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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수'의 진짜 이름은? '매국노' 집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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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보수'의 진짜 이름은? '매국노' 집단!

[김영종의 '잡설'·27]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④

진보는 퇴보의 다른 이름 ④

이제 우리는 진보가 '방식'의 형태를 취하는 문제에 집중할 차례다. 진보의 운동은 필연적으로 방식을 통해 관철된다는 것을 가장 잘 보여준 사람은 헤겔이다. 진보가 방식이라고 말한다면, 소크라테스가 덕은 앎이라고 한 만큼이나 옹색하다. 그러나 "덕은 앎이다"라는 정의도 내용이 아닌 방식이라는 사실이 벌써 드러나지 않았는가!

진보가 방식이라는 난센스는 우리 삶의 방식으로 벌써 확고하게 자리 잡았다. 특히 엘리트가 되려면 방식에 탁월함을 보여야한다. 법률가, 회계사, 기자, 건축가, 공학자, 디자이너 그리고 예술가까지도 방식을 다루는 전문가다. ('잡설' 연재를 시작하는 첫 처음 글에서 "앞에서 말한 작가도 일상을 생활 동화라는 '방식[형식]'으로 꾸며내자고 이야기하고 다닌다지 않는가. 이 같은 '방식'의 속임수에 대해서는 다른 장에서 상술할 것이다"라고 말한 '방식'이다.)

우리가 교육을 통해서 배우는 것은 방식이다. 심지어 인성 교육까지도 방식이다. 그 대표자가 '덕은 앎'이라고 가르친 소크라테스니까. 방식은 체계 속에 들어 있다. 앞서 "소크라테스는 증명을 하나의 대화로 도입하면서 동시에 대화 그 자체의 본래 목적을 제거해버림으로써 그 이전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들었다"고 한 가라타니 고진의 말을 기억하기 바란다. 여기에 '방식'과 '체계'의 관계가 고스란히 들어 있다. '방식'을 통해 본래의 목적을 제거해버림으로써 이전의 '체계'를 견고하게 만드는 것—이것이 '진보'의 정체다.

방식은 체계를 견고하게 하고 체계는 방식을 발전시킨다. 방식의 발전이 진보이므로, 진보는 체계를 더욱 공고히 한다. 따라서 방식에 길들어져 있는 한, 체계를 빠져나갈 길이 없다. 우리의 논의에서 '안'이라는 것은 빠져나갈 수 없는 이 체계의 '안'을 말한다.

20세기 구조주의와 모더니즘도 소크라테스-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방식의 발전을 거쳐 체계를 공고히 하였다. 화이트헤드의 말처럼 서양 철학 2000년이 모두 플라톤 철학의 주석에 불과하다면, 서양 철학은, 플라톤이 철학자를 건축가에 비유했듯 '건축=체계(형식)=안=유심론'의 철학이다. 이 철학의 임무는 자아와 이성을 위해 체계(형식)를 건축하는 일이다.

이런 건축은 형식화 또는 형식주의를 향한 욕망이다. 형식주의는 형식이라는 말과는 다르게 본질을 추구한다. 마치 소크라테스가 본질을 추구한 결과 그것(본질)을 방식으로 표현할 수밖에 없었듯이 똑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본주의는 하나의 건축물이자 방식이다. 돈은 이 건축물이 토대로 하는 본질의 표상이다. 그것은 종이에 잉크를 발랐을 뿐이지만 정확히 본질의 대행자이다. 따라서 돈은 물질의 대표 브랜드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형이상학(환영이자 속임수인 본질)을 베일 속에 숨기고 있다. 나는 이 베일을 벗기고 속임수를 폭로하기 위해서 '잡설'을 쓰고 있다.

형식주의의 궁극은 '무오류의 체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때문에 '바깥'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우리는 돈의 바깥에서 살 수 있는가? 불가능하다. 그러나 약점은 있다. 신용의 붕괴는 자본주의의 붕괴를 가져온다. 스태그플레이션과 공황 등이 신용의 붕괴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자본주의를 붕괴시킬 수 없다. 오직 신용의 붕괴를 통해서만 가능한데, 그것은 체계에 난 균열이 무너져 바깥의 바닷물이 해일처럼 밀려와 휩쓸어버릴 때다. 돈의 바깥은 신용의 바깥, 즉 '돈의 가치를 아무도 믿지 않는 것'이다. 휴지 조각으로 자본주의를 움직일 수는 없지 않은가!

진보를 믿고 따르는 삶은 '바깥'이 없는 까닭에 폐쇄회로에 갇힌 삶이다. 이 폐쇄회로가 다름 아닌 '무한대의 직선으로 뻗은 자본주의의 시간'이다. 얼마나 해괴한 이율배반인가. 이러니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사람들이 이 전도(顚倒), 이 도착(倒着)을 알 도리가 없다. 자본주의는 모든 정당한 가치를 전도시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본 것처럼 '본질'이 '잘'이 되고, '형식'이 '안'이 되고, '폐쇄회로'가 '무한한 직선의 시간'이 되는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다.

"자본주의 시간성은 무기한으로 연기된다는 점에서 유대-기독교의 시간성과 유사하다. (…)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관념도 아니고 현실적 필요나 욕망도 아니다. 우리를 움직이는 것은 오히려 형이상학과 신학이다. 이 형이상학과 신학은 상품 그 자체의 형태 속에 새겨져 있으며, 이것은 또한 우리의 의사소통과 교환 속에 내재한, 근거 없음(예를 들면, 돈은 어떤 근거에서 돈이냐?)과 (근거 없음에서 오는) 위기 속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은유로서의 건축>, 263~264쪽. 괄호는 필자)

앞서 나는 "원-상기론이 재생-상기론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전생(前生)'의 시간관인 '원형(圓形)의 시간'을 폐기하고 '직선의 시간'만 확립하면 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그만큼 '직선의 시간'은 근대의 진보 이념이 성립하는 전제조건이다. 자본주의 역시 '직선의 시간' 위에서 운동하지 않고서는 존립이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자본주의'와 '진보 이념'은 미래를 위한 '직선의 시간'을 모태로 해서 태어난 쌍생아인 것이다.

유대-기독교에 내재한 직선의 시간관은 모세로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느님은 모세에 의해 처음으로 '야훼'란 이름을 갖는다. 그 전에 이름을 갖지 않았던 하느님이 이름을 갖게 되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의미가 분명해졌음을 뜻한다. 의미(환영)를 통해 본질이 규정된 것이다. 그 본질의 규정이 바로 모세가 시나이 산의 불꽃 속에서 받은 열 가지 계율, 즉 십계다. 십계를 실행하여 하느님의 나라를 이 땅에 세워라! 야훼는 유대 백성한테 역사 속에 유토피아를 세우라고 명령한 것이다. 신의 백성은 야훼의 역사(役事)를 역사(歷史) 속에서 이루어야 하며 대망은 현재가 아닌 미래의 사건이다. 물론 최후의 대망은 종말론이다. 이것이 유대-기독교 엘리트들이 모세한테서 물려받은 직선의 시간관이다.

(모세의 메시아 신학은 그가 이집트에 있을 때 태양신학의 영향을 받아 성립됐을 것으로 보인다. "아켄아톤의 종교 개혁(기원전1375~1350년)으로 유일신이 된 태양신 아톤은 '얼굴을 가린 신' '다른 세계에 숨어 있는 신'이었던 태양신 '라'와는 달리 세상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냈다"(엘리아데, <세계종교사상사1>, 이용주 옮김, 이학사 펴냄, 172쪽 참고).

이는 야훼가 모세의 종교 개혁으로 세상에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것과 매우 비슷하다. 태양신의 아들 파라오는 마트의 화신인데, 마트가 '진리, 질서, 도리, 정의 이것들은 태양신의 존립 기초다'를 뜻하는 것으로 보아, 모세가 백성들에게 마트(십계명)를 주어 스스로를 파라오로 위치 지었을 가능성이 있다.)


야훼는 모세에게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라고 말한다. 이것은 바깥(타자)이 전혀 필요 없다는 점에서 완전함의 표현이다. '나는 스스로 존재하는 자'는 세계자본주/체계/이성의 특성이다. 예수는 '모세의 체계'(구약)를 파괴하기 위해 마구간/바깥에서 태어났으며, '가난한 자, 병신, 거지, 과부'/바깥을 쉽게 말해 혁명 세력으로 여겼다. 그러나 체계를 지키려는 자들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다.

오늘날 체계/세계자본주의 바깥에서 예수가 태어난다면 어떤 활동을 할까? 가장 먼저 직선의 시간을 휘어서 원으로 만들 것이며, 그런 다음 손을 들어 '희망과 기쁨의 시간'을 가리킬 것이다. '희망과 기쁨의 시간'은 다름 아닌 미래 없는 현재다. '지금! 여기! 기쁨!'이 그의 슬로건이다.

직선의 시간이 가리키는 '미래의 희망'은 인간을 노예로 만들고 지구를 파멸시키는 최고의 악덕이다. 그것은 진보라는 멋진 언어로 무시무시한 악덕을 은폐한 채 빛나는 상아에 둘러싸여 있다. 인간은 금수가 되지 않기 위해서 배운다고 하지만, 현대는 되레 배움을 통해 악덕의 계단을 하나씩 올라가고 있다. 어린 시절과 청년기 내내 시험에 나올 지식 따위를 배우느라 푸릇푸릇 싱그러운 생명의 빛을 지옥에 내던지면서까지.

첫 머리에 한 이야기를 다시 되풀이하겠다. "빚의 자가 재생산 시스템(현대 통화체계)—이 완벽한 시스템의 최종 생산물은 노예다. 모든 사람들이 재산을 지키고 잃지 않으려는 두려움 속에서 자발적으로 노예가 된다. 그래서 임금노예가 줄을 서게 만든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인류 전체가 쳇바퀴를 돈다. 이들은 피라미드 정상에 있는 엘리트에게만 이득이 되는 제국을 강화하기 위해 생존하고 있다."

악덕(배움)의 계단 정상에 최고의 교육을 받은 엘리트들이 자리하고 있다. 왜 천인공노할 이런 일이 벌어지는가? 직선의 시간 위에 있는 '미래의 희망'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그것을 타파할 구체적인 대안을 제시할 수는 없다. 나에게는 그만한 능력이 없다. 더 솔직히 말하면, 대안은 또다시 진보의 이념 안에 갇히고 만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과학적인 대안이 아닌 세속적인 대안을 추구한다. 세속적인 대안에 대해서는 '유언비어의 사회학' 등 몇 곳에서 드문드문 언급하였다.

ⓒ김용철

자, 이제 '진보'의 허위를 벗기기 위하여 사회 속으로 뛰어들자.

사람들은 진보 덕분에 정신없이 바빠졌다. 왜 바쁘냐고 물으면 "더 나은 삶을 위해서" 또는 "잘 살기 위해서" 또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서"라고 말한다. 그러나 아무도 더 나은 삶이 무엇인지, 잘 사는 게 무엇인지 묻지 않는다. 철학자나 종교인 같은 정신을 다루는 전문가들이 알아서 할 문제로 넘겨버린다.

현대인은 그들에게 돈을 주고 위안(慰安)을 사면 된다. 슈펭글러가 오늘날의 종교는 위로를 위한 기분 전환용이 됐지만 현대 문명에 필수적이라고 한 것은 아주 적절한 지적이다. 비단 종교에만 국한된 현상이 아니라는 것은 3S(screen, sport, sex 또는 speed)만 떠올려 봐도 알 만큼 더 이상 설명이 필요치 않다.

실제로 사람들은 돈을 더 벌고 스펙을 더 쌓고 교양을 더 넓히고 몸을 더 아름답게 가꾸고 더 잘하기 위해서 불철주야 여념이 없다. 소크라테스에 따르면 '더 잘한다는 것'은 인간이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이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잘'인가?"에서 '무엇'을 신적인 섭리와 확신이라는 형이상학에 넘겨버렸다. 대학에 있는 정신 전문가들은 이 형이상학을 형이하학으로 다루기 위해 사력을 다한다. 그 결과 이들 역시 소크라테스처럼 '잘'로 돌아간다.

대중은 전문가에게 공을 넘기고 전문가는 다시 대중에게 공을 넘긴다. 이 순환은 자본주의체계 속에서 운동하는 상품의 G(화폐)-W(상품)-G′(G+ΔG)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형이상학을 형이상학으로 대하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일종의 사기극이다. 그 결과, 형이상학이 사각지대에 방치됨으로써 일부 거대종교는 사이비종교와 구별하기 힘들 만큼 '사기의 전당'이 돼버렸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바로 이 '형이상학으로부터의 도피'가 정당정치에 의해 완전하게 보장된다는 사실이다. 보자. 정치가들이 모인 국회는 법을 만든다. 법은 사회의 근거다. 정치가 사회의 근거를 만드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이 만든 근거(법)는 무엇에 근거하고 있는가? 국민의 의사에 근거한다. 국민의 의사는 무엇에 근거하는가? 법에 근거한다. 이 순환논법이 자본주의 상품의 G(화폐)-W(상품)-G′(G+ΔG)의 과정과 정확히 일치한다. 이게 날조가 아니면 무엇이 날조인가? 오늘날 국민들에게 정치는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는 형이상학적 욕구를 위한 대용품에 지나지 않는다. 사회의 근거를 만든다는 신화 속에서.

이 신화 속에서 보수는 체계를 유지하는 역할을 하고 진보는 체계를 발전시키는 역할을 한다. 자신들이 사회를 운영하는 '방식'이 좋은 사회를 만드는 최선의 길이라고 주장한다. 좋은 사회의 내용은 모두 각 정당이 추구하는 '방식'으로 환원된다. 그것이 바로 정강 정책이다. 이들의 좋은 사회는 결국 좋은 방식인 것이다. 따라서 좋은 삶의 내용은 어디에서도 담보되지 않는다(이 점은 현대 문명의 비판과 직결되는 것으로, 내가 '잡설'의 연재를 통해 줄곧 제기하는 문제다). 복지국가에서 자살률이 높은 것도 그러한 사실을 반증하는 하나의 예다.

보수는 경쟁과 성장 그리고 상층을 위한 정치를 표방하고, 진보는 연대와 평등 그리고 사회적 약자를 대변하는 정치를 표방한다. 그러나 이들이 하는 정치는 결국 세계자본주의의 두 측면을 대표할 뿐이다. 보수는 경쟁과 이익=행복이라는 기치 아래 체제의 안정을, 진보는 평등과 정의=방식이라는 기치 아래 체제의 변혁을. 이 둘은 자본주의체제가 굴러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두 축인 것이다.

한국의 경우는 진보 세력이 자신들의 이념을 적용할 사회 현실이 혼란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참으로 우스꽝스럽게도 한나라당이 보수를 자임하고 있음으로 해서 진정한 의미의 보수가 진보 이념이 아닌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다. 사회진화론을 배경으로 태어나 사회의 진화를 이념으로 하는 보수주의가 어떻게 역사의 진보를 추구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보수주의야말로 선진국의 이데올로기다. 선진국이라는 게 뭔가? 가장 진보한 국가를 말하지 않는가.

(보수주의의 바이블인 에드먼드 버크(1729~1797)의<프랑스 혁명에 관한 성찰>(한길사 펴냄)을 번역한 이태숙 교수는 <한겨레>와 인터뷰에서 보수주의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보수주의는 근본적으로 선진국 이데올로기예요. 긍정하고 지켜야 할 제도와 가치가 부재했던 신생국 대한민국에서 보수주의가 강세를 보인 것은 기이한 현상입니다. 전쟁의 경험과 북한이라는 외부 위협의 존재에서 그 원인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 한국에서 보수주의가 세력을 유지할 수 있느냐의 여부는 결국 북한의 위협을 계속 설득력 있게 제시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만약 북한의 위협이 약해지거나 사라진다면, 1990년대 미국의 네오콘이 그랬던 것처럼, 새로운 위협 세력을 만들어내야겠지요.")


그런데 우리는 보수가 역사의 진보를 뒷걸음치게 만든다고 생각하고 있다. 바로 이것이 보수를 빙자한 한국의 수구세력이 언어의 장난질을 통해 권력을 잡은 탓에 빚어진 '사회 현실의 혼란'이다. 한국의 진보 세력이 '매국노 집단과 군사 독재 집단'에 뿌리를 둔 세력에게 '보수'란 이름을 갈수록 더 허용하고 있는 것은, 그래서 한국의 정치 지형을 보수와 진보로 정착시키는 것은 가장 결정적인 잘못이다. 이에 관해서는 앞의 글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에서 충분히 살폈으므로 생략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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