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과 미국이 베이징 고위급 회담의 합의를 바탕으로 후속 협의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그러나 북한은 남측 군부대에서 김정은의 사진에 전투구호를 붙인 사실을 꼬투리 잡아 대남 비난을 퍼붓고 있다. 북한이 한국을 제쳐두고 미국과만 대화한다는 이른바 '통미봉남' 현상이 뚜렷해진 상황이다.
북미 양국은 오는 7일 베이징(北京) 등에서 대북 영양(식량) 지원에 관한 후속 협의를 가질 예정이다. 미 국부무의 로버트 킹 대북인권특사와 북한의 리근 외무성 미국국장이 나온다. 킹 특사의 방북 가능성도 거론된다. 양국은 지난달 23~24일 베이징 3차 고위급회담에서 북한이 우라늄 농축 활동과 핵ㆍ미사일 실험을 중단하는 대신 미국은 24만 톤의 영양 지원을 하기로 합의했다.
또 미 시라큐스대 맥스웰스쿨과 독일 NGO가 주관하는 한반도 관련 세미나가 다음주 열린다. 이 세미나에는 북한의 6자회담 수석대표인 리용호 외무성 부상이 참석할 예정이다. 미국에서는 헨리 키신저 전 국무장관, 존 케리 상원 외교위원장 등 외교의 거물들이 나온다. 세미나 후 리 부상은 미국 외교정책전국위원회(NCAFP)가 주최하는 모임에도 간다. 글린 데이비스 미 국무부 대북정책 특별대표나 클리포드 하트 6자회담 특사가 등장할 가능성이 있다.
이밖에 북미 양측은 문화ㆍ교육ㆍ스포츠 교류를 하자는 베이징 합의에 따라 미주 지역에 거주하는 이산가족 상봉 문제 등을 조만간 추진할 것으로 예상된다. 한국전쟁 중 미군 전사자 유해 발굴단은 이미 북한에 들어가 있다. 우라늄 농축 중단과 관련해서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와 북한의 협의가 곧 진행된다.
북한의 대미 메시지는?
한편 남북간에는 격렬한 말들이 오가고 있다. 북한은 인천의 한 부대가 내무반에 김정일-김정은 부자의 사진을 걸고 전투구호를 붙인 사실에 대해 격렬히 반발하고 있다. 인민군 최고사령부가 지난 2일 대변인 성명을 발표한 후 북한 매체에서 사흘간 '최고존엄 모독'이라는 표현이 포함된 대남 비난 보도는 100건이 넘었다. 북한 외무성 대변인, 대남기구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대변인 등도 담화를 발표해 '무자비한 징벌'을 경고했다. 김정은의 판문점 시찰 소식도 이날 보도됐다.
<조선중앙TV>는 이날 평양 김일성광장에서 군인과 주민 15만여명이 참가한 대규모 군중대회를 중계했다. 김정일 위원장 사망 이후 최대의 인파였다. 최고 권력기구인 국방위원회도 정책국 부국장인 곽철희 소장(준장격)이 내외신 기자회견을 통해 대남 비난을 쏟아 냈다.
특히 북한은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욕설과 원색적인 비난을 퍼붓고 있다. <조선중앙통신>은 이 대통령을 '미친 X' `불망나니' '인간추물' `불한당' 등의 욕설과 원색적인 표현을 동원해 청와대를 '악마의 소굴'이라고 불렀다. 평양 군중대회에서는 이 대통령을 향해 '저능아' '개XX' 등의 표현이 등장했다.
이는 최고지도자에 대한 모독에는 즉각 반응해야 하는 북한식 정치 문화를 반영한 것으로, 구체적인 행동으로 이어질 가능성은 높지 않다는 게 대체적인 시각이다. 그러나 이와 별도의 목적도 있다는 분석이다. 우선 미국을 향해 '이런 남쪽과 어떻게 대화하느냐'면서 남북대화를 종용하지 말고 북미 합의 이행에 중점을 두자는 메시지를 보내는 의미가 있다. 김정은 체제 공고화, 주민들의 대남 적개심 고취 등의 목적도 깔려 있는 것으로 보인다.
한국 정부는 "대응할 가치가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국방부 당국자는 이날 "북측은 그동안 공식 매체를 통해 우리 정부와 최고위층에 대해 입에 담지 못할 악의적인 비방을 계속해오고 있다"면서 "따라서 우리 측이 오히려 북측의 비방중상 행위에 대해 중단을 촉구해야 할 입장"이라고 말했다.
MB 정부, 대미 외교 집중할 듯
하지만 '통미봉남'적 상황에 대한 정부의 대응 흐름도 있다. 한국 6자회담 수석대표인 임성남 외교통상부 한반도평화교섭본부장은 시러큐스대 세미나에 옵서버 자격으로 참석해 리용호 북한 부상을 만날 예정이다. 김성환 외교부 장관도 7일부터 닷새 일정으로 워싱턴을 방문해 힐러리 클린턴 미 국무장관과 톰 노닐론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 등을 만날 예정이다.
한국 정부는 이같은 일련의 회동을 통해 남북대화도 열려야 하고, 북한의 약속 이행이 우선이라는 등의 입장을 강조할 것으로 보인다. 이 과정에서 한국이 북한에 성큼 다가서는 미국의 발목을 잡으려는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관측도 있다.
그러나 한국의 처지는 여러모로 옹색해지고 있다. 중국 내 탈북자들의 북송 문제가 부각되면서 한중관계는 소용돌이치고 있고, 남북관계에도 불난데 기름을 붓는 상황이 계속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를 타계할 이렇다한 대책이 없는 가운데 이명박 정부는 대미 외교에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전망된다. 베이징 북미 회담에서 한반도 문제 해결의 최종 목표를 공유한 양국의 정세 주도권이 더욱 강화되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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