 걸러 한 집에 범죄자가 살았습니다.

글쎄요, 저희 동네엔 총도 마약도 흔했습니다. 고등학교 때 러시아 산 총이 85만 원 했어요. (웃음) 총이 등장하는 건 그것이 칼보다 '권력'을 상징하기 때문입니다. 이 싸움이 밑에서의 싸움이 아니라 '저 위'의 싸움이라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프레시안(최형락)

"소설가는 모두의 사연을 들어주는 직업"

소설 속에는 설계를 전복하려는 계획이 등장한다. 현실 세계로 말하자면 저항 세력이다. 전복 계획이 실패하는 결말은 작가의 현실 세계에 대한 비관을 반영하는 것은 아닐까.

"미토(소설 속에서 전복 계획을 세운 등장인물의 이름)의 세계가 옳은가는 중요한 게 아닙니다. 저는 운동하는 사람들, 어려운 자리에서 저항하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사회가 훌륭한 사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제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누가 옳은지 아닌지가 아니라, 어떤 일이 얼마나 복잡한가에 대한 것입니다.

학교에 아는 형이 있었습니다. 이기적이고 어디서 아부도 잘 하고 그래서 엄청 욕을 먹는 사람이었어요. 모든 이가 자신을 싫어한다는 걸 본인도 알았을 거예요. 그런데 어느 날 우연히 그 형이 여섯 살 난 딸을 목마 태우고 벚꽃 사이로 걸어오는 모습을 봤습니다. 그날 일기에 '내가 당당한 것은 나보다 고귀한 누군가를 위해 뒤로 물러설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라고 썼습니다. 뻔뻔하고 이기심 넘쳤던 그 형이 그렇게 복잡해 보일 수 없었습니다.

소설가는 흰 고양이가 옳은가 검은 고양이가 옳은가를 말해주는 직업이 아니고 흰 고양이도 사연이 있구나 하는 얘기를 해주는 직업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이 악함과 비열함과 추함의 얼굴을 두루 갖추고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하는 일입니다."

ⓒ프레시안(최형락)

'밀도 있는 시간'을 위하여

김언수 씨는 1년에 몇 달은 소설을 쓰기 위해 숲에 처박힌다. 도시에서 아내와 있는 시간에는 소설을 전혀 읽지 않는다고 한다. 재차 '심심해야지만 소설을 읽는다'고 강조한다. 과거 '부루마블 게임'에 광분해 있었던 1년 동안은 소설을 전혀 읽지 않다가 그것이 지겨워지자 비로소 책을 들었다는 역사도 있다.

이권우 : 독자로서는 김언수를 심심하게 만들어야겠네요?

김언수 : 사실 소설가는 대부분의 직업보다 편해요. 창작의 고통이라고 얘기하는데 짬뽕 만드는 데에도 대단한 고통이 소요됩니다. 소설가는 출근 시간도 없고 아무도 터치를 안 하니까 하염없이 게을러질 수 있어요. 그래서 저는 아무 것도 없는 숲으로 처박혀 글을 씁니다.

자신이 정말 하고 싶은 일을 해내기 위해선 TV나 인터넷, 술자리처럼 즐거운 것들을 멀리하는 기간이 필요한 것 같아요. 저는 한국 사람들 가운데 특별한 재능을 지닌 이가 많다고 생각하는데 다만 고유한 자기 삶을 위해 자신을 심심하게 만드는 재주는 없는 것 같아요.

저는 숲 속에 있으면 밖에선 생각나지 않았던 이들 다 생각나고, 아내도 한없이 사랑스럽고, 울기도 하고 그렇습니다. 전 이 시간을 '밀도 있는 시간'이라고 표현합니다. 음…. 뭐라고 잘 표현이 안 되는데….

ⓒ프레시안(최형락)

"여기 계신 분들이 평생 제 목소리를 이렇게 기억하면 안 되는데…."

김언수 씨는 대화를 시작할 때 이렇게 걱정했다. 얼마 전 감기에 걸렸다고 했다. 실제로 목소리는 작고 희미해 잘 들리지 않을 때도 많았다.

실제로 많은 독자들에게 김언수는 애석하게도(!) 그 희미함으로 기억될 것 같다. '너는 어떤 색이냐'를 따져 묻기 좋아하는 이 세상에서.

"나는 이제 선과 악의 구분을, 명확한 정의와 분명한 진실을 믿지 않는다. 나는 단색으로 만들어진 세상을, 이분법을, 칼날처럼 날카로운 비판과 명쾌한 아포리즘을 믿지 않는다. 나는 누군가를 완벽한 악인으로 만드는 모든 구호들을 경계한다." (<설계자들> '작가의 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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