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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가 판치는 세상…당신은 이미 '설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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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가 판치는 세상…당신은 이미 '설계'되었다!

[프레시안 books] 김언수의 <설계자들>

김언수의 <설계자들>(문학동네 펴냄)은 건축사나 건축에 대한 소설이 아니다. 행여 오해하고 덤빌지도 모르는 독자를 위해 작가는 소설의 첫머리를 충분히 관습화되고 약호화된 장면으로 시작한다.

노인이 마당으로 나왔다.
래생(來生)은 망원렌즈의 초점을 다시 맞추고 노리쇠를 뒤로 당겼다. 실탄이 장전되는 소리가 아주 컸다. (7쪽)


견고한 모든 장르는 자본과 상품이라는 대기 속에 녹아버린다. 순수한 추리 소설, 순수한 과학 소설, 순수한 역사 소설……순수한 판타지 소설은 물론이고, 시대가 바뀐 사실도 모른 채 동정과 처녀성을 고집하는 순수(?) 문학가들의 '순수(본격) 소설'마저도, 이제는 순수하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소설은 꽤 또렷이 자신의 장르를 호명한다.

다른 사람들은 어떤지 모르겠지만, 나는 예를 들어, 한국전쟁이 나오거나 형사가 주인공이 아니면서, 총이 나오는 한국 영화를 진지하게 취급하지 못한다. 대중 오락물이라고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영화도 그럴진대, 소설이 그렇다면 더욱 '개무시'하는 편이다. 이런 사람은, 꽉 막힌 상상력의 소유자가 아닐까?

총이 보편적이지 않기 때문에 범죄나 추리 소설이 환영받지 못하다니, 작가들에겐 답답한 노릇이다. 그런데 태도를 약간 고쳐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는 아직껏 전쟁을 잠시 멈춘 상태일 뿐인 최장기 휴전 국가이고, 군대를 갔다 온 한국 남자들은 예비군 훈련장에서 1년에 한 두 번씩 총을 만진다. 예상과 달리 총은 우리 사회의 신물(神物)이 아닌 것이다.

▲ <설계자들>(김언수 지음, 문학동네 펴냄). ⓒ문학동네
그런데다가 문학은 자신의 사실성을 외부에 의지하지 않아도 되는 자족적인 세계이기도 하다. 쥘 베른은 핵 잠수함이 없던 시절에 <해저 2만리>(1869년)를 썼고, 카렐 차페크는 로봇이 없을 때 <로봇>(1920년)을 썼지만 거기에 리얼리티 유무로 토를 단 사란은 없었다. 게다가 로봇과 핵 잠수함은 한 세기도 지나지 않아, 현실이 되지 않았나? 첨언하자면, 핵 잠수함이나 로봇은 아니지만, 김언수는 등단작인 <캐비닛>(문학동네 펴냄)에서 현실에 있음직하지 않은 무수한 '심토머(symptomer)'를 창조했다.

영화든 소설에서든 총기류의 사용은 현실의 승인이 필요한 게 아니고, 작품 내적 핍진성으로 판단되어야 한다. <설계자들>의 경우, 직업적인 킬러(당연히 총을 애용한다)의 등장은 이렇게 설명된다.

아이러니하게도 독재 시절과 군부 시절이 끝나면서 암살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 군부 시절의 암살 사업은 소수의 설계자들, 기관과 군대에서 전문적으로 훈련받은 암살자들, 그리고 경험 많고 신뢰할 만한 청부업자가 은밀하게 움직이는 비밀공작 같은 것이었다. 사실 그것은 사업이라고 부를 만한 거창한 것이 아니었다. (…) 군인들은 대체로 설계자에게 관심이 없었다. 눈엣가시 같은 사람들을 온 가족이 보는 가운데 지프차에 실어간 뒤, 남산 지하실에 가둬놓고 반병신이 될 때까지 두들겨서 돌려보내도 아무도 찍소리 못했던 무탈하고도 무지한 시절이었다. 그들에게 고급 설계자들이 필요할 리 없었다.

암살 사업의 팽창을 가속화시킨 것은 자신의 정부를 도덕적으로 포장하고 싶은 새로운 권력의 등장 때문이었다. 아마 그들은 "여러분, 안심하세요. 우리는 군인이 아닙니다"라는 표어를 이마에 붙임으로써 국민들을 속일 수 있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 도덕적 포장을 하고 싶은 이 권력이 맞닥뜨린 한 가지 문제는 예전 시대처럼 입바른 소리를 해대는 얄미운 놈들을 두들겨 패기 위해 남산 지하실을 이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국민과 언론의 시선으로부터, 기관의 복잡한 명령 체계와 집행 흔적으로부터, 그리고 훗날 자신들에게 닥칠 책임으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청부업자와 거래를 시작했다. 이른바 암살의 아웃소싱 시대가 시작된 것이다. (80~81쪽)

긴 인용이었던 만큼, 작가가 왜 하필 '킬러 이야기'를 쓰게 되었는지와 <설계자들>에 총이 사용되는 이유는 밝혀졌다. 인용된 대목에 약간의 근거를 보태자면, 정치 이론이나 사회학에서 익히 말해지는 '사회계약설'은 영주(領主)·씨족·개인이 행사해 왔던 사적(私的) 폭력의 권리를 국가에게 헌납한다는 뜻이다. 그 계약에 따라 '인간은 인간에 대해 늑대'라는 상시적 불안이 폭력을 독점한 국가 이성(법이라도 좋다)에 의해 종식되고, 사회는 안정을 이루게 된다.

그러나 국가가 시장에 권력을 넘겨주는 이 시대에 이르러, 국가가 배타적으로 독점했던 폭력 또한 시장으로 넘어간다. 구소련의 전직 KGB 요원들과 특수 부대원들이 마피아와 결탁하여 각종 범죄와 암살을 저지르는 러시아나, 일개의 민간 용역 회사가 이라크 전쟁의 많은 부분을 떠맡고 있는 오늘의 미국은 위의 사정을 뒷받침 하고 있다.

<설계자들>의 무대는 남한 전체를 가리키는 지명도 서울도 아닌, 서울의 위성 도시로 보이는 '푸주'라는 가상 공간으로 설정되어 있지만, 시간적 배경만큼은 가상 공간에 맞춤한 먼 미래가 아닌 현재다. 그렇게 읽어주기를 바라는 작가의 희망은 주물 공장에 취직하고자 이력서를 낸 래생에게 관리계장이 "인문계 고등학교 다녔으면서 대학은 왜 안 갔어? 운동권이나 뭐 그런 거 아냐?"(160쪽)라고 묻는 장면에 노골적이다.

재미삼아 작중에 찔끔찔끔 제공된 정보를 끌어 모아 보면, 작가는 이 책이 출간된 2010년을 작중의 시간적 배경으로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 근거는 "아이러니하게도 독재 시절과 군부 시절이 끝나면서 암살 사업은 폭발적으로 성장했다"는 저 위의 인용이 실마리인데, 박정희 이후 전두환에 이르는 긴 군부 독재가 마침표를 찍은 때는 1987년이다. 거기에 "모자에 두 개의 번쩍이는 별을 단 장군은 빙긋 웃으면서 래생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20년도 넘은 일이다."(48쪽)의 "20년도 더 전"을 제대로 가늠하기 힘들긴 하지만, 그 시기를 최대한 미루든 당기든 오차 범위는 수 년 밖에 되지 않는 2010년 어름이다.

현재의 대한민국은 작중 설정처럼 살인 청부업이 활개를 치고 있진 않다. 하지만 2008년 용산 사태 때 일개 민간 철거 용역 회사가 경찰과 나란히 진압 작전에 한몫했던 사례가 보여주듯이, '공권력의 민영화'랄지 '폭력의 시장 자유화'가 공공연히 이루어지는 중이다. 작가가 꽈배기처럼 꼬아 놓은 가상 공간과 현실 시간 사이의 불일치가 작품과 현실 간의 유비를 방해하지만 <설계자들>에 번성하는 살인 청부업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

문제는 작가의 과욕이다. "개들의 도서관이 지난 90년 동안 벌여놓은 참담한 역사"라는 121쪽과 "경성제국대학을 나온 인재들과 일본에 유학을 다녀온 제국주의 관료들 틈바구니에서 절름발이에다 초등학교도 채 마치지 않은 너구리 영감이 어떻게 주임이 되고 또 도서관장이 되었는지 잘 모른다"는 135쪽을 보면, 래생이 킬러로 소속되어 있는 '개들의 도서관'이 만들어 진 때는 1920년 부근이다(2010-90=1920).

모르긴 해도 암살의 역사는 인류가 시작되면서부터 있었을 것이고, 일제 강점기라고 해서 암살을 도맡는 청부업자가 없었을 리 없다. 실제로 명성황후 살해에 동원된 것은, 일본 군인들도 있었지만 작중의 '개들의 도서관'과 같은 일본 우익 낭인 단체가 합세했다. 그렇기는 하지만 수상쩍은 비밀 결사에 90년 전통을 부여함으로써 역사에서 비밀 결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기형적으로 극대화한 반면, 그 외의 역사적 동력을 죄다 축소시키고 단순화 시키게 된다. 저 대목엔 세계를 음모론적으로 해석해보고자 하는 작가 나름의 시도도 투여되어 있지만, 내가 보기엔 오히려 '90년 전통'이라는 실없는 과장으로, 작가는 군사 독재 이후 '시장에 의해 사회계약이 허물어져가고 있다'는 예민한 주제를 스스로 무화시켜버렸다. 작가의 의도가 살려면 '개들의 도서관'은 최근에 만들어진 거라야 더 효과적이다.

킬러들이 나오는 범죄 소설은 세 싸움을 피해갈 수 없고, 그 업계의 큰 손은 신흥 세력에 잠식된다. 유구한 전통을 가졌지만 정도를 지키고자 하는 '개들의 도서관'은 무자비한 기업형 조직인 한자의 도전에 무기력하다. 또 이런 장르에서는 15~20년씩 근속했던 추나 래생같은 킬러들은 상부의 견제를 받거나 스스로 회의를 느끼고 조직을 들이받게 된다. 이런 사항들은 <설계자들>만의 것이 아니라, 이 장르의 공식이다.

약간 다른 게 있다면, 래생이 속한 살인 청부 회사가 도서관으로 위장되어 있다는 점이다. 도서관은 물론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이 그랬던 것처럼 음모가 벌어지는 장소로 곧잘 애용되기에 딱히 독창적이진 않지만, <설계자들>의 작가인 김언수에겐 어쩔 수 없이 도서관을 무대로 삼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그 점은 후술키로 하고, 우선 용법이 같지 않다는 걸 지적하자.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책이나 도서관은 신의 위치마저 위협하는 드높은 권력(가치)으로 나타나지만, 하릴없이 백과사전에 코를 박고 사는 래생의 고용인이자 '개들의 도서관' 관장인 너구리 영감은 기업형 살인 청부업자인 한자에게 속수무책이다. 과부하(過負荷) 해석일지 모르겠지만, <장미의 이름>과의 이런 차이는 문자 문화의 몰락을 상징한다(그런데 백과사전을 읽는 게 취미인 너구리 영감에게서 사르트르의 <구토>에 나오는 '도서관의 독학자'를 연상한 독자는 혹 없었는지?)

또한 범죄물 속의 주인공들은 권태의 해결책이나 회심의 계기를 요부(femme fatale)로부터 얻는다. 추의 파멸도 그랬고, 래생 역시 그러하다. 하지만 여기서도 차이점이 있다. 남자를 유혹하고 파멸시키는 요부는 거의가 신비를 간직한 명품녀들이다. 그런데 래생을 유혹하는 미토는 수다꾼에다가, 시장통에서 순대와 소주를 즐기는 굉장히 서민적(?)인 요부다. 그런데 내 생각으로는 이 서민적 요부는 서양의 범죄물에 기원이 있는 요부가 아니라, 1980년대를 지나온 맹렬 운동권 여성을 모사한 것이다. 실제로 미토가 나오면서 이 소설은 '후일담 소설'을 닮는다. (그런데 또, 미토에게서 배두나가 연기했던 <복수는 나의 것>의 여주인공을 떠올린 사람은 나뿐일까?)

<설계자들>은 작가의 야망을 세부가 따르지 못한다. 작가가 제시한 애초의 문제의식은 더 이상 드러내 놓고 폭력을 행사하거나 비밀 기관을 이용할 수 없는 정치 권력이 공권력 대신 살인 청부업자의 손을 더럽힌다는 것인데, 그런 용도에 맞는 청탁 살인은 첫 장면에 나온 권 노인의 경우에만 해당한다. 나머지 두 경우는 국회의원 K의 청탁으로 그와 함께 잤던 콜걸을 죽이는 거였고, 또 다른 경우도 국회의원 B가 아들의 성기를 물어뜯은 여자를 죽여 달라는 사주였다. 두 사례 모두 극히 사적인 주간지적 사건이었지, 권력 암투나 공권력이 연루된 게 아니다.

래생보다 먼저 환멸을 느끼고 조직을 들이받기로 결심한 추에게 래생은 "설계자들도 우리 같은 하수인들일 뿐이야. 의뢰가 들어오면 설계를 하지. 그 위에는 설계자를 설계하는 놈이 있겠지. 그 위에는 그놈을 설계하는 또 다른 설계자가 있을 거고. 그렇게 끝까지 올라가면 결국 뭐가 남을까? 아무 것도 없어. 맨 위에 있는 것은 그냥 텅 빈 의자뿐이야"(93쪽)라고 충고한다. 그런데 이런 깨달음은 선험적으로 공표되기보다, 청문회에 나온 고위 공직자 후보들의 결격 사유가 양파 껍질이 까지듯 한 꺼풀씩 벗겨지는 것처럼, 서사 속에 드러나야 했다. 소설은 아직 300여 쪽도 더 넘었는데, 래생은 세계의 비밀을 일찌감치 발설해 놓고, 더 이상 진도를 내지 않는다.

그건 권력의 비밀을 선험적으로 알아채버린 작가 김언수가 "자넨 칼을 들고 올라가서 맨 꼭대기에 있는 놈을 찌르면 모든 게 해결된다고 생각하겠지. 하지만 그곳엔 아무것도 없어. 그곳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뿐이니까"(94쪽)라며, 래생을 세뇌해 놓은 결과다. 거기에 비하면 오히려 작가의 또 다른 목소리이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는 의자 같은 소리하고 있네"(299쪽)라고 래생을 타박하는, 씩씩한 운동권 여장부인 미토가 더 소설의 주인공답다. "괴물을 잡으러 갔다가 자신도 괴물이 되어버리는 슬픈 이야기"(323쪽)라는 한계로부터 자력으로 벗어날 공력이 없는, 구시대적이고 상투적인 인물이긴 하지만, 그녀가 얼핏 본 자유와 거부야말로 진지한 독자들이 진지한 소설로부터 기대하는 것이다.

"래생은 쓰레기통에서 발견되었다. 아니라면, 쓰레기통에서 태어났거나"(35쪽)라는 설명에서 보듯이, 이 소설은 부모 없는 소설이다. 부모 없는 주인공 또는 부모 없는 소설은, 가상의 부모를 만들고 부모 부재를 메울 무의식을 스스로 만들어야 한다. 도서관은 그래서 필요했다. 도서관은 부모 없이 자라난 래생에게 부모를 대신하는 콤플렉스이자 무의식이고 현실이다. 도서관이 래생의 부모라는 것은, 불성실한 양부였던 너구리 영감이 래생에게 글을 가르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글을 깨우친 일로 증명된다. 아홉 살 생일을 맞은 래생이 혼자서 <호머 이야기>를 읽고 있는 것을 발견한 너구리 영감은 성난 얼굴로 다그쳤다. "누가 너에게 글을 가르쳤지?"(36쪽)

마치 래생에게 글을 가르쳐준 사람을 잡아서 어떻게 하기라도 할 것처럼 너구리 영감의 목소리는 단호하고 무서웠다. 래생은 작고 떨리는 목소리로 아무도 나에게 글을 가르쳐 주지 않았다고 말했다. (…) 래생은 터져 나오는 울음을 가까스로 참으면서, 정말로 그림책을 보며 혼자서 글을 배웠다고 말했다. 그건 사실이었다. (37쪽)

젖을 먹는 게 어린아이의 본능이듯, 래생에게 글은 부재한 어머니의 젖이었고, 도서관은 그의 아버지였다. 래생이 읽는 산더미 같은 책은 부모가 선사하지 못한 그의 무의식이 되었고, 더불어 책과 문자는 그의 콤플렉스가 되었다. 당신은 <매독의 역사>·<푸른 늑대>·<만물의 유래사>·<불임의 정복>·<결혼, 여름>·<페스트>·<자살>·<나무 위의 남자>·<한낮의 우울>·<악령>·<의아한 북극곰>……을 쉬지 않고 읽어 댈 뿐더러, 자신이 키우는 두 마리의 고양이에게 '독서대'와 '스탠드'라는 이름을 붙인 킬러가 상상되는가?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도서명은 창작되었거나, 변형되었을 가능성이 있으므로, 인터넷에서 검색하지 마시오!)

책과 문자가 래생의 부모이긴 하지만, 실재하지 않는 가상의 부모였을 뿐이므로, 래생은 제대로 된 거세 위기를 거쳐, 아동의 세계로부터 성인의 세계로 넘어갈 수 없었다. 너구리 영감이 고아인 래생에게 문자를 배워주지 않으려 했던 이유도 그가 부모 대신 책에 물성애를 느끼게 되는 것을 방지하고자 한 것으로, 젖을 떼지 못한 아이처럼 서른두 살이 되기까지 문자를 게걸스럽게 탐닉해 온 래생이 문약한 회의주의자가 된 것은 그러므로 자연스러운 일이다. 바로 그런 까닭으로 실전시의 래생의 능력은 이발사와의 진검(眞實) 승부에서 보았듯이 변변치 못하며(고수가 못되며), 권력과 부딪쳐 피 흘려 본 일이 없으면서도 함부로 '맨 위에 있는 것은 텅 빈 의자'라고 체념하고 단언하는 것이다.

1인 혁명가가 된 래생이 너구리 영감 아래서 형제처럼 같이 자랐던 한자와 한바탕 격전을 벌이고 파멸하는 설정 역시, 생사의 고비를 함께 넘긴 무수한 거리의 의형제들이 반목과 대결 끝에 공멸로 이어지는 범죄물의 공식을 보여준다. 범죄물의 서두가 독자를 흡입하기 위한 긴장된 '액션'으로 시작한다면, 안티 히어로들의 경연장인 이 장르의 대미는 항상 이완된 '가오'로 막을 내린다.

래생은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오랜 전매특허처럼 허공을 향해 피식 웃었다. (417 쪽)

서평은 해당 도서를 소개하고 분석하는 일에 그치는 게 아니라, 누가 "<설계자들> 어때? 읽을 만해?"라고 물을 때, 거기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이 글의 운을 떼며 나는 '총이 나오는 장르는 질색'이라고 솔직히 밝혔다. 먼저 그걸 감안하고 들어 주시기 바란다. 이 소설은 읽어도 그만, 안 읽어도 그만인 오락물이다. 주제는 1964년 최희준이 불렀던 <회전의자>의 가사에 머물렀고, 그나마 어디서 본 듯한 인물과 일화가 짜깁기 되어 재미도 없다. 그런 대목 가운데 특히 M 우시장에 있는 희수 영감의 반짝 등장은, 어쩌면 앞으로 이 작가의 고질이 될지도 모르겠다.

래생은 자신에게 킬러 기술을 배워준 훈련관과 친구 정안 그리고 추를 죽인 이발사에게 복수를 하기 위해 먼저 M 우시장에 있는 희수 영감을 찾아 간다. 명목은 이발사의 거처를 알기 위해서인데, 굳이 그 때문에 새로운 인물을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 정인이 죽으면서 남겨 놓은 메모 정도로도 가능했다고 본다. 소설이 집필 단계부터 자원을 절약해야 하는 희곡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물을 남발할 것도 아니다. 게다가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이발사의 거처를 알고 있는 이 인물이 일회용으로 기용되고 말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인물이라는 점이다.

"기이한 영감"으로 소개된 희수 영감은 마약상, 갱들, 장기 밀매업자, 사기꾼, 청부 브로커, 장물애비, 포주 등 "푸주에 일하는 모든 업자들은 희수 영감에게 한 달에 한 번씩 돈" 바쳐야 할 뿐 아니라 "한자와 너구리 영감" 조차도 세금(?)을 바쳐야 하는 "푸주의 왕"(313쪽)이다. 소설의 전체 구도를 뒤흔들 정도가 되고도 남는 희수 영감이 이발사의 거처를 수소문하기 위해 래생이 그를 찾아가기 전까지는 한 번도 언급 되지 않은데다가, 이후로도 다시는 나타나지 않는 이런 부실한 구성은 어떻게 설명된다는 말인가? 김지운 감독의 <달콤한 인생>에 나오는 삼선교 도축장의 오무성(이기영)에게 바치는 오마주(hommage)였던가?

김언수의 등단작이자 전작(前作)이었던 장편소설 <캐비닛>은 더도 덜도 아닌 이상한 사람들의 일화 모음집이다. 이를테면 셔우드 앤더슨의 <와인즈버그, 오하이오>와 같은 소설집이 되었어야 할 <캐비닛>을 전체적인 플롯이 유지되는 무리한 장편소설로 만들었다면, 이번의 장편소설은 그와 반대로 작가가 <캐비닛>의 방법론을 잊지 못하고 전체적인 플롯에 기여하지 못하고 튀는 인물들을 버릇처럼 삽입하는 폐단을 보인다. 푸주의 왕 희수 영감이 대표적인 예였고, 입안에 넣고 사탕처럼 굴리며 돌의 맛을 구별하는 게 취미여서 지질학과를 지망했다는 래생의 친구 정안의 일화도 이번 소설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설계자들>은 또 한 권의 '심토머 백과'가 아니어야 한다.

이 소설이 품격 있다고 믿거나 이 소설에 사로잡혔다고 말하는 사람들은, 한 번도 문학의 진수를 맛보지 못한 사람들이다. 나는 이 소설이 품격 있다거나, 나를 사로잡았다고 말하지 못하겠다. 킬러도 설계자도 푸주도 작가의 입담이나 유머도, 모두 그랬다. 이 작품에서 내가 발견한 가치가 있다면 그런 드러난 주제나 스타일보다는, 이 소설의 제1장에 붙은 '환대에 대하여'란 소제목과 거기 따른 은유일 것이다.

소설의 서두는 이 글의 앞머리에 나오는 최초의 인용대로다. 그런데 래생은 노인을 쏘지 못하고 회의하다가, 매복 중에 잠이 들었다. 그러다 잠이 깼을 때, 암살자가 온 것을 간파한 노인에게 발각된다. 그날 저녁, 노인은 래생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식사와 술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다음날 아침 래생은 노인에게 아침을 대접받고, 집을 나설 때는 삶은 감자까지 선물로 받는다. 그는 뜻하지 않게 노인의 환대를 받았지만, 숲으로 돌아간 래생은 그날 낮에 노인을 저격한다.

이 소설에서 환대는 숨어있는 중요한 동기다. 래생은 미토의 여동생인 미사에게 턱없는 환대를 받으며, 푸주의 왕 희수 영감도 술과 안주로 래생을 환대한다. 그 뿐 아니다. 놀랍게도 래생은 대결을 하기 위해 처음 찾아간 이발사에게조차 환대 받았다! 동서양의 모든 신화나 민담은 환대의 중요성을 강조하여, 손님을 제대로 환대하지 않거나 환대한 주인의 선의를 악으로 갚은 자는 큰 벌을 받았고, <구약성서>에서는 거의 율법 외의 율법에 해당했다. 그런데 래생은 자신을 따뜻하게 환대해준 노인과 이발사를 죽인다.

'환대를 악으로 갚는 현상'이 비록 <설계자들>의 주제는 아니지만, 나는 이것이 작가가 피상적으로 제시하고 더는 세심하게 천착하지 못했던 '시장에 의해 사회계약이 허물'어져 가고 있는 현상보다, 가슴 아프다. 운 좋게도 '환대를 악으로 갚았다'는 비난을 들을 수 있을 만큼, 신화 시대에 허다하고 융숭했던 환대가 이 시대에도 존재하는 거냐고 따진다면, 너나없이 말문이 막히고 부끄럽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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