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적 진보의 역사적인 출발은 유대-기독교적 시간관이 르네상스기에 그리스·로마의 고전문화를 만나 물질세계까지 장악하기 위해, 즉 이성의 힘으로 사회와 자연을 재-디자인하기 위해 거듭 태어난 '직선의 시간관'에 있다. 다시 태어난 진보는 '천국' 대신 이성에 의해 운영되는 이상적인 사회로서 '유토피아'를 제시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으로 토머스 모어의 <유토피아>를 들 수 있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이상국가를 계승한 것이다. 다른 글에서 따로 다루겠지만, 유토피아는 근대가 역사 속에서 이루려는 진보의 추동력이요 도달하려는 신이었다. 유토피아의 건설은 자유주의, 민주주의, 파시즘, 공산주의, 사회주의, 군사독재 등 현대의 모든 정치 체제에 '보이지 않는 손'으로 작용한다.
체제와 정파에 따라 이념도 다르고 구호도 다르겠지만, 모두 유토피아의 건설을 추구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지 않으면 현대의 어떤 사회도 돌아가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다양한 정치 체제를 창조하고 돌보는 세계 자본주의는 유토피아를 천국으로 하는 종교라 할 수 있다. 이 종교의 이름은 앞서 말한 '역사의 진보'이며, 여기에서는 유토피아(천국/성부)와 이성(성령)과 세계 자본주의(성자)가 삼위일체를 이룬다.
우리의 주제인 '진보'가 영혼도 입도 다 마비시켜 잡아먹어버리는 '전자가오리' 같은 이념이라는 점을 폭로하지 않고선 현대인이 노예 상태에서 풀려날 길이 없다. '전자가오리'는 메논이 소크라테스에게 붙여준 별명인데, 소크라테스가 대화를 할 때 상대를 호리고 현혹하여 난관에 빠뜨리는 주술사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렀다. 그러면 진보가 '전자가오리' 이념임을 보여주기 위해 '진보 이념=소크라테스 방식'이라는 사실을 '직선의 시간관'이 거듭난 것과 관련하여 구체적으로 설명해보자.
사실 진보 이념은 재생한 '소크라테스의 상기론'에 입각해 있다. 여기서 '재생'은 르네상스를 통해 거듭 태어난 것을 뜻하는데, 재생-상기론은 이 '거듭난' 상기론을 말하고 원(原)-상기론은 원래의 소크라테스 상기론이다. 재생-상기론은 신비주의의 형이상학을 걷어치워버렸다.
원-상기론에서 보면, 상기가 일어나는 곳인 '영혼'은 전생에서 왔다. 전생은 원형(圓形)으로 된 시간관의 소산이다. 소크라테스가 메논에게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에 참여하여 입문하기를 권유했고, 플라톤이 신비 의식에 입문했다는 사실로도 원-상기론에서 신비주의 형이상학은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가 사형당한 이유는, 나라가 믿는 신을 믿지 않고 다른 새로운 다이모니온(영적인 것)을 믿은 죄 때문이다. '다이모니온'은 다분히 고대 오리엔트의 냄새를 풍긴다. 소크라테스가 권한 엘레우시스 신비 의식이 '나라의 종교'라는 점에서 모순이 일어나지만 이때(<메논>)까지만 해도 소크라테스가 '나라의 종교'와 공존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나는 다이모니온을 '신의 소리에 응하는'의 뜻이라고 파악한다. 플라톤의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박종현 옮김, 서광사 펴냄) 35쪽 역주 참고. 이렇게 보면 '응하는 자'가 중시되며, 신의 소리를 듣는 '응하는 자의 내면'이 인간의 중심 기관이 된다.
이 내면이 소크라테스가 말하는 혼이다. 혼은 몸과 분리된 존재로, 소크라테스에게 대화는 혼이 혼에게 하는 것이다. 대화에 실려 나가는 말(언어)이 로고스다. 로고스는 혼이 혼에게 하는 말이지 혼이 몸에게 하는 말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말(=로고스)은 이성(의 산물)이다.
소크라테스/플라톤은 오랫동안 외부의 신과 소통하던 주술적인 성격의 '말'을 내면의 혼이 소통하는 이성적(변증적)인 성격으로 바꾸어버렸다. 이런 변화에는 이란(조로아스터교)이나 이집트의 영향이 큰 것으로 보인다.
또 나는 다이모니온이 영지(그노시스)와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고 페르시아에서 온 조로아스터교의 영향이 큰 것으로 생각한다. 다음의 인용을 참고하라.
"플라톤은 소크라테스가 죽은 직후 페르시아로 가서 조로아스터교를 직접 연구하려고 했으나 기원전 386년에 발발한 스파르타와 페르시아 간의 전쟁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세계 종교사>, 존 노스 지음, 윤이흠 옮김, 현음사, 177~178쪽)
그러나 가라타니 고진은 다이모니온이 이집트에서 온 것으로 보는 듯하다.
"플라톤은 분명히 그리스 사상가들 가운데 소수파에 속했다. (…) 그의 신념은 일반적인 그리스 사유의 문맥을 완전히 벗어나서 갑자기 나타났음에 틀림없다. 그것은 그리스의 바깥, 즉 이집트로부터 온 것이 분명하다. 이집트는 영혼의 불멸, 일신교, 계획적으로 통제된 국가라는 개념들이 비롯된 곳이다. 철학자/왕이라는 플라톤적 개념 자체는 이집트로 거슬러 가서 그 흔적을 찾아볼 수 있다." (<은유로서의 건축>, 68쪽.))
니체는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이진우 옮김, 문예출판사 펴냄)에서 "플라톤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시작된다. (…) 그들(플라톤 이후의 철학자들)은 이단 종교의 창립자들이며, 이들이 창립한 이단 종교들은 모두 헬레니즘 문화와 전래된 양식의 통일성에 대항하는 반대 기관들이었다"고 비난한다. 여기서 플라톤은 소크라테스로 봐도 무방하다. 그의 저작이 대부분 소크라테스를 주인공으로 하기 때문이다. 특히 플라톤이 소크라테스에게서 독립해 자신의 사상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메논> 이후다.
소크라테스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다이모니온'은 그리스의 전통적인 '다신교의 신'이 아니라 외국에서 들어온 '일신교의 신'과 관련돼 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소크라테스가 '로고스'를 '다이모니온'과 관련해 인간 '이성'이라는 의미로 처음 사용했다.
ⓒ김용철 |
'상기'는 로고스(이성)를 사용하여 전생에 알았던 것을 떠올리는 것이다. 이성(로고스) 속에서 일어나는 작용 역시 로고스(말)다. 나아가 말(대화)을 통해 확실한 지식을 얻는 것도 로고스다. 상황이 이러하므로, 원-상기론이 재생-상기론으로 거듭 태어나기 위해서는 '전생(前生)'의 시간관인 '원형(圓形)의 시간'을 폐기하고 '직선의 시간'만 확립하면 되었다. 재생-상기론의 핵심도 로고스, 즉 이성(그러나 전생과는 무관한)이기 때문이다.
이를 달성하는 것은 두 가지 점 때문에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나는 로고스가 이미 기독교(스콜라 철학)에서 하느님의 말씀으로, 또 하느님의 아들(성자)로 채용되었다는 점이고, 다른 하나는 그 때문에 사형당했을 만큼 소크라테스가 진리를 추구하는 방식 속에 이미 직선적 시간관의 씨앗이 자라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의 '상기론'이 전생에 심어진 씨앗을 자라게 하는, 즉 배양하는 과정을 앎 자체로 여기므로-따라서 소크라테스에게 앎은 내용이 아닌 과정이요 방식이다-최고의 가치인 덕(훌륭함)을 미래에 획득할 것으로 설계해놓은 것이었다. 덕을 탐구하기 위해 현재를 희생함으로써 더 나은 미래가 기다리고 있다!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대표하는 "덕은 앎이다"라는 유명한 말을 그런 각도에서 다시 음미해보면, 상기론이 재생의 조건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덕은 원어로 aretē(아레테)라고 하는데, 모든 사물의 각 종류에 따른 훌륭하거나 좋은 상태를 말한다. 예를 들면 좋은 눈, 좋은 구두, 훌륭한 농부, 훌륭한 정치가 따위다.
"소크라테스가 든 예를 따라 이해해보도록 하자. 예컨대 훌륭한 제화공은 어떤 사람일까? 그의 훌륭함을 우리는 도대체 어디에서 찾을 것인가? 제화공의 '훌륭한 상태'는 구두에 대한 앎, 그리고 구두를 제대로 만들 줄 아는 것과 관련되어 있으니, 그의 '나쁜 상태'는 이와 반대되는 경우의 것이다. 구두를 제대로 만들 줄 안다는 것은 구두의 기능이 무엇인지를 알 때 가능한 일이다.
따라서 제화공의 '훌륭한 상태'(aretē), 즉 제화공으로서 훌륭함은 구두의 기능에 대한 앎과 그것을 제대로 만들 줄 아는 앎, 즉 기술이 있어야만 되는 일이요, 그 반대의 경우, 즉 그의 '나쁜 상태'는 구두의 기능에 대한 '무지'와 그걸 제대로 만들 줄 모르는 무지에서 비롯되는 당연한 귀결이다." (<에우티프론, 소크라테스의 변론, 크리톤, 파이돈>, 21쪽.)
이처럼 오늘날의 '지식'과 별반 차이가 없는 소크라테스의 '앎'은 끝없는 기능의 개선을 목표로 하는 미래 지향적 과정을 내포하고 있다. 최고의 훌륭함인 덕의 경우에는 획득을 위해 죽을 때까지 아니, 죽은 이후에도 노력해야 한다(전생의 것을 이어받아야 하므로). 이는 로고스=이성=말(논리)을 통해 달성된다. 소크라테스의 로고스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미 '직선의 시간'은 잉태되어 있다. 이렇게 해서 재생-상기론은 힘차게 거듭나는 것이다.
(니체는 이 점과 관련하여 소크라테스의 로고스를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와 비교해 격렬하게 비판한다. <그리스 비극 시대의 철학>, <비극의 탄생> 등 참조. 헬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직선의 시간에 대립되는 원형의 시간, 즉 영원회귀의 시간을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대우주년의 일 년은 1만800 태양년을 주기로 모든 사물이 영원히 회귀한다. 헤라클레이토스의 로고스는 신적이지 소크라테스와 같은 인격적인 정신이 아니며, 내재적인 생성의 법칙(대립 투쟁의 변증법)을 특징으로 한다. <서양철학사>, 요한네스 힐쉬베르거 지음, 강성위 옮김, 이문출판사 펴냄)
재생-상기론의 진보 이념에 입각한 교양과 지식이 상인·장인 등의 신흥 부르주아지가 봉건 귀족에 대항해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될 수 있는 수단이었듯이 원-상기론의 변증법도 소크라테스의 출현과 함께 평민이 귀족에 대항해 상부로 올라서는 수단이었다. 초기에 이들 사회 계급은 모두 이윤에 밝은 거상들이 주도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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