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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성수의 마술 "난 민족주의자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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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일파 김성수의 마술 "난 민족주의자야!"

[김영종의 '잡설'·20]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①

우파의 가면을 쓴 모리배 ①

현 정권은 용산 참사를 이데올로기화해서 색깔론으로 몰아갔다. '나봇의 포도원'에서 봤듯이, 살인 행위를 정당화하고자 하느님을 파는 짓을 한 것이다.

좌파 정권 10년간 떼잡이 문화를 양산해 법과 원칙이 무너진 결과라며, 좌파가 희생자들의 목숨을 정치 공세에까지 이용한다고 강변한다. 용역과 경찰이 합동 작전을 편 결과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드러났는데도 정당한 법 집행이라고 우기면서 말이다. 당시 텔레비전에서 김석기 전 서울경찰청장이 퇴임하는 장면을 보았는데, 공권력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두 뺨에 주르륵 눈물 흘리던 그 모습을 도저히 잊을 수 없다.

이데올로기를 통한 진실의 조작은 비단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사에서 긴긴 역사를 자랑한다. 쉽게 말해서, '도둑이 되레 매를 드는 적반하장'이 이데올로기를 통해 정당화되는 일이 멀리는 상고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니까.

여기서는 아주 가까운 20세기만 돌아보자. <동아일보>를 창간하고 고려대를 세운 김성수는 친일파인데도 민족주의자로서 우익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어 있다. 친일파가 어떻게 민족주의자가 될 수 있는가? 그런데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백주대낮에, 그것도 근 100여 년 동안 전 국민이 보는 가운데 아주 당당하게 행해지고 있는 것이다.

도둑이 주인이 되어 외려 주인을 도둑으로 몰 수 있었던 것은 '언어를 통한 조작'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 조작은 '언어에 대한 인간의 오해'에 기반하고 있다. 20세기 들어 철학계에서 코페르니쿠스적 전회(轉回)를 일으킨 비트겐슈타인은 바로 그 점을 탐구하였다. 그의 사상은 전후기로 갈리는데, 전기를 대표하는 <논리철학논고>에서 '이름의 의미는 그것이 지칭하는 대상'이라고 한 명제를 스스로 뒤엎고, 후기의 <철학적 탐구>에서 '이름과 명명된 사물은 별개이며 전혀 다르다'는 것을 논파하였다.

"한편에는 이름이 있고, 한편에는 명명된 것이 있다. 여기에 나무라는 말이 있고 저기에 실제 나무가 있다. 두 사물은 완전히 다르다. 그래서 그것들을 연결하는 어떤 자연적 관계도 없다. 그럼에도 그것들은 어떻게 해서든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왜냐하면 전자는 후자를 지칭하고 후자의 이름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이 연관성이 이루어지는가? 어떻게 종이 위의 글씨에 불과한 말이 그 자신을 넘어서 그 자신과 전혀 다른 대상과 관련을 맺는가? 그러면 이름과 명명된 것—혹은 간단히 언어와 세계 사이의 이러한 이상한 관계는 무엇인가? 이 질문은 전기와 후기의 비트겐슈타인의 모든 저작을 관통하는 주제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죠지 핏처 지음, 박영식 옮김, 서광사 펴냄)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은 이름의 '의미'는 이름이 나타내는 대상이라고 주장했다. 이때 의미라는 정신적 행위는 대상에 어떤 본질이 숨어 있다는 전제 아래 이루어지므로, 이름(언어)은 대상(세계)의 본질과 필연적으로 관련을 맺는다. 반면 후기의 그는 "의미하는 것을 정신적 행위라고 부르는 것보다 잘못된 일은 없다"고 단호히 말한다. 이름의 의미는 쓰임에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쓰임을 배제한 채 언어를 무균의 실험실에 고립시켜 추상적으로 고찰하였다. 이는 본질을 찾으려는 열망, 즉 '일반성에 대한 열망' 때문이다. ("이 열망이 너무 강해서 우리는 모든 것이 실제로 본질을 갖는다고 가정하게 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철학> 241쪽.)

바로 여기서 철학적 혼동이 일어나고 언어에 대한 오해가 발생한다. 이를 바로잡으려면 말(또는 이름)을 '문맥'과 '실제 상황' 속에서 고찰하지 않으면 안 된다. 실험실을 박차고 나와 삶 속으로 들어가면, 단일성이 아니라 다양성, 즉 말의 다양한 의미가 활기차게 나타난다. 이 다양성, 다양한 쓰임새이야말로 말(또는 이름)이 본질(단일성)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뚜렷한 반증이다. 말들은 오직 쓰임(use) 속에서만 생명을 얻는다. (비트겐슈타인은 말의 의미와 말의 쓰임(use)을 동일시한다. 또한 말의 의미를 마음속에 일어난 무엇으로 보지 않기 때문에, 의미가 정신적 행위로 말미암아 생기는 게 아니라고 주장한다.)

"모든 기호는 혼자서는 죽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무엇이 기호에 생명을 주는가? 사용될 때만 기호는 살아난다." (<철학적 탐구>, 루트비히 비트겐슈타인 지음, 이영철 옮김, 책세상 펴냄)

ⓒ김용철

하지만 우리는 여전히 (전기의 비트겐슈타인처럼) 이름이 어떤 대상의 의미를 가리킨다고 알고 있는데, 이 오해를 없애지 않으면 이데올로기를 통한 진실의 조작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언어에 대한 오해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만약 이름이 실제와 같다면, 눈앞에 있는 이 실제의 의자가 영어로 chair, 중국어로 倚子, 스와힐리어로 kiti 등 왜 이렇게 다양하게 불리는가? 이것은 마치 사물에 이름표를 붙인 것과 같지 않은가? 이름표에 적힌 이름은 의미와 상관없는 기호에 해당하며, a, b, c, d로 표기된 기호보다 더 의미 있는 어떤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름-의자'가 '실제-의자'에 내재한 본질적인 요소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후자가 파괴되어도, 전자는 의미를 잃지 않는다. 우리는 여기서 이름의 소지자와 이름의 의미가 별개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도 여러분이 각각의 이름에 대응하는 본질이 있다고 믿는 한, 플라톤(이데아론이 대표적이다) 이래 수천 년 동안 철학이 저질러온 미혹에서 벗어날 길이 없을뿐더러, 철학이야 어찌 됐건 관심 없다고 도리머리를 쳐도 현실적으로 날마다 부딪치는 것들과 어떤 의미를 교환하며 살 수밖에 없는 마당에야 여러분은 이데올로기의 조작에 놀아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중요한 것은 낱말이 아니라 낱말의 의미라고 한다. 그리고 그때에 의미를 낱말과 다르기는 하지만 낱말과 같은 종류의 사물로서 생각한다. 여기에는 낱말, 여기에는 의미. 돈, 그리고 그것으로 살 수 있는 암소.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 돈, 그리고 돈의 이용.)" (<철학적 탐구>, 120절)

이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쉽게 말해서, 기호에 해당하는 이름표는 사용가치가 아니라 의미를 구입할 수 있는 화폐라는 것이다. 낱말은 돈이고 의미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암소이거나 돈의 이용. 자, 그렇다면 '이름-의자'라는 돈으로 살 수 있는 '의미-의자'는 무엇일까? 의미-의자는 비유컨대 구두일까 염소일까? 나는 실제로 의자의 의미를 의자라는 말이 사용되는 일상 속에서 취득하면서도, 의자의 의미를 곰곰이 또는 철학적으로 생각하자마자 의자의 의미는 단숨에 하찮은 일상을 박차버리고 모든 문맥을 떠난다. 나는 '절대적으로 단순한 것'(사물의 본성 속에 있는 존재론적 신비)을 의미로서 추구하지만 이렇게 해서 발견한 의미는 '환영'에 불과하다. (칸트는 <순수이성비판>에서 철학자의 임무는 오해에서 비롯된 환영을 제거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대부분의 철학자들은 오해를 통해, 특히 언어에 대한 오해를 통해 환영을 만들어왔다.)

이들 곰곰이 또는 철학적으로 생각하는 자들은 기기묘묘한 온갖 환영을 만들어내어 그것이 진정한 의자의 의미라며 판매한다. 판매가 이루어질 때, 의미라는 환영은 시장에서 교환가치의 형태를 띤다. 교환가치는 사용가치에 기반을 두지 않고서는 홀로 존재할 수 없다. 물신(物神)이라는 환영이 사용가치에 빙의되어 시장에서 활동하는 것이 교환가치다. 화폐는 '이름', 사용가치는 '실제-의자', 교환가치는 '의미-의자'에 비유할 수 있다. 시장에서 가격은 교환가치이므로, 이름(=화폐)은 언어시장에서 의미(=교환가치)가 된다. (물신숭배는 인간이 상품을 생산했음에도 불구하고, 상품이 인간과 관계없이 고유한 힘을 가지고 활동하는 것처럼 생각하여 상품 등 인간의 생산물을 숭배하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 물건(=의자=사용가치)을 교환가치로 만드는 환영(물신)은 실제 물건을 정신적인 분위기로 에워싼다. 그리하여 우리는 이름(낱말 또는 문장)의 의미를 물신 숭배한다. 당신이 '이름-의자'(화폐)로 산 '의미-의자'는 구두나 염소, 또는 악마가 앉는 자리이거나 천사가 앉는 자리다. 의미가 실제(사용가치)를 떠나서 당신한테 마술을 걸면 마술에 걸린 당신은 의미에 무릎을 꿇고 복종한다.

이렇게 해서 친일파가 민족주의자로 둔갑한다. 김성수 일파가 자신들이 행한 실제의 사실(친일행위=사용가치)을 환영을 통해 조작해 만든 상품이 '의미-민족주의'인바, 이는 마치 발암 물질로 만든 상품을 항암 제품이라고 선전해 파는 것과 똑같은 반사회적·반윤리적 행위다. 여기서 이중의 질곡이 나타난다. 정상 제품이라 해도 '환영'의 문제가 제기될 터에 반사회적인 제품을 만들어 사업을 해도 처벌은커녕 오히려 존경과 인기를 누리는 '시장'이 한국이라는 것이다. 이 이중의 질곡은 앞서 말한 대로 멀리 삼국시대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이데올로기 조작의 비옥한 토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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