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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는 종이호랑이'라던 마오쩌둥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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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무기는 종이호랑이'라던 마오쩌둥이…

[정욱식의 '핵과 인간'] 미-중-소 '3각관계'와 미‧중 수교

핼버스탬은 "중국인에게 한국전쟁은 아주 자랑스럽고 성공적인 전투였으며 오랜 역사를 가진 중국이 현대 국가로 탈바꿈하면서 이뤄낸 쾌거 중 하나였다"고 주장한다. "세계 최대 강국인 미국을 보기 좋게 이겼을 뿐 아니라 유엔 전체를 무색케" 함으로써, 또한 "불구경만 했던 소련과는" 달리 대규모의 병력을 파견해 북한을 구원함으로써, "한국전쟁 후 전 세계 국가들은 중국이 떠오르는 세계 강국이라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중국이 치른 비용도 대단히 컸다. 약 30만명이 목숨을 잃었을 뿐만 아니라 경제는 더욱 피폐해졌다. 무엇보다도 한국전쟁이 중국에게 미친 가장 결정적인 영향은 양안간 현상 유지의 장기화였다. 미국은 애치슨 라인 발표 등을 통해 중국의 대만 통일에 개입하지 않을 뜻을 내비쳤지만,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의 대만 보호는 중대한 원칙으로 자리잡은 것이다.

대만 해협 위기와 미국-중국-소련 삼각관계

한국전쟁이 동아시아 지정학에 미친 가장 직접적이고도 중대한 영향 가운데 하나는 미국의 대중(對中) 핵 위협의 증대와 이에 맞선 중국의 핵무장이다. 마오쩌둥은 1946년 인도 총리 네루를 만났을 때는 "중국 인구가 얼만데"라며 미국의 원자폭탄을 '종이호랑이'로 비유했을 정도로 미국의 핵 위협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고, 자국의 핵 개발에도 큰 관심을 두지 않았다. 여기에는 "전쟁은 무기가 아니라 인간이 좌우한다"는 그의 신념이 깔려 있었다. 그러나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중국 지도부의 생각은 바뀌었다. 미국의 핵 위협에 맞서기 위해서는 핵무장이 불가피하다는 인식이 자라나기 시작한 것이다. 마오쩌둥은 한국전쟁 참전 결정을 내렸던 1950년 10월 "우리가 원자폭탄을 가질 때 비로소 전쟁광이 우리의 정당하고 이성적인 요구에 귀를 기울이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비슷한 시기에 <인민일보>는 미국은 다른 나라를 협박하는데 핵무기를 이용해왔다고 비난하면서 "소련을 위시한 다른 나라들이 핵무기를 보유하는 것이야말로 미국으로 하여금 자신의 핵 독점에 따른 이점이 더 이상 존재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한반도에서 총성이 멈춘 이후에 미국의 대중 핵 위협은 더욱 강해지고 구체화되었다. 미국이 북한과 함께 중국을 대량 보복 전략의 핵심적인 대상으로 삼은 것이다. 미국의 핵 위협은 중국의 한반도 및 인도차이나 개입과 대만 공격에 대비한 성격이 짙었다. 1953년 11월에 작성된 미국 합참 문서에 따르면, 당시 미국의 목표는 핵 공격을 통해 "한반도와 극동에서 중국의 추가적인 도발 능력을 제거"하는데 맞춰졌다. 또한 이듬해 1월 NSC는 인도차이나 전략을 승인하게 되는데, 한반도에서와 마찬가지로 중국이 이 지역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면, 개입과 직접 관련이 있는 중국의 군사력을 파괴하기 위해 해공군 작전에 돌입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관련해 미국의 전략공군사령부(SAC)의 르메이(Curtis E. LeMay) 사령관은 "한반도에는 전략적 목표물이 없지만, 중국, 만주, 러시아 동남부 등에 몇 개의 핵폭탄을 투하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놓았다. 다만 동맹국들의 반발 및 소련의 개입 가능성을 우려해 중국에 대한 보복은 가급적 선택적이고 제한적이어야 한다는 의견이 주류를 이뤘다.

미국의 대중 핵 공격 계획은 1954-55년 1차 대만 위기가 발생하면서 시험대에 올랐다. 위기가 장기화되자 아이젠하워 행정부는 1955년 들어 본격적으로 핵 위협을 가하기 시작했다. 덜레스 국무장관은 "무고한 민간 지역을 위태롭게 하지 않고도 군사 목표물을 완전히 파괴할 수 있다"며, "새롭고도 강력한 정밀 무기"의 사용 가능성을 시사했다. 아이젠하워는 3월 17일 기자회견에서 "엄격히 군사 목표물로 제한하고 군사적 목적 달성만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면, 당신이 총이나 그 밖에 다른 것들을 사용하는 것처럼 왜 그것들은 사용되어서는 안 되는 거죠"라고 말했는데, 그가 말한 "그것들은" 바로 핵무기를 의미했다. 그러자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핵문제 담당 특별보좌관인 스미스(Gerald Smith)가 신중론을 제기하고 나섰다. 그는 아무리 작은 전술 핵무기라도 그것이 터지면 낙진에 의해 주변 도시에도 피해를 입힐 수 있고, 일단 핵 공격이 시작되면 그 임무를 맡고 있는 전략공군사령부가 대규모의 핵 공격에 나설 가능성이 높아진다고 지적했다. 또한 영국 정부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강해진 미국의 대중국 적대감이 핵 공격을 비롯한 전면전으로 이어질 가능성에 우려를 나타냈다. 그러나 정작 중국은 미국의 핵 위협에 개의치 않는다는 태도를 고수했다. 1차 대만 위기가 정점에 달했던 1955년 1월 말, 마오쩌둥은 주중 핀란드 대사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중국 인민은 결코 미국의 핵 협박에 굴복하지 않아요. 우리나라는 6억명의 인구와 9백60만 평방킬로미터의 영토를 갖고 있습니다. 미국은 핵무기로 결코 중국을 절멸시킬 수 없어요. 미국의 원자폭탄이 아무리 강력해도 중국에 떨어지면 지구에 구멍 하나를 만드는 것이거나 약간의 타격을 입힐 뿐이며, 이 정도는 우주 전체로 볼 때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중략) 만약 미국이 원자폭탄을 탑재한 항공기로 전쟁을 도발하더라도 수수와 소총으로 무장한 중국은 승리자가 될 것입니다. 전 세계 인민들도 우리를 지지할 것입니다."

1954-55년 1차 위기 때 날카롭게 대립했던 미국과 중국은 1958년 2차 위기에서는 정면충돌의 위기까지 겪었다. 중국이 대만 해협을 봉쇄하려고 하자 미 공군은 핵무기를 중국에 투하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합참의장인 트위닝(Nathan F. Twining)은 "미국 항공기는 아모이(중국의 해안 도시로 오늘날에는 샤먼으로 불림) 인근의 몇 개 기지에 10-15킬로톤의 핵폭탄을 투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미국은 "중국의 공군기지에 핵 공습 준비태세를 갖춘 5기의 B-47 전폭기"를 배치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아이젠하워는 "핵무기가 고폭탄과 같은 재래식 무기라는 (공군의) 주장을 수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공산군의 재래식 공격에 핵무기로 보복한다는 '대량 보복' 전략에 따라 미 공군은 핵 공격 권한 위임을 승인해줄 것으로 믿었으나, 아이젠하워는 첫 공격은 재래식 고폭탄을 사용해야 한다고 지시한 것이다. 핵무기를 다른 무기와 구분해야 할 이유를 모르겠다던 아이젠하워가 놀랍게도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를 구분한 것이다.

미중간의 대만해협 위기와 관련해 주목할 것은 소련의 반응이었다. 소련은 미국의 중국에 대한 핵 공격 위협과 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는 마오쩌둥의 무모해 보이는, 그러나 일관되고도 단호한 입장에 아연실색했다. 중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상태에서 미-중 전쟁이 발발하면 소련 역시 휘말릴 것으로 걱정했기 때문이다. 마오쩌둥은 1957년 모스크바에서 열린 회의에서도 미국의 핵 공격으로 중국인 3억명이 목숨을 잃더라도 "세월은 흘러 우리는 더 많은 아이들을 낳을 수 있다"며 핵전쟁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다고 말했다. 이에 대해 흐루쇼프는 "정말 역겹군"이라는 반응을 보였고, 체코슬로바키아의 안토닌 노보트니(Antonin Novotny)는 "겨우 1천2백만 밖에 인구가 안 되는 우리는 어쩌란 말이냐"고 푸념했다.

흐루쇼프는 1959년 10월 마오쩌둥을 만난 자리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당신이 총을 쏘면 그 섬들을 장악해야 하고, 당신이 그 섬들을 장악할 생각이 없다면, 총을 쏠 이유가 없잖아요. 난 당신의 정책을 이해하지 못하겠습니다." 이와 관련해 헨리 키신저는 흥미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대만 해협 위기를 조장한 "마오쩌둥의 진짜 의도는 핵전쟁의 위험을 크게 고조시켜 소련으로 하여금 중국의 핵무기 프로그램을 지원하도록 만드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그는 1차 대만 해협 위기를 거치면서 소련이 중국의 핵 개발을 적극 지원했다는 사실을 상기시키면서 "소련은 중국에 대한 미국의 핵 공격 방어를 중국 손에 넘겨줌으로써 미래에 또 다시 위기가 발생하면 말썽쟁이 동맹국(중국)과 거리를 두기 위해 중국의 핵개발을 돕기로 했다"고 분석했다.

중국 핵무장 저지, 소련에게 물어봐?

한편 1960년대 들어 중국의 핵 개발 움직임을 예의주시했던 미국은 중국이 핵보유 문턱에 접근하자 대응책 마련에 부심했다. 케네디 행정부는 "중공이 핵무기를 손에 넣으면 세계 정치를 뒤흔들 것이기 때문에 미국과 서방 국가들에게는 결코 받아들일 수 없다"고 여겼다. 케네디 대통령은 1963년 1월 22일 NSC 회의에서 "중국이 (핵무장에 성공하면) 1960년대 후반 이후에는 우리의 주적이 될 것"이라며, 핵실험 금지조약 체결이 중국의 핵무장을 저지할 수 있는 방법이 될 것이라는 희망을 피력했다. 1월 하순 <Meet the Press>에 출연한 딘 러스크 국무장관은 중국의 핵무장에 따른 "심리적, 정치적 영향은 심각한 수준이 될 것"이라며, 케네디 행정부가 핵실험 금지조약 협상에 적극적인 배경 가운데 하나가 바로 중국의 핵보유 예방에 있다고 설명했다.

이에 따라 '중국 핵문제 해결'은 케네디 행정부의 외교정책의 최대 숙제로 부상했다. 일각에서는 중국 핵시설에 대한 선제공격론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초점은 외교적 해결로 맞춰졌다. 중국에 가장 큰 영향력을 갖고 있는 나라, 즉 소련 역할론이 바로 그것이었다. 케네디 행정부 내 최고의 아시아통으로 평가받았던 해리먼(Averell Harriman) 국무부 차관이 이 구상을 주도했다. 그는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 핵문제 해결이 가능할 것이라며, 소련에게 미끼를 던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 미끼는 바로 미국이 서독의 핵무장 방지를 위해 최선의 노력을 다할테니 소련도 중국의 핵무장 저지에 적극 동참하라는 것이었다.

케네디는 이러한 협상안에 적극 동의하면서 1963년 7월 해리먼을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러나 해리먼은 흐루쇼프를 만나지도 못했고, 소련 정부와 중국 핵문제를 제대로 논의하지도 못했다. 중국과 공산주의 운동을 놓고 경쟁하고 있었던 소련이 미국과 손을 잡고 중국에 대응하는 모양새를 취하면, 공산 진영에서 자신의 지도력이 실추될 것으로 우려했던 것이다. 이후에도 케네디 행정부는 소련과의 접촉에서 중국의 핵무장 저지를 핵심 의제로 삼고자 했지만, 흐루쇼프 정권은 미국이 다자군(Multilateral Force)이라는 이름하에 미국 핵무기를 서독 등 일부 유럽 국가들과 공유하려는 문제가 우선적으로 논의되어야 한다는 입장으로 맞섰다.

이처럼 소련과의 협력을 통해 중국 핵문제 해결을 도모하려고 했던 꿈이 무산될 위기에 처하자, 케네디는 1963년 8월 1일 기자회견을 통해 중국이 핵무장에 성공하면 10년 이내에 "2차 세계대전 종전 때보다 더 위험한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 중국의 핵 개발이 가속화되자 대만의 로비도 치열해졌다. 장제스 총통은 아들인 장칭궈를 워싱턴으로 보내 중국에 대한 무력 사용을 요청했다. 그러나 케네디 행정부는 무력 공격이 중국과 소련을 밀착시킬 것이라며 난색을 표했다.

미국의 '대량 보복 전략'이 인종차별주의를 야기하며 중국의 핵무장을 정당화시켜줄 우려가 있다는 목소리도 나왔다. 국무부의 중국 전문가인 로버트 존슨(Robert Jonson)은 1963년 4월에 작성한 메모에서 아시아 전략을 핵무기에 의존하는 것의 문제점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미국이 아시아인보다 백인의 생명을 더 중시하는 것으로 비춰질 것이다." 존슨은 특히 핵에 의존하는 미국의 아시아 전략이 중국의 핵무장에 인종주의적 정당성을 부여해줄 우려가 크다고 지적했다. '유색 인종'의 눈에는 중국의 핵무장이 백인의 핵 독점 체제를 무너뜨리는 것으로 간주될 수 있고, 중국 역시 이를 적극 활용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국 정부 역시 흡사한 판단을 하고 있었다. 63년 10월 작성된 외교 문서에는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중국은 핵보유국 지위를 확보한 첫 번째 후진국이 될 것이다. 중국 위상의 이점은 핵무기가 히로시마를 기억하는 아시아인들과 또 그들의 이상과는 배치된다는 점에서 약화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감정은 중국이 유럽과 북미의 선진국들의 핵 독점을 무너뜨렸다는 경외감에 의해 상쇄되고도 남을 것이다. 아시아에서 중국의 지도력 주장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미국의 또 하나의 고민거리는 한반도 문제였다. 한국전쟁 이후 미국은 재래식 군비 부담을 줄이기 위해 주한미군을 대폭 감축한 반면에, 한국과 일본에 핵무기를 대거 배치했다. 북한과 중국이 또 다시 남침을 강행하면 북한은 물론이고 중국에도 핵무기를 사용하겠다는 대량보복 전략에 따른 것이었다. 그런데 중국이 핵을 갖게 되면, 이러한 전략은 큰 차질을 빚게 될 터였다. 미국이 북한이나 중국에 핵을 사용하면 주한미군이나 주일미군이 중국의 핵보복 대상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케네디 행정부는 재래식 군사 태세 강화를 통해 한국과 일본을 안심시키려고 했다. 러스크 국무장관은 1963년 8월 맥나마라 국방장관에게 "중공의 핵 실험 이후 태평양에 적절한 재래식 능력을 갖추는 것이 정치적으로나 심리적으로 훨씬 중요해질 것"이라며, "이를 통해 자유 아시아 국가들로 하여금 우리가 반드시 핵 전쟁에 의존하지 않더라도 중공의 공격으로부터 아시아를 보호할 수 있다고 믿게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외교적인 해결이 난망해지나, 미 공군을 비롯한 일각에서는 중국의 핵무장 이전에 선제공격을 통해 이를 저지해야 한다는 '예방전쟁'론을 펼쳤다. 또한 당시 미국은 핵확산금지조약(NPT)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중국의 핵무장은 핵확산의 우려를 부채질해 NPT 추진을 위태롭게 할 것이라는 의견도 강했다. 그러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중국의 핵무장은 공격용이라기보다는 억제 효과를 높이기 위한 성격이 강하다며 예방전쟁론에 반대한다는 의견이 부상한 것이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에 걸쳐 미국의 중국 핵문제에 대한 대처 방안 수립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한 존슨은 이렇게 지적했다. "미국이 효과적인 아시아 전략을 공산 진영의 도발에 대처할 암묵적인 핵 위협과 명시적이고 가시적인 재래식 군비 태세 사이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은 자명하다. 중공이 핵 능력을 보유하면 아시아 대륙이 또 다시 핵 전쟁터가 될 수 있다는 아시아인의 공포도 커질 것이다. 이러한 환경에서 미국이 명시적으로 핵무기에 의존하려고 하면 아시아 국가들은 미국의 원조를 요청하는 것을 더욱 꺼려할 것이다." 이러한 권고를 수용한 존슨 행정부는 "중공군의 중대한 도발에 대한 대응"을 제외하곤 선제공격론을 배제키로 했다.

'종이호랑이'에 올라탄 중국

한국전쟁에 이어 두 차례의 대만 해협 위기와 중소 분쟁을 거치면서 중국 지도부는 핵보유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다. 당시 미국의 공세적인 핵 전략은 중국으로 하여금 대미 보복 능력을 확보해 미국의 핵 위협을 억제해야 할 필요성을 증대시켜 주었다. 중국이 독자적인 핵무장을 선택한 데에는 대만 문제를 둘러싼 소련과의 이견도 한몫했다. 중국은 어떤 대가를 치르던지 대만 통일을 최우선적인 과제로 상정한 반면에, 소련은 중국의 대만 공격이 미국의 개입을 야기해 미국과의 충돌로 비화될 것을 우려했다. 1954-55년 1차 대만 위기를 겪으면서 이러한 차이를 확인한 마오쩌둥은 결국 핵무장을 통해 대소 의존을 줄이기로 결심했다.

마오쩌둥은 1956년 핵무기 개발을 담당하는 부서를 신설하면서 "우리가 오늘날의 세계에서 괴롭힘을 당하지 않으려면, 핵무기를 가져야만 한다"고 말했다. 소련도 적극 지원하고 나섰다. 베이징에 원자력 연구소와 란저우에 우라늄 농축 공장을 짓는 것을 도왔을 뿐만 아니라, 핵폭탄 샘플과 핵무기 제조 정보를 중국에 전달했고, 과학자들의 상호 방문을 통해 중국의 핵 과학자 양성에도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2차 대만 해협 위기 때 중국의 일방적인 언행, 즉 '미국과 핵전쟁도 불사한다'는 마오쩌둥의 입장에 분개한 흐루쇼프는 1959년 6월 들어 중국의 핵 개발 지원을 중단했다. 이에 따라 중국에 원자폭탄 모델을 제공하기로 한 약속을 취소했고, 이듬해에는 모든 핵 개발 지원을 중단했다. 또한 이즈음 발생한 중소 분쟁 역시 소련의 중국 핵무기 개발 지원 중단의 중요한 배경이 되었다. 그러자 중국은 독자적으로 핵무기 개발에 들어갔다. 그리고 1964년 10월 16일 우라늄 핵폭탄 실험에 성공했다.

다음날, 핵무기와 장거리 로켓 개발을 담당한 전문 위원회를 주도했던 저우언라이 총리는 세계 각국에 통지문을 보내 핵실험 사실을 알렸다. "중국 정부는 핵무기 사용 전면 금지와 폐기를 일관되게 주장해왔지만 어쩔 수 없이 핵실험을 거쳐 핵무기를 개발하게 되었다. 하지만 중국 정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먼저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을 것임을 선언한다." 그러면서도 "중국의 목적은 핵 강대국들의 독점 체제를 무너뜨리고 핵무기를 폐기하기 위한 것"라고 주장하면서, "핵보유국과 핵보유 잠재력이 있는 나라들의 정상이 모여 비핵국가와 핵보유국 상호간에 핵무기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회담을 열자"고 제안했다.

중국은 원자폭탄 실험에 이어 불과 32개월 뒤에는 수소 폭탄 실험에도 성공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원자폭탄 실험 이후 32개월 만에 수소 폭탄을 개발하는 데 성공한 것 자체가 상당한 기술력을 과시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미국은 86개월이, 소련은 75개월이, 영국과 프랑스는 각각 66개월과 105개월이 걸렸다. 핵실험에 성공한 중국은 1966년 10월에 중거리 탄도 미사일인 '둥펑-2호'에 핵탄두를 장착한 상태에서 시험 발사에 성공해 핵미사일 보유 능력도 과시했다. 이로써 중국은 원자폭탄과 수소폭탄, 그리고 탄도미사일로 전용될 수 있는 위성 발사 능력을 확보함으로써, 유명한 '양탄일성((兩彈一星)'을 손에 쥐게 됐다.

중국이 원자폭탄 실험에 성공하자 존슨 대통령은 경제 발전에 사용되어야 할 소중한 자원을 낭비해 "중국 인민들에게는 비극"이라고 비난하면서, 미국의 아시아 안보 공약에는 어떤 변화도 없을 것이라고 발표했다. 또한 정·재계에 긴밀한 인맥을 구축하고 있었던 로스웰 길패트릭(Roswell Gilpatric) 전 국방부 부장관에게 중국 핵무장의 파장과 대응책에 관한 조사 보고서 작성을 요청했다. 당시 존슨 행정부 내에서는 중국의 핵무장이 비확산 체제에 미칠 영향과 대응에 대한 의견이 엇갈리고 있었다. 러스크 는 "중공에 대해 핵무기를 사용해야 할 나라는 항상 미국이어야 하느냐"며, 일본과 인도의 핵무장을 허용해 중국에 맞서게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맥나마라는 "일본과 인도가 적절한 핵 억제 능력을 갖게 될지 회의적"이라며, 미국은 중국의 핵무장에도 불구하고 비확산 체제 강화에 나서야 한다고 반박했다. 1965년 1월 21일 존슨 대통령에게 제출된 '길패트릭 보고서'는 핵비확산 주장에 힘을 실어줬다. 특히 이 보고서는 유럽, 중동, 아시아에서 추가적인 핵무장 국가가 나와서는 안 된다며 이를 위해 NPT를 강력히 추진해야 한다고 권고했다.

중국의 핵 개발을 지원했다가 국경 분쟁을 거치면서 이를 중단한 소련은 중국의 핵보유를 기정사실로 받아들였다. 대만은 중국의 핵실험을 강력 비난하면서 핵 시설에 대한 선제공격을 미국에게 거듭 요청했지만, 별 소득은 없었다. 중국과 라이벌 관계에 있었던 인도는 중국을 비난하면서도 비핵화 원칙을 고수하겠다고 발표했지만, 비밀리에 핵 개발에 착수했다. 유일한 피폭국이자 중국과 적대관계에 있었던 일본 언론의 반응은 엇갈렸다. 중국의 영향력 확대를 경계하면서도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은 핵 군축을 위한 중국과의 협상에 본격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요구한 것이다. 중국의 우방국들인 북한과 북베트남은 "미 제국주의에 일침을 가했다"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또한 많은 비동맹 국가들은 중국의 강대국화가 가시화된 만큼, 중국이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을 맡아야 한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 마오쩌둥과 리처드 닉슨의 악수

"2.5g의 탁구공이 세계를 흔들다"

한국전쟁 이후 미중관계는 더욱 거칠어졌지만, 미국 내 일각에서는 새로운 전략을 모색하는 움직임도 있었다. 미 8군과 유엔군 사령관을 맡아 한반도 전세를 역전시키는데 혁혁한 공을 세웠던 리지웨이(Matthew Ridgway)는 1954년 8월, 냉전 시대 미국의 최고 전략은 소련과 중국을 분열시키는 데에 두어야 한다며, 핵 공격을 통한 중국 군사력의 제거는 이러한 목표에 부합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중국에서 힘의 공백이 발생하면 다른 나라가 들어갈텐데, 그 나라는 바로 소련"이라며, "최상의 접근은 중공으로 하여금 자국의 장기적인 이익은 소련이 아니라 미국과 우호 관계를 맺는 데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데 있다"고 강조했다. 아이젠하워는 그의 권고를 귀담아 듣지 않았지만, 1969년 출범한 닉슨 행정부는 리지웨이가 15년 전에 내놓은 전략을 주목했다. 닉슨은 아이젠하워 행정부 때 부통령으로 있었던 것이다.

닉슨은 1967년 <포린어페어즈(Foreign Affairs)> 기고문을 통해 "지구상에 수억명의 잠재적 능력이 있는 사람들이 분노어린 고립 속에 사는 나라도 없다"며, 중국과의 관계개선 의지를 피력했다. 취임사에서 "우리는 열린 세계를 지향할 것이다. 크던 작던 어떤 나라도 분노어린 고립에서 살 지 않는 세계를 추구할 것이다"라고 말했다. 닉슨이 이처럼 대중 관계 개선을 모색한 핵심적인 이유는 베트남 전쟁 종결 및 소련 견제를 위해서는 중국과 손을 잡아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소 분쟁이 격화되면서 마오쩌둥도 대미 관계 필요성을 느꼈다. 특히 1969년 3월 우수리 강 부근에서 중‧소간의 무력 충돌이 발생해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나온 이후, 중국 정부 내에서는 소련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반영하듯, 마오쩌둥을 비롯한 수뇌부가 소련의 핵공격을 두려워해 베이징으로부터 피신하기도 했다. 이처럼 소련의 위협이 가시화되자, 마오쩌둥은 4명의 원로 장군들에게 대소, 대미 전략 재검토를 지시했다. 이들은 전략 검토를 거쳐 소련의 위협 대처 차원에서 "미국 카드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며, 마오쩌둥에게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권고했다. 1969년 9월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에게 제출된 '4인 그룹' 보고서는 중국의 대외 전략 변화에 큰 영향을 미쳤다.

양국 지도부가 이처럼 관계 개선 의지는 갖고 있었고 동유럽에서 대사급 접촉도 가졌지만, 상황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1970년 5-6월에 미국이 캄보디아를 폭격하고, 이에 중국이 격렬히 반발하면서 미중간의 즉각적인 접촉은 이뤄지지 않았다. 두 나라의 국내 상황도 여의치 않았다. 국민당은 1949년 중국 본토에서 패퇴해 대만으로 쫓겨났지만, 미국은 여전히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유일한 합법 정부로 간주했다. 미국 내 대만의 로비단체인 '중국 로비'는 미국 의회를 상대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중국 내에서도 대미 관계 개선에 대한 거부감은 여전했다. 특히 당시는 문화혁명 기간이었고, 많은 사람들은 베트남과 캄보디아가 미국의 맹폭에 고통받고 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미국 제국주의자와 타협해서는 안 된다"는 목소리가 높았다.

이즈음 등장한 것이 바로 '핑퐁외교'였다. 핵무기로 대표되는 '하드파워 시대'에 2.5g의 탁구공이 펼칠 '소프트파워'가 등장한 것이다. 저우언라이는 내부 강경파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마오쩌둥을 설득해 1971년 3월말-4월초에 일본 나고야에서 열리는 세계탁구선수권 대회에 중국 대표팀을 파견하기로 했다. 그는 대표 선수들에게 세계 선수권 대회 참가는 "정치 투쟁"이라며 "우정이 첫째이고, 경쟁은 그 다음"이라고 강조할 정도로 탁구 대회를 대미 관계 개선의 기회로 인식했다. 중국 대표팀의 참가를 관계 개선의 기회로 포착한 닉슨 행정부는 미국인의 중국 여행 제한을 해제하기로 했다는 입장을 전달하면서 양국의 탁구 교류를 제안했다. 그러나 중국 외교부는 미국 대표팀 초청이 시기상조라고 답했다.

그러나 대회 막바지에 이른 4월 4일 맞아 극적인 반전이 연출되기 시작했다. 미국의 글렌 코완(Glenn Cowan)은 실수로 중국 대표팀이 탑승한 버스에 올라탔고, 어색해진 분위기를 깨기 위해 중국의 탁구 영웅 주앙쩌둥이 코완에게 다가가 인사를 나누면서 중국의 명산인 황산이 그려진 수건을 선물했다. 두 사람의 짧은 만남은 '나비 효과'를 만들어내기 시작했다. 코완이 중국 선수단과 동승한 사실을 안 기자단들은 버스에게 이들이 내리자, 스포트라이트를 터뜨렸다. 코완은 주앙쩌둥이 선물한 수건을 펼쳐 들면서 주앙쩌둥과 함께 사진을 찍었고, 이는 전 세계에 타전됐다. 다음날 코완은 주앙쩌둥에게 답례로 평화를 상징하는 3가지 색깔로 장식된 티셔츠를 선물했다. 티셔츠에는 'Let it Be'라는 문구가 새겨져 있었다. 각국에서 몰려든 기자들은 이를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그 파장은 일파만파로 번졌다.

대회 폐막 하루 전이었던 4월 6일 밤, 마오쩌둥은 코완과 주앙쩌둥의 선물 교환을 다룬 언론 보도를 접하고는 "주앙쩌둥은 훌륭한 탁구 선수일 뿐만 아니라, 아주 유능한 외교관"이라고 칭찬하면서, 미국 대표팀을 중국에 초청하라고 지시했다. 닉슨도 즉각 이에 동의하면서 역사적인 핑퐁 외교의 막이 올랐다. 중국을 방문한 미국 대표팀 환영 만찬에서 저우언라이는 이렇게 말했다. "중국인과 미국인은 오랫동안 빈번한 교류를 했었습니다. 그러나 잠시 관계가 단절된 기간이 있었지요. 여러분의 방문은 두 나라 인민들의 우호의 문을 열었습니다." 몇 시간 후, 닉슨 행정부는 중국에 대한 경제봉쇄를 완화한다는 방침을 밝혀 이에 화답했다. <뉴욕타임즈>와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일간지들은 연일 미국 선수단의 소식을 전하면서 미국의 우호적인 여론 조성에 나섰다.

특히 일부 언론은 중국의 미국 탁구 선수단 초청에 닉슨 행정부는 중국의 유엔 가입 승인으로 화답해야 한다며, 탁구로 조성된 우호관계 분위기를 정치외교로까지 확장해야 한다고 요구했다. 귀국한 미국 선수단도 중국에 대한 우호적인 여론 조성에 크게 기여했다. 이들은 상상을 초월한 중국인들의 환대와 우호적인 분위기, 마오쩌둥의 지도력으로 일심단결하는 중국인의 열의, 양성평등, 무계급 사회 등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들의 솔직한 방중 소감은 비정치적인 데다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으면서 미국 내에서 더욱 큰 반향을 일으켰다. 이를 반증하듯, 1971년 5월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중국의 유엔 가입을 지지하느냐는 질문에 사상 최초로 찬성(45%)이 반대(38%)를 넘어섰다.

'나비 효과'는 상상을 초월했다. 핑퐁외교가 절정에 달했던 4월 14일에 닉슨 행정부는 한국전쟁 직후 부과한 대중 무역 제재를 해제했다. 백악관은 이러한 방침이 핑퐁외교에 영향을 받았다고 인정했다. 이틀 후 닉슨은 재임 중에 중국을 방문하고 싶다는 의사를 피력했고, 4월 20일에는 중국 탁구 선수단 답방에 합의했다고 발표했다. 4월 하순 들어 중국은 파키스탄을 통해 미국에게 대통령 특사 파견을 제의했고, 닉슨 행정부도 파키스탄을 통해 정상회담에 앞서 키신저와 저우언라이의 비밀 회담을 제안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키신저는 7월 9-11일 베이징을 방문해 저우언라이와 협상을 가졌다. 두 사람의 회동은 양국관계뿐만 아니라 국제사회 전반에 상당한 파장을 몰고 왔다. 유럽의 대다수 국가들과 캐나다는 이미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추구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중 데탕트를 환영했다. 아시아의 미국 동맹국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이미 패색이 짙어진 남베트남은 미중 데탕트를 미국의 철수 신호로 받아들였다. 미국의 비밀외교에 놀란 일본은 미국에 앞서 중국과 대사급 외교 관계 수립으로 대응했다. 한국은 미국의 안보공약 후퇴를 우려하면서도 미국의 압력을 받고는 남북 특사교환을 통해 7.4 남북공동선언을 채택했다. 미국-중국 관계 밀착에 두려움을 느낀 소련도 대미 관계 개선에 적극 나섰다.

미중관계도 급속도로 가까워졌다. 1971년 10월에는 미국의 승인 속에 중국이 대만을 밀어내고 유엔 회원국으로 가입했다. 그리고 닉슨은 이듬해 2월 하순에 중국을 방문해 마오쩌둥과 정상회담을 가졌고, 27일에는 상하이 코뮤니케를 발표했다. 코뮤니케에서 양국은 완전한 관계정상화를 다짐하는 한편, 첨예한 외교문제와 관련해 양국의 입장을 병렬적으로 서술하는 방식을 택했다. 특히 최대 이슈인 대만 문제와 관련해, 중국은 "대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일부"라고 주장했고, 미국은 "중국의 입장에 도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미국은 또한 대만 주둔 미군을 점진적으로 감축해 완전 철수를 추진키로 했다. 1973년 3월에는 베이징과 워싱턴에 각각 연락사무소를 개설해 관계정상화에 필요한 실무 협의에 착수했다. 1975년에는 제랄드 포드 대통령이 베이징을 방문해 상하이 코뮤니케를 재확인했고, 지미 카터도 대통령에 취임하자마자 중국과의 관계정상화 입장을 재확인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1978년 12월 15일 양국 정부는 1979년 1월 1일부로 국교를 수립하기로 발표했다. 국교가 수립되면서 미국은 중화민국(대만) 대신에 중화인민공화국(중국)을 중국의 합법 정부로 인정했다. 이에 대해 중국은 미국이 대만과 상업적, 문화적 교류협력하는 것을 계속 인정하기로 했다. 미국은 대만과 국교를 단절하는 대신에, 민간 차원의 교류협력은 지속하기로 했고, 대만관계법을 제정해 대만에 대한 안보 공약도 유지하기로 했다.

중국은 1972년 2월 미중정상회담을 계기로 서방세계와의 관계 개선에도 본격 나섰다. 그 해 9월에 저우언라이는 베이징에서 일본의 다나카 총리와 정상회담을 갖고 대사급 외교관계 수립을 선언했다. 그리고 그 후 4년 동안 무려 107개국과 국교를 수립했다. 이처럼 핑퐁외교는 20년 넘게 닫혀 있던 미중관계의 문을 여는데 크게 기여했다. 핑퐁외교를 주도했던 저우언라이는 "네트 위를 넘나든 공 하나가 세계를 놀라게 했다"고 그 의미를 부여했다. 중국의 한 매체는 "지구라는 커다란 공이 작은 공 하나에 따라 움직였다. 물리적으로는 불가능하지만 정치적으로는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평가했다.

핑퐁외교를 중심으로 미중간의 데탕트를 비교적 상세히 언급한 이유가 있다. 전지구적, 특히 아시아 냉전의 결정적 사건이었던 한국전쟁과 그 이후 대만 해협 위기 및 인도차이나 반도 전쟁 때 미국은 수십만명을 몰살시킬 수 있는 거대한 '핵폭탄'으로도 중국을 변화시키는데 실패했다. 그러나 미국이 가장 강력한 '하드파워'인 핵무기 대신에 무게 2.5g의 탁구공을 앞세운 '소프트파워'를 발휘하자 중국은 놀랄 만큼 변하기 시작했다. 중국 역시 미국과 소련이라는 '이중 위협'에 맞서 '양탄일성'을 손에 쥐었지만, 중국의 안보딜레마 해소 및 개혁·개방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은 세계 최강의 탁구 실력을 앞세운 '소프트파워'였다. '나비 효과'를 입증하듯, "2.5g의 탁구공이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변화"를 이끌어낸 것이다.

미중 핑퐁외교 20년 후, 이번에는 남북 핑퐁외교의 막이 올랐다. 세계적 수준의 탈냉전 분위기를 기회로 포착한 노태우 정부는 북방외교를 통해 한국전쟁을 승인한 소련 및 통일의 꿈을 앗아간 중국과 관계개선에 박차를 가했다. 국제적 고립에 직면한 북한의 김일성 정권도 대외관계 개선을 타진하고 나섰다. 이즈음 열린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 남북한은 단일팀을 출전시키기로 합의했고 여자 단체팀은 최강 중국을 꺾고 우승트로피를 들어올렸다. 남북화해협력 의지와 "한민족의 저력"을 과시한 감동적이고도 역사적인 순간이었다는 평가가 언론을 도배하다시피 했다. 남북관계 차원에서도 남북기본합의서와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이 채택되는 등 본격적인 화해협력으로 진입하는 듯 했다. 그러나 봄 소식을 전할 것으로 보였던 나비의 날개 짓은 오래가지 못했다. 1992년 대선을 앞두고 국내 강경파는 대북 핵 공격 연습이 포함된 '팀 스피리트' 훈련 재개를 발표함으로써 남북화해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이에 맞서 북한은 이듬해 3월 NPT 탈퇴를 선언하며 '핵 카드'를 전면에 꺼내들었다. 미국 역시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소극적이었고, 이에 영향을 받은 일본도 대북관계 개선 노력을 접고 말았다.

☞ '후쿠시마 1년, 핵 없는 세상을 꿈꾼다' 강연회가 열립니다.

☞ 필자 정욱식 블로그 '뚜벅뚜벅'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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