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대한민국의 모두가 처해있는 진정한 비극의 상황은 가진 자들의 도덕적 타락과 저급한 폭력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대한민국을 뒤덮고 있는 거대한 폭력의 사소한 돌출이며, 더 심각하고 더 치명적인 폭력을 은폐하는 눈속임일 뿐이다. 청와대 대변인의 저열한 폭력 뒤에 GM의 통상임금 개입과 한미 FTA 강행이라는 더 큰 폭력이 가려져 있듯이 말이다.
▲지난 1월 당선인 시절의 박근혜 대통령과 윤창중 전 대변인. 박근혜 대통령은 방미 기간 중 댄 애커슨 GM 회장을 만나 "통상임금 문제를 합리적으로 해결하겠다"고 말해 논란을 낳았고, 윤창중 전 대변인은 '성추행 사건'으로 물의를 빚어 결국 대변인직에서 경질됐다. ⓒ뉴시스 |
보이지 않는 폭력은 보이는 폭력보다 더 교활하고 잔인하다. 그것은 분노도 저항도 없는 희생을 부르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의 자살이 그렇다. 하루에 45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30분 간격으로 죽음의 행렬을 잇고 있지만, 이 가공할 폭력 앞에 우리는 모두 무력한 희생자로, 방관자로 서 있다. 악을 쓰고 저항하고, 분노와 비난을 퍼부을 가해자도 없이.
한 사회의 자살률은 그 사회가 발 딛고 서 있는 폭력의 빙산이 얼마나 거대하고 심각한지를 보여주는 눈금자다. 흔히 자살의 원인으로 지목되는 우울증은 사실 자살의 진짜 이유가 아니다. 뇌와 우울증에 대한 신화는 전도되어 있는데, 뇌의 이상이 우울증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우울하기 때문에 뇌에 이상이 생긴다. 보이는 폭력은 분노와 저항을 부르지만 보이지 않는 폭력은 절망과 우울을 부른다. 그렇다. 얼굴 없는 살인자의 연쇄 살인극, 이것이 바로 대한민국 자살 행진의 진짜 이름이며 대한민국이 마주한 폭력의 그림자다.
얼굴 없는 폭력, 그 거대한 질서
1950년대 사회심리학자 솔로몬 애쉬(Solomon Acsh)는 폭력의 당사자가 없는 폭력의 사례를 연구했다. '동조 실험'이라고 불리는 그의 실험에는 한 명의 진짜 피험자와 여러 명의 가짜 피험자들이 참여한다. 실험은 여러 개의 선분 중 표본과 길이가 같은 선분을 고르는 간단한 과제였는데, 가짜 피험자들이 차례 차례에 질문에 답을 하고 나면 진짜 피험자가 마지막에 답을 하도록 순서가 정해져 있었다. 이제 실험이 시작되고, 가짜 피험자들은 모두 하나같이 엉터리 답을 보고한다. 즉 누가 봐도 길이가 다른 선분을 모두 하나 같이 같다고 보고하는 것이다. 자신의 차례가 되면, 진짜 피험자는 자신의 눈을 믿어야 할 지 다른 사람들의 판단을 믿어야 할지를 고민하게 된다. 내 눈으로 직접 보고 확인한 이상 내 눈을 믿는 것이 정상이지만, 피험자는 실험이 진행될수록 내 눈이 아닌 타인의 판단을 따르게 된다. 그리고 어느새 내 눈의 증거를 믿을 수 없게 된다.
이런 사회적 압력에의 굴복은 상황이 애매할수록, 주변에 사람이 많을수록 더 자동적이고 무의식적으로 일어난다. 사회적 폭력이 제한된 소규모의 집단에서 일어날 경우에는 폭력의 가해자들이 쉽게 지목될 수 있다. 집단 따돌림에 의한 자살의 경우가 그렇다. 하지만 인터넷과 같이 열린 광장에서 익명의 다수에 의해 행해지는 압력은 사람의 손을 떠난 거대한 사회적 질서를 형성하게 되고, 이것은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상식이라는 이름으로 둔갑하여 폭력을 휘두른다. 바로 이때 진정한 의미의 얼굴 없는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 대한민국의 정치지형에서 발생하고 있는 국정원 댓글 공작과 종북 여론 몰이는 바로 얼굴 없는 폭력 뒤에는 사실 이 폭력을 계획하고 주도하는 진짜 얼굴들이 있음을 웅변으로 보여준다. 마녀사냥의 집단적이고 상징적인 폭력이 가져오는 결과가 얼마나 크고 무서운지는 나치의 유대인 학살에서 확인되었다. 2차 세계 대전 당시 '피도 눈물도 없는 고리대금업자', '가난하고 속물적인 유대인'의 초상은 나치의 상징조작에 의해 만들어진 마녀의 초상이었다. 사르트르는 그의 '반유대주의와 유대인'에서 지구상에 유대인이 단 한 사람도 존재하지 않는다 해도 반유대주의는 유대인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낼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대한민국에 종북세력이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더라도 '극우반공주의'는 종북세력을 창조하거나 만들어 낼 것이다.
얼굴 없는 폭력의 평범한 악인
1961년 사회심리학자 스텐리 밀그램(Stanley Milgram)은 인간 본성에 대한 기념비적 연구를 수행한다. '맹종 실험'으로 알려진 이 실험에서 밀그램은 '처벌에 의한 학습 효과'를 측정한다고 광고하여 피험자들을 모집한다. 피험자들은 각각 선생과 학생 역할을 하고 학생이 정답을 맞히지 못하면 선생은 전기 충격을 주어 처벌을 하는 것이다. 이 실험에서 학생 역할의 피험자는 가짜 피험자였고 전기충격 장치도 가짜였다. 실험의 진짜 목적은 선생 역할을 맡은 피험자가 얼마나 높은 수위까지 전기충격을 주는지를 확인하는 것이었다. 결과는 놀랍게도 학생의 처절한 비명 소리와 양심의 가책에도 불구하고, 선생 역할의 피험자는 위험 수준에 달하는 마지막 수위까지 전기충격을 주었다.
이 실험의 결과는 평범한 사람들이 특정한 상황에서 아주 끔찍한 폭행의 하수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현상은 바로 한나 아렌트가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의 재판을 참관하고 쓴 보고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악의 평범성'이라고 묘사했던 현상이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집단 학살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었던 인물이다. 하지만 재판과정에서 그는 "나는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으며 단지 명령을 수행했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아렌트는 이 전형적으로 성실하고 평범한 독일인은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는지에 대한 아무런 생각이 없었으며, 그 놀라운 '사유능력의 부재'가 바로 유대인 학살이라는 끔찍한 폭력의 진짜 범인이라고 주장했다.
밀그램의 실험과 아렌트의 보고서는 인간은 스스로 인정한 권위와 규범에 거의 맹목적으로 복종하며, 이때 평범한 사람들이 적극적인 동조자로 참여하는 체제의 폭력이 발생함을 보여주었다. 거대한 불개미 떼의 집단적 힘과 같은 가공할 체제의 폭력은 우두머리의 지시에 의해서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성찰하지 않음'이라는 치명적인 악덕에 의해 일어나는 것이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얼마 전 일어났던 백화점 여직원의 자살과 남양유업 영업사원의 폭언을 떠올리게 된다. 백화점 매니저로부터 판매실적을 강요받으며 스트레스에 시달리던 여직원은 '그만 좀 괴롭혀요'라는 문자를 남기고 자살했다. 남양유업 영업사원들은 족벌 경영의 밀어붙이기식 전략에 '생각 없는' 협력자가 되어 대리점 주인들을 과도하게 괴롭혀 왔다. 스스로 경쟁과 생존의 압력에 시달리며, 성실하고 유능한 직장인이고자 노력했을 매니저와 영업사원은 거대한 폭력의 질서 속에 잔혹한 가해자의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 9일 오전 서울 중구 브라운스톤 LW컨벤션센터에서 남양유업 김웅 대표(오른쪽 네 번째) 등 임직원들이 '영업 직원 막말 음성 파일'로 불거진 강압적 영업 행위에 대한 사과의 뜻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연합뉴스 |
얼굴 없는 폭력의 방관자
대한민국 시장질서의 위계에 촘촘히 산재한 폭력이 얼마나 끔찍한 결과를 불러왔는지 다시 한 번 상기해볼 필요가 있다. 한때 화려한 도시 문화의 대명사로 등장했던 편의점 점주들이 부당한 가맹 계약에 줄줄이 자살을 하고, 동네 골목까지 밀고 들어온 대형 마트가 동네 상권을 파괴하고, 생계의 벼랑에 몰린 영세 자영업자들이 가족과 함께 동반 자살을 감행한 것이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다.
1990년부터 2011년까지 불과 20년 사이에 대한민국의 자살자 수는 4배 이상 증가했다. 중소상인들의 대형마트 영업규제 요구도 '소비자의 선택'이라는 시장논리와 부패한 권력의 편들기로 흐지부지되고, 이제 대한민국의 시장 위계에는 재벌과 소비자만 남을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가랑비에도 옷이 젖고 낙숫물도 댓돌을 뚫는데, 탱크처럼 밀려오는 시장의 폭력에 중소기업이든 중소 상인이든 악을 쓰고 버틸 체력은 더 이상 남아 있지 않다.
세계 2차대전의 나치 정권 하에 살았던 마틴 니뮐러(Martin Niemöller)는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라는 제목의 시에서, "나치가 공산주의자들을 덮쳤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다.//다음에 그들이 사회민주당원들을 가두었을 때/나는 침묵했다/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었다.//다음에 그들이 노동조합원들을 덮쳤을 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었다.//다음에 그들이 유대인들에게 왔을 때/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나는 유대인이 아니었다.//그들이 나에게 닥쳤을 때는/나를 위해 말해 줄 이들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고 노래했다.
이 시에 나치 대신 '시장'을, 공산주의자 대신 '비정규직 노동자'를 사회주의자 대신 '영세상인'을, 유대인 대신 '재래시장'을 집어넣어 다시 읽어보라. 정확히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다. 폭력의 마지막 순간 '소비자'라는 이름으로 물러서있던 '나'만 남게 될 것이며, 결국 최후의 희생자로 사라질 것이다. 아무도 방관자로만 살아갈 수 없다!
불복종의 선언과 '얼굴'의 회복
시몬느 베이유는 "폭력은 폭력의 피해자를 살아 있는 존재에서 사물로 바꾸어버린다"고 말했다. 폭력의 진짜 목적은 가해자의 쾌락도 피해자의 고통도 아니다. 오히려 쾌락과 고통은 인간의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살아있는 존재를 폭력의 도구로, 폭력의 대상으로 바꾸어 분노도 저항도 의지도 성찰도 없는 사물로, 얼굴 없는 존재로 만들어 버리는 것이 바로 폭력의 진짜 목적이다.
저마다의 생각과 감정을 가진 살아 있는 개인들이 자신의 생각을 믿지 못하고 자신의 행동의 결과를 고민하지 않게 될 때, 그리하여 각자가 체제의 부속품이 되고, 도구가 되고, 상품이 되어 고유한 인간성을 상실할 때, 국가와 시장은 '얼굴 없는 폭력의 질서'가 된다. 체제의 폭력을 유지하는 것은 권력도 자본도 소수의 지배자도 아니다. 그것은 개인들의 잃어버린 '얼굴'이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그 사람의 의지와 생각, 감정, 그리고 영혼이 담겨 있다. 비트겐슈타인은 '인간의 몸은 인간 영혼의 최고의 그림'이며, '얼굴은 몸의 영혼'이라고 말했으며, 레비나스는 인간은 타인의 얼굴에서 윤리적 책임과 만난다고 말했다. 체제 속의 개인들이 각각의 '얼굴'을 잃고, 평범한 악인으로 이기적인 방관자로 절망적인 패배자로 굴종할 때 폭력은 스스로를 유지하고 증식한다. 모든 '얼굴 없는 폭력'의 실체는 '얼굴'을 잃어버린 개인들인 것이다.
체제와 시장의 거대한 폭력 앞에 선 대한민국이 스스로를 구원하는 유일한 길은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잃어버린 자신의 '얼굴'을 찾고 폭력 앞에 '불복종의 선언'을 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스로의 눈으로 보고, 스스로의 머리로 판단하고,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둘러싼 이웃들과 '얼굴'을 마주하는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상품이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생각 없는 관리자가 되기를 거부하고, 스스로 이기적인 소비자가 되기를 거부할 때, 그리하여 주체적이고 윤리적인 얼굴을 가진 존재로 '인간선언'-어쩌면 '바보선언'-을 할 때 비로소 거대한 폭력의 힘은 사라질 것이다.
이러한 '불복종의 선언'은 아마도 아주 사소하고 바보스러운, 하지만 지혜롭고 용기있는 윤리적 행동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영리한 적을 이기는 길은 더 영리해지는 것이 아니라 영리함의 논리 자체를 붕괴시키는 것이며, 시장을 이기는 길은 '이윤과 효율의 논리'를 붕괴시키는 것이다. 미국산 오렌지 30개를 1만 원에 파는 대형마트를 지나쳐 과일 노점상에서 참외 7개와 할머니의 환한 미소를 곁들여 사는 지혜, 우동 한 그릇이 가져다준 행복을 배고픈 이웃과 나누려 우동 한 그릇 값을 미리 맡겨두고 나오는 기쁨(이태리 나폴리의 전통에서 시작된 '맡겨두는 커피(Suspended Coffee)'는 지불 능력이 모자라는 이웃을 위해 형편이 나은 이웃이 미리 계산하고 커피를 맡겨두는 나눔의 소비 방식이다. 현재 한국에서도 여러 업종의 가게들이 동참하는 '미리 내는' 소비가 생겨나고 있다. 시장은 돈이 아니라 사람을 위해 존재한다는 것을 몸의 성실함과 마음의 환희로 보여주는 용기(예, 봉구스 밥버거), 이런 사소한 불복종의 실천들이야말로 거대한 폭력에서 나와 나의 이웃을 구하는 유일한 촛불이며 짱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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