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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는 왜 그녀를 버렸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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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읽어주는 남자'는 왜 그녀를 버렸나?

[김영종의 '잡설'·30]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 ③

엘리트주의만 남은 진보 ③

이 글의 주제가 다소 산만해질 우려가 있으므로, 이제 우리의 담론이 진행될 경로를 간략히 언급하고 넘어가겠다. 먼저, 지금까지 살펴본 '네차예프 현상'을 더 지나 뿌리로 들어가 보면 운동권 지식인의 엘리트 의식이 근대 학문 안에 아로새겨진 '엘리트주의, 도덕성, 헌신성'과 만난다는 사실을 알아볼 것이다.

그런 다음 지식/학문에 기초한 운동권 지식인의 비판적 사유가 결국 도덕성의 시비를 초래하고, 그렇게 될 때 그것이 어떻게 파멸로 가는 지름길인가를 밝힐 것이다. 마지막으로, 파멸을 피하고 엘리트주의를 넘어설 수 있는 자리가 증명 체계의 바깥이자 학문과 지식의 바깥인 세속성이라는 점을 피력할 것이다.

이야기를 계속하겠다. 다시 우리 운동권 지식인의 문제로 돌아오자. 민중과 동일한 계급의식을 지니려는 의지에서 학벌과 엘리트주의적 기호, 취미, 감성마저 털어내고자 했던 1970~80년대 한국의 운동권 지식 청년들은 러시아의 인텔리겐치아 못지않게 혁명의 대의에 헌신했다. 그러나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헌신은 엘리트주의의 한 표현일 수 있다는 사실에 주의해야 한다. 헌신이 위험할 수 있는 이유는 사태를 도덕적으로 보게 하는 데 있다.

만약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들이켜지 않았다면 플라톤주의가 오늘날처럼 근대 학문의 근간을 이루지 못했을 것이다. 플라톤주의야말로 예수회 못지않은 엘리트주의의 화신이다. 플라톤주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근대 학문은 네차예프처럼 불우한 배경의 청년들이 출세할 수 있는 '부르주아 지식'이었다. 운동권 지식인은 근대 학문의 가장 큰 수혜자라 할 수 있다. 이들이 당파성을 가지고 근대 학문을 부르주아 학문과 사회주의 학문으로 나누어 전자를 비판한다고 해서 엘리트주의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오해는 근대 학문의 토대에 대한 성찰이 부족한 탓이다.

일차적으로는 사회 환경 때문이지만 주로 학습을 통해 이들은 의식화되었으며, 이때의 학습은 그 내용이 어떠한 것이었든 간에 전적으로 근대 학문에 속한다. 만약 이를 부정한다면 사회주의 학문이 근대 학문이 아니라는 것과 같다.

민중운동에 대한 이들의 헌신은 '엘리트주의, 도덕성, 헌신성'이 깊이 아로새겨진 근대 학문과 무관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말한 대로 전문가 집단이 사회적 발언을 독점하고 사회의 진로를 주도하는 시대가 왔는데도 그 심각성을 전혀 느끼지도 못한 것이다. 사적인 자리에서는 학력/지식을 우선시하고 출신 학교별로 연대를 분명히 해온 것도 사실이다.

운동권 학생은 대체로 우등생이자 모범생으로 입시 경쟁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청년들이다. 입시는 원래 비판적 사유를 배제하고 규칙 안에서만 사고할 것을 요구한다. 규칙은 한마디로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규칙이다. 이들은 대학에 들어와 전에 자신들이 받은 교육이 얼마나 주입식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체제 옹호적이었는지를 통탄하며 의식화를 통해 비판적 사유를 하게 됐지만, 이 비판적 사유 또한 '증명'에 토대를 두고 있기 때문에 규칙을 상대화할 수 없다.

심하게 말하면 증명은 규칙을 위해 존재하는 일종의 알리바이라고 할 수 있다. 규칙과 증명의 관계는 앞의 여러 글에서 웬만큼 설명이 됐다고 보고, 여기에서는 결론만 말한다. 이들의 비판적 사유가 '증명'을 토대로 하는 한, 그것은 규칙을 위한 것이다. 규칙은 게임의 규칙에서 볼 수 있듯이 '방식/형식'의 모습을 띤다. 사태를 '방식/형식'으로 취급하는 것은 전문가의 특권으로 엘리트주의의 토양이 된다.

증명은 '방식/형식' 이외의 것으로는 표현될 수 없기 때문에 '실제/내용'은 명분으로 전락한다. 반혁명 세력이 적반하장으로 부과하는 '증명의 의무'는 '방식/형식=잘well=도덕성'으로, 혁명 세력은 이를 거부할 '자리'가 없는 것이다. 그 '자리'는 유일하게 증명 체계의 바깥이자 학문과 지식의 바깥인 세속성이다.

세속성이야말로 진보의 핵심이다. 비판적 사유가 세속성에서 나올 때에야 부르주아형 자본주의를 극복할 수 있다. 부르주아형 자본주의는 우리가 경험한 천민자본주의(군사 독재에 의한 개발형 자본주의)에서 진일보한 개념으로 '합리성'을 특징으로 하며, 그런 의미에서 합리적 자본주의라고도 할 수 있다. 이는 정치 형태로 대의민주제를 갖는데, 이 대의성(代議性)이 자신의 존립 근거로서 요청하는 것이 전문성이다. 사람들(民)의 뜻을 무엇이 대표한다고 했을 때 그것에 전문성이 없다면 대표성 자체에 의문이 제기되기 때문이다.

전문성은 지식/학문을 통해 습득된다. 따라서 이에 대한 비판은 대의민주제와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의 핵심을 이룬다. 세속성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세속성은 문자가 아닌 말의 세계다. 문자가 증명과 관련을 맺는다면, 말은 저잣거리(또는 광장)와 관련을 맺는다. 지식인이 세속성 속에서 활동할 때, 그는 증명이 아니라 '저잣거리(또는 광장)에서의 소통'을 통해 진실에 도달한다. 바로 이 활동을 세속화라고 한다. 세속화는 대의민주제가 아닌, 저잣거리 또는 광장의 정치인 직접민주제를 지향한다.

세속화는 쉽게 말해서 광대 정신이다. 광대는 풍자와 익살과 해학 등을 통해 관중에게 웃음을 선사한다. 풍자 등 광대의 행위는 기존 질서와 가치에 대한 격하(格下)이고 그 결과는 민중의 웃음이다. '증명의 의무'를 거부할 수 있는 자리가 바로 이 자리인 것이다. 거리와 광장에 모인 100만의 촛불은 바로 이것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운동권 지식인이 그 자리에서 한 것은 '증명의 의무'였고, 그 결과 촛불은 흩어졌다.

도덕에 의한 도덕적 성토, 부당함을 입증하기 위한 이론적 토론, 그리고 대의(代議)기관인 언론에 의존한 활동 등은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에 알맞은 활동이다. 이러한 활동은 광대의 활동(격하 행위)과 정반대로 격상의 행위다. 진보적인 활동가들과 그들의 단체는 활동을 통해 격상된다. 격상되어갈수록 '도덕적 권위'를 가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대중은 모범생이나 도덕 교사를 좋아하지 않는다. 이것은 파멸로 가는 지름길이다.

이 글 첫머리에서 나는 "운동권 지식인이 사회를 계급의 체계로만 보았지 계급사회를 자발적으로 추종하게 하는 힘이 자본 자체(형이상학이 배제된 자본)가 아니라 자본이 자본이게 하는, 즉 자본에 '인격과 품위를 부여하는 학력/지식'이라는 점은 간과했다"고 말했다. 원래 지식/근대 학문은 부르주아지의 교양이다. 학력/지식을 격하시키지 않고는, 욕심 사납고 천박한 '부르주아지의 교양'을 비웃지 않고는, 부르주아형 자본주의를 넘어설 수 없다. 부르주아형 자본주의가 진행되고 있는 오늘날, '학력/지식'으로 무장한 채 '증명의 의무'를 지고 자본주의와 싸우겠다는 것은 마치 자책골을 넣으려고 싸우는 선수 같다. 그럴수록 부르주아형 자본주의와 대의민주제는 풍성해진다.

일상을 통해 볼 때, 진보적 지식인에게는 엘리트주의만 남아 있다. 정치공학, 마케팅, 사설학원, 학문과 교육, 문화예술, 언론 분야 등에서 '학력/지식'을 수단으로 뛰어난 능력을 발휘하는 이들은 모두 그 학력/지식 안에 안주하고 있다. 내가 진보주의자에게서 볼 수 있는 엘리트주의라 함은 '학력/지식'을 수단으로 자신의 인격적·사회적 지위를 격상시키는 현상을 말한다. 사전적인 의미로는 '①소수의 엘리트가 사회나 국가를 지배하고 이끌어야 한다고 믿는 태도나 입장'과 '②어떤 사람이 엘리트로서의 자부심이나 우월감을 가지는 태도' 중에서 ②를 뜻한다. 그러나 ①과 ②의 경계는 아주 넘나들기 쉬운 야트막한 경계석 같은 것이다.

ⓒ김용철

이 글을 끝내면서 엘리트주의가 인간을 뿌리부터 얼마나 파괴하는지를 잘 보여주는 소설 <책 읽어주는 남자(The Reader)>를 소개하겠다. 소설은 15세 소년 미하엘 베르크와 36세의 여인 한나 슈미츠의 사랑 이야기로 시작한다.

미하엘은 고등학생이고 한나는 전차 차장이다. 여자는 사랑을 나누기 전에 책 읽어주기를 원하고, 그것은 곧 둘 사이의 의식(儀式)이 된다. 이 의식은 독자들에게 왜 그런 의식을 치를까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면서 작품 전체를 관통한다. 둘의 관계는 얼마 못 가서 끝난다. 한나가 "이제 네 친구들한테로 가봐" 하고는 훌쩍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1부가 끝난다.

이어지는 2부에서 한나가 나치 전범으로 재판정에 서고, 한나가 사랑하는 소년을 버린 이유를 비롯해 그 뒤로도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었던 이유가 문맹 때문임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옮긴이의 말을 인용하겠다.

"한나가 떠난 뒤 대학에 들어가 법학을 전공하던 미하엘 베르크(주인공)는 우연한 기회에 그녀를 다시 만나게 된다. 그것은 법학 세미나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씩 방문하게 된 법정에서였다. 이 소설의 제2부는 한나 슈미츠의 과거에 대한 이야기이다. 이때부터 한 꺼풀씩 그녀의 과거가 벗겨지기 시작한다. 그녀는 나치수용소의 감시원이었던 것이다.

이 소설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지멘스 회사에서 보장된 승진도 마다하고 나치 친위대로 들어가 수용소에서 감시원이 된 한나의 행동과 또 전차 회사에서 운전수로 정식 채용하겠다는 보장도 거절하고 다른 곳으로 도망친 한나의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이다(이때 사랑하는 소년 미하엘과 헤어진다-필자).

그러나 미하엘에게는 그녀의 잔혹함보다는 본원적인 약점이 문제가 된다. 그녀의 약점은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하는 문맹이라는 것이었다. 어떤 이유에서 글을 배우지 못했는지 모르지만 그녀는 자신이 글을 읽지도 쓰지도 못한다는 데 대해서 걷잡을 수 없는 수치심을 느낀다. 한나는 법정에서 기소된 다른 여자 감시원들이 그녀가 보고서를 작성했다고 모든 책임을 뒤집어씌울 때에도 자신이 문맹이라는 것이 노출되는 것이 두려워 필적 감정을 거부하고 보고서 작성을 자신이 했다고 시인하고 모든 벌을 자신이 떠맡는다."


3부에서는 한나가 감옥에 있은 지 8년째 되던 해부터 미하엘이 책을 낭독해 녹음한 카세트테이프를 보낸다. 중년의 미하엘은 사랑의 기억과 부채의식에 시달리다가 방황의 종착지가 한나라는 것을 깨닫고 다시 한나를 찾은 것이다. 자신의 방황처럼 오디세우스는 머물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시 출발하기 위해 귀향하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미하엘은 <오디세이>부터 녹음해 보낸다.

한나는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와 카세트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소리를 따라 손가락으로 한 자 한 자 맞춰가며 글을 배운다. 드디어 문맹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미하엘도 그 사실을 알고 말할 수 없이 기뻐한다. 그러던 어느 날, 한나는 18년을 복역하고 사면된다. 교도소장의 요청으로 미하엘은 석방을 앞둔 한나를 만난다. 한나는 여전히 미하엘을 사랑하고 있지만, 미하엘은 부채의식 속에서 과거 속에 묶어놓은 한나를 사랑할 뿐이다.

출소 당일 미하엘이 한나를 데리러 갔는데, 그녀는 그날 새벽 스스로 목매달아 죽는다. 교도소장이 미하엘에게 묻는다. "그녀는 당신이 편지를 써주기를 정말로 고대했어요. 그녀에게 우편물을 보내는 사람은 오직 당신뿐이었죠. 우편물을 나누어줄 때면, 그녀는 '편지는 없어요?'라고 물었지요. 카세트테이프가 들어 있는 소포 이야기를 하는 게 아니었어요. 당신은 왜 한 번도 편지를 쓰지 않았나요?"

왜 그랬을까? 인정하지 않은 것이다. 미하엘은 한나가 '진정으로 원하는 게 무엇인지'는 관심 밖이다. 글을 읽을 줄 알고 쓸 줄 아는 한나임에도 여전히 문맹의 한나로 대한다. 그는 한나가 글을 깨친 사실에 놀라 환호성을 질렀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그는 한나가 왜 자살했는지조차 소설이 끝날 때까지 모른다. 오직 자신의 방황, 자신의 양심, 자신의 선의, 자신의 채무감, 자신의 빚 갚는 행동, 자신의 만족 따위에만 갇혀 있다. 그렇게 선하고, 자신을 책망하고, 시대의 아픔을 함께하고, 상대를 생각하고, 교양 있는 엘리트건만.

나는 문자만큼 소통을 방해하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앎, 지식 따위만큼. 사람들이 가장 듣기 싫은 소리가 "저런 무식한 놈!"일 것이다. 학력, 지식으로 계급 정도가 아닌 인격(사람 가격)의 줄을 세우는 계서화(階序化)는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움켜쥐어야 하는데 그것마저) 기댈 곳 없게 만드는 가장 무서운 학대다. 그런데, 도대체 누가 학력, 지식, 문자 따위에 그런 권력을 주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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