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자리에는 멀리 미국에서 방금 날아온 오 박사의 지인을 비롯해 우리나라 학계, 문화계, 기업계 인사 등 약 80여 명이 모였다. 그중에서도 특히 가운데 테이블에는 백낙청, 김상근, 강만길, 한완상, 임동원, 이재정, 문정인 등 그동안 남북 간 화해 협력에 앞장서온 남측 민간 전문가와 전 통일부 장관이 앉아 있었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백낙청 명예대표(서울대학교 명예교수)는 "그동안 6·15해외위원회 활동을 봐왔는데, 오 박사가 대표로 있는 미주 지역 서부위원회 활동이 가장 활발했다"면서 "아마도 그 이유는 오 박사가 북에 대해서도 할 말은 다하고, 또 위원회 활동을 통해 한 자리 해보겠다는 사심이 없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고 그를 치켜세웠다.
6·15공동선언실천 남측위원회 현 대표인 김상근 목사는 "오 박사의 전공인 인공 고관절 수술은 걷지 못하는 사람을 걷게 하는 수술이라고 하던데, 예수가 그렇게 했듯이, 남북 관계가 제대로 걸어갈 수 있도록 애써 달라"고 당부했다. 문정인 연세대학교 교수는 "대부분 사람들이 '통일이 되겠어' 라고 체념하는 데 비해 오 박사는 '통일은 반드시 된다'는 낙관과 집념으로 북한과의 교류를 추진해왔다"며 "그 낙관주의를 배우고 싶다"고 말했다.
임동원 전 장관은 "김대중 대통령 당선자 시절인 1998년초 오 박사 주도로 작성된 재미 동포들의 남북 관계 관련 건의서 'KOREA 2000'을 건네받고 그 깊이에 놀랐었다"고 회고했으며, 강만길 고려대학교 명예교수는 오 박사의 의학 외 최초 저서인 <꼬레아, 코리아(Corea, Korea)>에 대해 "우리나라 영문 국호에 관한 최초의 쳬계적인 개설서"라면서 "통일 영문 국호를 정할 때 큰 참고가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이처럼 오인동 박사에 대한 찬사가 쏟아진 것은 우선 남북 간 민간 교류에 대한 그의 기여가 컸기 때문이다. '미국에서 가장 성공한 아시아계 전문인'에 선정될 정도로 잘나가는 의사인 그는 1992년을 시작으로 1998년, 2009년, 2010년 등 4차례 평양을 찾았고, 지난해부터는 인공 고관절 수술을 통해 약 30명의 북측 환자를 걷게 했다. 나아가 북측 의료진에게 인공 고관절 수술의 노하우와 인공 관절기 제작 방법 등을 전수했다.
하지만 내로라 하는 남측의 남북 관계 전문가들이 한결같이 오 박사의 대북 의료 교류 활동에 찬사를 보내는 것은 어쩌면 이명박 정부 이후 꽁꽁 얼어붙은 남북 민간 교류의 해빙을 원하는 간절한 소망의 반영은 아니었을까. 사실 재미 동포 오 박사의 대북 교류는 이명박 정부 출범 후인 작년부터 본격화된 반면(그가 처음 북에서 인공 고관절 수술을 한 것은 작년 5월이며 지난 6월 2번째 방문 수술을 했다) 남측 시민단체의 대북 교류는 작년초 이래 지금까지 꽉 막혀 있기 때문이다.
예컨대 2001년 이후 30여 차례나 평양을 방문한 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어린이어깨동무' 이사)는 "작년 2월부터 단 한 번도 북녁 땅을 밟지 못했다"며 "북에 전달해야 할 의약품 원료와 관련 기자재가 벌써 1년 반째 인천항에 묶여 있다"고 안타까워 했다.
2000년 6월 역사적인 남북 정상 회담 이후 활발했던 남북 간 민간 교류가 벌써 2년째 답보상태에 있다. 아니 이제는 퇴보 상태에 들어간 게 아닌가 하는 걱정마저 들 정도다. 이에 지난 10여 년간 각각 남에서 또 미국에서 북과의 의료 교류를 실천해온 재미 동포 오인동 박사와 서울대 황상익 교수의 대담을 통해 남북 민간 의료 교류의 실태와 앞으로의 과제를 점검해 본다.
이 대담은 지난 18일 낮 종로구 통인동의 한 카페에서 진행됐다. 진행은 프레시안 박인규 대표가 맡았다. <편집자>
▲오인동 박사(왼쪽)·황상익 서울대학교 교수(어린이어깨동무 이사). ⓒ프레시안(최형락) |
북한에 수술 가방을 두고 온 사연은…
프레시안 : 2000년에 남북 정상 회담을 한 지 10년이 되었다. 그간 남북 정부뿐만 아니라 남북 간의 민간 교류도 많았다.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을 보면서 그간 남북 민간 교류를 다룬 책을 모아서 기사로 정리를 해보자, 이런 아이디어가 있었다. 그런데 찾아보니 북쪽을 많이 다녀오긴 했지만 책으로 나온 것은 찾기가 어려웠다.
그래서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 출간을 계기로, 재미 동포 의사로서 북한과 교류가 있었던 오인동 박사와 남북 의료 교류를 오랫동안 해온 황상익 교수가 만나서 남북 민간 의료 교류의 현주소도 짚고 앞으로 발전 방안도 고민해보는 자리를 마련했다. 어차피 같은 고민과 실천을 하시는 분들이니 이런 만남 자체도 의미가 있을 것 같았고.
우선 북한과의 인연을 소개하면서 얘기를 시작해 보자.
오인동 : 먼저 이렇게 좋은 자리를 마련해줘서 고맙다. 나와 북한과의 인연은 1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지난 1991년 12월 '남북기본합의서'가 타결되고 나서, 분단 46년 만에 한반도에도 해빙기가 시작되었다. 그렇다 해도 남한 사람이 북한을 방문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었다.
반면 외국에 사는 동포, 특히 미국에 사는 한인 동포 중에서 극소수는 1980년대 초반부터 북쪽에 두고 온 부모, 형제자매를 만나거나 혹은 조국 통일에 뜻을 두고 북녘 땅을 밟는 경우가 있었다. 해외 동포가 가졌던 일종의 특혜이기도 했는데, 본격적으로 한반도에서 해빙기가 시작되면서 이런 기회가 더욱더 많아졌다.
그런 참에 미국에서 활동하는 약 4000명의 한인 동포 의사의 모임인 재미한인의사회(KAMA, Korean American Medical Association)의 권영세 회장이 1992년 가을에 북한 방문을 제안했다. 북녘 의학계와의 학술 교류와 의료 지원의 가능성을 타진하고자 평양을 방문한다는 것.
그렇게 재미한인의사회의 방북 대표 다섯 명 중 한 사람으로 1992년 10월 10일 처음으로 북녘 땅을 밟았다. 그게 나와 북한과의 첫 인연이었다. 그러나 1993년 북한 핵무기 개발 의혹이 불거지고, 북미-남북 관계가 악화되면서 이 인연은 본격적인 교류로 이어지지 못하고 말았다.
그러다 1997년말에 한반도 평화를 진지하게 고민하던 김대중 대통령이 당선되고, 재미한인의사회 회장으로 새로 당선된 이상철 박사도 다시 북한과의 의료 교류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이런 분위기에서 재미 동포의 북한 방문을 주관하는 재미동포전국연합회 김현환 목사를 통해서 다시 1998년 2월에 북한을 찾았다.
하지만 나와 북한의 본격적인 인연은 2009년부터 시작되었다. 1998년의 두 번째 평양 방문이 성과로 이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2000년의 남북 정상 회담이 있었다. 그러고 나서 2006년 광주에서 열린 6·15민족통일축전에 참가했을 때, 그전에 평양을 방문했을 때부터 안면이 있었던 북한의 최창식 보건상(보건부 장관)을 우연히 만났다. 1992년 처음 만났을 때 그는 보건부 부부장(차관)이었다.
ⓒ프레시안(최형락) |
2009년 5월에 평양으로 수술 여행을 가기로 결심한 것은 바로 이런 상황 때문이다. 이번 '수술 여행'은 나로서는 1992년부터 맺은 북한과의 인연이 17년 만에 결실을 맺는 순간이었다. 2010년 6월에 한차례 더 평양을 방문했고, 조만간 한 번 더 평양을 갈 기회가 생길 것 같다. 앞으로는 기회만 닿으면 더 자주 방문할 예정이다.
인공 관절기 하나에 6000~7000달러나 하는데 북한이 그것을 수입하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고. 내가 만든 것을 본떠서 자체 제작을 해야 하는데, 내가 그것을 도와줄 수 있다. 앞으로 교류가 좀 더 잦아지면 무릎뿐만 아니라 어깨, 팔꿈치의 인공 관절기도 제작하도록 도울 생각이다.
남북 어린이가 어깨동무를 하려면…
프레시안 : 오인동 선생이 본격적으로 의료 교류를 시작한 게 2009년부터라면 황상익 교수는 2001년에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부터 약 10년간 여러 가지 의료 교류에 관여해온 것으로 알고 있다.
황상익 : 사실 2000년 남북정상회담 이전에는 남북 간의 민간 교류는 상상도 못할 일이었다. 물론 개인 차원에서, 단체 차원에서 북쪽에 대한 관심이 있기는 했지만 1980년대 중반에 재미 동포들이 북녘을 방문하고 나서 그쪽의 상황을 전하기 전까지는 모든 게 차단돼 있었으니까.
물론 1993년 김영삼 정부가 시작하고, 1994년에 남북 정상 회담 계획 사실이 발표면서 남북 간에도 해빙이 시작되나보다 이런 기대를 하기도 했었지만…. 1990년대 북의 핵개발을 둘러싼 남북-북미 간의 갈등, 북쪽을 덮친 식량난 등으로 남북 간 민간 교류를 할 만한 상황이 조성되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에 북쪽이 식량난으로 어려울 때도 국제기구가 나섰고, 남쪽에서는 그런 국제기구에 직간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개인, 단체만 제한적으로 교류를 했을 뿐이다. 내가 참여하는 '어린이 어깨동무'가 어린이를 통해서 세계 평화를 이끌어내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 이런 문제의식 하에 북에 관심을 가지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이 단체의 문제의식은 아주 간단명료하다. 남쪽과 북쪽의 어린이가 어깨동무를 할 수 있으려면 양쪽의 여건이 비슷해져야 하니까. 당장 영양 문제를 겪는 북쪽의 어린이에게 식량을 공급하고, 학교에서 사용할 문방구와 같은 용품을 지원하고, 병에 걸리면 치료를 받을 수 있는 의약품을 공급하고…. 이런 고민에 기반을 둔 교류가 2000년 남북 정상 회담 이후로 본격화 되었다.
지금까지 남북 민간 교류를 주도하는 많은 다른 단체도 이 무렵(1990년대 중·후반)부터 활동을 시작했다. 지금 남북 민간 교류를 주도하는 이들도 이 무렵부터 노하우를 쌓기 시작했고. 남한의 의사들이 남북 교류에 관심을 가지고 뛰어든 것도 이 때부터다. 나도 2001년에 평양을 처음 방문하고 나서 2009년 2월까지 서른 번 정도 평양을 방문했다.
오인동 : 2009년에 평양을 방문하고 나서부터 본격적으로 의료 교류를 하면서 제일 놀란 일도 이미 남쪽의 많은 의사들이 북쪽을 오가며 교류를 진행하고 있는 점이었다. 북한을 처음으로 방문한 1992년을 염두에 두면, 채 20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세상이 변했다, 이런 걸 느꼈다.
황상익 : 처음 북쪽과 교류를 시작했을 때는 의약품, 소모품 지원부터 시작했다. 그러면서 서서히 남북의 의료인이 서로를 알아가는 과정을 거쳤다. 북쪽이 오랫동안 외부 세계와 단절돼 있었으니까, 당연히 남쪽에서 간 물품 중에는 처음 보는 것도 있었을 테고, 새로운 지식, 기술도 있을 테니까.
이 과정에서 특히 북쪽의 처지를 배려했다. 표현도 "지원"이 아니라 "협력"이라는 말을 사용하려고 노력했고. 사실 이 말이 맞다. 남북이 교류하는 과정에서 남쪽의 의사들이 북쪽의 의사로부터 배우는 것도 많이 있으니까. 항상 교류를 해보면 생각하는 것처럼 일방적인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다.
이렇게 신뢰를 쌓는 과정을 거치다 보니 어떤 단체에서는 수액, 약품을 생산할 제약공장(정성제약)도 짓고(2005년, 2006년), 평양의학대학병원에 어린이병동도 완공하고(2008년)…. 불과 10년 새 많은 성과를 올릴 수가 있었다. 이젠 북쪽도 조심스럽게 "우리가 이런 게 필요하다" 이런 요구를 할 정도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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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산다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면…
프레시안 : 방금 황상익 교수가 남북이 조심스럽게 의료 교류의 가능성을 확대해가는 과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평양에 두고 온 수술 가방>을 보면서도 아쉬웠던 점이지만, 북한의 의료 실태가 너무 알려지지 않은 게 많은 것 같다. 직접 방문해서 체감을 한 두 분이 보기에는 어떤가?
오인동 : 사실 구체적인 데이터가 없더라도 한두 번 북한을 둘러보면 열악한 상황이야 누구나 확인할 수 있다. 인공 관절기처럼 외국에서 6000~7000달러를 주고 수입해야 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고. 외과 수술만 놓고 보면 한국의 수십 년 전의 상황을 생각하면 된다. 아까도 얘기가 나왔지만 당장 의약품, 소모품 같은 게 부족한 실정이니까.
황상익 :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영양 상태, 내과 질환, 전염병 등도 상황이 좋지는 못할 것이다. 2001년 3월에 북을 처음 방문했을 때, 보건성 관계자를 만났을 때 "부족한 부분이 있으면 저희가 채울 수 있도록 노력을 하겠습니다" 이렇게 말했는데 딱 잘라서 "부족한 것 없습니다" 이렇게 얘기를 하더라.
'아차' 하면서 이번에는 그냥 인사만 하고, 얼굴만 알고 돌아가나, 이렇게 생각했다. 그러다 남쪽으로 돌아오기 직전에 같은 사람을 만났다. 놀랍게도 이렇게 얘기하더라. "어느 사회든 부족한 게 있지 않겠느냐, 필요한 약품의 목록을 보여줄 테니, 남쪽에서 성의를 보일 수 있으면 고맙겠다."
목록을 살펴보니까, 항생제, 의약품 등…. 그 목록만 봐도 북녘의 의료 실태를 대충 알 수 있었다. 목록에 말라리아 약이 들어있는 것을 보니 말라리아도 북쪽의 골칫거리라는 사실을 알 수 있었고. 아무튼 그 목록을 받아들면서 '고맙다' 이런 생각을 했다. 자존심 상해가며 어려운 형편 얘기를 하기 어려울 텐데, 불과 두 번 만났을 때 그런 얘기를 해줬으니까.
목록에는 없었지만 남쪽의 과거 경험을 염두에 두고 구충제 지원도 언급했더니, 그것도 북쪽에서 받아들였다. 식량 지원도 필요하지만, 그렇게 섭취한 영양을 기생충에게 빼앗기면 안 되니까. 그래서 몇 년 동안 남쪽에서 북쪽으로 구충제를 많이 지원했고, 분명히 효과를 봤으리라고 짐작한다.
나중에는 평양에 있는 어린이영양관리연구소와도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남쪽 관계자는 평양에 이런 연구소가 있다는 사실도 몰랐는데, 북쪽에서 먼저 마음을 열고 다리를 놓아준 것이다. 연구원들과 만나서 얘기를 해보니 북녘 어린이의 건강을 챙기기 위해서 남쪽에서 협력할 수 있는 구체적인 방안들이 떠올랐다.
이 인연으로 어린이 어깨동무에서 2004년에 영양관리연구소의 부설 병원을 평양적십자병원 옆에 지을 수 있었다. 2007년에는 같은 평양특별시지만 농촌 지역에 위치한 진료소 대신 병원을 지었고, 아까 얘기했듯이 2008년에는 아주 오랜 준비 기간을 거쳐서 평양의대병원에 어린이병동도 지었다.
오인동 : 참 잘하는 일이다. 2009년에 평양의대병원을 갔더니 예전부터 알던 문상민 박사가 원장이 되었더라. 어린이병동을 보여주면서 남쪽 특히 서울대학교병원에서 많은 도움을 줬다고 고마워하는 얘기를 들었다. 마침 얼마 지나지 않아 당시 서울대학교 이장무 총장이 로스앤젤레스를 방문했기에 내가 직접 감사 인사를 전했다.
남쪽이 좀 산다고 졸부 근성을 보여서는 안 된다. 우리가 미국 초콜릿 하나에 감지덕지 하던 때 생각 못하고 잘 났다고 거들먹거리기 시작하면 절대로 북쪽과의 교류가 성공할 수 없다. 아까 황 교수가 표현 하나도 "지원" 대신 "협력"을 선택했다고 했는데, 바로 그래야 남북이 서서히 소통을 하고 신뢰가 생길 수 있다.
일단 신뢰가 쌓이면 의사 대 의사, 정치인 대 정치인… 누군들 마음을 터놓고 대화를 못하겠느냐. 그리고 이렇게 여러 분야, 여러 계층에서 남북 간 교류가 늘어나면 긴장을 조성하고 싶어도 도저히 안 되는 단계가 온다. 좀 더 많은 이들이 북쪽과 신뢰를 쌓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열어줘야 한다.
"고작 햄버거 하나 던져주고 퍼주기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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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상익 : 결핵 환자에 대한 지원은 유진벨재단이 사실상 전담하다시피 해왔다. 린튼 회장은 지난 10년간 25만 명분의 결핵약을 북쪽으로 전달했다. 그런데 이런 결핵 환자 치료 지원 사업이 최근 심각한 위기에 직면했다. 이명박 정부가 남북 간 민간 교류에 제동을 걸면서 결핵 약 지원도 끊어질 위기에 처한 것이다.
보통 일반 결핵 환자는 1차 치료제를 6~8개월 복용하면 완치된다. 그러나 이런 1차 치료제에 내성이 생긴 환자들이 있는데, 그건 약을 지속적으로 공급하지 못해서도 생기기도 한다. 이런 환자를 통해서 전염된 결핵은 1차 치료제로도 듣지 않는다. 이런 환자들은 청각 상실, 손발 저림 등의 부작용을 감수하며 100배나 많은 약을 약 3년간 복용해야 한다.
현재 북에서도 이렇게 1차 치료제로 듣지 않는 환자가 계속 발견되고 있는데, 지금처럼 남북 민간교류에 심각한 제약이 가해져 결핵 약 지원이 차단되면 앞으로 북쪽에 심각한 문제가 생길 수 있다. 이런 문제는 결핵 환자 치료 지원 사업뿐만 아니라 진행 중인 여러 개의 남북 의료 교류 사업에서 나타나고 있다.
예를 들자면, 평양의대병원에 환자에게 공급할 수액을 제조하는 설비를 설치할 예정이었다. 애초에 수액 제조 설비가 부족했던 데다 최근에는 어린이병동 등이 생기면서 수요가 더 늘어서 이런 설비의 필요성이 제기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남쪽, 북쪽이 같이 준비해 2009년부터 본격적으로 사업을 벌이기로 했는데 북으로 갈 설비, 자재 등이 1년 6개월 째 인천항에 묶여 있다.
북쪽으로 가야 할 의약품 중에도 일부가 그렇고. 이명박 정부가 남북 간의 관계 경색을 이유로 제한을 하고 있는데…. 1년에 10여 차례 남북 민간 교류를 오고갔던 단체가 1년에 한 차례 방북도 어려우니. 나도 2009년 2월 이후에는 방북 허가가 나지 않아서 북쪽을 방문하지 못하고 있다.
오인동 : 참 답답하다. 재외 동포 입장에서 보면 이명박 정부의 행태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의약품 지원하는 걸 막아서야 되나. 이것은 인도적 문제가 아닌가? 저렇게 북한의 어린이들이 불량한 영양 상태와 열악한 의료 현실 속에서 성장하게 한다면 나중에 통일이 된다 한들 남북쪽의 건강 불평등을 어떻게 조정할 수 있겠나.
남남북녀가 만나서 어떻게 연애를 하고, 애들을 낳겠나. 천박하게 예를 들어보자. 남쪽이 북쪽을 도와서 북쪽이 안정되면 가장 이익을 보는 게 남쪽이다. 생각해 보라. 자꾸 '잃어버린 10년' 운운하는데…. 그 동안에 전쟁 걱정은 안 하고 지냈지 않나. '퍼줬다' 하는데 남한 사람 한 사람이 내는 남북협력기금(연간 약 2억 달러)이 4달러 수준이다.
미국에서 4달러면 딱 햄버거 하나 살 수 있는 돈이다. 고작 1년에 햄버거 하나씩 북한 동포에게 줘놓고서 퍼주기라니! 10년간 햄버거 열 개 던져 주고서 남쪽이 얻은 게 얼마나 많나. 남북 간 길 뚫렸지, 개성에 공단 생겼지, 금강산 가지. 서해의 북한 항구가 활성화되면 가장 많이 드나드는 배의 국적이 어디겠나. 대한민국이지.
이런 얘기를 하면 안 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사악한 시쳇말로 '영토 확장'이다. 이런 상황에서 자꾸 남한과 북한이 멀어지니까, 북한이 중국에 의지하지 않나. 남한 사람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야 하는데…. 지금 하는 모습을 보면, 외국에 사는 동포 입장에서는 분통이 터지고, 부끄럽기 짝이 없다.
ⓒ프레시안(최형락) |
위기의 남북 의료 교류, 하지만…
프레시안 : 지난 10년간 남북한이 민간 교류의 소중한 경험을 축적했는데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까?
오인동 : 북한에 가서 의사들에게 수술을 가르치면 정말로 고마워한다. 그들도 다 독일, 러시아, 헝가리, 중국 등에서 연수를 할 기회가 많다. 하지만 아무래도 언어 문제도 있고 마음의 여유도 없지 않겠나. 내가 한국말로 설명해 주면서 같이 협력해서 수술을 하니 얼마나 좋아하고 고마워하는지 모른다.
당장은 나 같은 재외 동포 의사가 그리고 앞으로는 남쪽의 의사들이 더 많이 북쪽으로 건너가서 같이 연구하고, 치료하고 그래야 한다. 이렇게 신뢰가 쌓이다 보면 북쪽에 있는 의사들도 미국으로 또 남쪽으로 건너와서 직접 교류할 길이 생길 테고. 일단은 나처럼 외국에 사는 의사가 최선을 다하겠지만 갈수록 황 교수 같은 이들의 역할이 커질 것이다.
프레시안 : 북쪽에 있는 의사들이 미국 또는 한국으로 오는 게 어렵나?
ⓒ프레시안(최형락) |
지난 10년 동안 쌓인 신뢰가 가장 큰 자산이다. 앞으로 남북 관계가 정상화되면 이런 신뢰를 바탕으로 좀 더 넓고 깊은 남북 간의 의료 교류가 가능할 것이다. 현재로서는 인적 교류 면에서는 재미 동포 분들이 유리한 측면이 있으니까 좀 더 열심히 길을 닦아 주시면 좋겠다.
오인동 : 더 많은 책임감이 느껴진다. 앞으로 나도 최선을 다할 테니, 황 교수처럼 남쪽에서 남북한 민간 교류를 고민하는 이들도 기운내고 앞으로 더 많은 것을 할 수 있도록 차근히 준비를 했으면 좋겠다. 지금은 일시적으로 남북한 교류가 어려움에 직면했지만, 이런 비정상적인 상황은 조만간 정상화될 수밖에 없다. 그게 역사의 큰 흐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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