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년 김정은 체제 공식 출범에 맞춰 북한은 미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4.13일 장거리 로켓 발사를 강행했다. 북한은 12.12일 은하 3호 발사를 재강행했고 미국과 국제사회는 안보리 제재 결의안 통과로 응수했다. 북미 협상 국면은 사라지고 2013년은 시작부터 강경 대결 국면이 지속되었다. 북한은 급기야 3차 핵실험을 진행했고 한반도는 최대의 군사적 긴장 고조와 전쟁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이 지속되었다.
마침내 북한은 김정은 체제 출범 1주년을 맞아 당중앙위 전원회의를 개최하고 '경제건설과 핵무장의 병진노선'을 채택하고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곧이어 열린 최고인민회의에서 핵보유를 정당화하는 대내적 입법조치마저 단행했다. 비핵화 협상을 전제로 안전보장을 담보 받고자 했던 기존의 대미 핵전략이 이제는 '세계의 비핵화' 이전에는 비핵화 협상 불가라는 사실상의 핵보유 장기화 전략으로 바뀌게 된 것이다.
▲ 지난 3월 31일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주재하는 김정은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조선중앙통신=연합뉴스 |
미국과의 협상을 통한 체제인정과 안전보장의 카드로서 핵문제를 접근했던 것과 달리 이제 김정은 시대 북한의 대미 전략은 핵보유를 기정사실화하고 핵무력을 최대로 늘려나감으로써 협상을 통한 안전보장 획득이 아니라 핵무기 보유를 통해 미국으로부터 안보를 확보하겠다는 이른바 '선 확산, 후 협상' 전략으로 바뀌게 된 셈이다.
북한의 대미 핵전략의 본질적 전환은 2012년 4월 개정헌법에 '핵보유국'을 공식적으로 명시한 데서도 예상할 수 있었다. 핵문제에 대한 기존 북한의 입장은 에너지 확보용으로 경수로 발전소를 제공받거나 대미 안보용으로 자위적 억제력 수준이었다면 헌법상 핵보유국이라는 선언과 이른바 김정일의 3대 혁명유산으로 '핵과 인공위성'을 꼽고 있음은 이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과 자존심의 상징으로 핵무기가 격상되었음을 의미한다.
당국가인 북이 당의 총노선으로 경제건설과 핵무력의 병진노선을 공식 선언한 것은 핵폐기라는 기존의 협상카드를 스스로 거둬들인 것이다. '한반도 비핵화가 김일성의 유훈'이라는 입장에 따라 지금까지 북은 협상장에서 줄곧 핵포기를 약속하면서 자신의 요구사항을 얻으려 했다. 그러나 이젠 핵무력 건설노선을 당의 공식방침으로 확인한 이상, 협상장에서도 핵포기는 불가능한 것이 되고 말았다. 쉽게 포기하기 어려운, 그만큼 쉽게 해결하기 어려운 국면으로 본질적 전환을 시도하고 있는 것이다.
북이 대미 극한 대결을 선택한 배경에는 김정은 체제 이후 북한의 대외전략 변화가 자리 잡고 있다. 1990년대 사회주의 진영이 붕괴하면서 북한은 탈냉전의 객관적 정세변화에 맞춰 안보(security)라는 국가이익은 미국으로부터, 번영(prosperity)이라는 국가이익은 한국으로부터 얻고자 했고 지난 20여 년의 북미관계와 남북관계는 그같은 북한의 대외전략이 추진되고 작동되는 전개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그러나 미국에게 체제인정과 안전보장을 담보 받고 한국에게 경제협력과 경제적 지원을 보장받으려는 북한의 대외전략은 지난 20여 년 동안 사실상 성공하지 못했다. 주기적인 선거에 의해 정부가 교체되는 미국과 한국으로부터 북이 안전보장과 경제지원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는 구조적으로 어려웠다. 대미 대남관계의 피로감과 불안정성에 더하여 G2 시대 중국의 부상이라는 변화된 국제정세를 토대로 북한은 기존의 대미 안보의존과 대남 경제의존을 벗어나 중국이 오히려 안보와 경제지원의 상당부분을 책임질 수 있다는 현실적 고려를 하게 되었고 2010년 이후 북중관계의 전략적 격상과 북중협력의 심화는 그런 맥락에서 진행되었다.
최근 북한의 대외전략 변화는 이른바 '선택적 병행' 전략이라고 할 수 있다. 중국의 부상이라는 변화된 객관적 환경 하에서 북한은 이제 대외전략의 중심추를 미국과 한국 외에도 중국에게도 안보와 경제를 상당부분 의지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있다. 탈냉전 이후 대미 대남 의존에서 이제 중국에게도 안보와 경제를 의존하는 '병행전략'을 구사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안전보장을 미국이 확고하게 담보해주는 것은 여전히 필요하지만 굳이 이를 위해 북한이 전적으로 매달리지 않겠다는 것이다. 경제 역시 한국이 화해협력과 남북경협에 적극 나선다면 반대할 리 없겠지만 경제적 지원을 한국에게만 전적으로 의존하지 않고 필요하다면 중국의 경제력을 최대한 활용하겠다는 전략인 것이다. 안보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경제는 한국과 중국 사이에서 병행하다가 상황과 조건에 따라 선택적으로 활용하는 이른바 '선택적 병행' 전략이고 명명할 수 있을 것이다.(1)
굳이 미국에게 안보를 의존하지 않아도 된다는 북한의 전략적 판단은 이후 대미 대결 강화를 정당화하는 토대가 되었다. 지난 1년 동안 북의 핵문제에 대한 입장은 시종일관 강경일변도로 고조되었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만 해도 북미협상의 동력은 유지되었고 어렵사리 북미는 2012년 2.29 합의를 도출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해 4월 김정은 체제 공식출범을 정당화하고 강성대국 선포를 가시화하기 위해 김정일 위원장의 유훈이었던 인공위성 발사를 강행해야만 했다. 2.29 합의에 '대륙간탄도탄 미사일 기술을 이용한 일체의 발사 금지'라는 문구 대신 '장거리 미사일 발사 중단'으로 표시된 것도 사실은 북이 김정일 체제 출범이라는 대내적 요구에 의해 장거리 로켓을 쏠 수밖에 없음을 염두에 둔 것이기도 했다. 로켓 발사 직전인 2012.4.7일 미 백악관 관리가 비공개로 평양을 방문한 것도 이 문제와 관련해서 북미간 물밑논의가 진행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4월 로켓발사 이후에도 북미간 최소한의 동력은 유지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미국이 주도한 유엔의 대응은 제재결의보다 수위가 낮은 '의장성명'으로 도출되었고 북한 역시 외무성 성명에서 추가 핵실험을 예고하는 고강도 표현은 삼갔다. 실제로 북은 5.22일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평화적인 위성발사를 계획했기 때문에 핵시험과 같은 군사적 조치는 예견한 것이 없었다'고 밝히기도 했다.
그러나 2012년 8월 미 백악관 관리의 2박 3일 비공개 방북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또 다시 장거리 로켓 발사를 공식표명하고 12.12일 은하3호 발사를 강행 성공시켰다. 북한의 로켓발사 강행 의지와 이를 막으려는 미국의 노력이 합의점을 찾지 못한 결과로 해석가능하다. 그즈음 북한은 미국을 비난하면서 대미전략의 변화를 예고해왔다. 2012년 7월 북한 외무성은 이른바 '동까모' 사건 적발을 계기로 자신의 최고 존엄을 모독하는 특대형 적대행위에 미국이 개입되었다고 강력비난하면서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이 지속되는 한 한반도 비핵화는 요원해지고 '제반 상황은 우리로 하여금 핵문제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지 않을 수 없게 하고 있다'고 경고했다.(2012.7.20) 이어 국방위원회 성명을 통해 미국의 대북적대정책에 실제적인 초강경 대응으로 맞서고 선군의 위력으로 짓부실 것이라며 '핵억제력을 포함한 자위적 군사력전반을 끊임없이 강화'할 것을 공언하고 나섰다.(2012.7.29.)
결국 북한은 8.31 외무성 비망록을 통해 미국의 대북적대시정책으로 인해 핵문제 전면 재검토가 불가피하다고 설명한 뒤, 미국이 적대시정책을 포기한다면 화답할 것이지만 '미국이 옳은 선택을 하지 못하는 경우 우리의 핵보유는 부득불 장기화되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며 우리의 핵억제력은 미국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현대화되고 확장될 것'이라는 경고로 끝을 맺었다.(2012.8.31) 8월 평양에서의 북미협상 불발과 '동까모' 사건으로 인해 북한은 오바마 행정부와의 협상 시도를 거부한 채, 핵확산 우선이라는 대미 강경전략으로 선회한 것이었다.
이후 북은 12.12일 예고한 대로 은하 3호를 쏘아 올렸고 유엔의 대북제재 결의가(2013.1.22) 채택되자마자 미리 준비한 듯이 외무성 성명을 통해 '세계의 비핵화 이전에는 조선반도비핵화가 불가능하다'하다는 최종결론을 내리고 '조선반도와 지역의 평화와 안정을 보장하기 위한 대화는 있어도 조선반도 비핵화를 논의하는 대화는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다.(2013.1.23) 9.19 공동성명에 명시된 한반도 비핵화를 위한 협상은 종말을 고한 셈이 되었다. 연이어 북한은 3차 핵실험을 강행했고 이후 정전협정 백지화 선언, 워싱턴 불바다와 대미 핵선제 타격 언급 등 미국과의 강경대결 입장을 일관되게 고수강화하고 있다. 존 케리 국무장관의 동북아 순방 이후 미국의 대북 대화 제의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우리와 미국 사이에 군축을 위한 회담은 있어도 비핵화와 관련한 회담은 절대로 없을 것'이라고 못박고 협상 자체를 거부하고 있다.(로동신문. 2013.4.20.)
미국으로부터 안전보장을 담보 받으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던 북한은 이제 중국의 부상과 미중관계의 갈등양상을 배경으로 자신의 안전보장을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선택적으로 확보하려는 대외전략으로 수정했고 이는 결국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핵보유를 통한 대미 안전보장'을 내세우고 지금까지 줄곧 대미 강경 대결과 한반도 긴장고조를 지속해오고 있는 것이다. 북한의 핵입장이 본질적으로 바뀌었고 그만큼 핵문제 해결이 어려워진 것이다.
그러나 문제 해결이 어렵더라도 해법은 존재하기 마련이다. 북이 핵보유 장기화의 이유로 시종일관 내세우고 있는 것이 바로 '미국의 대조선적대시 정책'이고 핵무력 병진노선의 불가피성을 설명하는 근거도 '국방비를 늘리지 않고도 적은 비용으로 경제건설과 인민생활 향상에 큰 힘을 돌릴 수 있게 된다'는 것임을 감안하면 사실상 북한의 핵전략은 그 본질에서 북미간 적대관계를 해소하고 이를 통해 안전보장을 확보한 연후에 경제건설에 힘을 쏟겠다는 논리적 설명임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적대관계 해소를 위한 안전보장의 담보물은 평화협정 체결이라는 것이 북한의 주장이다.
핵무력 병진노선이 미국과의 대결 상황에서 북의 안전보장을 위해 채택한 것이라면 협상국면에서 북이 안전보장을 위해 줄곧 주장했던 것은 평화체제 협상이다. 북한은 이미 2005년부터 핵문제 해결을 위한 북미관계 정상화의 첩경으로서 평화협정 체결을 주장해왔다. 9.19 공동성명에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가 동시에 명기된 것도 그 맥락이었다. 6자회담이 중단되고 북미대결이 재연된 이후 북한은 2010.1.11 외무성 성명을 통해 향후 협상은 비핵화와 함께 평화체제 논의가 동시에 진행되어야 한다고 못박았다.(2) 경제건설을 위한 자신의 체제보장과 안전보장은 평화체제 전환에 의해 가능하다는 것이 북한의 일관된 논리였다.
결국 북한은 경제건설의 조건으로서 안전보장이 필요하고, 이를 위해 대결 국면에는 핵무력 병진노선을, 협상 국면에는 평화체제 논의를 동전의 양면으로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의 대미 대결과 대남 위협은 역설적으로 한반도 평화체제의 필요성을 각인시키기 위한 전략적 의도에 다름 아니다.
최근 북한의 핵전략 변화와 한반도 긴장고조의 핵심 의도가 평화협정의 협상 테이블로 한국과 미국을 끌어내기 위한 것이라면, 바로 이 지점이 북핵문제 해결의 가능성을 찾아내고 우리의 적극적 역할을 모색할 수 있는 대목이기도 하다. 따라서 협상국면으로의 전환을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평화체제 논의를 제의하고 주도해야 한다. 평화체제 논의가 마치 북의 전유물인양 우리에게 터부시되는 것은 이제 극복해야 한다. 현실을 똑바로 봐야만 올바른 해법이 나오는 법이다.
□ 필자주석
1. 자세한 내용은 김근식, "김정은 시대 북한의 대외전략 변화와 대남정책: '선택적 병행' 전략을 중심으로," 『한국과 국제정치』, 29권 1호, 2013년 봄호, 193-224.
2. '조선외무성 성명 평화협정회담을 제의,' 조선중앙통신, 2010.1.11.
*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소장 이수훈)가 발행하는 <한반도포커스> 2013년 5·6월호(제23호)에 실린 글입니다. 이번 호의 전체 주제는 '김정은 체제 공식 출범 1년 : 평가와 과제'입니다. * 원제 : 김정은 체제의 대미 핵전략과 북핵문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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