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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건의 '두 얼굴'과 고르바초프의 혁명

[정욱식의 '핵과 인간'] '코리아 아마겟돈'은 오는가

"아직도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고 생각하세요?"
"아니요."

1988년 5월 모스크바의 붉은 광장을 산책하면서 미하엘 고르바초프와 로날드 레이건이 나눈 대화의 한 대목이다. 소련을 "악의 제국"으로 부르면서 '스타워즈'를 주창했던 레이건의 대변신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장면이다. 레이건도 훗날 회고록에서 "고르바초프와 나는 화학 작용을 일으켜 우정과 대단히 유사한 뭔가를 만들어낸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역시 낸시 레이건에게 "당신 남편과 어떤 화학 작용을 일으킨 것 같다"고 말했다. 레이건과 고르바초프의 정상회담은 '인간적 요소'가 불신과 권력 정치가 지배한다는 국제 정치의 현실을 바꿔놓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대표적 사례로 일컬어진다

"나는 핵무기의 확산을 저지하고 핵무기 없는 세계를 추구한 존 F. 케네디와 로널드 레이건의 비전을 환영합니다." 버락 오마마 미국 대통령이 2010년 1월 연두 교서를 통해 한 말이다. 오바마가 '핵무기 없는 세계'를 추구하면서 공화당의 우상이자 '냉전의 전사'로 일컬어지는 레이건을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아마도 자신의 구상에 대한 초당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레이건 역시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반영하고 있다. 레이건은 '스타워즈'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를 천명해 소련과의 핵군비 경쟁을 새로운 국면에 올려놓은 인물이다. 신냉전이 절정에 달했던 1986년에는 두 나라의 핵무기 보유량이 7만개에 육박했다. 두 나라가 몇 십개의 핵무기만 주고받아도 지구는 '핵 겨울(nuclear winter)'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과학자들의 경고도 이즈음 나왔다. 핵과학자협회가 '운명의 날 시계(Doomsday Clock)'를 지구 멸망 3분 전인 11시 57분에 맞춘 때도 이 때였다.

그러나 '절대 무기'를 통해 '절대 안보'를 꿈꿨던 레이건에게서도 영화 <반지의 제왕>에 등장하는 골룸과 같은 '이중인격'이 발견된다. '절대 반지'를 손에 쥐면 세상을 지배할 권력을 손에 쥘 수 있다는 욕망의 존재 골룸과 절대 반지를 파괴하지 않으면 자신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파멸을 가져올 것이라고 고뇌의 존재 스미골은 한몸이었다. 마찬가지로 핵미사일이라는 창과 전략방위구상(SDI)이라는 방패를 양손에 쥐고 세계의 지배자를 꿈꿨던 레이건과 임기 후반부에 접어들어 '핵무기 없는 세계'를 주창하고 나선 레이건도 동일인물이다. 이를 두고 시린시온은 "두 명의 레이건"이라고 불렀다.

'냉전의 전사', 레이건의 등장

1970년 말에 시작된 미‧소 간의 신냉전은 1981년에 초강경 성향의 레이건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절정으로 치닫기 시작했다. 레이건은 대선 유세 때 카터의 정책을 2차 세계대전 직전 영국의 대독일 '유화 정책'에 비유하면서 맹공격했다. 그는 카터의 유화 정책으로 "서구 문명은 앞으로 수십 년간 가장 위험한 상태에 직면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소련이 이란과 중동을 협박해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고, 베트남이 인도차이나 반도 전체를 병합하며, "소련의 꼭두각시"인 카스트로의 쿠바가 카리브 해를 "적색 바다"로 만들어 멕시코를 포위하고 있다고 것이다. 특히 소련이 미국보다 1970년대 10년간 2,400억 달러의 군사비를 더 썼고, 앞으로도 그 격차가 더 벌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우리는 군비 경쟁을 하고 있다. 그런데 오로지 한쪽만 달리고 있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기도 했다. 또한 그는 1981년 취임사를 통해 "데탕트는 지금까지 소련이 자신의 목적을 추구하기 위해 이용한 일방 통로였다"며, 그 목적은 바로 "세계의 공산화"라고 못 박기도 했다. 또한 소련을 "범죄와 거짓말과 속임수를 일삼는" 집단으로 묘사하면서 대화 무용론을 강조했다. 이를 두고 <LA 타임즈>는 "지난 20년동안 백악관에서 나온 가장 강력한 냉전적 공격"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냉전의 전사' 레이건의 폭주는 집권 직후부터 시작됐다. 카터 행정부 때 소련과 협상을 벌였던 SALT II를 완전 중단시켰고, 그 대신에 글로벌 핵전쟁에서 이길 수 있는 방안을 모색했다. '핵전쟁에서 어떻게 하면 이길 수 있을까?' 당시 레이건 행정부를 지배한 이 담론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군사력을 요하는 문제였다. 이러한 사고에 사로잡힌 레이건 행정부는 10개의 핵탄두를 하나의 미사일에 장착하는 MX 미사일과 B-1 전략 폭격기를 개발·배치했고, 잠수함에서 발사되는 트라이던트 핵미사일의 보유량도 대폭 늘렸다. 또한 소련이 SS-20 미사일을 폐기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Pershing II 미사일의 유럽 배치를 강행했다. 그리고 "이길 수 있는 핵전쟁"의 총아로 SDI를 들고 나왔다. 이에 따라 미국의 국방비는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아, 1985년 국방비는 1980년에 비해 두 배로 늘어났다.

레이건 행정부의 이러한 노선은 와인버거(Casper Weinberger) 국방장관이 취임 일성으로 "저는 미국의 재무장을 열정과 열성을 다해 학수고대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예견된 것이었다. 외교안보 분야에서 경험이 일천했던 와인버거의 뒤에는 대표적인 매파였던 리처드 펄(Richard Perle) 국방부 차관보가 있었고, 당시 그의 영향력은 미국 언론이 "어둠의 황태자(the Prince of Darkness)"라고 부른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외교를 담당하는 국무장관 헤이그(Alexander Haig)는 "평화보다도 더 중요한 것이 있다. 바로 미국이 싸우고자 하는 의지"라고 말하고 다녔다. 레이건을 지근거리에서 보좌하는 국가안보보좌관 알렌(Richard Allen)은 "군사력 강화 대신에 군비통제 협상을 추구하는 것은 환상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심지어 군비통제 및 군축국(ACDA)의 로스토우(Eugene Rostow) 국장은 "군비통제는 건전한 사고를 몰아낸다"고 말할 정도였다. ACDA의 존재 이유를 부정하는 발언이었다. 이처럼 레이건 행정부는 매파로 득실거렸다.

레이건의 대소 강경책은 1983년 3월 들어 더욱 거칠고 강경해졌다. 레이건은 3월 8일 연설에서 소련과의 대결을 "정의와 불의, 선과 악의 투쟁"으로 묘사하면서 소련을 "현대 세계의 악의 초점", "악의 제국(evil empire)"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강경론은 3월 23일의 유명한 '스타워즈 연설'에 고스란히 담겼다. 레이건은 역설했다. "우리가 적의 전략 미사일이 미국이나 우리 동맹국의 영토에 떨어지기 전에 요격할 수 있다면 무엇이 문제입니까?" 전략방위구상(SDI) 추진을 공식 선언한 순간이었다. 미국의 과학적 능력이라면 여러 가지 기술적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고도 자신했다. SDI를 통해 핵미사일을 무력화하면 그래서 핵미사일을 "쓸모없는 것"으로 만들면, 핵군축을 앞당길 수 있다는 황당한 주장도 곁들였다.

미사일방어체제(MD)의 원조격인 SDI는 소련의 ICBM을 우주 공간에서 레이저로 요격하는 시스템을 의미한다. 이 구상이 '스타워즈'라는 찬사와 조롱이 섞인 별명을 갖게 된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SDI가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미국이 더 이상 핵 시대의 안보를 '억제'에 의존하지 않겠다는 의사를 밝혔다는 데에 있다. 즉 핵무기를 비롯한 막강한 공격력과 적의 미사일을 무력화할 수 있는 방어력을 동시에 갖춰 소련과의 핵전쟁에서 승리를 도모해보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는 곧 소련이 미국의 선제공격에 취약해진다는 것을 의미하고, 핵 시대에 미소간의 전략적 균형을 유지해온 MAD, 즉 '공포의 균형'의 폐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레이건이 이처럼 초강공으로 나오자 소련도 적극적인 대응에 나섰다. 특히 소련 지도부는 SDI를 미국의 핵전쟁 준비 계획과 동일시했다. 적이 방패를 갖게 되면 창을 휘두르는 것이 훨씬 쉬어질 터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핵무기고를 비약적으로 늘려, 1980년 3만 개였던 소련의 핵무기는 1986년에는 4만 5,000개에 달했다. 또한 소련은 다탄두 핵미사일과 하나의 미사일에 장착된 여러 탄두들이 각기 다른 목표물을 공격할 수 있는 MIRV(multiple independently targetable reentry vehicle) 개발 및 배치에도 박차를 가했다. SDI라는 방패를 뚫기 위한 것이었다. 1960년대에 주미 소련 대사를 지냈고 레이건 재임 시에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이었던 아나톨리 도브리닌은 "레이건의 강경책은 소련의 강경파를 강화하면서 레이건 정책의 거울 영상(mirror-image)을 연출했다"며 당시 소련 내의 강경 분위기를 전하기도 했다.

이처럼 지구 생존을 담보로 한 미국과 소련의 핵 군비경쟁이 격화되자,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반핵운동이 들불처럼 일어났다. 유럽에서는 퍼싱-2 등 핵미사일 배치 반대 운동이 주요 대도시를 집어삼켰다. 당황한 나토 국가들은 레이건 행정부에게 핵미사일 배치를 재검토하고 소련과의 핵군축 협상에 나설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미국 내에서도 SDI를 비롯한 급격한 군비증강과 이에 따른 경제와 복지를 우려하는 목소리도 높아졌다. 핵문제 비평가로 명성을 떨친 탤벗(Strobe Talbott)은 이렇게 말했다. "유럽인들은 유럽에 새로운 미사일이 들어오는 것을 막을 것이다. 미국 의회는 SDI 구축이라는 레이건 행정부의 야심에 찬 계획에 제동을 걸 것이다. 미국인들은 1984년 대선에서 레이건을 거부할 것이다." 그러자 레이건 행정부 내에서도 신중론이 부상했다. 소련과 핵군축 협상을 재개하지 않으면, 대서양 동맹이 뿌리부터 흔들릴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 고르바초프와 레이건

트랜스포머, 고르바초프의 등장

1980년대 전반기에 절정으로 치닫던 신냉전은 유럽을 집어삼킨 반핵평화운동과 1985년 3월 체르넨코의 사망 및 고르바초프의 등장을 계기로 극적인 변화를 맞게 된다. 고르바초프는 스탈린주의와 2차 세계대전에 사로잡혀 있던 전임 지도자들과 달리 흐루쇼프 개혁 시대에 교육을 받은 인물이었다. 그는 엄청난 군비 부담에서 벗어나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이는 미국 등 서방 세계와의 데탕트를 추진해야 할 강력한 동기로 작용했다. 고르바초프가 공산당 부서기장이었을 때인 1984년 12월에 그를 만난 또 한 명의 '냉전의 전사' 마거릿 대처는 그를 "대단한 러시아인"이라고 치켜세웠고, 체르넨코 장례식에 참석한 조지 H. W 부시 부통령과 조지 슐츠 국무장관 역시 이전 지도자들과는 차원이 다른 인물이라고 그를 칭찬했다. 이러한 고르바초프의 등장은 공교롭게도 레이건 행정부 2기 출범과 조우하게 된다.

고르바초프의 혁명적 행보는 국내외를 가리지 않았다. 그는 정치 개혁인 글라스노스트(glasnost)와 개혁 개혁인 페레스트로이카(perestroika)를 추진해 소련 체제의 체질 개선에 나섰다. 신냉전 촉발의 중대 계기가 되었던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군사 행동을 중단하기 시작했고, 베트남을 설득해 캄보디아에서 철수토록 했다. 1960년대 이후 미국 못지않은 전략적 라이벌이었던 중국과도 관계 개선에 나섰고, '브레즈네프 독트린'을 폐기해 동유럽의 내정문제에 더 이상 군사적으로 개입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신사고(new thinking)'을 앞세워 핵무기와 재래식 군축에도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고르바초프의 혁명은 유라시아 서쪽에서는 정치혁명을 촉진시켰고 그 '나비효과'는 서울올림픽을 동서화합의 장으로 만드는 데까지 다다랐다.

한편 레이건의 핵문제에 대한 자기 분열적이고 모순된 인식은 쉽게 고쳐지지 않았다. 그는 '너 죽고 나 죽고 모두 죽을 수 있는 공포'가 핵전쟁을 억제한다는 MAD에 대해 반감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반감은 두 가지 경로로 나타났다. 하나는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미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해 소련을 제압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SDI를 통해 "핵무기를 무력화해 폐기시키는 것"이었다. 즉, 레이건은 SDI를 통해 핵무기를 필요 없는 무기로 만들면 핵폐기를 촉진할 수 있다는 천진난만한 생각도 품고 있었다. 레이건은 "한편으로는 강경한 냉전 전사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의 십자군을 자임했던 것"이다. 어쨌든 1기 때 강경 드라이브를 걸었던 레이건은 2기 들어 고르바초프와 함께 핵군축 협상과 냉전 종식에서 큰 진전을 이뤄내게 된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은 1985년 11월 스위스 제네바에서 이뤄졌다. 그런데 정상 회담을 앞두고 미국 내에서 심각한 이견이 표출됐다. 레이건은 SDI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자는 황당한 생각을 갖고 있었고, 펜타곤은 SDI를 군비 경쟁을 격화시켜 소련을 굴복시킬 수 있는 유력한 카드로 간주했다. 조지 슐츠 국무장관은 이 구상이 1972년 ABM 조약을 위반하는지 여부와 정상 회담의 주도권을 둘러싸고 백악관 국가안전보장회의(NSC)와 갈등을 빚었다. 고르바초프는 정상 회담 사전 논의차 모스크바를 방문한 슐츠에게 "우리는 당신의 방패를 부수는 전력을 강화할 것"이라며, 미국이 SDI를 철회하지 않으면 핵군축 협상에 진전이 없을 것임을 명확히 했다. 그러면서도 소련은 변할 준비가 되어 있으니 미국도 군산 복합체의 영향력에서 벗어나야 할 것이라고 충고했다. 정상 회담이 시작되자 SDI를 둘러싸고 격론이 벌어졌다. 레이건은 이 기술을 소련과 공유하자는 입장에서 물러서지 않았다.

이에 고르바초프는 SDI와 같은 우주 무기는 언제든 공격 무기로 전환될 수 있고, 우주 무기는 확인하기가 더욱 어려워 의혹과 불신을 증폭시킬 것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미국이 SDI를 고집하면 소련은 "당신의 방패를 파괴하기 위해 군비를 강화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러나 SDI를 스스로 고안했다는 레이건의 집착 역시 만만치 않았다. 그는 SDI를 통해 "핵무기 제거를 논의하고 그것으로 전쟁의 위협을 제거할 것"이라고 반박했다. 고르바초프는 둘 다 창을 갖고 있는 상태에서 어느 한쪽이 방패를 갖게 되면 다른 한쪽은 어떻게 되겠느냐며, "나의 권력을 총동원해 이 프로젝트의 성사를 방해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그러면서 미국이 SDI를 포기하고 양국이 50퍼센트 이상 핵무기를 감축하자는 제안도 거듭 내놓았다. 결국 두 정상은 이 사안에 대한 이견을 좁히지 못한 채, 추가 정상 회담을 비롯한 교류 협력 확대에 합의하는 수준에서 정상 회담을 마무리했다.

제네바 정상 회담 이후 고르바초프는 '신사고'를 구체화하기 시작했다. 적극성의 계기는 미국의 변화보다는 그 자신의 보다 확고한 신념과 소련 관료주의에 대한 절망감에 있었다. 고르바초프는 1986년 1월에 2000년까지 모든 핵무기를 폐기하자고 제안했다. 또한 2월 공산당 전당대회에서는 핵전쟁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 시대에 양대 진영은 MAD에 기초한 '평화 공존'을 넘어 '상호 의존'한다고 피력하면서 '신사고'를 거듭 강조했다. 그의 핵군축에 대한 신념과 관료주의에 대한 실망감은 1986년 4월 26일에 발생한 체르노빌 핵발전소 폭발 사건으로 더욱 강해졌다. 레이건 행정부의 수준이 '스타워즈'에서 맴돌고 있었을 때, 고르바초프는 '핵무기 없는 세계'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교착 상태에 빠져 있던 미‧소 관계의 중재자로는 사회주의자이면서 미국 동맹국 지도자인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이 나섰다. 당시 레이건과 고르바초프는 개인적인 유대감의 진전에도 불구하고, 레이건은 소련의 의도, 즉 '세계 공산화 노선' 포기가 실현될 수 있을지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레이건이 과연 군산 복합체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있을지에 대해 의구심을 떨쳐버리지 못했다. 미중 데탕트의 주인공이자 미소 핵군축 협상의 물꼬를 텄던 리처드 닉슨 전 대통령도 중재자로 뛰어들었다. 그는 모스크바를 방문해 고르바초프를 만난 자리에서는 보수 정권인 레이건 행정부와의 합의 유용성에 대해 설명하고 레이건에게는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를 설명하면서 두 사람이 다시 만날 것을 설득했다.

이러한 과정에 힘입어 두 사람은 1986년 10월에 아이슬란드 레이캬비크에서 2차 정상 회담을 가졌다. 이 회담에서 고르바초프는 파격적인 핵군축 제안을 내놓았는데, ABM 조약을 고수하는 조건으로 5년간 "모든 공격 전략 무기"를 50퍼센트 감축하고, 이후 5년간 나머지 대륙간탄도미사일을 모두 폐기하자는 것이었다. 이는 고르바초프의 통 큰 제안이었다. SDI 철회를 명시적으로 요구하지 않았을 뿐더러, 완전 폐기 대상을 대륙간탄도미사일로 한정할 경우 전략 폭격기를 다량 보유한 미국이 핵전력에서 압도적인 우위를 달성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레이건 행정부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SDI는 여전히 걸림돌이었다. 고르바초프는 완전 철회에서 '연구용'으로 낮춰줄 것을 요구했지만, 레이건은 이마저 거절했다. 이에 따라 핵군축에 이정표를 세울 기회는 또다시 유실되고 말았다.

그런데 2차 정상 회담 이후 양국 내부에서 중요한 변화가 일어났다. 1986년 11월 미국 의회 중간 선거에서 공화당이 패배하면서 SDI 예산 확보에 비상이 걸렸다. 또한 이란-콘트라 사건이 터져 레이건 행정부는 더욱 궁지에 몰렸는데, 이는 외교 정책에서 성과를 내야 할 필요성을 더욱 부각시키는 한편, 대외 정책 강경파들의 줄사퇴를 초래하며 협상파인 슐츠 국무장관의 입지를 더욱 높여주었다. 2006년 중간선거에서 이라크 전쟁 여파로 공화당이 패배하고 네오콘의 축출과 협상파의 부상으로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의 변신을 야기했던 것과 닮은꼴이었다. 12월에는 고르바초프가 반체제 인사인 안드레이 사하로프를 가택 연금에서 풀어줘 미국의 대소 강경론을 누그러뜨렸다. 또한 1987년 2월에는 고르바초프가 핵군축 협상을 SDI와 연계시키지 않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는 핵군축 협상의 가장 큰 걸림돌을 제거하고자 하는 동기와 함께 이미 SDI가 생명을 다하고 있다는 계산에 따른 것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1987년 12월에 워싱턴에서 열린 세 번째 정상 회담에서 양국은 전술 핵무기에 해당하는 중거리미사일폐기(INF) 협정에 서명했다. 이 협정은 특정 무기를 모두 폐기하기로 한 미‧소 간의 최초의 합의에 해당하는 것으로서, 사정거리 500~5,500킬로미터 사이의 지상 발사 탄도미사일 및 순항 미사일을 폐기키로 했다. 특히 상호 검증을 통해 폐기 여부를 확인하기로 했는데, 이는 비밀주의를 선호하던 소련 체제의 일대 변화를 보여준 것이었다. 이 협정에 따라 미‧소 양국은 양측 참관단의 확인 하에 신냉전의 상징인 SS-20와 Pershing II 등 중거리 미사일 폐기에 돌입했고, 1991년 6월 1일에 모두 2,692기의 미사일을 폐기했다. 이는 유럽과 미국을 휩쓴 반핵평화운동의 빛나는 성과이기도 했다.

레이건-고르바초프 시대 미‧소 관계의 패러다임 전환은 안보관의 변화에 바탕을 두었고 또 이를 촉진했다. 핵무기가 지배하는 MAD 시대의 안보가 기껏해야 '공포의 균형'에 기반을 둔 것이었다면, 고르바초프의 '신사고'는 이와 같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라 '상대방이 안전을 느껴야 나도 안전을 느낀다'는 공동 안보 정신에 바탕을 둔 것이었다. 더디었지만 레이건 행정부의 변화와 두 정상 사이의 개인적 유대의 증진은 고르바초프로 하여금 신사고를 더욱 믿게 했고, 이 신사고는 핵무기의 폭발음이나 총격 소리 없이 미‧소 두 정상의 악수로 냉전 종식이 이루어지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그러나 미국의 주인공은 레이건이 아니라 조지 W. H 부시가 됐다. 1989년 12월 3일 고르바초프와 부시가 몰타에서 만나 냉전 종식을 공식 선언한 것이다.

미소 탈냉전과 독일 통일을 거치면서 탈냉전의 훈풍은 한반도에도 부는 듯 했다. 그러나 미국과 소련에 의해 분단된 한반도는 '근친증오(近親憎惡)' 현상을 극복하지 못한 채, 냉전의 늪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미-소 냉전 종식으로 지구 생존을 담보로 한 '글로벌 아마겟돈'의 위험은 크게 줄어들었다. 그러나 60년 넘게 지속되어온 미국의 핵 위협과 북한의 핵무장이 날카로운 금속음을 내면서, 그리고 여기에 이명박 정부의 대북강경책까지 가세하면서 '코리아 아마겟돈'의 위험은 더욱 커져버렸다. 하여 "냉전이 종식되었다"는 담론은 전형적인 오리엔탈리즘이다.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 그리고 정전체제에 책임이 있는 강대국들의 역사적 책임을 도외시하는 것이자, 한반도 평화와 통일의 지구적 의미를 축소시키는 자폐적인 담론이다. 핵의 시대 첫 전쟁인 한국전쟁이 전지구적 핵문제 촉발의 중대 계기였다면, 이 전쟁을 완전히 끝내는 것이야말로 '탈핵의 시대'를 여는데 중대한 출발점이라는 점도 결코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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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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