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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당신을 사랑해!" 외치는 거짓말쟁이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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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보다 당신을 사랑해!" 외치는 거짓말쟁이들

[김영종의 '잡설'·27]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⑤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⑤

진보 이념이 현대 생활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보기 위해 이제부터 우리의 일상이 어떻게 진보의 레일 위를 굴러가고 있는지를 살펴보겠다. 세 가지 예를 들어본다.

먼저, 사랑에 대해서.

얼마큼 사랑하느냐고 물었을 때, "너무나 사랑해서 말로 표현할 수 없어." "우리 사랑에는 바닥이 없어." "백번을 다시 태어나도 너만을 사랑할 거야." "너를 위해 죽을 수 있어." "나보다 더 사랑해." 그러나 "돈보다 더 사랑해"라고 말하는 사람은 본 적이 없다.

가혹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당신이 연인을 목숨보다도 사랑할망정 돈보다 더 사랑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죽으면 돈이고 뭐고 다 소용없는데 무슨 소리냐고 되묻겠지만, 그렇지 않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돈은 소용이 아니고 형이상학이다. 사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것은 순간의 결정이지만 돈은 ('돈 위의 삶'은 체계에 복종하는⎯진보를 믿고 따르는⎯삶이라고 했듯이) 당신의 전 존재를 죽음 이후까지도 지배한다.

인류 최초의 서사시 <길가메시>에 나타나는 '사랑과 재물'의 원초적인 관계를 한번 살펴보자.

"길가메시, 내게로 오세요. 신랑이 되어주세요."

사랑의 여신 이슈타르가 길가메시에게 반하여 구혼을 하지만, 길가메시는 여신을 모욕하며 거부한다. 여신은 분에 떨며 하늘로 올라가 부모 앞에서 눈물을 쏟는다.

"아버지, 길가메시를 쳐부술 수 있는 황소를 제게 주세요."

여신은 하늘의 황소를 몰고 길가메시를 공격해온다. 지상에서 가장 유능한 사냥꾼 길가메시는 하늘의 황소와 싸워 목덜미와 뿔 사이를 칼로 찌르고 목을 베어버린다. 사랑을 거부한 대가로 하늘의 황소를 획득한 셈이다. 5000여 년 전 메소포타미아 지역을 다스린 길가메시 왕의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사랑의 거부가 황소를 오게 한 것'을 읽을 수 있다. (<그리스 문명의 오리엔트 전통>, 발터 부르케르트 지음, 남경태 옮김, 사계절 펴냄)

또 한편의 서사시를 소개한다. 게르만 서사시를 오페라로 만든 바그너의 <니벨룽겐의 반지>를 보면, 라인의 딸이 이렇게 노래한다.

"사랑의 힘을 거부한 자만이,
사랑의 쾌락을 거부한 자만이,
황금을 강요하여 반지로 만들 수 있는
마법을 얻어낼 수 있으리."


여기서 반지는 무제한의 권력과 세계의 상속권을 지닌 반지다.

공교롭게도 세계 금융 중심지라는 미국의 월가 한복판에는 검은 황소의 상이 서 있다. 세상은 월가의 검은 황소 밑에 있는 사냥터일까? 우리는 길가메시의 범례를 따라서 날마다 사냥터로 나가는 것일까? 당신은 어떤가? 일을 위해, 성공을 위해, 사랑을 거부하고 있지는 않은지? 현대인은 황소를 위해 사랑을 거부했으면서도 사랑하는 당신을 위해 사냥터에 나간다고 믿고 있다.

예컨대, 당신과 K씨는 사랑하고 있다. 일에 파묻혀 있는 K씨는 사랑하는 당신을 만나기 위해서 일에 지장이 없는 시간을 고른다. 만약 K씨가 약속을 어길 경우, 일 때문이라면 당신은 이해한다. 하지만 K씨가 약속을 번번이 어기면 당신은 참지 못하고 화를 낸다. K씨는 당신을 분위기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가 기분을 풀어준다. 당신은 K씨의 변명을 들으며 사랑의 감정을 회복할뿐더러 그를 이해하지 못한 걸 미안해하면서 더 열심히 일하라고 격려한다.

그러고는 라디오 음악 프로그램 같은 곳에 사연을 보낸다. "그 사람을 사랑하는 건 그 사람의 일까지 함께 사랑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자기야 사랑해!" 이렇게 사연이 나가고, "참 아름답군요. 일이란 게 그렇잖아요. 자기도 어떻게 할 수 없을 때가 많으니까 말이죠. 사랑은 연인의 일에 대한 이해 없이는 쉽게 사그라지는 불꽃인 것 같아요" 운운하는 진행자의 멘트와 함께 '험한 세상 다리 되어' 같은 노래가 흘러나온다.

사랑보다 일(돈)을 중시하지 않으면 삶의 터전에서 추방당하는 엄혹한 현실이다. 길가메시든 니벨룽겐 반지의 주인공이든, 이들이 사랑을 거부한 대가로 얻은 부와 권력은 야망 때문이다. 그런데 현대의 소시민은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 통화체계)의 최종 생산물인 노예이기 때문에 사랑을 위해 '빚'(일/돈)을 거부할 권리가 없는 것이다.

ⓒ김용철

둘째, 스케줄에 대해서.

꽉 짜인 스케줄을 보고 숨이 막힐 때도 있고, 시류에 뒤처지지 않았다는 자부심이 들 때도 있다. 전자일 때는 이렇게 살아서 뭐 하나 하는 회의가 밀려와 여행이라도 떠나고 싶고, 후자일 때는 경쟁사회가 주는 희열 속에서 성취를 위해서라면 뭐든 감수할 것 같다. 이 두 감정이 한 사람한테서 일어난다.

바쁜 스케줄상에서 당신은 주인인가 노예인가? 분명히 스케줄은 당신이 짜는데도 후자의 경우마저 선택의 여지없이 당신은 스케줄의 노예다. 마치 인간이 정해진 운명의 각본대로 살면서도 자신의 의지대로 산다고 생각하는 것과 같다. 스케줄에 작용하는 운명의 각본 같은 것, 그것이 바로 진보의 레일이다. 스케줄은 진보의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이자 진보의 레일이 깔려 있는 행선지다.

스케줄이 이 레일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것은 일상이 그렇다는 얘기다. 우리가 일상을 말할 때는 공기와 같이 자각되지 않는 현상에 주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거기에 일상의 진실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하면 일과 무관한 경우에도 당신이 자신의 스케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을 뚜렷하게 보게 된다. 그것은 당신의 스케줄이 진보의 레일 위를 달리는 열차라는 반증이다.

예를 들어, 같이 놀아주기를 원하는 딸이 날이면 날마다 얼마나 외롭게 지내는지를 몰라서 함께할 시간은 내지 못해도, 허구한 날 보는 사람들과 건수 만들어서 보는 모임은 빠지기 힘들다. 또 우울증에 시달리는 늙은 아버지가 오늘 저녁 와달라는 부탁은 거절할망정 노인의 외로움을 다룬 영화 약속은 기꺼이 지킨다. 등산모임, 친목회, 술자리, 미술관 관람, 사진 강좌, 스포츠센터, 영어회화, 인터넷 동아리 활동 등 수없이 많은 스케줄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 당신은 이것들을 인간적인 일(딸이나 부친)과 바꾸려 하지 않는다. 이는 당신이 원래 비인간적이어서가 아니라 스케줄이란 게 본디 당신의 의지에서 독립하여 진보의 레일 위를 달리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스케줄상의 일 하나하나를 사용가치로 대하지 않는다. 모든 상품이 그렇듯, 스케줄도 물신(物神)이라는 환영으로 인해 당신을 떠나 하나의 독립된 세계를 이룬다. '일과(스케줄)의 세계'와 '당신'의 관계. 여기에는 필연적으로 논리와 방식이 관철된다. 당신은 이 논리와 방식—메커니즘—에 종속된 상태에서 살지 않을 수 없다. 이 메커니즘이 바로 스케줄에 작용하는 운명의 각본 같은 것이자 더 잘 살기 위해 미래의 시간을 향해 깔린 진보의 레일이다.

마지막으로, 여행에 대해서.

복잡다단한 업무와 현실을 떠난다는 것이야말로 여행이 안겨주는 큰 기쁨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대부분 피상적인 기쁨만을 맛보고 돌아오니,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런데 가장 중요한 '떠남', 이것을 방해하는 장본인은 바로 '진보'라는 괴물이다.

히말라야의 안나푸르나를 여행한 경험을 예로 들어 잠깐 살펴보겠다. 바로 내 눈앞에 펼쳐진 장관에 감탄을 금치 못하고 사진을 찍고 일행과 감동을 나눈다. 산에 흠뻑 취하고 싶어 홀로 계곡에도 앉아 있어보고, 무심한 마음으로 오두막의 베란다에도 앉아 있어본다.

그러나 정말로 잠시만 산에 집중할 수 있다. 산과 나 사이에 장벽이 둘러쳐져서 내 머릿속은 세상일로 다시 분주해진다. 이런저런 골칫거리, 크고 작은 스트레스, 창피한 기억들, 떠올리고 싶지 않은 얼굴들, 억울한 일, 분노할 일 따위…. 이 감옥을 벗어나지 않고서는 산과의 교감은 요원할 뿐이다. 벗어나려고 발버둥 칠수록 감옥으로 다시 붙잡혀온다.

이 장벽이 왜 진보와 관계가 있다는 것인가? 반대의 경우를 생각하면 답은 훨씬 쉽게 나온다. 나는 서울을 떠나 섬에 가서 사는데, 한 3년 넘어가니까 장벽(스트레스, 창피한 기억 등 세상의 일로 이루어진 장벽)이 서서히 걷히는 것을 느꼈다. 그 기간만큼 진보의 레일에서 이탈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인 덕분이다. 즉, 그 기간 동안 나는 생활 속에서 직선의 시간을 휘어 원형으로 만들려고 애쓴 것이다. 자세한 내용은 생략하고 결론만 말하면 이렇다. '직선의 시간관을 가지고서는 어떤 수행을 해도, 또 어떤 영감으로 가득한 예술혼으로 접근해도, 자연은 당신에게 문을 열지 않을 것이다.'

안나푸르나를 내려와 카트만두 시내에서 쇼핑을 한다. 기념품을 비싸게 샀느니 싸게 잘 샀느니 하며 일행들과 함께 밥을 먹는다. 이 나라는 한국의 5, 60년대 같다고들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어느 곳을 가나 한국의 경제 수준과 비교하는 건 필수다. 사정이 이러한데, 우리의 여행이 진보의 레일을 달리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까?

이제 마무리를 하도록 하자. 진보에 대한 비판은 진보 '바깥'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한국의 정치 지형에서 진보 세력이 거듭 새롭게 태어나려면 제일 먼저 스스로를 비판할 그 바깥이 어디인지를 발견해야 한다. 그 바깥은 결코 보수일 수 없을뿐더러, 보수로 위장한 모리배 집단과의 논쟁이나 경쟁 또한 결코 바깥을 발견할 수 없게 만든다는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다. 그것은 자본주의가 원하는 구도만 확고하게 해줄 뿐이다.

나는 진보에 대한 비판을 '바깥'에서 행하였다. 이 '바깥'은 세계 자본주의 체제의 바깥이며, 더 멀리 가면 문명의 바깥이다. 또, 인간의 바깥, 사회의 바깥이다. 그리고 개인적으로는 학문의 아웃사이더로서의 바깥이며, 나아가 내가 쓰고 있는 이 '문자' 세계의 바깥이다.

진보 세력이 그 '바깥'을 어떤 '사회주의적인 이상' 같은 것에서 찾는 향수, 그리고 그것에 대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패가망신할 뿐이다. 이를 염려하여 아래 인용과 함께 끝으로 내 의견을 몇 자 덧붙인다.

"사회주의는 이른바 '인간의 동일성'이라는 사실에서 출발한다. 마르크스가 그런 종류의 사회주의적 이상가(idealist)를 철저하게 비판한 것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그것은 마르크스가 '가치'에 대해 보다 깊이 있는 통찰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고전경제학은 두 개의 이질적인 사용가치가 등가일 수 있는 근거를 거기에 포함된 동질의 인간 노동에서 구한다. 사실 이것(모든 상품 속에 동질의 인간 노동이 들어 있다는, 고전경제학의 노동가치설)은 화폐 형태를 전제로 한 발상이며, 화폐를 각 상품 속에 내재시키는 일이다. 요컨대 화폐의 성립에 의해 비로소 각 상품은 '공통의 실체(동질의 인간노동)'를 지니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그들은 각 상품은 원래 '공통의 실체'를 지닌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 마르크스가 말하는 것은 '인간은 똑같다(평등하다)'는 사고가 선험적인 진리가 아니라 '상품 형태가 노동생산물의 일반적인 형태인 사회'에서 가능하다는 것이다. 결국 동질의 인간노동이란 처음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화폐경제의 확대 속에서 나타난 것이다." (<마르크스 그 가능성의 중심>, 가라타니 고진 지음, 김경원 옮김, 이산 펴냄)


이처럼 상품에 내재한 '공통의 실체'는 모든 인간이 가지고 있는 '인간의 동일성'이라는 가짜 개념'(=노동가치설), 즉 '본질'의 철학에 입각한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본질에 기초한 진보는 자본주의 변혁('차이'의 철폐)을 목 놓아 부르짖으면서 실제로는 오히려 '산업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고전경제학(차이의 확대)을 맹렬히 신봉한 꼴이 되었다.

산업자본주의는 시간적인 차이에서 이윤을 얻는다. 즉 기술 개발을 통해 가치체계를 끊임없이 차이 짓기 함으로써 잉여가치를 획득한다. 이것은 시간적 차이가 가치의 차이를 생산하는 '방식'의 발전이다. 근대적인 의미의 진보는 이 방식이 주축이다.

여기서 방식은 인간의 호불호(好不好)에 상관없이 자기운동으로 관철된다. 인간의 감정이 사상된 바로 이 메커니즘, 형식주의, 수학적일 만큼 엄밀하고 논리적인 방식; 이념-비판-대안-토론-계획-실천. 이것이 진보주의자가 가장 좋아하는 태도이자 철학이다. 이곳에서는 생명이 질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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