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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의 비밀' 말해줄 유적 대거 발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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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건국의 비밀' 말해줄 유적 대거 발굴

고속철 구간 경주 덕천리…고분만 235기, 제철ㆍ청동기 유적도

경부고속철도 구간에 포함된 경북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유적에서 왕국 신라가 태동한 비밀을 풀 수도 있는 사로국 시대의 대규모 유적이 확인됐다.

24일 현재 확인된 사로국 시대 고분만도 목관묘 11기, 목곽묘 122기, 옹관묘 65기, 토광묘 2기에 이른다. 아울러 말과 호랑이 모습을 본뜬 청동제 혁대 버클인 마형대구(馬形帶鉤)와 호형대구(虎形帶鉤) 각각 1점, 오리모양 토기(鴨形土器) 등의 유물 2000여 점이 출토됐다.

한국철도시설공단이 발주한 덕천리 유적을 2004년 6월18일 이후 발굴 중인 영남문화재연구원(원장 이백규)은 고속철 구간에 포함된 이 일대 3만5320㎡를 조사한 결과 이 외에도 주거지를 비롯한 청동기시대 유적 29기, 삼국시대 이후 도로 유적 등 총 300기에 이르는 유적과 2347점에 이르는 유물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성과가 쏟아짐에 따라 조사단은 "고속철도 건설로 인해 (유적의) 훼손이 불가피한 상황이나 중요 유적의 확인으로 일부 유적 범위 및 중요 유구에 대한 보존방안을 재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덧붙였다.
▲ ⓒ연합뉴스

이에 따라 덕천리 유적 일대 고속철 구간 공사는 타격이 불가피할 전망이다.

조사단은 "덕천리 유적이 원삼국시대(초기삼국시대) 대규모 분묘군임이 확인됨으로써 이 유적이 초기신라 사로국의 모체가 되는 새로운 집단으로 파악되며, 이를 통해 1-3세기대의 초기신라 형성과정과 문화상을 이해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평가했다.

특히 "다수의 오리모양 토기와 마형대구·호형대구는 피장자의 신분을 과시하는 위세품(威勢品)으로 이를 통해 덕천리 유적의 정치적 지위를 파악하는 단서가 된다"고 덧붙였다.

서기 1세기 무렵 마형대구와 호형대구는 영천 어은동 유적 출토품과 경주 사라리 130호 목관묘 출토품과 각각 흡사한 것으로 평가된다. 이들 대구는 125호와 127호 목관묘에서 각각 확인됐다.

덕천리 유적 출토 오리형토기 수량은 지금까지 발굴을 통해 알려진 같은 유물보다 많을 것으로 짐작된다. 종래 오리형토기는 울산 대곡리 유적, 울산 중산리 유적과 하대 유적, 포항 옥성리 유적 등 경주 주변 지역에서 출토 사례가 있으며, 가야문화권인 김해 대성동 유적 출토품도 있다.

11기 중 4기가 조사 완료된 목관묘 가운데 130호묘에서는 철모 2점, 철겸 2점, 무경식 철촉 2점, 판상철부 1점이 각각 출토됐다.
덕천리 유적과 돌산 고허촌과 소벌도리

경부고속철 구간에 포함된 경주 덕천리 유적은 신라가 태동하던 이른바 사로국 시대의 유적이라는 점이 관심을 끈다.

신라는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기원전 57년, 천상(天上)에서 강림한 박혁거세가 건국했다고 한다. 이에 의하면 혁거세는 지금의 경주지역 산곡간(山谷間)에 할거하던 사로 6촌(斯盧六村)의 우두머리들인 6촌장(村長)들에게 옹립되어 신라를 세우고 초대 왕이 되었다.

혁거세를 추대한 6촌과 각 촌장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신라 건국신화 부분에 실명이 모두 공개되고 있다. 이를 종합하면 첫째가 알천(閼川) 양산촌(楊山村)이고, 둘째가 돌산(突山) 고허촌(高墟村), 셋째는 취산(嘴山) 진지촌(珍支村), 넷째가 무산(茂山) 대수촌(大樹村), 다섯째는 금산(金山) 가리촌(加利村), 여섯째가 명활산(明活山) 고야촌(高耶村)이다.

이들 6촌은 나중에 부(部)로 바뀌게 된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혁거세 건국기에서는 사로 6촌이 발전한 6부를 '진한 6부'(辰韓六部)라 부르고 있다. 6부 이름 또한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모두 전하는데, 미세한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대략은 일치한다.

기록에 의하면 돌산 고허촌은 촌장이 소벌(蘇伐) 혹은 소벌도리(蘇伐都利)였다. 6촌장 중에서도 이 소벌도리는 혁거세 옹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즉, 고허촌장 소벌도리가 어느 날 양산 기슭을 바라보다가 나정(蘿井) 옆에서 아이를 발견하니 그가 바로 혁거세였다는 것이다.

삼국유사는 이에 더해 소벌도리 또한 형산(兄山)으로 강림했다고 덧붙인다. 형산이란 서형산(西兄山), 선도산(仙桃山)이라고도 부르는 산으로, 중국 황실의 딸인 혁거세 어머니가 중국을 떠나 정착한 곳이며, 김유신의 큰누이 동생 보희(寶姬)가 방뇨하는 꿈을 꾼 장소로도 유명하다.

이 기록들이 비록 신화 혹은 전설이라는 성격을 벗어버리기 힘들지만 돌산 고허촌이란 곳이 사로 6촌 중에서도 사실상 신라의 탄생지라는 흔적을 가장 농후하게 남기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이런 돌산 고허촌은 나중에 부(部)로 바뀌어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는데, 사량부(沙梁部)가 그것이다. 이 사량부를 무대로 저명한 족적을 남긴 신라사의 인물로는 신라말기의 대학자 최치원이 있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서는 김유신 집안이 대대로 정착해 생활한 곳도 이곳이다.

김유신은 6부 중 어느 곳 출신인지 기록이 없으나, 그의 조부인 김무력(金武力)이 사량부 출신이라는 사실이 신라 진흥왕 시대 몇몇 금석문에 보이는 데다, 무력의 고손자이자, 김유신의 조카인 김반굴(金盤屈) 또한 사량부 출신이라는 사실이 확인된다는 점에서 사량부 출신임이 확실하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사량부는 고려 건국 직후에는 남산부(南山部)가 되었다. 즉, 사량부는 돌산 고허촌을 모태로 해서 사로 6촌 중 하나가 되었다가 고려시대에는 남산부로 바뀐 셈이 된다.

이 사량부, 나아가 돌산 고허촌이 정확히 어떤 곳인지는 논란이 없지 않으나, 최근 1-4세기 대규모 고분군이 발견된 경주시 내남면 덕천리 일대를 포함했다는 데는 학계에서 이견이 거의 없다.

신라사 전공인 이근직 경주대 강사는 "덕천리 유적 발굴성과를 존중한다면, 이들 유적을 남긴 주인공은 돌산 고허촌 혹은 사량부 세력으로 보아야 할 것"이라면서 "다만, 이 덕천리 유적 일대가 돌산 고허촌의 중심지였는지에 대해서는 판단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지금까지 돌산 고허촌, 나아가 사량부 중심지는 박혁거세 탄강 전설이 어린 나정 일대를 지목하는 연구자가 많았다.

하지만 나정은 물론 덕천리 유적 등의 고고학 발굴이 활발해짐에 따라 조만간 그 중심지, 나아가 지금까지는 미궁에 빠진 사로 6촌의 실체를 상당히 밝혀 나갈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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