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데이비드 베컴은 16일(한국시간) 자신의 공식 홈페이지를 통해 "파리 생제르맹(PSG)에 감사하다. 선수로의 삶을 조금 더 늘릴 수 있게 해줬다. 하지만 이제 은퇴할 적절한 시점이라 생각한다. 높은 수준의 리그에서 (현역생활을) 마칠 수 있어 기쁘다"라며 은퇴 의사를 밝혔다. 베컴은 "세계 최고의 클럽에서 뛰는 영광을 경험했다. 나라를 대표하는 선수로 100경기 이상 뛰었고 주장까지 경험한 일은 굉장히 자랑스럽다. 판타지 같은 인생이었다"고 회상하며 "꿈 같은 일들을 현실로 이룬 난 행운아다"라고 말했다. ⓒAP=뉴시스 |
그가 프로 무대에 첫발을 내디뎠던 1993년부터 1997년까지 영국 언론에 '데이비드 베컴'이라는 이름은 칭송과 찬양의 대상이었다. 1997년에 발간된 그의 자서전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젊은 스타"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1996년 프리미어리그 개막전 윔블던과의 경기 당시 하프라인 부근에서 성공시킨 그의 골은 "세기의 골"로 평가받았다. 한마디로 당시 데이비드 베컴은 10대 소녀들의 가슴을 뛰게 만드는 스타였고, 10대 소년들에게는 닮고 싶은 영웅이었다.
하지만 1998년 6월 30일 이후, 데이비드 베컴을 둘러싼 모든 것들이 변했다. 이날은 베컴의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날이자, 그의 인생을 드라마틱한 판타지로 만들어 준 시작점이다. 1998년 6월 30일 잉글랜드는 '숙적'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월드컵 16강전을 펼쳤다. 2대 2의 팽팽한 접전 속에서 베컴은 아르헨티나의 미드필더 디에고 시메오네에게 파울을 당해 넘어졌고, 이후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가 주심이 빤히 지켜보는 앞에서 시메오네의 종아리를 걷어찼다. 보복행위를 금지하는 국제축구연맹(FIFA)의 규정에 따라 주심은 베컴에게 레드카드를 꺼냈고, 그는 60초간 주심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퇴장 당했다. 그리고 잉글랜드는 8강 진출에 실패했다.
훗날 베컴은 인터뷰를 통해 당시 상황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시메오네가 넘어져 있던 나의 머리카락을 잡아당겼고, 반사적으로 발을 들어 그의 종아리를 걷어차게 됐다. 보복할 생각으로 한 게 아니라, 어디까지나 순간적인 반응이었다." 퇴장 당시의 느낌에 대해서도 그는 다른 인터뷰에서 "퇴장 선언을 들을 때까지 걸린 60초는 내가 죽을 때까지 잊지 못할 시간이다. 경기장을 걸어 나오던 그 순간 온 몸이 갈기갈기 찢기는 느낌이었다"고 전했다.
하지만, 잉글랜드 축구팬과 언론에 이런 베컴의 해명과 느낌은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이미 잉글랜드의 역적이었다. 패배 원인을 제공한 선수를 인정사정없이 뭉개버리기로 유명한 잉글랜드 언론은 베컴을 패배의 제물이자 희생양으로 선택했다. 그리고 타블로이드 신문을 중심으로 베컴의 공개처형이 시작됐다.
타블로이드 신문들은 베컴을 가리켜 "10명의 영웅들과 1명의 얼간이", "아르헨티나의 영혼을 가진 잉글랜드인" 등과 같은 혹평을 쏟아냈고, 이런 혹평은 팬들의 분노와 적대감을 부추겼다. 그 결과, 베컴의 말처럼 가족과 퍼거슨 감독을 제외한 모든 사람이 자신을 향해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베컴은 경기 시작 전부터 경기가 끝난 뒤까지 팬들의 야유와 욕설을 듣는 유일무이한 선수가 됐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길을 가다가도 욕먹는 인물이 되었다.(<GQ>, UK, 1999년 5월호)
"데이비드 베컴은 축구선수 가운데 가장 잘생겼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뛰고 있고, 스파이스 걸스의 빅토리아 애덤스와 사귄다. 이 모든 것들은 하나같이 다 교수형감이다."
영국의 인기 주간지 <타임아웃>이 1999년 3월 31일에 묘사한 베컴에 대한 분노와 증오의 이유를 설명한 글이다. 하지만 베컴은 대중과 타블로이드의 교수형에 처해지지 않고, 다시 살아나 복권되었다.
1998/99 시즌 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가 잉글랜드 클럽 역사상 최초로 리그 우승, FA컵, UEFA챔피언스리그 우승컵을 차지하는 전대미문의 트레블을 이룩하자,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팬들과 타블로이드지는 그 중심에 오른쪽 미드필더 데이비드 베컴이 있었다는 사실을 강조하며 베컴의 '복권'을 논하기 시작했다. 이후 1999년 7월에 거행된 데이비드 베컴과 빅토리아 애덤스의 결혼식을 전후해 타블로이드지들은 더 이상 베컴을 '얼간이', '역적'으로 부르지 않았다. 대신 이 커플을 '벡스와 포시'라고 부르며, 연일 이들의 결혼과 관련한 기사를 쏟아내기 바빴다. 그리고 그 기사의 대부분은 그들의 로맨스와 화려함에 대한 찬양 일색으로 채워졌다. 오죽했으면 <가디언>이 이를 가리켜 "이 나라가 얼마나 천박해졌으며, 얼마나 물욕을 경배하고 찬양하는지를 확인시켜주는 것"이라고 꼬집을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타블로이드 기사 덕분에 베컴은 '얼간이'에서 '세기의 로맨티스트'로 탈바꿈했다. 그는 타블로이드와 영국 대중에게 '부활한 스타'로 불리며 복권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대표선수' 데이비드 베컴은 여전히 복권되지 못했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제외한 대다수 잉글랜드 축구팬은 여전히 베컴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봤고, 축구 전문 기자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2001년 10월 6일은 데이비드 베컴이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만 같았던 1998년 프랑스월드컵의 악몽에서 완전히 빠져나올 수 있었던 날이다. 올드 트래포드에서 잉글랜드와 그리스의 2002년 한일월드컵 유럽지역 예선 마지막 경기가 열렸던 이날, 데이비드 베컴은 잉글랜드를 구한 '영웅'이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는 그리스전에서 패한다면 조 2위로 떨어져 지옥의 플레이오프를 치러야 했는데, 90분이 다 가도록 1대2로 뒤지면서 절망적인 상황에 놓여있었다. 경기 종료 직전 베컴에게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왔다. 베컴은 상대 골문 37m 지점에서 얻어낸 잉글랜드의 마지막 프리킥을 찼는데, 그의 오른발을 떠난 공은 스핀이 걸려 믿을 수 없을 만큼 아름다운 호를 그리며 골로 연결됐다. 그 순간, 경기장에 모인 모든 잉글랜드 팬들은 기립해 환호했고, 잉글랜드는 2002 한일월드컵 본선 무대에 나서게 됐다.
"불가능, 그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Impossible is nothing)"로 유명한 TV 광고에서 베컴이 스스로 말했듯이, 이 골은 자신을 비난해 왔던 기자들마저 박수를 보낸 골이었고 동시에 3년간의 비난을 찬사로 바꿔놓은 골이었다. 베컴이 스스로 인정하듯, 그는 모든 잉글랜드 국민과 언론이 기립박수를 보내던 그 순간 끝이 보이지 않던 좌절의 터널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이 골 장면이 아직까지 데이비드 베컴의 대표적인 골 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는 것 역시 이런 개인적 히스토리와 무관하지 않다.
우리는 흔히 "인간은 누구나 완벽하지 않다. 고로 우리는 누구나 실수를 하고, 실수를 거듭하며 성장한다"고 말한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는 말뿐이다. 실수를 하게 되면 누군가에게 그 실수를 지적당하고, 질책당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프로라면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엄격함이 요구된다"고 말하며 그 비판과 질책을 정당화시키고, 이 과정에서 가끔은 흔히 일어날 수 있는 실수조차도 실수가 아니라, '죽을 죄'가 되는 일이 생긴다. 98년의 베컴처럼 말이다.
이것이 우리가 실수를 두려워하는 진짜 이유다. 우리가 실수를 두려워하는 이유는 실수 그 자체가 아니다. 오히려 실수로 인해 나에게 쏟아질 비난과 질책이 겁난다. 때문에 우리는 "실수를 두려워 말고 계속 도전하라"는 말을 머리로만 이해할 뿐이다. 그리고 한번 실수로 일을 망치면 죄책감과 좌절감에 휩싸여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실수로 인해 죄책감과 좌절감에 사로잡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데이비드 베컴의 삶의 궤적에서 그 해답을 찾자면, "누군가 자신의 손을 잡아줘야 한다"가 정답이다.
베컴은 자신이 98년의 실수와 악몽을 이겨내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원동력으로 퍼거슨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서포터들을 꼽는다. 98년 사건 이후 베컴은 자신에게 쏟아지는 비난과 질책에 힘들어 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떠나려고 했다. 하지만, 엄격함에 있어서 세계 제일이라고 할 수 있는 알렉스 퍼거슨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은 베컴을 '감정적으로 아직 연약한 23살짜리 선수'라고 평가하며, 실수를 실수로 받아들이라고 주문했다. 그리고 온 세상이 베컴을 향해 비난의 칼날을 던질 때에도 그를 비난하지 않고 보호해 줬다. 덕분에 베컴은 올드 트래포드에서 이를 악물고 패스하고, 프리킥을 날리며 계속해서 싸울 수 있었다. 서포터들은 그의 패스와 프리킥이 성공할 때마다 큰소리로 응원을 보냈다. 그 결과 베컴은 자신을 옥죄이던 비난과 악몽에서 조금씩 벗어날 수 있게 됐다.
"98년 퇴장 사건 이후, 마음이 너무 아프고 괴로웠지만, 나를 지지해주는 클럽에 몸담고 있다는 것과 서포터들의 박수를 받고 있다는 사실은 나에게 세상 모든 것을 의미했다"는 베컴의 말처럼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서포터들은 그가 가진 전부였다. 그리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서포터들이 보여준 베컴에 대한 지지는 1년이 채 지나지 않아 그들에게 커다란 보상으로 되돌아왔다. 1999년 UEFA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에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바이에른 뮌헨에 후반 45분이 지날 때까지 0대 1로 지고 있었다. 하지만 3분의 추가시간이 주어졌고, 그 시간 동안 베컴은 2번의 코너킥을 찼다. 그리고 그 2번의 코너킥은 모두 골로 연결되면서 2대 1 극적인 승리로 이어졌다. 이후 "베컴의 오른발이 없었더라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트레블도 없었을 것"이라는 평가와 칭송이 쏟아졌다. 한마디로 퍼거슨 감독과 서포터들은 베컴을 붙잡아주고 응원해준 덕분에 잉글랜드 클럽 역사상 최초로 트레블의 영광을 누릴 수 있게 된 것이다.
베컴이 은퇴를 선언한 오늘(한국시간 16일), 잉글랜드 언론은 그를 가리켜 "1998년 월드컵 이후의 온갖 수모를 다 이겨내고, 세계적으로 가장 존경받는 축구인 중 한 명이 되었다"고 평가한다.
만약 당신이 지금 실수로 인해 넘어져 힘들거나 혹은 실수할까봐 두렵다면, 데이비드 베컴을 떠올리며 '슈팅 라이크 베컴'을 중얼거려 보기 바란다. 또 만약 당신이 지금 동료의 실수를 보게 된다면, 질책과 비난을 퍼붓기에 앞서 데이비드 베컴과 맨유의 트레블을 떠올려 보기 바란다. 결코 다시 일어설 수 없는 사람은 세상에 없고, 칭찬과 격려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 또한 세상에 없으니까 말이다.
스포츠평론가 이종훈은… '무한경쟁과 승리의 스포츠'보다는 '힐링의 스포츠', '내가 응원하는 스포츠'보다는 '나를 응원해주는 스포츠'에 관심이 더 많은 자칭 비주류 스포츠평론가이다. 현재 MBC 라디오 <왕상한의 세계는 우리는>과 팟캐스트 <공짜 가라사대, 오빠가 쏜다!> 등에 고정 출연하고 있다. ★ 위의 글은 <공짜 가라사대, 오빠가 쏜다!>의 코너인 [멘붕 스포츠]를 기사로 옮긴 것입니다. <공짜 가라사대>는 여행, 레저, 문화, 예술 등 다양한 분야의 상품을 공짜로 나눠주는 팟캐스트입니다. ☞ 팟캐스트 바로 듣기 http://podbbang.com/ch/5783 ☞ '공짜 가라사대' 온라인 카페 http://cafe.naver.com/freecast |
전체댓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