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톤은 '본(paradeigma)'을 실현한 국가를 이상적인 나라로 제시한다. '본'은 이데아와 같은 것으로, 이데아의 모방은 언제나 이데아일 수는 없기 때문에 끝없는 개선과 발전이 요구된다. 그래서 이상적인 국가에 근접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실현될 수는 없다.
놀랍게도 플라톤의 <국가>는 대부분 근대사회가 추구하는 가치들로 이루어져 있다. 전문화, 자기 일에 충실하고 남의 일에 참견하지 않는 태도, 인식과 여론의 차이, 즉 인식은 이데아를 알아가니까 훌륭하고 의견은 무지한 여론을 형성한다는 것, 그리고 진실은 사실대로 생각하는 것이고, 양육과 교육은 올바름의 근원이자 백년지대계라는 것이다.
'본'을 아는 철학자들이 나라를 훌륭하게 다스리며, 피치자는 치자의 바른 판단에 따라 화합하고, 각 계급은 저마다의 일에 충실하며, 훌륭한 법질서를 파괴하는 변혁은 죄악이라는 것이다. 실천보다 말(로고스/이성)을 더 진실한 본성으로 보며, 이상적으로 세운 국가가 욕심으로 인해 타락하지 않도록 사유재산을 폐지하는데, 이 모든 것은 시민 전체의 행복을 위해서다.
플라톤은 수천 년을 격하여 근대국가의 가치를 아주 정확하게 지적하고 있다. 사유재산의 폐지만 빼면, 그의 이상국가는 자본주의건 사회주의건 사회의 룰로서 손색이 없다. 여기서 내가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유토피아가 '이룰 수 없는 미래의 공상'이 아니라 '현재를 박탈하기 위해 현재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라는 사실이다. 이를테면 돈과 같은 것이다. 돈(빚/신용)은 현재 돌고 있지만, 사람들이 빚을 갚기 위해 현재를 살 수 없게 한다.
그렇다면 플라톤의 이상국가는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지는가? 즉, '본'을 실현하는 방식이 어때야 하는가? 플라톤은 '생성과 소멸의 방식'에 대립되는 '불변의 방식'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혜를 사랑하는 사람들(철학자들)은 생성과 소멸에 의해 헤매게 되는 일이 없는 저 존재(본질)를 자신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배움을 언제나 사랑하는 데 대해서 우리가 합의한 걸로 해 두세나." (<국가·政體>, 플라톤 지음, 박종현 옮김, 서광사 펴냄)
이 구절을 보면 플라톤에게는 이상국가가 미래의 문제가 아니라 현재의 실천적인 문제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왜냐하면 (본질을 자신들에게 드러내 보여주는) 배움은 현재의 실천적인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제 플라톤이 주장한 '불변의 방식'('생성과 소멸의 방식'에 대립되는)이 현대에 와서는 세상 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활동하는지 조금만 살펴보도록 하자. 플라톤에 따르면 '본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본의 모형을 설계하고 제작해야 한다. 그런데 '본'은 자연물 속에는 없으므로 '이성'을 통해 정신 속에서 발견해야 한다. 이 발견이 앎(지식)인데, 설계와 제작은 이 앎에 근거하여 이루어진다. 바로 이것이 '생성과 소멸의 방식'에 대립되는 '불변의 방식'이다.
따라서 플라톤의 '불변의 방식'은 '사유적 지식-설계-제작'의 과정이다. 여기서 '사유적 지식'을 '계획 또는 아이디어(어원이 이데아)'로 바꾸면 바로 현대의 '방식'이 된다. 오늘날 한국 사회의 국가 균형 발전이라든가 지역 발전 5개년 계획, 도시 재개발 사업 그리고 신도시 건설 등은 모두 플라톤의 '불변의 방식'으로 추진되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의 생활이 유토피아와 관계없다고 할 것인가! 유토피아는 현대인의 일상에서 관철되고 있고 현대인의 일상을 지배하고 있다.
유토피아(천국/성부)와 이성(성령)과 세계자본주의(성자)는 삼위일체를 이룬다. 이 종교의 최고 지도자는 제국주의다. 제국주의자가 일으키는 전쟁은 언제나 평화를 명분으로 진행된다. 이때 평화는 토머스 모어의 책에도 나오듯이 유토피아를 위한 평화다. 오늘날 세계 평화는 열강들의 유토피아 정책의 일환이다. 약소국가들은 제국주의 사이의 힘의 균형 속에서 불안하게 평화를 맛보고 있다. 한편으로, 세계자본주의를 이끌어가는 힘도 유토피아다. 시민들은 유토피아의 형이상학이 아로새겨진 돈(빚/신용)의 위력 속에서 하루하루 노예처럼 살아가고 있다. 이처럼 유토피아는 거대담론의 대상이자 일상의 문제다.
우리가 이 같은 유토피아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유토피아에 박탈당한 현재를 되찾는 것이 가장 긴요하다. 거듭 강조하지만, 유토피아는 미래의 천국을 빌미로 현재를 박탈하기 위해 현재에 구체적으로 작용하는 힘이다. 이것은 바로 오늘날 종교가 번성하는 토양이기도 하다.
새로운 전망을 제시하는 과학적인 진보 운동도 유토피아를 팔기는 마찬가지다. 이윤을 목적으로 하지 않고 에너지, 교통수단, 노동, 자동화 등에 접근할 경우 전혀 새로운 세상이 된다는 것을 부정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이성과 설계에 따른 방식(플라톤의 '불변의 방식')으로는 결코 이윤을 배제한 세상을 만들 수 없으며, 설령 내 우려를 뒤집고 그것이 가능하다 해도 인간의 심장과 모든 감각, 생명 에너지의 파장이 그런 '이성적인 조화와 질서'(유토피아)를 견딜 수 없는 것이 사실이다.
인간이 동물이라는 절대적 전제를 망각해서는 안 된다. 인간은 단맛, 쓴맛, 짠맛, 매운맛, 신맛을 느끼는 동물이다. 포도는 시고 달콤한 맛을 제공하며, 인간은 그 맛을 생생하게 느낀다. 나는 그 점이 가장 놀랍다. 자연과의 만남과 교환은 한마디로 기적이다. 모든 생물⎯무생물은 잘못된 개념이다. 만물은 다 생명이다⎯은 현재를 산다. 우리는 현재를 통해 다른 생명과 소통하고 우주적 에너지로 충만한 인간의 삶으로 다시 접어들어야 한다. 그것은 문명 시대보다 몇 천 배나 더 긴 세월 동안 인류가 살아온 삶이다.
ⓒ김용철 |
페루에서 원주민의 전통 약재와 샤머니즘의 관계를 조사한 인류학자 제레미 나비의 이야기로 이 글을 끝맺겠다. (<우주뱀=DNA:샤머니즘과 분자생물학의 만남>, 제레미 나비 지음, 김지현 옮김, 들녘 펴냄) 그는 스탠퍼드 대학에서 박사 학위를 따기 위해 1985년 초부터 2년 동안 현지 조사에 참여했다. 그 무렵 국제 개발 단체는 페루의 아마존 정글을 목초지로 바꿀 계획으로 수백만 달러를 퍼붓는가 하면, 전문가들은 인디언이 땅을 합리적으로 이용할 줄 모른다면서 식민화와 삼림 프로젝트를 합리화하고 있었다. 나비는 개발자와 전문가들의 견해에 반대해 원주민이 자원을 합리적으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다방면의 분석을 시도했다.
제레미 나비는 샤먼의 권유로 '아야우아스까'라는 환각식물을 먹고 정령(精靈)의 세계를 체험한 뒤, 원주민들이 현미경보다도 정확하게 약재를 변별해 이용하는 능력이 식물의 가르침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식물이 의사이고, 식물이 말하고 가르친다.' 이것은 아마존 원주민들의 확고부동한 믿음이요 실제였다.
그는 몇 차례의 체험과 조사를 통해 환각으로 경험한 정령의 세계가 '환영'이 아니라 '실제'라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과학자로서 환각제에 대한 불신 때문에 가혹할 정도로 자기검열을 거친 것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그는 환각 식물이 식물과의 소통에 필수적이며, 원주민의 생태학 지식이 여기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나아가, 원주민들의 이 같은 지식 없이는 지구상에 퍼져 있는 대략 250만 종의 식물에 대한 의학적 검증이 불가능해진다는 점을 들어 환각 식물에 대한 기존의 관념을 뒤집었다.
나비는 "원주민들은 환각 식물이 숲 속의 텔레비전이라고 말한다. 환각 식물이 중계하는 영상들이 이들에게는 우리가 지각하는 실제 이상으로 실제적이다"라면서 페루 아마존의 샤머니즘 연구로 탁월한 루나라는 학자를 소개한다.
나비가 소개한 바에 따르면, 루나는 자신의 책에서 합리적인 독자를 위해 합리적인 언어로 서술하고는 있지만, 특정 식물이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지적 존재라는 그의 주장은 합리적이지 않기 때문에 독자와 원활한 소통이 이루어질 수 없어서 결국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식물들이 스스로 자신의 성질을 계시한다고 말할 때, 독자들이 그게 무슨 말인지를 이해하게 될 때까지 아무것도 말할 수 없다."
현대는 타자와의 소통이 불가능한 시대다. 식물이 자신을 이용해 어떻게 약을 조제하라고 가르친다는 사실을 우리는 정상적인 정신 상태로는 받아들일 수 없다. 그러나 제레미 나비라는 학자는 체험을 통해 토착민들의 말이 맞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합리적 지식'이 가로막고 있을 뿐, 그것은 '실재하는 세계'였다. 이 세계야말로 타자와 소통이 원활히 이루어지는 정상적인 세계다. 이 '실재하는 낙원'을 미신이라 해서 퇴치하고, 존재하지도 않는 유토피아를 향해 스스로 노예가 되려고 혈안이 돼 있는 세상을 어찌 지옥이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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